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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섬김으로 피어오른 사랑
- 이현필의 신앙운동과 기독교 영성 -
1. 동광원 사람들
동광원을 시작한 이공李空은 하늘에 가득한 얼 자체, 어름과 같은 분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이은 이현필은 끝없이 고신극기苦身克己하는 험준한 산으로 신비한 구름에 덮여 한없이 깨끗한 설산雪山이었다. 정인세, 오북환, 김준호, 김준, 김금남, 그 밖의 많은 여러 어른들은 설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차디찬 샘물과 같은 어른들이다. 어떻게 이 땅에 이렇게 아름다운 높은 산이 흰 눈을 이고 찬 샘물을 쏟아내면서 자리잡게 되었을까? 다만 이 땅을 가엽게 생각하시어 내려주신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할 따름이다. 그들의 마음은 빈 하늘처럼 맑고, 그들의 뜻은 지리산처럼 굳다고나 할까. 정말 기심청정여허공其心淸淨如虛空이요 기의부동여지리其意不動如智異라 하겠다. 우리 동방에 비친 진리의 참 빛이요, 그 빛을 먹고 사는 산 생명의 푸른 동산이로다. - <동광원 사람들>(김금남, 사색 2007) 머리말에서-
이공은 동광원을 시작한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1877-1942)을 부르는 말이다. 그는 예수만을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버렸다고 하여 스스로를 공이라 했다. 나는 죽고 없으니 예수만 위하자는 것이다. 그는 나라가 무너진 시절 화순 도암의 두메산골에서 가난하고 무지한 농사꾼으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처럼 자랐다. 순수한 조선의 토박이로 태어나 조선 사람의 마음을 가졌던 그는 머슴살이로 시작 하였지만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이내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전도자를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어느 순간 뒤집히고 말았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다. 그는 성경을 보기 위해 한글을 깨쳤고 성서를 보면서 마음이 열렸다. 이를 볼 때 그의 마음은, 아니 깊은 산골의 때 묻지 않았던 조선인의 마음은 얼마나 깨끗하고 순수했던가. 천지를 지어내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성서의 말씀에 그동안 섬기던 모든 우상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살리시며 특별히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어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였다. 그리고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그는 그동안 빚진 자들을 불러서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자들을 도왔다. 그리고 말씀과 기도로 살기 시작했다. 사람의 사는 것은 밥과 떡, 의식주의 풍족함에 있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철저히 깨쳤다. 이런 이공의 영성에 관하여 감신대 이후정교수는 2015년 11월 27일 심포지엄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이집트의 수도자 성 안토니의 회심과 상통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공의 영성의 삶의 출발점을 보면 성경을 구해 읽고 우상 숭배를 버리고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받고자 기도와 말씀의 매일 실천을 통해 수도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부자로서 자신의 재산을 다 팔아 처분한 것은 수도생활의 창시자 이집트의 안토니의 회심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세상의 명리, 탐욕, 정욕적인 삶을 모두 버리고, 전적으로 돌이켜 회심하는 길에 들어선다.”
이세종 생존당시 이공의 인격과 믿음의 깊이를 느끼고 감화를 받았던 사람은 많지만 정작 세상에 드러내놓고 그의 믿음과 인격을 높이 칭송했던 사람은 당시의 최고 지성인이었던 정경옥 교수였다. 1937년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였던 정경옥이 이세종을 찾아서 도암을 방문하였다. 이공을 만나고 난 정경옥 교수는 그를 평하여 이르기를 ‘조선의 성자’요 ‘숨은 성자’라 하고 신학 잡지에 소개하였다. 이공은 스스로 글을 써서 남긴 적도 없고 사진 한 장도 없다. 철저하게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자기를 감추고 숨어 살았던 숨은 성자였다. 따라서 이공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정경옥교수가 발표한 글과 이현필이 작성한 <우리의 거울>, 그리고 몇몇 제자들의 증언과 일부 제자들의 기록물뿐이다.
