음악이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향기를 내뿜는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두드리는 게 내 소박한 소원 이였다. 아니 소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2때 기억을 잃고 방황하던 내게 일기장이 준 아주 소박한 꿈이었다.
'내 소원은 다른 사람이 그게 뭐냐? 라고 흉본다고 해도 상관없다. 열심히 공부해서 작가가 되어 음악이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면서 노트북에 온통 신경을 쏟아보는 게 내 자그마한 소원이다. 물론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칭찬을 들은 적도 없고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 본적도 없다. 하지만 난 우리 반 친구들에게 내 글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늘 듣는다. 누군가가 그랬다. 작가는 1%의 재능과 98%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맹종한다. '
일기장에 적힌 이 글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인생의 일부를 잃어버린 나를 다시 살게 한 일기장안의 작은 소원.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소원대로 잔잔한 음악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는 카페에 앉아 따뜻한 기운으로 내 차가운 손을 녹여주는 커피를 손에 쥐고 앉아 있다. 하지만 노트북을 두드리지는 않고 있다. 일기장에는 작가가 소원이고 내 글을 친구들이 재미있게 읽는다고 하지만 나는 글을 쓰지 못한다. 도통 글을 쓰질 못한다. 그리고 난 일기장에 적힌 대로의 대학에를 지원하지 못했다.
'난 문예창작과를 갈 것이다. 그래서 멋진 방송작가가 될 것이다. 내 솔직함을 담은 글로 사람들을 웃음 속으로 이끌 것이다. 내가 봐도 정말 멋진 꿈이다.'
일기장의 글대로 나는 문예창작과를 가질 못했다. 대학도 한번에 가질 못했다. 사실 대학에 가고 싶은 맘이 전혀 없었다. 부모님의 성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재수를 해서 대학에를 갔다.
일기장의 글을 읽어보면 내가 참 발랄하고 밝은 아이라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내게, 지금의 내게 그런 모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찾으려 해봐도 그런 모습은 없다. 일기장을 읽으면 난 이질감을 느낀다. 하지만 난 내가 아닌 내가 적은 글이 적힌 일기장으로 내 인생의 일부를 채우고 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일기장이라도 있으니 내가 글쓰는 걸 좋아하는 아이였기에 망정이지 정말 글쓰는 걸 싫어하는 아이였다면 난 절대 그 방황에서 벗어나질 못했을 것이고 잃어버린 인생의 일부를 채우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슨 생각해?"
내 바로 건너편에 앉은 내 대학친구가 내가 대답이 없자, 탁자를 툭툭 치며 물어본다.
"아니, 그냥..."
사실 난 고등학교 친구가 없다.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예전의 나는 꽤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병원에서 나와 다시 학교에 갔을 때 반 아이들은 나를 참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또 언제 글 쓸것이냐고 했다. 글? 밀려드는 이질감. 내게 이제는 더 이상 글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2학년이 되네..."
"그러네..."
내 앞에 앉아서 1학년이 끝나는 걸 아쉬워하는 친구, 수영이는 내 유일한 친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난 친구를 잘 사귀지 못했다. 책이나 만화 또는 영화에서 나오는 벽 속에 숨겨져 있는 비밀문을 보면 한 바퀴 돌려버리면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 지금의 내가 그런 형편에 놓여 있는 게 아니겠는가? 한 바퀴 돌기 전의 내 모습과 돌고 난 후의 내 모습.
"이제 복학하는 선배들이 대부분이겠다 그지?"
"응.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오네."
"싫어?"
싫냐구? 그래 싫어.
"아니, 그냥."
싫을 수밖에. 지금의 동기들과도 얼마나 힘들게 사궜는데,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게 내게는 시련일 수밖에 없다.
"이제 그만 나갈까?"
"그러자."
그날은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방학중에 학교를 나온 것이다. 나는 틈을 두지 않고 빽빽할 정도로 수업을 신청했다. 심지어 0교시까지. 틈을 주면 나는 생각 속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내게는 생각할 여유를 줘서는 안된다. 내가 내게 내린 처방이다.
거리는 아직도 쌀쌀했다. 그리고 초콜릿 냄새가 가득했다.
"발렌타인데이라고 난리도 아니네."
"그래 난리도 아니다."
팬시점 앞에는 초콜릿을 고르고 있는 여자들로 가득했다. 요즘은 정말 아이디어 세상이다. 여러 모양의 초콜릿에 머물러 있는 내 시선 앞에 수영이가 초콜릿을 하나 내민다. 하얀 초콜릿으로 love you라는 단어가 새겨진 막대 초콜릿이다. 나는 얼른 비닐을 벗겨 입 속에 냉큼 넣었다. 달다. 피식, 나는 입술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어쩌질 못한다.
"왜 웃어?"
"응?.....그냥 맛있어서.."
"뭐?"
초콜릿은 그리 맛있지 않았다. 달기만 할 뿐 이였다. 내가 피식 웃은 이유는 달다고 생각한 그 순간에 일기장의 한 문구가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달다. 일기장의 어느 한 페이지에 그저 달다는 단어하나 만이 적혀 있었다. 무엇이 달다는 것인지. 내가 적은 글인데도 왜 적었는지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웃음이 안나올 수는 없다. 피식.
집으로 가는 지하철. 중간에 내린 것은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 때문 이였다. 두통은 두서없이 갑자기 다가온다. 그러고는 살며시 당기고 밀 듯이 아파 오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다. 의자에 앉아 허리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박아본다. 이러면 그나마 좀 견딜만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이 바지로 스며든다. 헉헉. 내 입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소리.
한참이 지난 후에야 두통은 사라졌다. 이렇게 두통은 갑자기 왔다가 또 갑자기 사라진다.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다.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느껴진다. 나는 하나의 지하철을 또 보내고 다음 지하철을 탔다. 2시이다. 점심 먹고 가자는 수영이의 권유에 속이 안좋아서 아무것도 먹질 못하겠다고 말하고 그냥 와 버렸다.
지하철은 널널했다. 여학생 두 명이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중학생쯤 되어 보였다. 무슨 이야기가 저리도 즐거운 것일까? 어쩜 저리도 예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일까?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중학교 시절.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여학생들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디를 가는 것일까? 지하철에서 내린 그들은 다시 버스를 탔다. 그들은 한번도 얘기가 끝이질 않았다. 정말 이야기 보따리가 있는 것일까? 어쩜 저리도 이야기가 끊임이 없을까? 그들의 수다가 시끄럽다고 면박을 주는 아주머니도 있지만 그들은 그런 면박도 우스운 모양이다. 머리를 마주 대고 키득키득 웃는다. 그 웃음이 얼마나 재미나던지 나도 따라 웃고 만다. 하지만 그들의 것처럼 맘속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나의 것은 공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어디에도 머물 수 없는 나의 미소. 나의 웃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체육관이였다. 농구경기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플렌카드가 가득이다. 그리고 내 손에는 농구 티켓이 쥐어져 있다. 그들을 따라서 샀으리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체육관 안으로 들어간다. 좋아하는 선수에게 넣어 주세여. 좋아하는 선수? 없는데.. 나는 그냥 아무통에나 넣어 버린다. 와. 여기저기서 함성이 터져나온다. 내 머리 속의 두통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희열의 함성들. 나도 거기에 참가하고 싶어 아무 곳에나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앞에는 응원단장이 열심히 뭐라고 외치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농구 경기. 처음 보는 거다. 아니 어쩜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동안은 좋아했을 지도.
"이상민!!이상민!!"
나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귀 기울이지 않아도 들려왔다. 여학생들이 대부분을 이루는 무리는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같이 이상민 이상민, 이라고 외쳤다. 난 그 이름을 안다. 눈물 자국과 함께 일기장에 적혀 있었다.
'이상민....내 사랑 이상민..그가 결혼을 한다고 한다. 내게 아주 커다란 시련이다. 물론 작가는 많은 시련을 맞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련은 너무 슬프다. 여자는 별로 이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영웅. 나의 이상형. 그가 그가 이젠 내 곁을 떠난다. 난 오늘 하루종일 아팠다. 내 일기장에 그의 이름은 되도록 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 하루를 돌아보면 그 때문에 아팠던 것밖에 기억에 안 남기에 어쩔 수 없다. 정말 슬프다. 제발 헛소문이길. '
나의 영웅, 나의 이상형이라고? 내가 좋아했다는 사람을 찾기 위해 나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저..이상민이 누구예요? 낯선 사람은 이상민도 몰라? 그러면서 농구장에는 어떻게 와? 라는 시선으로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하얀색 옷 입은 사람 중에 등번호가 11번인 사람이에요. 라고 간단하게 말해 주었다. 나의 시선은 11번을 찾고 있었다. 시력이 그리 좋지 않은 나는 일어나 앞자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구만. 나는 나의 이런 반응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좋아했었던 건, 그가 결혼할 것이라는,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소문인데도 단지 그가 결혼한다는 얘기에 눈물을 흘린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의 내 머리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내 모습이라고 해도 그건 틀림없는 나였다. 그런데 지금 나의 반응. 마치 동생이 좋아하는 사람을 평하듯이 별로 잘생기지도 않았구만, 이라니. 두통. 또 다시 두통이 밀려 왔다.
"아.."
작은 소리였지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비록 그 비명이 사람들의 환호 속에 묻혀 버렸다고 하더라도 분명 비명이었다. 비명을 지를 정도로 두통은 밀려왔다. 사람들은 나의 두통을 알지 못했다. 그래, 나도 소리를 질려보자. 그럼 두통이 가실 꺼야. 나는 기운을 내어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농구 경기에 온 신경을 몰두하여 다른 사람들과 같이 환호했다. 함성도 질렀다. 두통은 함성 속으로 조금씩 사라졌다. 경기가 끝나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텅 비어 버린 경기장에서 방금 경기를 끝내고 선수들의 땀으로 얼룩져 있는 농구장을 내려다보는데 왜 그런 맘이 생긴 건지? 서둘러 밖으로 나온 나는 온몸에 힘이 없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버스를 타야하는지 어떤 걸 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거리를 걸었다. 또 허탈해지는 내 맘. 왜..왜 그런 맘이 생긴 것인지. 나는 신호등이 파란불이 되었는데도 건널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재미있게 경기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소리도 지르고 내가 좋아했었던 이상민 선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기뻐했었는데 갑자기 텅 비어버린 농구장을 내려다보면서 왜...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낀 것인지? 저 바닥에 왜 얼굴을 박아버리고 싶던지.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 왜 내 머리를 내던지고 싶던지. 그 충동을 참느라고 또 얼마나 다리에 힘을 줬던지. 나는 신호등에 몸을 기대며 또 주저앉는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엄마..나 좀 구해줘요..난 힘겹게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1번을 깊게 누른다. 한참의 신호소리.
"여보세요?"
"....."
"여보세요?"
"..엄..마."
"응. 주희니?"
"...........엄마.."
"주희야. 왜 그러니?"
"나 좀 데리고 가 줘.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엄마!"
"주희야... 그래 엄마가 갈게."
"엄마... 어서 나 좀 살려줘. 머리가 아파. 깨질 듯이 아파. 엄마....엄마!"
"주희야. 옆에 뭐가 있어? 갈게 그러니까 차근차근하게 말해봐...주희야..주희야.."
한참 후 엄마는 정말 왔다. 그리고 나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자. 자. 1학기 개강총회를 시작합니다."
개강총회. 학기를 새로 시작할 때마다 하는 행사 같은 것이다.
"이번에 복학생들이 많으니 선후배끼리 자기 소개도 하고 그럽시다."
자기소개. 동기들과 복학해 온 선배들은 서로를 소개하며 한 학기를 잘 지내보자고 한다.
"안녕? 난 97학번 이재민이라고 해."
"네. 안녕하세요?"
"자기 소개 해야지."
자기 소개. 난 뒤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듯이. 오히려 그에게 내가 누구죠? 라고 묻고 싶었다. 나의 그런 눈빛을 읽은 건지. 그의 얼굴에 당황함이 드러났다. 죄송해요. 나는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작년에는 뭐라고 날 소개했던가?
'안녕하세요? 저는....저는...안주희라고 합니다.'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나의 소개.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 이름이 안주희라는 것 밖에 나는 알지 못한다. 공중에 붕 떠버린 내 존재. 부모도 있고 호적에도 내 이름은 존재하지만 정작 내 실제적인 존재는 정착하지 못한다.
"소개 안해?"
"네?"
"소개...해야지."
"네..00학번 안주희입니다."
하나가 더 생겼다. 00학번이라는 거.
"이름 이쁘네."
이런 이야기에 다른 여학생들은 상큼하게 깨지는 웃음소리로 보답하겠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깊이 숙일 뿐이다. 뒷목이 다 보일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서로 자기 소개하기에 바쁜 사람들 틈 속에 끼지 못하는 내 머리위로 부드러운 손길이 놓인다.
"세상에는 기쁜 일이 있듯이 힘든 일도 있어. 하지만 그게 삶의 전부는 아니야."
무슨 얘긴가? 나는 고개를 들어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를 본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훗, 나는 웃음을 흘려 버린다.
"무슨 웃음 그래? 활짝 웃어봐!"
"..이보세요. 선배님!"
그는 대답대신 응? 이라는 눈빛으로 다가온다.
"날..얼마나 알아요?"
황당해 하는 그의 시선을 가르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설교예요?"
"..."
"힘든 일... 그게 삶의 전부는 아니다. 이런 위로가 다른 사람에게는 적당할 지는 몰라도 나에게는 아니에요. 그리고 이런 설교, 아니 위론가? 이론 위로! 선배한테 들어야 할 이유 없어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
웃음이 쏟아져 나온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고 해서 이런 얘길 들어야 하다니.
"나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굴지 말아요. 내 슬픔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해요? 잘난 척하지 말아요. 그리고 그런 싸구려 동정, 위로 따위 다른 여자 애들한테나 써먹어요!"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세차게 가방을 짊어 매고 그 자릴 빠져 나왔다. 캠퍼스를 마구 마구 뛰어 내려왔다. 슬픔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서글프고 아픈지 모르겠다. 그냥 마구 서럽고 가슴속을 저미는 슬픔이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밀려온다. 왜 이렇게 슬프지? 뭐가 이렇게 서글프지? 난 지하철 화장실로 가 바람을 가르고 뛰어 온 차가운 빰을 타고 흐른 따스한 눈물자국을 물로 씻어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저번 농구 보러 가던 그 날 처럼.
개강이후 나는 내가 의도한 대로 정말 쉴 틈 없이 바빴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업이 있었고 그나마 수업이 적은 날에는 도서관에 처박혀 있었다. 난 그렇게 두통조차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았다.
그 날은 수업이 적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 꿈이 작가였었다. 비록 글을 쓰지는 못하지만 나는 읽는 것은 좋아했다. 책 안에서 여자는 딸기우유가 먹고 싶다고 남자에게 말하고 있다. 딸기우유? 나는 갑자기 딸기 우유가 먹고 싶어 지갑을 들고 교내 매점으로 갔다. 딸기우유에 빨대를 꽂아 한 모금 쭉 빨아먹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유는 달았다. 하지만 빨대에서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쉴새없이 쭉 빨아먹었다. 도서관으로 돌아 온 나는 더 이상 책에 흥미가 쏟지 않았다. 내일 수업의 예습을 해볼까 하여 책을 펴 보았지만 도통 머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억지로 책을 붙들고 있으려니 갑자기 두통이 몰려왔다. 한동안 모르고 지낸 두통이다. 난 얼른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 이 놈의 두통. 밖은 어느새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저녁대신 우유를 마신 게 되어 버렸다. 난 잠시 두통을 달래기 위해 벤치에 앉았다. 옆 벤치에는 cc가 앉아 있다.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바람은 시원했다. 두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하늘에는 별이 몇 개 있다. 서울은 별을 볼 수 없다던데. 얼마 전에 온 아빠의 편지에서 그러셨다. 아빠는 사업상 서울로 가셨다. 아니 내가 내 병 때문에 지방으로 내려온 것이다. 엄마는 내게 서울 명문대를 가시기를 기대하셨지만 나는 그리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방에서는 알아준다는 대학을 지원하고 지방으로 내려 왔다. 물론 엄마는 나를 따라 오셨다. 지방의 공기는 서울보다 좋았다. 그러니 별도 볼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토요일에는 수업이 없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시려고 서울로 가시고 같이 가자는 엄마의 제의를 거절한 나는 그냥 거리를 헤매고 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은 정말 답답한 일이다. 바보같이 TV만 보고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수업을 마쳤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는 거리 한켠에 있는 레코드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요즘은 서비스 시대 라더니 정말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다. 하지만 어디가 찌들어 버린 표정으로 끊임없이 인사를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끊임없는 인사를 받고 안으로 들어갔다. 최신곡, POP, 트롯, 발라드, 등등 여러 팻말들이 각 코너를 알려준다. 난 발라드라고 적힌 팻말 쪽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기획앨범 같은 것이 모여 있었다. 명곡? 앨범 제목인가? 나는 이것저것을 들추어보다가 별들의 전쟁이라는 앨범을 집어들었다. 농구공이 하나 그려져 있고 여러 농구 선수들이 사진이 실려 있다. 거기에 이상민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이상민. 내가 좋아했던 농구 선수. 그렇다면 이 앨범을 들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내게는 이런 앨범이 없다. 이상하군! 그렇게나 좋아했다면서 왜 이 앨범을 사지 않았을까? 모른다. 왜? 왜? 자꾸 내게 물어 보아도 나는 모른다. 나는 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그런 곳에 앉아 있다는 게 창피해서 일어나려고 여러 번 움직였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나는 또 생각 속에 빠져들려는 정신을 깨우려고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른다니. 왜 이상민을 좋아하는지도 왜 이 앨범을 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니. 그저 세월이 한참 지나 까먹은 것도 아니고 아주 아주 기억에 없다. 그게 내 현실이다. 멍해져 버린 시선 앞으로 운동화가 한 켤레 들어온다. 사람이 온 모양이다.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마음 뿐 몸은 맘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결국 나는 엉덩이를 끌어 옆으로 움직였다. 운동화는 나를 쫓아 왔다. 계속 엉덩이를 끌어 움직였다.
"주희 아니니?"
난 고개를 들어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 이 사람은 이재민이다. 뒷목이 보일 정도로 고개를 숙이던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으며 몇 마디 하여 내게 면박을 당한 사람. 그 사람이다. 나는 놀랐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그는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나는 일으켰다. 주희야, 라고 그저 한번 불렀을 뿐,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일으켜진 나는 다짜고짜 그에게 말했다.
"나랑 같이 농구 보러 갈래요?"
'오늘은 내 5번째 소설이 완성 된 날이다. 내일 반 애들에게 보여 줄 것이다. 주인공 여자는 작가이고 약혼자는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여주인공은 세상과 한 발자국 떨어져 어둡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저 로봇처럼 아침에 일어나 방송국으로 가서 라디오 대본을 쓰고 PD에게 보이고 심의를 거쳐 방송하고. 일이 끝나면 영화관에 가서 영화 한편 보고 서점에 들려 책 사고 시장에 들려 반찬거리 사서 집으로 온다. 저녁을 먹고 청소를 좀 하고 나서 컴퓨터에 앉아 대본을 또 쓴다. 그러고 밤이 깊으면 자고 또 아침에 밝아오면 일어나서 .. 늘 같은 일상 속에서 약혼자를 잊어 보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여자는 술에 모든 것을 의지하게 되고 알콜 중독자가 된다. 환자가 되어 버린 그녀는 입원한 병원 의사의 사랑으로 병을 낫게 된다.........'
나는 도중에 일기장을 덮어 버렸다. 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로봇? 그건 나잖아. 벽지의 무늬가 얼굴로 쏟아 질 것만 같다. 난 얼굴을 감싸안으며 내가 로봇이지, 라고 속삭인다. 그래, 내가 바로 로봇이다. 멍해지는 내 눈빛을 보고 싶지 않아서 생각이라는 걸 하지 못하도록 바쁘게 그리고 로봇처럼 늘 같은 일상 속을 헤매었다. 하지만 어제는 아니였어. 옆으로 돌아누우며 몸을 잔뜩 움츠린다. 이재민. 왜 갑자기 그의 이름이 떠오른 것인지.
그를 만났던 그 날, 정말로 그와 나는 농구를 보러 갔다. 어쩜 농구를 하지 않을 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체육관으로 갔다. 체육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그와 나는 말이 없었다. 그는 오늘 농구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만약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사과를 해야할 지 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구를 보자는 생각은 계획된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발상이였으니까. 다행히도 농구가 있는 날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본거지로 하고 있는 팀과 원정을 온 팀이 경기를 벌이는데 그날은 이상민이 속한 팀과의 경기가 아니였다. 그는 내가 플렌카드에 정신을 빼고 있는 동안 표를 사 가지고 왔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는 표를 받아들었을 뿐이다. 사람들은 다 각각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경긴 이미 진행 중이였다. 그는 꽤 농구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무척이나 열중하고 열광하고 있었다. 그냥 두통을 잊으려는 나의 열광과는 다른 정말 순수한 열광.
"저, 실례합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우리 쪽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 바람에 내가 그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들키고 말았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을 건네 온 사람을 쳐다보았다.
"저, 베스트 커플로 선정되었는데 잠시 후에.."
"네? 베스트 커플요?"
베스트 커플이라니. 세상에! 어딜 봐서 우리가 커플 갔다는 말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다거나 어깨를 부딪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우리는 커플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내 손을 잡으며,
"아, 네."
"잠시 후에 선물도 드릴 겁니다. 성함하고 사귄 지는 얼마정도 되셨습니까?"
"아, 네. 안주희하고 이재민입니다. 사귄 지는 한 2주 정도밖에 안 됩니다."
"네. 잠시 후에 호명하면 앞으로 나와 주세요."
그 남자는 이름을 종이에 적고는 그냥 가버렸다. 나는 사납게 그리고 어리둥절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꿍꿍이인가?
"선물 준 다잖아. 다시 볼 사람도 아닌데. 굴러 온 복을 왜 차니?"
선물? 정말 신기한 사람이다.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 일으켜 주고 농구 보자는 말에 자기도 계획이 있었을 텐데 그냥 따라와 막상 오자고 한 사람보다 더 게임에 열중하고 순식간에 두 주된 연인사이로 만들어 버린다.
전반전이 끝나고 오늘의 베스트 커플입니다, 라고 사회자에 의해 소개되어 앞으로 불려 나가게 되었다. 꽃다발과 케?을 선물로 받았다. 자리로 돌아 와 보니 그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아까 나갈 때부터 잡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빼려고 했다. 선물도 이제 받았겠다, 더 이상 연인처럼 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는가?
"아직....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웃어....어서.."
후후훗. 우습군. 이 남자 정말 우습다. 내게 위로 몇 마디 건넸다가 면박 당하고 이후로 한번도 아는 체 하지 않았는데 다른 선배였다면 내게 아주 따끔하게 그리고 무섭게 혼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내가 하는 데로 두고만 보았다. 그러고 오늘 우연히 만나 그의 의사 물어보지도 않고 농구장으로 와 버렸는데 오늘도 역시 아무 말 않고 태연하게 연인 행세까지 한다. 이 남자 정말 웃긴다.
농구가 다 끝이 나고 보니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그는 배고픈데 저녁 먹으러 갈래? 그랬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은 들은 체 않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나는 그가 앉지 못하도록 옆에다 케?과 꽃다발을 놓았다. 그런데도 그는 케?과 다발을 치우고 앉았다. 나는 그의 행동에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어?"
"......"
"너무 난리를 피웠더니 배가 고프네. 오늘 경기 정말 아슬아슬했어, 그지?"
"......."
"마지막 101:102로 뒤지고 있는 데 1.58초 놓고 자유투 두 개를 다 놓쳤는데 마지막 자유투 놓친 걸 자기가 리바운드 해서 레이업슛으로 결국은 역전했잖아."
그는 짜릿했다는 듯이 팔을 높이 쳐들고 비틀었다.
"안그래?"
그는 이번에는 내 대답을 들어야 겠다는 듯이 내 얼굴을 계속 쳐다보았다.