그는 길을 가다가 개미 한 마리라도 밟혀죽을까 조심하였고 칡넝쿨 하나 다치지 않게 조심하였다. 길가에 싱싱한 풀 한포기를 볼 때도 기뻐하였고 우거진 산천을 바라보며 “만물들아,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자”하고 찬송했다. 짐승과 곤충 해충 잡초에 이르기까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하나님의 자비를 전했다. 특히 죄를 짓거나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연민의 마음이 가득하여 앞에서는 꾸짖지만 뒤돌아서서는 크게 울었다. 한 사람이라도 믿음에서 떨어지면 밤새도록 눈물로 기도했다. 주님의 은혜를 알고부터는 가난한 이웃들을 생각하여 밥 한 그릇도 차마 배불리 못 먹겠고 따뜻한 잠 한숨도 편히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런 연민과 자비와 인자의 거룩한 마음이 제자인 이현필(1913-1964)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2. 이현필의 기도와 신앙
<한국적 영성의 뿌리, 성자 이현필의 삶을 찾아서>라는 저서에서 저자 차종순목사는 동광원과 이현필을 중심으로 호남의 기독교 역사를 소개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현필은 청년기에 고향을 떠나 광주로 나가서 농업학교를 다니며 농사법을 배우고 서서평선교사의 추천으로 재뫼교회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서울로 올라가 YMCA 영어 반에서 영어 성경을 배우고 아현교회에 나가서 김현봉목사의 설교를 듣기도 하였다. 23세쯤인 1935년 결혼문제로 고향에 내려와 중촌에서 교사를 하면서 이공을 알게 되어 성경을 배우고 이공의 모습에 감화를 받았다. 그러나 순결과 가난을 강조하는 스승의 가르침에 그대로 순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26세 때 백영흠목사의 처제와 결혼 후 다시 고향에 내려와 신혼살림을 차리고 다시금 이공을 찾았다. 이공은 화학산 깊은 산골에서 날마다 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더욱 거룩하고 온화한 성자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돌아온 제자를 본 이공은 안타깝고 섭섭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가냘픈 목소리로 ‘깨끗하게 사시오.’ 하는 스승의 부탁말씀과 그 거룩한 모습이 이현필에겐 잊어지지 않았다. 고향에서 의약품과 성경을 들고 다니며 전도에 힘쓰던 이현필은 뜻하지 않은 비극을 겪게 되었다. 깊은 죄책감이 빠져 기도에 몰두하던 이현필은 새로운 회심과 회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공의 믿음과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대로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에 나가서 여러 목사, 장로, 선교사들을 만났지만 참으로 성경의 말씀대로 따라 사는 믿음과 실천의 일치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스승 이공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자기를 온전히 비우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스승의 삶과 그 말씀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공은 말씀대로 사는 믿음에 들어가려면 성령 충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성령을 받는 것도 세 가지 역사가 있다고 하였다. 마음에 성령의 감동을 받는 것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지만 지나가는 구름처럼 쉽게 떠나게 된다. 회개하고 말씀 받는 성령체험은 중간단계인데 아직 불안정한 것이다. 마지막 성령의 충만이 이르게 되면 넘쳐흐르는 샘물처럼 떠날 수 없게 된다 하였다.
이현필은 성령의 충만에 이르기 위해서 날마다 저녁이면 산으로 올라가 회개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고신극기苦身克己의 기도생활이었다. 잔등에 서리가 내리고 수염에 고드름이 달리도록 밤새워 엎드려 회개 하고 기도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짊어지신 십자가의 고난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기도하였다. 그것이 고신의 내용이다. 그리하여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영적인 새 사람이 극기의 내용이다. 십자가의 은혜로 죄악의 내가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가 다시 소생하여 새로운 영으로 거듭나는 삶이 고신극기라는 것이다. 이현필에게 이런 고신극기의 기도는 죽는 날까지 계속 되었다. 일찍이 이공은 제자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마음속에 ‘나’라고 하는 것을 죽여 버려야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는 이 넓은 우주 공정한 공의의 법 밑에서 될 일이 아니다. 내 뜻 내 고집 사망의 내 생각 내 지혜는 아낌없이 버리자. 성자의 뜻에 순종하자. 내 마음은 그의 성전이 되어 그의 경륜을 이루시도록 비워드릴 것이다.