"내가..."
"응?"
".........."
"말해봐. 응?"
"내가 괘씸하지도 않으세요?"
"뭐?"
그는 정말 우습다는 듯이 한참을 웃었다. 그 웃음 가운데에 세상에, 뭐라구? 라는 단어가 끼어 있기도 했다.
"괘씸? 내가 왜?"
"네?"
"내가 왜 널 괘씸하게 생각하지?"
"제가 전에.."
"아..."
그는 알았다는 듯이 내 말을 가로채며 이마를 짚었다.
"개강총회때..."
난 민망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그랬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다 맞더라구... 내가 너에 대해서 정말 무얼 안다고 그런 말을 했는지... 오히려 미안해지더라구... 사방이 막혀 있는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의 위로가 얼마나 가시가 되는 줄 나중에야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미안해하지 마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더 숙였다.
"고개...그렇게 숙이지 마라..."
그의 뜻하지 않은 말에 한참을 숙였던 고개를 순식간에 쳐들어 그를 바라 봤다.
"그렇게 고개 숙이니까 분수에도 안 맞게 그런 말을 하게 되잖아."
"........"
"뒷목이 다 보일 정도로 숙이는데 그런 말이 그냥 나오게 되더라고...."
"........"
"너..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 듣기 싫으면 그렇게 고개 숙이지 마라."
".........."
"배고프다.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스파게티 맛있게 하는 데 아는데 갈래?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일어섰다.
"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래? 나는 나를 달래 보았지만 입은 이미 열렸다. 그는 다시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고등학교.....2학년 때 이전의 기억이 없어요."
"........"
"사고를 당했어요. 교통사고였는데 그 때 머리를 다쳐 기억이 싹 사라진 거예요..... 다행히 주머니 속에 지갑, 더 정확히 말해서 지갑 속에 학생증 때문에 학교로 연락이 닿아 내가 누구인지 그러니까 곁으로 누구인지는 알게 됐어요..... 하지만 난 이미 나를 잃어버린 걸요. 내가 알고 있는 예전의 모습은 일기장에 적힌 게 다예요. 일기장에 나는 정말 귀엽고 활달하고 반 아이들에게 인기도 많은.....지금의 나하고는 정말 다르죠... 농구선수 이상민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작가가 꿈인 아이예요. 그런데..내가 화나는 게 뭔지 아세요? 분명히 그런 모습은 나의 것 이였는데 마치 다른 사람을 말하듯 한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화나는 지 아세요? 누가 누구세요? 라고 물으면 난 정말 놀래요. 내가 누구지? 뭐라고 해야하지? 저...저도 몰라요, 라고 말해야 하나요?"
"주희야!"
"아니요. 위로는 아직이에요. 기다려 주세요.... 고개를 숙이면 다른 게 안보이죠. 그럼 좀 안심이 되요. 다른 사람이 보인다는 건 제겐 고통이에요. 공중에 둥 뜬 것 같은 내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알아 차릴까봐요. 난 두려워요. 정말..... 그래서 그랬어요. 그 때 그날.. 선배의 위로가 내게는 너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게 아니야!"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몰라요. 어쩜 그런 위로....."
"......"
"그런 위로 처음이였으니까....그래서....."
나는 더 이상 말이 잇지 못했다. 목이 메고 눈앞이 흐려지고 결국은 한 줄기의 눈물을 허락했다. 그는 위로 대신 조용히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안아주었다. 그의 품은 따스했다. 그의 옷자락에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내가 우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다. 내가 울면 버럭 화를 내셨다. 왜 우냐? 뭐가 힘들다고? 힘든 건 없어. 내 딸이라면 그까짓 거 다 이겨낼 수 있다. 울지마. 다시는 내 앞에서 눈물 보이지 마라. 그리고 엄마. 엄마는 내 눈물에 자신의 눈물도 보이실까봐 화장실이나 안방으로 숨어 버리신다. 나는 어쩜 엄마, 아빠의 위로가 필요했는 지도 모른다. 지금 그가 해주고 있는 조용한 위로가. 마음껏 내 눈물을 흘리도록 허락해주는 가슴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린아이가 사탕을 사주지 않는 것이 너무 서러워 울 듯이 나는 소리내어 서럽게 울었다. 방안 침대에 엎드려 숨죽여 울지 않고 그날은 정말 마음껏 울었다. 그는 그런 나를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라고 했다. 그 이후로도 나는 그를 모른 척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그런 나를 그냥 두고만 보았다.
"야! 우리 M. T가자!"
총대의 이런 말에 모두들 한마디씩 하느라고 강의실 안은 떠들썩해졌다. 어디로 가는데? 언제 가는데? 가기 싫은데 등 모두들 자기들의 의견을 두서없이 표현했다.
M. T라... 나는 한번도 가보질 못했는데...
"갈 사람만 내게 이름과 학번을 적어 주세요."
나는 이번에도 안 갈 생각이었다.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는 지 보려고 책을 뒤적거리는 사이로 종이가 쑥 들어왔다. 나는 종이의 근거지를 쳐다보았다.
"갈 거지?"
이재민. 환하게 웃으면 갈 거지, 라고 묻고 있다.
"아니요. 안갈 거예요."
나는 그가 내민 종이를 도로 돌려주며 말했다.
"왜? 가자."
"아니요. 생각 없어요. 선배나 가세요."
"에이, 가지."
그는 종이를 도로 가져가며 아쉬워했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얼굴이 더워졌다. 저 가슴에 안겨 나는 울었었다. 더워지는 얼굴을 달래려고 노트로 부채질을 했다.
"자. 다 적어 냈지? 그럼 내가 가는 사람 부를게. 이름 안 불린 사람 말해."
총대는 수첩을 높게 들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턱을 괴며 창 밖을 바라 봤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갑자기 나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저 벚꽃 때문인가? 아님 개나리 때문인가?
"야! 주희야. 너두 가?"
잠시 생각을 하고 있는 내게 수영이가 말을 건네 왔다.
"응?"
"너두 M. T가냐고?"
"무슨 말이야. 나 안가. 이름 적어내지도 않았는데..."
"무슨 소리야? 금방 네 이름 불렸는데......."
나는 재민 선배를 돌아봤다. 역시나 아닐까 그는 나를 보며 심술궂은 미소를 띄고 있었다. 정말 못 말릴 사람이군. 다시 총대에게 가서 안 간다고 말하면 될 일지만 그럼 왜 안가냐고 물어 올 총대의 집요함이 귀찮아 그냥 놔두었다.
그날, 엄마에게 가 M. T 에 가니 회비를 달라고 말하는 나를 엄마는 한참동안 쳐다보셨다.
"왜요?"
"너...그런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
"지금도 안 좋아해."
"그럼?"
"누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누구 때문이든 어떻든 간에 무조건 찬성이다. 회비 주마..."
엄마는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에 정말 기뻐 하셨다. 엄마의 모습에 나도 기뻤지만 아직까지는 내키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내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죽평리 사서함 76-13호 제29연대 1대대 4중대 4소대 152번 훈련병
윤창영'
보낸 사람 주소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창영이... 나는 다시 편지를 책상 위에다 놓고 옷장 문을 열었다.
"주희야! 엄마 커피 마실 건데 너도 마실래?"
"아니."
나는 옷을 갈아입고도 편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시고 계신 엄마 옆으로 가 앉았다. 엄마는 패션 잡지를 보고 계셨다. 나는 리모콘을 집어들고 TV를 켰다.
"창영이 한테서 편지 왔던데 읽었니?"
"아니."
"왜?"
"나중에 읽으려고."
TV에서는 그저 그런 드라마가, 또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쇼프로그램이 보여지고 지고 있었다. 나는 TV를 끄고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녁 안 먹었어?"
"아니, 먹었어."
"간식 먹게?"
"응."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들었다. 깎기가 귀찮아서 물로 씻어내고는 그냥 입에 물었다.
"안 깎어?"
"귀찮어."
"안돼. 요즘 농약을 얼마나 많이 뿌리는데?"
엄마는 이미 입에 물고 있는 사과를 뺏어 깎아 주었다. 엄마는 사과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접시에 담아 예쁜 포크까지 가져다주었다.
"이쁘게 해서 좀 먹어. 웬 여자애가?"
엄마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포크를 집어들지 않았다. 그냥 손으로 사과를 집어 입안으로 쑤셔 넣었다. 입안 가득 사과를 넣고 우걱우걱 씹어 먹는 걸보고 엄마는 내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셨다. 아니, 그냥 배고파서.
사과를 다 먹고 나는 방으로 들어와 침대위로 몸을 누였다. 손을 뻗어 책상 위의 편지를 집었다. 창영이의 편지. 훈련소에서 보내 온 편지이다. 창영이는 대학 동기이다. 얼마 전에 군대를 갔다. 난 조심스럽게 편지 봉투를 뜯었다. 봉투 안의 편지를 꺼내는데 핸드폰에서 문자가 왔음을 알려왔다. 나는 편지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들었다.
'집에는 잘 갔어? 저녁은 먹었니? 사준다는 데도 그냥 가는 게 어딨어? ^^ 심술꾸러기 잘 자고 내일 보자."
재민 선배의 문자였다. 답장을 보내야 하는 지를 잠깐 고민하고는 그냥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영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는 나의 어두움을 조금이라도 밝게 만들려고 무단히 노력했다. 내게로 마음이 쏠린 그를 알면서도 나는 무척이나 무심했다. 그가 내게로 와서 사귀자는 말을 했을 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나는 연인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수업도 같이 들으러 가고 밥도 같이 먹고 매일이고 그는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는 나를 위한 나와 함께 하는 일이라면 정말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무심했다. 그가 스파게티를 먹자 하면 김치찌개를 먹고 싶다 했고 김치찌개를 먹자 하면 나는 포크커틀릿을 먹고 싶다 했다. 영화를 보러 가자 하면 쇼핑을 하러 가자 했고 연극표를 구해 가지고 오면 가기 싫다고 해 번번이 표를 버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느 날, 명성황후 뮤지컬이 보고 싶다고 무심히 말했는데 그는 정말 표를 구해 가지고 왔다. 그렇게 보고 싶어했지만 그가 표를 구해오자 가고 싶은 맘이 싹 사라졌다. 하지만 그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혹시나 이번에도 거절할까봐 무척이나 긴장하는 얼굴로 표를 내미는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와 뮤지컬을 보고 저녁을 먹고 집으로 왔다. 그날도 역시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날도 역시 고맙다는 말 대신 다 왔어, 라고 말하고는 그냥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다른 날과는 다르게 내 팔을 잡았다.
"주희야!"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왜?"
"........"
"......."
그가 대답이 없었기에 우리는 한참을 침묵 속에 서있었다.
"주희야."
"응."
"앞으로는 널 데려다 주지 못하겠구나."
".........."
".........."
"..........."
"주희야!"
"응."
"나....군대 가!"
그의 폭탄 같은 선언은 나를 놀래켰다. 하지만 다른 연인들처럼 눈물은 없었다. 연인에게서 이런 폭탄 같은 말을 들으면 여자들은 대게 자연적으로 흐르는 눈물을 어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나오지 않는 눈물에 더 당황했다. 나는 조용히 그가 다시 입을 열어 주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역시! 그렇구나."
"무슨 말이야?"
"역시나 넌 아니길 바랬던 결과를 내게 안겨줬어."
"무슨 말이냐니까?"
"..........여기까지 오면서 너에게 말을 해야지 하면서 계속 망설인 건... 네가 받을 충격 때문이 아니였어. 그건 내가 받을 충격 때문이었어. 이렇게 지금 이렇게 네가 아무렇지 않을까 봐 그럼 난 무척 아플 테니까."
"창영아!"
"언제나 그랬어. 점심때 무얼 먹자고 하려고 해도 난 아주 사소한 것인데도 난 무척이나 망설여졌어. 언제나. 네가 아는 거 보다 훨씬 많이 영화, 연극표가 버려진 거 아니? 네게 말도 꺼내 보지도 못하고 버려진 표가 얼만 큼인지 아냐구?"
그는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 왜 내게로 맘이 와 버린 거니? 난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로 가던 손길은 중간에 흩어지고 말았다. 나도 모른다. 네게 왜 이러는지? 하지만 너만 보면 그냥 이러게 된다. 너의 말과는 항상 다르게 맘이 움직인다. 지금도 내 앞에서 울고 있는 너를 위로해 주지 못하는 내가... 죄라면 죄겠지. 괜한 사람 맘 붙잡아 놓고 칼을 휘둘렸으니. 나는 다시 한번 손을 뻗어 보았다. 하지만 역시 손길은 중간에 멈추고 말았다. 하지만 거두어지려는 손을 창영이는 낚아채고는 자기 얼굴에 가져다 댔다. 나는 그저 그가 하는 대로 지켜만 보았다. 그의 눈물을 손바닥으로 느끼면서 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울음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눈물을 느끼면서도 너는 꼼짝도 안해."
".........."
"그래, 그게 너지. 그래야지 안주희지. 하지만 주희야. 오늘만큼은 너답지 않아 줄 수 없니? 오늘만큼은 말이다."
창영아. 내게 애원하는 듯한 몸짓을 하는 그가 난 너무나도 애처로와 양팔로 그를 껴안았다.
"난...너에게 뭐냐?"
"..........."
"넌 내 전부다. 이제 헤어지게 된다고 해도 변함없는 사실이다."
".........."
"말해봐! 나는 네게 뭐지?"
너는 내게 잃어버린 기억이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내게 없는 기억의 공허함이 채워지는 거 같지. 너는 내게 잃어버린 기억 같은 존재이다. 너무나도 그리운 존재. 그게 바로 너다. 그는 나를 벽으로 밀어 넣고 내 얼굴로 그의 얼굴을 밀어 넣었다. 내 입술위로 그의 입술이 느껴지며 동시에 그의 눈물도 느껴졌다.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이 그대로 느껴졌다. 난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그의 등을 쓸었다. 울지 마라. 나 때문에 울지 마라. 나처럼 온전하지 않은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마라. 울지 마라.
창영이의 편지에는 군이 어떻고 어디로 배치 받을 거며 학교생활은 어떻냐고 묻을 뿐 나와의 관계에 대한 말은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답장을 써야 할까? 뭐라고 쓸까? 농구를 좋아하게 됐다고 쓸까? 그럼 예전처럼 농구 티겟을 사들고 오지 않을까? 난 편지를 다시 접어 봉투에 넣고는 책상 맨 위 서랍에 넣었다. 재민선배에 대해서도 써야 하나? 뭐라고 쓰지? 아니다. 그가 내게 뭐라고 그에 대해 쓰는가? 잠깐 그렇다면 창영이는 네게 뭐지? 안주희 너 혹시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연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천만에 사귀기 시작할 때도 너는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더라도 너흰 헤어진거야. 창영이의 편지를 봐. 더 이상 그에겐 너에 대한 애정은 없다.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자리에 누웠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다. 그가 없다는 건 기억이 다시 없어졌다는 것이다.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로 나는 내 잃어버린 기억 같은 존재를 잃은 것이다. 깡그리.
M. T를 간 곳은 어딘지 잘 모르겠다. 어디를 가는 지, 언제 가는 지를 나는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 재민선배의 전화를 받고 나갔기에 어디가 행선지인지 알 지 못했다.
"여보세요?"
"아직 자냐?"
".... 재민 선배?"
"그래. 오늘 M. T가는 날이잖아."
"난 몰라요."
"됐어. 지금 준비해서 학교로 와. 준비물은 없어. 갈아입을 옷 한벌만 들고 와라."
"네? 지금요?"
"응. 빨리 와."
그의 전화는 그렇게 끊겨 버렸고 잠결에 들은 말을 토대로 난 준비를 마쳤다.
집을 나서는데 엄마는 반갑게 배웅하셨다. 들어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엄마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가라고 말씀하실 뿐이었다. 엄마로서는 기쁜 일 일 수밖에 없다. 언제 엄마 딸이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이라는 걸 해봤어야지. 기억을 잃기 전 수학여행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수학여행을 가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다. 수학여행을 가지 않았다면 내가 기억을 잃게 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졸업여행도 신입생 환영회도 가지 않았고, M. T도 한번도 가지 않았던 것이다. 내게 여행이란 어린아이들이 꾸는 악몽보다 더 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난 학교로 가면서도 계속 망설였다. 가지 말까? 내게 여행은 숫자 4와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재민선배가 오라고 했는데. 헉. 나는 나의 여러 생각 중에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생각을 발견했다. 재민선배가 오라고 했는데... 난 잠시 생각하는 걸 멈추고 몸을 뒤로 젖혀보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좀 쉬어가자. 내 뒤로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나는 얼른 일어나 할머니께 자리를 내 드렸다. 나는 서서 내 뒤에 앉은 사람을 보았다.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인지 아님 그런 척 하는 것인지 그 사람은 계속 창 밖만을 바라보았다. 하긴 나도 할머니께서 서 계신 걸 몰랐으니 이 사람도 모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재민. 그의 이름은 다시 내 생각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M. T를 가게 된 것도 그에 의해서이고 지금 이렇게 학교를 가는 것도 그에 의해서이다. 언제부턴가 그에 의해서 하는 일이 많아졌다. 왜일까? 모르겠다. 나도 모르겠다. 하긴 이 세상에 자기도 모르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도 모르게 하품을 하고 자기도 모르게 생각 속에 빠져들고... 이 세상에 늘 있는 일이니까.
뒤늦게 안 일이지만 M. T가서 움직일 조를 짜기도 했고 조끼리 의논해서 가서 먹을 음식장만을 위한 회비도 걷어졌다고 했다. 또 각자 먹을 만큼의 쌀도 준비해오기로 되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난 옷 한벌만 가져갔다. 내 쌀과 회비는 재민선배가 다 해결해주었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됐다. 버스를 타고 약간이 시간이 흐르자 우리의 M. T지로 도착했다. 우리가 이틀동안 머물 민박집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점심을 준비했다. 여자인 부총대는 여행 와서는 남자가 일하는 거라면서 여학생들보고는 냇가로 나가자고 했다. 나는 수영이와 팔짱을 끼고 시원한 물소리가 들리는 냇가로 나갔다. 그녀들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 속으로 발을 담구었다. 하지만 돌에는 이끼가 많이 껴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물 속으로 곤두박질 쳤다. 신발을 벗던 수영이는 얼른 다시 신발을 신었다. 나는 넙적한 돌 위로 가 앉았다. 시원하다는 말이 정말 어울리는 곳이었다. 잠시 후 남자들도 여기로 오기 시작했다. 점심준비 안해요? 라는 여학생들의 높은 소리위로 당번 정했어, 라는 남자들의 낮은 소리가 겹쳐졌다. 남자들은 여자들을 번쩍 들어 물 속으로 빠뜨리는데 재미있어 하고 여학생들은 도망 다니느라고 재미있어 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나 역시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데 한 남학생 무리들이 내 쪽으로 몰려 왔다. 나는 오지 말라는 듯이 손을 내 저었지만 그들은 본 척도 않고 나를 물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저 물 속에 빠지고 싶지 않았기에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살려달라고 소리친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하고 지원병까지 동원되었다. 살려줘. 멈추어라. 나뿐만 아니라 나를 물 속으로 내 던지려던 무리들도 멈추고 소리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재민 선배였다. 그는 위에 입은 잠바를 벗어 망토처럼 몸에 걸쳤다. 모두들 재미있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놔주어라."
크큭. 그녀을 놔주어라, 라니. 무슨 삼류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그의 의외의 행동에 나는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느라고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다.
"어머, 주희 얼굴 빨개졌네. 뭐야? 두사람."
웃겨서 그렇다는 변명을 하려는데 난 붙잡고 있던 한 선배가 내 목을 팔로 휘감으며 악당목소리를 만들어 내 놔주어라 한다고 놔 줄 바보가 아니다, 라고 했다. 나는 이 유치한 대사에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데 웃고 있는 내게 수영이가 웃으면 안되지, 살려주세요 라고 애절하게 외쳐야지. 라고 한다. 모두들 재미난 연극을 보는 듯이 진지했다. 아무도 이 삼류연극을 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민 선배는 한걸음에 달려와,
"다시 한번 말한다. 그녀를 놔주면 너의 목숨만큼은 살려주마." 라 대사한다.
"하하하. 어림없는 소리. 자신 있으면 이 여자를 데려 가봐라."하더니 얘들아, 라고 외치자 주변에 있던 남자들이 일제히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싸움에서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가 대충 팔을 휘둘려도 사람들은 옆으로 나동댕이 쳐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난 잡고 있는 선배만이 남았다. 선배는 나를 한쪽에 내려놓고 그와 일정한 사이를 두면서 빙빙 돌았다. 선배가 얼마나 연극에 열중했는지 나는 목에 약간의 통증을 느꼈다. 곧 그와 선배는 싸움을 시작했고 꽤 접전이였다. 이 유치한 연극은 그가 이겨 나를 구해내는 걸로 끝이 났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워 안으며 늦어서 미안하오, 라는 대사를 했다. 나는 너무 웃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에이, 여배우 케스팅이 잘못됐어, 라고 나를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자꾸 웃는 게 어디있어?"
모두들 이 놀이가 재미있는 모양이다. 여배우 바꿔서 하자는 말도 나오고 남자 주인공이 몇 번 쓰러지기도 해야지, 라는 의견도 나왔다. 나는 여배우 자격을 박탈당한 뒤 아까 있던 바위로 와 아까처럼 앉았다. 새로운 여배우는 정말 애절하게 살려달라고 외쳤고 또 바뀐 남자주인공은 망토처럼 입은 잠바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나는 이런 놀이를 재미있게 하고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고 웃겨 입을 크게 벌려 소리내어 웃었다. 웃느라고 정신없는 내게 그는 웃는 거 처음 보네, 라는 말로 다가왔다.
"네?"
"이렇게 크게... 웃을 줄 아네..."
나는 그의 말에 웃음을 멈추고 굳어졌다.
"웃어라! 무지하게 보기 좋다."
"........."
"........전에는 소리내어 울더니 오늘은 소리내어 웃네."
"........"
"웃는 게 훨씬 보기 좋다. 이제는 웃어라. 지금처럼."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소리내어 울었다? 내가? 맞아. 전에 그의 가슴에 묻혀 소리내어 울었었다. 아직 기억하네? 하긴 안지 얼마 안 되는 여자애가 자기 품에서 울었는데 어느 누가 기억을 못하겠는가? 내가 대답을 않자, 그도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에서 벌어지는 연극을 지켜 볼 뿐 이였다. 유치한 놀이는 밥 먹자, 라는 말에 끝나버렸다. 민박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내가 몇 조인지 알지 못했다. 수영이는 벌써 자기 조로 합류해 버렸고 나는 그저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금 민망했다.
"주희야. 뭐하니? 어서 와서 밥 먹어. 배안고파?"
재민 선배의 구세주 같은 말이였다. 재민 선배와 같은 조였다. 점심 메뉴는 카레 라이스였다. 그는 내 밥그릇에 넉넉할 만큼의 카레를 퍼 주었다.
"배고프지? 어설픈 연기 한다고."
그는 나의 어설픈 연기에 대해 핀잔을 주었다.
"맞아. 주희 너 너무 웃었어. 희정이 봐. 대사까지 너무 완벽했는 걸."
옆에 있던 악당이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밥하느라고 우리의 연극을 못 본 당번이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악당의 설명이 이어지는 사이에 나는 밥그릇을 비웠다.
점심을 다 먹고 뜻 맞는 아이들끼리 근처에 있는 절에 가기로 했다. 절? 나는 수영이에게 같이 가자 권하고 웃옷을 걸쳤다.