이현필은 이러한 이공의 가르침에 따라 기도생활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삶으로 사랑과 겸손의 본을 보였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의 강요를 피하여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은둔하여 생활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광주로 진출하여 전도와 봉사 구제활동을 벌였다. 여순사건으로 고아가 발생하자 고아원 사업을 하게 되었고 동광원을 세워 6.25로 인하여 발생한 수백 명의 전쟁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이현필은 광주 YMCA 총무였던 정인세에게 동광원 원장을 맡겼다. 이때부터 이현필의 제자들은 일반인들에게 동광원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고 동광원은 자연스럽게 기독교 봉사단체요 수도단체가 되었다. 그들은 목사나 교회의 직분을 가진 교인이 아니고 평신도이지만 예수를 본받아 말씀대로 복음을 실천하며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나아가 예수님으로 섬기고자 하였다. 이처럼 이웃에 대한 헌신적 사랑의 본을 보여준 이런 분들의 출현과 자생적 수도공동체로서 평신도 신앙운동은 우리 교회사에서 보기 드문 은혜의 사건이었다.
3. 이현필의 이웃사랑과 귀일운동
어느 해 정월 보름 누군가 찹쌀떡을 잡수시라고 떡 한 덩어리를 가져왔다. 떡을 받아든 이현필은 지금 깊은 지리산 골짜기에 차가운 움막에서 기도하고 있을 김광석 집사가 생각이 났다. 그러자 그는 곧장 그 길로 따뜻한 떡 한 덩이를 가슴에 품고 사십 리 눈길을 헤치며 맨발로 산으로 올라갔다. 밤새 올라가서 움막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새벽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제자를 위해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추위에 떨며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다가 제자가 일어나자 찬송을 불렀다. 뜻밖의 찬송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온 김광석 집사는 얼마나 놀랐겠는가. 1970년대에 <맨발의 성자 이현필전>이라는 책을 펴낸 엄두섭 목사는 김광석 집사를 만나 스승에 대해 말해 달라고 요청하자 금새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저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이현필 선생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면 아마도 우리 선생님 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전쟁의 참화가 휩쓸고 지나간 1950년대 우리나라는 빈곤과 질병과 정치적 혼란으로 말미암아 씨알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먹을 것 입을 것도 없고 의약품도 없어서 결핵 등 전염병이 창궐하고 한센 병 환자만 해도 수 없이 많았다. 병원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아 죽기만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만나면 이현필과 동광원 식구들은 데려다가 씻어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주로 젊은 제자인 김준호를 시켰다. 김준호는 해방된 이듬 해 해남에서 부흥회 강사로 찾아온 이현필의 모습에 감화를 받고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접고 스승을 따라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누군가 강대상에 꽃을 꺾어다 놓았는데 이현필은 그 꽃을 보자마자 “꽃을 꺾지 말하야 되는데... 부디 꽃을 꺾지 마시오.” 했다. 이 작고 애달픈 목소리에 그만 청년 김준호의 가슴은 뜨거워지고 말았다. 그날 이후 그 말이 불화살처럼 마음에 들어와 박히고 선생님의 모습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고 일생을 스승을 따라서 예수님을 본받는 수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김준호는 스승의 권고에 따라 광주천 다리 밑에서 거지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돌보며 그들과 함께 생활했다. 엄동설한 추운 겨울밤이었다. 스승과 함께 차가운 냉방에서 겨우 작은 이불 하나로 지내고 있었다. 이현필이 물었다. 오는 낮에 보고 온 것을 말해 주시오. 이때 김준호는 망설였다. 선생님의 물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숨길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말했다. 낮에 천변에 가서 보니 거지 한분이 이불도 없이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그 말이 나오자마자 이현필은 자기의 이불을 내주면서 가서 덮어주고 오라고 했다. 아무 소리도 못하고 스승의 이불을 들고 나오는 제자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이 추운 밤에 선생님은 이불도 없이 어떻게 지내실까?