절 안은 고요했다. 나는 절을 구경하겠다는 수영이와 떨어져 법당 앞으로 갔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몇몇이 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서서 불상을 쳐다보았다. 위엄과 포근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크게 원을 그린 후 모아 절을 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나는 엎드려 가만히 빌었다. 다시 기억을 되찾게 해주세요. 보통 기억을 잃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을 되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2년이 훨씬 넘게 지났는데도 기억의 일부분도 떠올리지 못한다. 그저 일기장에 의지할 뿐이다. 내가 절을 찾아 기도를 한지도 2년이 다 되어간다. 그 때마다 하는 기도는 늘 똑같다. 기억을 되찾게 해주세요. 하지만 오늘 내 기도에는 제발이라는 단어가 덧붙었다. 기억을 되찾게 해주세요, 제발. 엄마는 절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교회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주말마다 교회를 간다면 나는 한 달에 한번씩 절에를 갔다. 전 지은 죄가 없어요. 아니 없을 거에요. 일기를 보면 아는 걸요. 제가 나쁜 사람이였다면 일기 같은 건 쓰지 않았을 거에요. 제발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예전의 발랄한 안주희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일기 속의 저로... 그저 글쓰는 걸 좋아하고 이상민을 좋아하던 밝은 저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아까...조금 전처럼 큰소리로 웃는 것이 자연스럽도록.... 그렇게...나는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울고 말았다. 남들이 일상처럼 소리내어 웃는 일이 내게는 아주 대단한 일처럼 여겨지는 일이 더 이상은 지속되지 않았음 한다고 빌었다. 일기 속의 내 모습을 보면서 이질감을 견디지 못하고 우는 일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음 한다고 빌었다. 그리고 내 상처를 이기지 못해 남에게까지 상처를 입히고 마는 일 더 이상 하지 않았음 한다고 다시는 창영이에게 했던 짓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 내 흐느낌은 조금씩 새어 나갔다. 모두들 절을 하고 나가는데 나는 엎드린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복받쳐 오는 슬픔을 가누기 전에는 고개를 들고 싶지 않았다. 흐흐흑. 내 흐느낌이 법당을 맴돌았다. 웃는 게 훨씬 보기 좋다. 이제는 웃어라. 지금처럼. 이제는 법당을 가득 메울 뻔한 흐느낌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재민 선배의 말이였다. 이제는 웃어라. 그의 말이 생각나자, 멈출 수 없었던 서러움과 슬픔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가셨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불상을 바라봤다. 제 구세주는 재민 선밴가요?
수영이는 빨개진 내 눈을 보고는 나를 냇가로 끌었다. 그녀는 조용히 세수해, 라고 말했다. 나는 세수하려다 말고 물 속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찌들어 보였다. 어둠에 눈물에 찌들려 버린 것이다. 세상에. 나는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손으로 물을 흐트러 버렸다. 세수 안 해? 라는 수영이의 말에 나는 손으로 물을 떠 얼굴을 씻어 냈다. 얼굴에 있는 찌든 때를 다 씻어 내려는 듯이 나는 여러 번 빡빡 얼굴을 문질러 씻어 냈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벌써 저녁 준비로 산만했다. 한 쪽은 삼겹살을 굽고 한 쪽은 김치를 넣어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우리 조는 뭘 준비하고 있는지 가보았다. 재민 선배가 주축이 되어 모두들 하나씩 업무를 맡고 있었다. 악당 외 2명은 밥을, 또 2명은 칼질을, 나머지 2명은 설거지 담당이였다. 나만 빼고는 다 역할이 있었다. 그래도 할 일이 없나 하고 기웃거리니까 재민 선배가 너는 저기 가서 내가 부르면 와라, 고 하며 나를 떠다밀었다. 떠다밀어진 나는 다른 조를 기웃거리며 시식을 도맡았다. 여기 저기서 이것저것 많이 먹었더니 배가 벌써 부르고 말았다. 목이 말라서 나는 물병을 들고 입에 가져다 댔다. 이런데 와서 컵을 찾는 내숭은 될 수가 없었다. 입 옆으로 조금씩 흘러내리는 물을 손으로 쓱 닦고는 방문턱에 걸터앉았다. 나는 사람들의 바쁜 움직임을 보면서 나도 이제는 조금씩 저 무리에 속해지는 것 같아 아까 법당에서의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이 모든 게 어쩜 재민 선배 때문인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얼굴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차가워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열을 식이고 있었다. 그러고 있는 내게로 온 재민 선배가 뱉은 말 한마디가 사람들 속에 속해지는 느낌을 감사해 하며 조용하고 잔잔한 내 가슴을 흐트러 놓았다.
"네?"
나는 선배가 해 준 말을 다시 한번 듣고 싶었다. 아니 그 선배의 목소리 위로 겹쳐오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다시 말해 준 그 목소리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겹쳐 있지 않았다.
"주희야... 왜 그러니?"
하지만 나는 생생히 들려와.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메아리 치고 있어. 문지방에 앉는 거 아니랬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경상도 사투리겠지. 그리고 그 목소리에 깔려있는 위엄과 따스함. 자고 있는 내 머리를 한없이 매만져 주며 자장가를 끊임없이 불러주시던 그 목소리인걸. 내 강아지, 하며 다 터 까슬한 손으로 내 얼굴을 쓸어주시던 내 제일 나쁜 버릇이 바로 문지방에 앉는 거라며 얼마나 야단을 치셨던가. 내 작은 손을 꼭 잡고 동네를 다니시며 내 손녀라오. 하며 자랑하시고 다니시던... 그분. 그분은...난 기억할 수 있어. 할머니. 내가 가장 의지하던 그분 할머니. 이젠 돌아가시어 더 이상 내가 의지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할머니... 내 할머니. 얼른 문지방에서 내려앉으며 나도 모르게 잘못했어요, 할머니. 라고 말해 버린다. 그리고 흐르던 눈물. 이제 눈물은 아까의 법당에서가 마지막이라고 여긴 게 금방이거늘 또 이렇게 눈물을 흘리고 만다. 하지만 이 눈물은 슬픔에 찌들린 눈물이 아닌 걸. 그.. 내게 할머니를 떠올리게 아니, 기억나게 한 그 장본인은 나를 얼른 일으키고는 다른 아니들이 눈치채기 전에 밖으로 끌었다. 하지만 나는 걷는 게 걷는 게 아니였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그 기분. 그는 나를 물가로 데려 갔다. 주희야. 그는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왜 그 순간에 생각이 난 것일까? 일기장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글이 잔뜩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할머니를 많이 따랐고 사랑했다. 그 분이 돌아가신 건 내가 기억을 잃기 전이였다. 아마 지금 살아 계신다면 내가 나의 일부를 잃고 방황하는 걸을 보고 누구보다 슬퍼하시고 아파하셨을 것이다. 엄마가 나를 야단 치시며 매질을 하시면 할머니는 나를 감싸 안으며 아이구, 이 생떼같은 것을 때릴 때가 어딨다고 때리냐, 하시며 엄마를 말리셨다. 할머니. 그는 고개 숙여 할머니, 할머니 부르며 울고 있는 내 앞에 무릎 굽혀 앉았다. 얼굴을 내밀어 내 얼굴을 살피고는 손을 집어넣어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이제... 울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니?"
"..........."
"주희야!"
"선배.... 맞아요. 나 이제 울지 않기로 했어요. 이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되서 난 참 기뻐요. 다 선배 덕분이에요. 그리고 선배. 또....또 있어요. 선배 덕분에 나 할머니를 되찾았어요."
".......할머니?"
"네... 내 할머니. 사랑하는 나의 할머니."
그는 손수건을 꺼내 물에 적신 후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는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할머니도... 나를 이렇게 닦아 주셨어요."
"기억이 돌아 온 거야?"
"아니요. 그저 할머니만 생각나요."
"할머니?"
"네. 우리 할머니는 지금은 가깝지만 예전에는 멀었던 경주에서 조금 더 가서 있는 안강이라는데 사셨어요. 내가 어렸을 때 아빠와 엄마는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지금은 엄마가 나 때문에 사업에는 손을 떼셨지만 처음에는 두 분이 같이 사업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집에서 자랐어요. 할머니는 처음 제가 내려갔을 때 당신이 직접 짜신 옷을 내게 입히시고는 제 손을 꼭 잡고 마을을 온통 돌아다니시며, 내 손녀야. 이쁘지? 하셨어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해요. 고생을 한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거칠은 손으로 제 얼굴을 쓰다듬으시며 정말 많이 이뻐 하셨어요. 저도 할머니를 많이 따랐구요. 갑자기 기억이 났어요."
"어떻게?"
"어떻게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 선배.. 선배가 문지방에 앉는 거 아니랬지? 하면서.. 그래서 기억이 났어요. 너무 기뻐요. 기도가 이제서야 들어지나 봐요. 얼마나 기도 했는데요.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는지 모르죠?."
"그래. 기도가 들어지나 보다. 아무튼 잘 된 일이야. 그지?"
그는 환한 미소를 띄며 나 못지 않게 기뻐했다. 그는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 같았다. 그는 내게 그토록 고프던 따스한 가슴과 위로를 주었고 처음으로 M. T를 오게 만들었으며 이를 계기로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잃은 일부 중에 일부를 되찾게 해주고 그 때부터 였다. 그가 내게 특별한 사람이 된 건 내게 할머니를 기억해내게 만든 그 순간부터였다.
그리고 그날 선배와 나는 다른 사람들 보다 일찍 M. T를 마쳤다.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함께 했던 일을 정말 또렷이 기억해내자 서울에서 일이 바쁘신 아빠까지 내려오시게 만들었다. 아빠,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은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정말 한순간이고 일부지만 그 일부가 할머니와의 것이 였다는 게 내 맘을 가볍게 만들었다.
"다른 때랑은 다르네. 표정도 부드럽고."
벌써 2년째 내 주치의로 있는 정신과 의사는 내게 말했다. 다른 때랑은 다르다고? 아무래도. 깜깜한 동굴을 걷다가 횃불을 발견했는데 이제는 동굴을 걷기가 한결 편해졌는데 그렇지 않겠는가?
"맞아요. 하나도 틀린 게 없어요."
"그런가요? 그 외에는 다른 건 기억나는 게 없어?"
"없어요. 할머니 집에서 지냈던 그 시절 밖에는 기억에 없어요."
"하지만 정말 희망적이에요. 극히 일부지만 기억해 냈다는 건 다른 걸 기억해 내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것이 되거든요. 말 한마디로 할머니를 기억해 냈다니까. 다른 것도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게 좋겠어요. 하지만 서둘지는 않아야 하는 거 알고 계시죠?"
의사는 부모님께 희망적이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내게로 시선을 돌려 대견하다는 듯이 쳐다 보았다. 예전엔 저런 의사의 시선이 정말 싫었다.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데도 그는 아주 부드럽게 나를 바라 봤다.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았고 정말 짜증스러웠다. 그런데 의사가 말한대로 극히 일부분인데 그걸 알아냈다는 것에 나는 정말 달라졌다. 의사의 그런 시선에 밝은 웃음으로 답하니 말이다. 난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제는 다 된 것만 같았다. 찾은 기억은 잃은 기억의 세 발의 피도 안되지만 더는 없어도 될 것만 같았다. 나는 병원 복도를 밝게 걸었고 엄마에게 팔짱도 꼈다. 이제 나는 사방이 어둠뿐인 작은 상자 속에 갇힌 내 모습을 벗고 일기장 속에 있던 내가 늘 그리던 모습으로 들아 온 것 같았다. 엄마도 아빠도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뻐 하셨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에게 재민 선배 얘기를 해 주었다. 할머니를 기억해 낸 건 다 그 선배 덕분이라고. 아빠는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하셨다.
다음날 나는 선배에게 아빠의 말씀을 전했다. 선배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그건 내 덕이 아닌데, 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는 선배에게 결국은 약속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약속은 다음, 언제가 될 지 모르는 다음으로 미루어 졌다. 아빠께서 급한 일이 생겨 서울로 올라가 버리셨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이렇게 슬픈 날이 갑자기 생기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하루 종일 힘이 없다. 그러면 내 친구들은 어김없이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온다. 친구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이런 날이면 늘 그 사실을 망각하고 만다. 아니, 오히려 소중하다는 의미를 역으로 적용하여 그러는 지도 모르겠다. 아무 죄 없는, 그저 내게 무슨 일이 있나고 물었을 뿐인데 나는 그런 배띠에게 짜증을 부렸다. 그렇게 짜증을 부리면 나는 그저 배띠가 내게 무슨 일이 있구나, 지금 내 심정이 이렇구나, 라고 무조건 이해해주길 바랬을 뿐 나는 배띠가 얼마나 황당할까를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온 친구들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인 날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난 왜 이렇게 오만하며 생각이 짧은 것일까? 무척 당황하고 기분이 상했을 배띠를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내일 가면 사과를 해야겠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할머니를 생각해 냈지만 일기장 속의 나는 아직도 낯설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슬며시 다가오는 이질감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배띠? 이름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별명인 모양이다. 그리고 꽤 친했던 모양이다. 하드버드지로 만들어진 편지함에는 배띠라는 아이와 나눈 편지들로 가득 찼다. 받는 사람에는 당공으로 적혀 있었다. 아마도 내 별명은 당공이였는 모양이다. 풋, 천장을 보고 누운 내 입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웃음은 익숙한 장면이다. 땅콩도 아니고 당공이라니. 그러는 배띠는 또 뭔가? 어디서 유래한 말인지. 아무튼 예전의 나는 배띠라는 친구와 편지를 자주 나눈 사이인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도 편지로 털어놓았다. 아마 이렇게 끝난 일기 뒤에는 배띠에게 편지를 쓰고 잠들었다, 라는 내용이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또 멍해지는 정신을 애써 잡으려 한다. 천장의 무늬들이 멍해지는 생각 속으로 들어오려는 걸 피할려고 얼른 옆으로 돌아누웠다. 콧바람을 팔로 느끼면서 나는 결국 생각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그런데 나는 왜 배띠라는 친구를 모르지? 그애와 그렇게 친했던 친구라면 나는 왜 알지 못할까? 졸업하는 그 날까지 나는 배띠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그 애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그 애는 나를 알지 않는가? 그럼 그 애가 다가 왔을 텐데 그럴텐데 그런데 왜 지금까지 나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으로 기억되는 걸까? 배띠... 도대체 누구인가?
학교 앞에 화장품 종합 마트가 새로 생겼다며 수영이는 나를 끌었다. 나는 아직 화장을 하지 않는다. 차분히 앉아 화장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화장을 해 볼까 하는 생각에 화장대에 앉았지만 결국 한 일이라곤 스킨로션 하나 바른 게 다였다. 나를 꾸민다는 것도 그렇지만 툭 하면 우는 내게 화장이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수영이가 화장품을 고르는 걸 옆에서 구경하고 있자니 아주 잠깐 이였지만 나도 하나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무슨 소리냐? 며 내 자신을 비웃고 있었다. 창영이. 비웃음 사이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언젠가 망설이며 내게 향수를 내민 적이 있었다.
"나...향수 안 뿌려."
"알아. 화장품을 살까 했는데... 넌 화장도 하지 않잖아."
"..........."
"그래서 향 좋아. 별로 진하지도 않고... 이왕 사왔으니까 한번 뿌려봐."
창영이는 향수를 내 손목에 살짝 뿌리더니 양 손목을 서로 살짝 문지르더니 다시 손목을 귀 뒤로 가져가 댔다.
"이렇게 하면 된대."
나는 그 이후로 향수를 꾸준히 뿌리고.... 아니 뿌린다는 표현보다는 바른다는 표현이 적당한 것 같다. 바르고 다녔다. 창영이는 나에게서 향이 나는 지 매일 코를 가져다 댔다. 향이 나면 창영이는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기뻐했다. 향이 안 나는 날이면 뽀루퉁한 표정으로 안 뿌렸어? 하고 투정을 부리곤 했다. 늘 내 눈치만 보던 그가 유일하게 투정을 부릴 수가 있는 부분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향수병을 깨트리고 부터는 그 유일한 투정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군에 가는 그 순간까지 그에게는 다시는 투정이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다시 사 줄 필요는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냐고 묻는 그에게 그렇지 않아도 귀찮았다고 말하며 그의 마지막 투정을 완전히 뭉게 버렸다.
나는 점원에게 그가 사 준 향수이름과 같은 걸대며 하나 달라고 했다. 점원은 좋은 걸 쓰시네요, 하며 밝게 웃었다. 그래요? 전에 선물로 받았었는데 향이 좋길래. 나는 처음으로 점원의 말에 대꾸도 해 보았다. 자꾸 말을 하는 게 좋다고 했던가? 기억을 잃고 우울증에까지 빠진 나에게 의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난 오히려 그에게 말을 많이 하고 나면 허전함이 두 배가 되는 거 모르세요? 라고 가르쳐 주었다. 의사는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건 아마도 환자가 오히려 의사를 가르친다는 사실 때문이겠지. 아무리 정신과 의사라고 해도, 그렇다 해도 어찌 자신도 아닌 내 맘을 다 알겠는가? 그리고 나는 내게 지금은 막막하겠지만 이런 시기가 지나고 나면 다시 정상적인 삶을 할 수가 있을 거야. 그러다 보면.... 그리고 내가 그의 말을 가로 막았지. 뭐라고 하면서 막았더라? 그래, 정상적인 삶요? 라고 되물으며 막았던 것 같다. 선생님이 저라면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아요? 정상적인 삶요? 그리고 나는 아주 크게 웃었던 거 같다. 나는 그 의사를 비웃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불쾌하다는 표정보다는 깍지 낀 손으로 턱을 바치고 앉아서 지긋이 웃음까지 띄면서 나를 쳐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게 불쾌해서 말을 한마디 더 했다. 머리 속은 텅 비어 있고 막말로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다니던 아이인지도 모르면서 정상적인 삶이라고요? 누군가가 넌 누구니? 라고 하면 저도 몰라요. 라는 말밖에 안나오는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요? 혹시나 거리를 걷다가 누군가가 나를 아는 체하는데 모릅니다. 라고 말하고는 도망치듯 달리는 내 모습을 정상적인 삶이라구요? 이건 스쳐 가는 시기일 뿐이라고요? 웃겨. 이런 애기해 주는 이유는 이런 실수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지 않았음 하기 때문이에요. 내 말이 끝나고 그제서야 그는 조금 표정이 어두어 졌다. 그가 또 무슨 말을 하려 하자, 나는 난 당신이 싫어. 라고 하고는 진료실을 나와 버렸다. 그 이후로는 진료를 잘 받지도 않으려 했고 엄마의 권유로 할 수 없이 가게 되면 난 딴짓으로 그의 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안경을 벗으며 뭐라고 했던가?
"지금 의사의 직분에서 벗어나 너에게 너보다 삶을 훨씬 더 산 어른으로써 한마디 하마."
난 그때 그의 표정에 잠시지만 화가 밀려왔다는 걸 느꼈다. 난 대답대신 그를 가만히 쳐다 보았다. 의사로서가 아니라구?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의지 못하는 건 알겠어. 네 맘이 그렇다는 거니까. 하지만 너의 그 태도, 사람을 대할 때의 그 태도는"
"무슨 태도요? 어떤 사람을 대할 때요?"
"너를 걱정하고 아끼는 사람들. 물론 나도 포함되는.... 그 사람들의 태도가 맘에 안 들고 역겹다 해도 그 사람의 마음만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거야.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너를 걱정해주고 아끼는 방법이 맘에 안 든다고 그 맘까지 밟아 버리는 게 아니야. 그건 너의 상처, 열등감에 대한 자격지심 밖으로 안 보여."
"............."
나는 무척 놀랬다. 비록 의사로서가 아니라고 했지만 환자에게 자격지심이라니. 그의 눈은 정말 화가 나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밖에 안 보여."
그의 말이 맞다고 내 맘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었다. 자격지심이라고? 내 열등감에 대한 자격지심? 그의 말은 화살촉이 되어 내 가슴을 찔렀다. 나는 그 아픔,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눈물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가 원한 결과 였던 모양이다. 나는 놀라지 않는 그의 반응에 싸늘해져 쓱 눈물을 닦고는 몇마디 했다.
"고맙군요. 그러니까 당신이 날 걱정하고 아낀다는 말이군요... 선생님의 위로 방법이 틀리신 걸 아시긴 하네요. 그럼...바꾸세요. 맘에 들도록."
왜 지금 이 순간에 그 일이 생각난거지? 나는 종업원이 건네주는 향수를 받아 가방 깊은 곳에 넣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수영이는 자기가 얼마 전에 갔었는데 정말 맛있더라며 나를 이끌었다. 도착한 곳은 국밥집이였다.
"국밥먹자구?"
"응. 싫어?"
"응..... 1학년때 국밥 먹고 탈난적이 있어서."
"어머, 그러니? 난 몰랐네."
"응. 창영이랑 먹었었거든......"
"그럼.... 넌 된장찌개 먹어. 여기 된장찌개도 하거든. 그것도 맛있어."
난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이가 주문을 하는 사이 나는 또 창영이와 있었던 그 의 일로 돌아간다. 왜 였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왜 갑자기 국밥이 먹고 싶었는 지는 정말 모르겠다. 창영이는 아무 말도 없이 국밥집으로 안내했다. 국밥은 양이 정말 많았다. 주문할 때 여자 분이 돼지국밥 드세요? 라고 물은 거 같은데. 그건 양을 적게 하려는 거 같은데도 양은 많았다. 평소에도 많이 안 먹는다고 늘 혼났었던 나였다. 그 때 나는.... 그 때 나는? 그 때가 언제였다고...풋. 난 아무 것도 먹질 못했다 무언가를 먹는다는 게 내겐 아무런 의미가 되질 못했다. 복스럽게 먹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배가 고파 뭔가를 먹긴 하지만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배가 고파서 먹게되는 본능 같은 거였다.
국밥을 보며 이걸 어떻게 다 먹지 하면서도 나는 숟가락을 들고 이미 먹고 있었다. 맛있다는 생각을 몸으로 느껴 보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맛있지? 라고 물으면 응, 맛있어. 라고 대답하면서 맛있구나, 했지만 그 때처럼 정말 맛있다는 걸 스스로 느끼며 먹기는 첨이였다. 나는 입안에 마구마구 넣고 씹으며 먹었다. 그러고 그 많다고 느꼈던 국밥을 국물까지 다 먹었다. 창영이는 돼지라고 나를 놀리면서 나보다 오히려 저가 더 좋아했다. 그러고 집으로 와 나는 국밥을 다 게워냈는데도 배탈이 났다. 병원에 가자는 엄마를 그냥 많이 먹어서 그렇다고 말렸다. 아직도 창영이는 그 사실을 모른다.
된장찌개는 정말 맛있어 보였다. 뚝배기 같은데 밥을 담아 주었다. 나는 된장찌개를 떠서 밥을 조금씩 비벼 입에 넣으며 색깔이 너무 먹음직스러운 김치도 한 조각 먹었다. 된장찌개의 두부를 건져 밥 위에서 으깨 밥이랑 섞어 입안에 넣으며 정말 맛있다고 수영이에게 전했다. 나는 계란말이를 수영이 숟가락 위에 놓으며 이것도 맛있어. 라고 했다. 나는 내가 봐도 많이 밝아진 걸 느낀다. 수영이는 더더욱 많이 느낄 것이다. 수영이는 환하게 웃으며 계란말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있는데 재민선배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보고 들어 온 건지 자리에 앉기 보다 우리에게 먼저 다가왔다.
"밥 먹니?"
"네."
수영이가 대답했다. 나는 그냥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장동건처럼 생긴 건 아니였지만 그는 잘생긴 편이였다. 키도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그는 좀 마른 편이였다.
"주희야! 맛있어?"
"네? 아, 네."
"음... 그럼 나도 된장찌개 먹어야지."
그는 살짝 웃으며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에는 저녁초대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어색한지. 나는 그를 대하는 게 어색했다. 그는 자연스러웠다 해도 나는 무척이나 어색하고 신경이 쓰였다. 조금씩이였지만 그를 보면서 두근거리는 심장도 느꼈다. 난 혹시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식사를 다 하고 나오면서 그에게 인사하는데도 나는 된장찌개를 먹어 입냄새가 나지는 않을까? 하며 말하는 데도 엄청 신경을 쓰는 모습을 발견했다. 물론 사람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하는 에티겟이지만 왜 그에게는 모든 것이 어색한 건지. 나는 그에게 갖는 이런 맘이 너무 불순하게 느껴졌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처럼, 하늘의 노여움을 사는 짓인 것 처럼 말이다. 수영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음 내게 그 마음을 고백하면서 얼마나 설레여하던지. 그 모습이 너무나 이뻤다. 나는 할 수 없는 일만 같았다. 역시나 아닐까? 나는 그런 일을 불순하다고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한번도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지 못해서 이겠지. 아님 기억이 없어지면서 사랑할 수 있는 마음도 사라진 게 아닐까?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이렇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갑자기 싫어 졌다. 차라리 예전처럼 기억하나에만 매달렸으면. 할머니를 찾았다는 것에 그 기억을 선배덕분에 찾았다는 것에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이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민망해서 나는 무릎에 얼굴을 깊이 묻어버린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나는 나의 복잡한 마음을 이렇게 달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아님 나만 이런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서로 잘도 만나던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피하려는 것일까? 책상 위에 있는 오렌지들이 나를 비웃는 거 같다. 왜 웃니? 웃기니까. 뭐가 웃겨? 너무 바보 같아서. 내가? 그럼 너 말고 누가 있냐? 왜 내가 바보 같아? 넌 사랑을 두려워하는 거야? 두려워... 한다고? 내가? 바보. 사랑은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불순한 게 아니야. 그건 무척 아름다운 거야. 그것이 얼마나 더 아름다워지느냐는 너에게 달려 있어. 나에게? 하지만 시작부터 글렀군. 무슨 소리야? 넌 사랑을 피하고 있으니까. 왜? 무섭니? 무섭냐구? 나는 벌떡 일어나 오렌지들을 마구 흐트러 놓았다. 무섭냐구? 그래. 무섭다. 반쪽뿐인 인생을 가진 내가 사랑을 한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 줄 아니? 그것도 재민 선배를... 가슴속에 자신감으로 가득 찬 사람을... 아름다운 것이라구? 하지만 그 아름다운 것을 내가 하면 아주 슬프고 비참한 것이 되지.... 내가...바보라구?
'오늘은 정말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류소라 선생님께서 학교를 그만 두신다고 하신다. 선생님은 정말 언니 같은 분이시다. 그 분은 나뿐만 아닌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 받는 선생님이셨다. 언제나 언니 같이 편하면서도 막 대할 수 없는 위엄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만난 지 일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가시다니. 이유는 결혼을 하여 남편을 따라 미국에 가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공부를 계속 하실 꺼 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항상 나의 급하고 다혈질 적인 성격을 옆에서 늘 다듬어 주셨다. 내가 흥분하면 내 어깨에 두 손을 얹으시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주셨고 내 의견을 서슴없이 드리면 끝까지 다 들으신 후 틀린 생각을 고쳐 주셨다. 나는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면 선생님께 가서 말씀 드리고 했다. 그럼 정말 재미있게 들어주시고는 수업에 들어가셔서 지루할 때마다 재미있는 얘기를 해주셨다. 2학년에 되면 수학여행 가는 데 선생님이랑 같이 갔으면 했는데.. 그럼 같이 갈 수가 없다............(뒷부분 생략)'
'류소라 선생님 결혼식에를 다녀 왔다. 선생님은 정말 예뻤다. 세상의 신부들이 다 이쁘다지만 선생님만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 선생님을 뵐 수가 없다는 생각에 울고 말았다.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이뿐 신부를 보고 왔다. 영원히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역시 기억은 없다. 하지만 내가 이 분을 많이 좋아했구나, 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책상서랍에는 배띠라는 친구와 나눈 편지 말고도 선생님과 나눈 편지도 몇 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몇 개중 미국에서 온 편지도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후에도 편지가 한 통 왔었다. 소식을 듣긴 했는지 그녀의 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학생 두 명이 새벽에 바람쐬러 나갔다가 사고가 났다며? 너는 별일 없지? 정말 속상하구나. 너도 많이 놀랬겠구나. 한동안 편지가 없길래 무슨 일이 있나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구나. 참, 주희야. 방학 때 잠깐이라도 놀러 오렴. 학교도 구경 시켜주고 우리 집도 구경 시켜주마....'
아주 잠깐이였지만 그녀는 사고 내용을 편지에 실었다. 하지만 그 사고의 여학생이 나 인줄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녀가 편지를 기다렸다는 내용에 나는 얼른 답장을 썼다. 처음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예전의 나처럼 편지를 썼지만 나는 괜찮고 좀 놀랬을 뿐이고 방학 때 놀러 가겠다는 내용을 쓰고 나니 그 이상 쓸 얘기가 없었다. 그 내용을 한 장도 채 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볼펜을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마땅히 적을 말이 없었다. 사고 내용을 정확히 알려 주려해도 기억이 없고 요 근래에 있었던 일은 좌절하고 운 일 밖에 없으니. 나는 그러다 말고 다시 편지를 썼다.
'선생님이 알고 계신 사고로 저는 기억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전 선생님을 모릅니다. 놀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멍할 뿐이지요. 방학 때는 가고 싶지만 선생님을 만나 봤자 선생님은 슬프고 가여운 눈으로 절 보시고 전 모른다는 눈으로 선생님을 보겠죠. 안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라도 답장은 필요 없습니다. 주희.'
이것 역시 한 장도 채 되지 않지만 그게 훨씬 어울리는 편지였다. 많은 얘기가 더 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정말로 그녀에게는 답장이 없었다.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의아해 할 일이 생겼다. 여학생 두 명.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사고를 당한 사람은 나 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병원에는 나 밖에 없었다. 하긴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말 사고는 나만 당했을 지도 같이 나갔다는 여학생은 다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겐 기억이 없으니 모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 난 일기장을 덮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모르는 일이 너무 많구나. 난 사각형 작은 내 방을 한번 둘러보았다. 둘러보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방은 정말 작았기 때문이다. 책상과 화장대. 그리고 붙박이장 뿐. 내 방에는 침대도 있지 않았다. 침대까지 넣어두면 방이 정말 좁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어나 내 방에 딸린 조그마한 베란다로 가는 문으로 갔다. 커튼을 열고 두 손을 유리로 된 미닫이문에 가만히 갖다 댔다. 차갑다. 나는 문을 지나 창을 넘어 있는 하늘을 보았다. 까맣다. 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입김으로 인해 유리가 뿌옇게 되었다. 뿌옇다.... 내 지난 날이.... 뿌옇다.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났지만 도서관에 가지 않고 바로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던 중. 나는 집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을 탔다. 나는 사람들이 득실 거리는 곳을 찾아 헤맸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사람들 속에 섞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우선 대형의류상가로 가 쇼핑을 했다. 화사한 봄옷들이 많았다. 이제 날씨가 풀려서 인지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워졌다. 플리트 치마를 입어보고 있는 여자. 화사한 니트를 고르고 있는 여자. 활동적인 청바지를 고르고 있는 여자. 그리고 커플티를 고르고 있는 남자와 여자. 나는 여기저기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들 자기 목적이 있는, 그저 나만이 할 일이 없어 온 듯 했다. 나는 그런 느낌을 없애려고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나도 봄옷 하나 마련해 볼까? 난 오랜만에 산뜻한 마음으로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점원들은 친절하게 설명하며 입어보고 결정하세요, 하며 날 붙잡았다. 아직 그런데 익숙치 못한 나는 그들의 말대로 거의 다 입어 보았다. 그럴 때마다 드는 실망은 산뜻하던 내 맘을 흐트려 놓았다. 이상하다. 저 여자가 입어 봤을 땐 예쁘던데. 그냥 볼 때는 예쁘던데 왜 내가 입으면 밉지? 나는 고스란히 다시 벗어 놓으며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하나 맘에 드는 옷이 없었다. 있었다 해도 내게는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맨 후에야 내가 산 옷은 고작 반 팔 티셔츠 하나. 덩그란히 하나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오랜 시간을 돌아다닌 탓인지 배가 고팠다. 하지만 나는 선뜻 식당으로 가지 못했다. 젊은 여자 혼자서 밥을 먹는다는 게 이상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도 어떤 여자가 혼자서 밥을 먹고 있다면 이상하게 봤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하에 있는 대형 마트로 가서 우유를 하나 집어들었다. 정말 배가 고팠는지 나는 순식간에 우유를 마셔 버렸다. 배가 부르지는 않았지만 시장기는 가셨다. 나는 다시 지하철로 향하려다 내 앞에 가고 있는 여자의 발에 눈이 머물러 있다는 걸 발견했다. 여자는 리본이 달려 있는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정말 갑자기 신발, 그것도 구두가 사고 싶어졌다. 내게 저런 예쁜 구두는 없다. 나는 신발을 파는 4층으로 가서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두리번 두리번 거리다가 아까 그 여자가 신은 신발과 비슷한 모양의 신발을 발견하고는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점원은 친절했다. 나는 신발을 가르키면서 신어봐도 되냐고 물었다. 점원은 아주 친절하게 되고 말고요 라고 말하며 내게 발 사이즈를 물었다.
"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내 발요? 글쎄요."
나는 한번도 이렇게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사 본적이 없기에 내 발 사이즈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내 발 사이즈를 모르다니. 난 정말 너무나도 한심하다. 내가 너무 당황해 하자 점원은 지금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안다며 신발을 벗어 보라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고 점원은 내 발 사이즈를 알려주며 구두를 내 주었다. 구두는 정말 예뻤다. 그리고 그 구두를 신은 내 발도 예뻐 보였다. 아까 옷을 고를 때와는 달리 지금은 너무나도 내 발이 예뻐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구두를 샀다. 덩그란히 하나 있던 쇼핑백이 하나 더 늘자 나는 쇼핑백을 앞뒤로 흔들며 길을 걸었다.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 특히 여자들은 쇼핑을 하는 모양이다. 물건을 하나씩 사면서 기분이 좋아지고 상쾌해지는 것. 겨우 티셔츠 하나와 구두를 샀을 뿐인데도 나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난 지하철역으로 가면서도 계속 흔들어 대던 쇼핑백을 갑자기 멈춘 건 기분이 왜 좋니? 라는 내 안의 질문 때문이였다. 그냥. 구두를 사서. 단지 구두를 샀기 때문이라고? 아니. 그것만이 아니지. 그 구두 신은 모습을 재민선배에게 보여 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거야. 그렇지? 그렇구나. 나는 내 안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앞의 여자가 신은 구두를 보고 단숨에 4층으로 가 비슷하게 생긴 구두를 사고 그러면서 기분 좋아하던 모습. 그 사이 사이에 존재한 재민선배의 얼굴. 난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면서 티겟을 끊으면서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지하철을 타면서 끊임없이 재민선배를 생각했다. 쉽게 옷을 고르지 못한 것도. 생전 생각지도 못한 구두를 산 것도. 그런 나의 행위 모든 것에 재민 선배가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나는 옷을 고르면서 이건 어울리지 않아. 그 사이로 스쳐간 한마디. 재민 선배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어. 구두를 고르면서도 스쳐간 한마디. 재민 선배가 예쁘다고 해줄까? 이런 생각은 창영이와 있을 때 했어야 했는데. 그 때는 이런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여유가 있는 것일까? 기억의 한 부분을 찾았으니까? 하지만 찾아야 할 건 아직도 많은데. 겨우 한 부분이 날 여유롭게 만든 것인가? 누군가를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여유? 그런 건 내게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다른 여자애들과는 같은 수 없는 줄 알았는데. 결국은 나도 같은 여자인 모양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기를 가꾸려는 지극히 아름다운 모습. 그런 모습을 지금 내가 하고 있으니까. 나는 쇼핑백을 가슴 안으로 품듯이 안았다. 혹시라도 잃어 버릴까봐.
다음 날, 나는 어제 산 구두를 하얀색 치마 밑에 신었다. 거울에 자꾸 구두를 비춰보며 들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더 이상 나를 비정상인으로 취급하지 말자. 장애인들도 자신을 정상인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왜 날 비정상인 취급을 한단 말인가? 그래, 그냥 이렇게 사는 거야. 기분이 들뜨면 손을 앞뒤로 신나게 흔들고 우울하면 울고 화나면 신경질 부리고 일기장의 모습에 매달리지 말고 다 지워버리고 다시 다시 나로 태어나는 거야. 또 다른 나로.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그까짓 과거 필요 없어. 이제는 웃을 수도 있는 걸.
재민 선배는 구두가 이쁘다는 말보다는 치마를 입었구나, 라고 했다. 나는 원하던 말을 얻지 못해 조금은 실망했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내 시선에 보인 건 내 구두를 밟고 있는 재민 선배의 발이였다. 나는 놀라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새 신발은 이렇게 신고식을 해야지."
"새 신발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보면 알지. 내 눈은 척, 하면 다 알아보지."
나는 고개 숙여 조용한 웃음을 지었다.
"새 신발인 거 몰라줘서 섭섭했지?"
나는 그런 그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놀란 토끼 눈과 빨개진 홍당무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 역시 나의 이런 반응에 놀란 모양이다. 계속 말을 잇지 못하는 데에 무척 황당해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나는 속으로 알아 버린 건가? 라는 불안이 잠시 찾아 왔다가 그의 반응에 사라지고 말았다. 불안..이라 할 것도 없지만...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함은 나를 잠적하게 만든다. 가려던 길의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발걸음을 놓게 하는 우울함은 갑자기, 아주 갑자기 찾아온다. 오늘이 그런 모양이다. 학교를 간다고 나선 걸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를 가려고? 나는 걸음이 가는 데로 내 버려 두었다. 가방 속에 있는 핸드폰이 바쁘게 울어댔다.
'어디야?'
수영이의 문자였지만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학교에 오지 않겠냐는 수영이의 문자를 확인하고는 베터리를 분리시켜 버렸다. 여기는 어디일까?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는 길이였지만 나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척 화창한 날이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새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 나는 너무나도 눈부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발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파란 하늘의 풍경 속에 회색 빛의 쇠 덩어리가 보이더니 나는 그것과 충돌을 했다. 부딪힌 얼굴을 감싸 안으며 부딪힌 그것을 보았다. 고속버스 정거장. 그것은 팻말이었다. 어디로 가는 고속버스의 팻말일까? 그 궁금증은 얼마가지 않아 풀렸다. 곧 버스가 왔고 팻말 앞에 있는 나를 보고 버스는 세웠다. 경주행. 경주로 가는 버스였다. 나를 보고 세운 버스를 그냥 보내기가 그래서, 그리고 이렇게 좋은 하늘을 휘날리고 있을 경주의 벚꽃이 보고 싶어 나는 얼른 탔고 기사 아저씨가 원하는 값을 내주었다.
자리에 앉은 나는 생각을 정리 한다던지 내 행동을 질책하는 여유는 갖지 않았다. 바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떴을 땐 경상북도라는 팻말이 휙, 하고 지나갔다.
잠에 깬 건 기사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 때문이였다. 경줍니다, 내리실 분은 어서 내리십시오. 이 차는 계속 포항까지 갑니더. 애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매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경주의 정류장은 시골분위기를 잔뜩 안겨 주었다. 시꺼먼 돌 바닥과 낡은 의자들. 그리고 정류장안의 상가들은 그런 분위기를 한층 더 나타내 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이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는 낡은 벤치에 앉은 체 잔뜩 몸을 움츠렸다.
"아가씨. 여기서 뭐해?"
잔뜩 움츠렸던 내 몸뚱이를 툭 치는 손동작에 나는 얼굴을 들어 그 사람을 보았다. 한낮인데도 술을 마셨는지 혀는 꼬여 있고 몸은 흐느적거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튀어 올라 그 아저씨로부터 벗어났다. 길로 나온 나는 정말 갈 데가 없었다. 하지만 봄이라서 경주에는 벚꽃이 만개했다. 그 활짝 핀 벚꽃은 정처 없는 나를 자전거를 빌려주는 곳으로 인도했고 그 빌린 자전거를 타고 경주의 자전거 도로를 누비고 다니도록 했다. 길 양옆으로 가득한 벚꽃은 꽃눈을 뿌려 주었고 나는 그 눈을 맞으며 신나게 달렸다. 다리가 아픈 지도 모르고 한참을 달린 나는 나 말고도 자전거를 타고 있는 무리들을 만났다. 그들은 나처럼 혼자가 아니였다. 시끌벅적하게 웃어대는 그들의 웃음 속에 나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들은 점심 내기를 하는지 계속 내가 이겼지, 아니야 내가 이겼어, 그러고 있었다. 나는 신나게 가던 길을 되돌아 갔다. 자전거 페달을 밟을 힘이 없어 질질 끌고 오면서 나는 끊임없이 울었다. 자꾸 나는 눈물을 나는 닦지도 않고 그렇게 가던 길을 되 걸었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나는 고모집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버스에서 내려 고모집을 찾아와 대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실망을 했다. 어렸을 때 고모집은 마당이 참 이쁜 집이였다. 실망을 하고 있는 날 부른 건 고모가 아닌 고종사촌 언니였다.
"어머, 언니 집에 내려 와 있었어요?"
"너... 어떻게 여길 왔니?"
"어떻게라니. 내가 못 올 때라도 왔어?"
"그게..아니라..."
"그런데 마당이 왜 이래? 나, 실망했어. 어렸을 때는 참 예뻤는데... 그 땐 저기 저 쪽에 봉숭아꽃도 많이 피어 있었잖아."
예전에 봉숭아꽃이 피어 있던 곳을 가르키던 내 손을 잡은 언니는 기쁘게 그랬다. 기억나니? 어렸을 때 기억나? 라고. 나는 그제야 언니가 놀라는 이유를 알았다. 나는 고모집을 초등학교 때 와 보고는 첨이다. 그런데 이렇게 단박에 찾아와서는 한다는 말이 마당이 왜 이래? 라니. 언니는 기쁘다며, 날 안았다. 그러고는 고모 가게를 찾아 갈 수 있겠나, 며 물었다. 나는 대문을 나와 고모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가면서 그 때의 기억들이 새록새록 났다. 저기 저 가게 아줌마랑 언니랑 싸웠어. 그지? 언니는 맞아. 물건값을 잘못 계산해 놓고는 오리발을 내밀어서 내가 따졌었어. 기억하는 구나. 그 아줌마 아직 있어? 아니. 나는 그 옆에 문구사의 오락기를 만지락 거리며 이것도 많이 했는데. 그지? 하고는 언니를 돌아 봤다. 언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고 있었다. 이것저것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고모가게에 도착했다.
"예전에는 분식점이였는데."
"그래. 그래. 맞아. 맞아. 다 기억해내는 구나."
언니는 나를 꼬옥 안으며 그렇게 기뻐했다.
"얼른 들어가자. 고모가 기뻐 할거야."
집으로 돌아온 고모는 버스를 타고 그냥 왔다는 얘기에 고모는 정말 신기하다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나는 그때의 일을 다 기억해 냈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 2학년 쯤이였을 것이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맡겨 진 곳.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정도 서울에 있다가 다시 여기에 맡겨졌잖아요. 그 때는 개가 두마리였는데. 지금 있는 흰 개랑 누렁이. 맞죠? 나는 흰 개가 이뻐서 맛있는 걸 주면 고모가 누렁이한테 주라고 하셨잖아요. 그거 살 찌워서 팔려고 그러셨죠? 그 때 흰 개가.. 참 이름이 뭐였죠? ............ 그냥 흰둥이였어요? 암튼 그 때 흰둥이가 새끼를 많이 낳었는데. 암컷 2마리랑 수컷 4마리 낳았잖아요. 그죠? 그 때 난 젤 포동포동한 수컷 한 마리를 젤 이뻐 했었어요. 너무 귀여워서. 기억난다. 서울 갈 때 데리고 갈 거라고. 그런데 고모 다 내다 파셨죠? 너무했어. 그런데 고모, 마당이 왜 이렇게 엉망이 됐어요? 예전에는 정말 이쁜 마당이었는데. 저기 봉숭아꽃 피면 고모가 내 손톱에 봉숭아 물 들여주고 했잖아요. 그죠? 장날에는 내 손 꼭 잡고 장에 가서 수박도 사오시고 나 심심하지 않게 종이인형도 사 주시고 간식거리도 잔뜩 사 주셨잖아요. 할머니 돌아가시고 막 기가 죽은 나한테 고몬 정성을 다 해주셨어요. 엄마도 해주지 못한 일을. 고모께서 해 주셨어요. 그렇게 5학년 때까지 있었잖아요. 중학교는 서울로 갈 거라고 6학년 때 서울로 올라갔죠? 나 이제 반은 기억해 낸 거네요? 그죠? 고모, 나 이제 기도가 들어지나 봐요. 나, 절에 가서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기억 조금이라도 되찾게 해 달라구요. 그런데 할머니를 기억해 내고 여기서도 기억해 내고 이젠 서울에서의 기억만 찾으면 되네요. 이젠 거의 다 왔어요.
"그래. 주희야. 대견하구나."
고모는 할머니를 잃은 충격에서 입을 다문 내 입을 열게 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정성으로 나를 돌보셨다. 가게 일도 바쁠 텐데 끼니때마다 내게 밥을 주시려고 집으로 오셨다. 그러다가 나는 하교를 하면 바로 고모네 가게로 가 있다가 밤에 고모와 함께 돌아오고 했다. 그러면 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고모 등에 업혀 쫑알쫑알 이르곤 했다.
고모는 내 손을 꼭 잡고 주무셨다. 나는 고모의 주름진 얼굴을 보면서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기억을 해 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렇게 예감했다.
"고모, 고마워요." 샤르르. 벚꽃 날리는 소리.
to. 재민 선배
선배, 제가 갑작스럽게 휴학계를 내서 많이 놀라셨죠? 그렇게 됐어요.
저, 재수해요. 고모 집에서 재수 공부하고 있어요. 원래 제가 가고 싶었던 공부하기로 했어요. 저, 문예창작과로 지원하려구요. 나쁘진 않죠? 원래 하고 싶던 공부였으니.
엄마는 집 팔구 서울로 다시 가셨어요. 예전처럼 돌아간 거에요. 엄마하고 아빠는 사업하시고 나는 고모 집에서 지내고... 다 기억해 낸 거냐고 그렇게 묻고 있겠죠?
아니요. 다는 아니에요. 하지만 더 이상 찾을 필요 없어요. 중학교 때 부터 서울서 엄마랑 살았다면 뻔하잖아요. 엄마랑 아빠랑 회사 가시는 길에 나 학교에 데려다 주시구...
중학교 때는 학교 마치면 학원 갔을 것이고 고등학교 때는 독서실엘 갔겠죠? 그러고 집에 오면 밤이 많이 늦었을 테니까요. 그럼 그럼. 난 또 입을 다물게 되겠죠? 그러면 집에서 못하는 말 학교 가서 하게 되겠죠? 일기장 속의 제 모습... 활발하고 밝은 아이라고 했었죠? 사실은 아니에요. 아니라는 걸 알겠어요. 밝아서가 아니라. 엄마한테 하지 못하는 말을 일기장에 쓰는 걸로 대신 했다는 걸.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은 아마 말로 못하는니까 쓰겠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정말 쓰고 싶어요. 많은 얘기를 쓰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선배. 아직 아직 모르는 게 있어요. 아니, 알고 싶은 게 있어요. 제 친구였는데 배띠라는 아이요. 젤 친했던 친구래요. 집에 그 친구랑 나눈 편지도 가득한데 그런데 왜 절 아는 체 안 했을까요? 그 애가 아는 척을 해줬다면 2년을 힘들어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아직 이름도 몰라요. 별명밖에는. 다른 건 필요 없지만 그 기억만큼은 찾고 싶네요. 그 친구만큼은 찾고 싶어요.
선배. 저는 이렇게 됐어요. 선배는 어떻게 지내는 지 궁금하네요.
답장 주실 거죠? 그럼 건강히 안녕히 계세요.
경주에서 주희가.
추신. 다른 아이들은 편지 뒤에 꼭 이런 거를 붙히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그거 모르시죠? 제가... 선배를 좋아했다는 걸. 선배가 제게
할머니를 안겨 주신 그 이후로 저 선배 좋아하게 됐어요.
모르셨죠? 감사해요. 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