이렇게 환자들과 함께 살면서 이현필과 김준호 모두 환자가 되었다. 결핵에 걸린 것이다. 이현필은 후두결핵으로 말을 하기가 어려웠고 김준호는 결핵으로 오른쪽 팔이 곪아서 마비되고 있었다. 주위의 강권으로 광주 제중원에 입원했지만 이현필은 제자의 치료만 요구하고 자기는 한사코 치료를 받지 않으려 했다. 온 세상의 결핵환자들이 다 치료받게 되기까지 자기는 치료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버스를 타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타고 난 뒤에 맨 마지막에 자기도 타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제자들에게 선생이라 하지 말로 헌신짝으로 불러라 했다.
1946년 당시 YMCA총무였던 현동완선생의 소개로 광주 여름수양회에 찾아온 다석 유영모(1890-1981)는 이 같은 이현필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함께 화순 도암을 찾아가 이공의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서 참된 신앙의 꽃이 피어남을 보고 기뻐하였다. 다석은 광주를 빛고을이라 불렀다. 이현필도 유영모선생을 만난 뒤 늘 신앙의 선배요 어르신으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다석 유영모는 동양사상의 핵심을 꿰뚫고 모든 철학을 그리스도 예수의 신앙으로 포섭하여 가온찍기를 이루고 하나님 아버지께 귀일하였다. 그는 현대 한국철인의 대표적 선각자요 동양적 그리스도인의 선구적 모범이요 일일일식의 하루를 사는 힘찬 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목탁이요 신앙의 사도로 존경받고 있다.
동광원은 이런 큰 신앙의 어른들이 모인 곳이다. 이런 어르신들의 신앙을 한 마디로 귀일신앙이라 하겠다. 인간의 힘으로 하나를 이루자는 것이 통일이라면 귀일은 하나님의 힘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가 하나가 되자는 운동이다. 이현필이 세상을 떠날 무렵에 정인세 원장께 부탁한 말씀이 귀일이다. ‘귀일운동을 하십시오.’ 한분이신 참 하나님, 절대자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에게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이 귀일운동이다. 인류와 이웃이 나와 한 몸이라는 생명과 사랑의 운동이 귀일운동이다.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함께 아프며 온 힘을 합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웃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자는 십시일반과 일작운동의 합심운동이요 한 영혼의 회복이 온 세상의 기쁨이 되는 복지와 영성회복이 귀일운동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습,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의 사랑을 회복하여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사는 거룩한 인격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힘차게 펼쳐 나아가자는 신앙운동이다.
4. 이현필을 통해서 본 우리시대의 사명
이현필의 믿음과 사랑과 인격의 감화를 받아서 일생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몸 바쳐 살아가겠다고 출가한 수도자들의 모임이 동광원이요 그들의 일터가 귀일원이다. 동광원은 현재 남원과 광주와 화순 그리고 벽제에 모여 살고 있다. 이들의 수도 덕목은 기독교 전통의 일반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청빈과 순결과 순명이다. 그러나 그 영성적 의미와 개성은 수도원마다 조금씩 그 향취가 다르기 마련이다.
동광원과 귀일원의 청빈은 오쟁이를 지고 탁발하는 수행의 상징으로 표현 되듯이 일체 자기라는 것을 버리고 자기 소유를 포기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뜻과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자는 것이 청빈이다. 결국 청빈의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을 만나는데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만을 모시고 사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이 청빈이다. 하나님을 모시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 곧 청빈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된다. 달리 말하여 맑고 가난한 청빈의 즐거움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모시는 기쁨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욕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깨끗한 자만이 하나님을 뵐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결은 그야말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사는 것이지만 이 또한 오직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삶이다. ‘꽃을 꺾지 마시오.’라는 말로 상징되듯이 독신적인 삶의 의미는 하늘나라를 위하여 스스로 헌신하는 것이요 그의 나라는 사랑의 세계라는 것이다. 주객분열이 되어 죽이고 빼앗는 세계를 벗어나 아버지 하나님 안에서 각자가 주체가 되어 모두가 하나가 되는 한 생명으로서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아끼는 유기체적 사랑의 삶이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이웃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형제자매를 예수처럼 섬기는 삶이 순결의 의미가 된다.
그리고 순명은 천명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지만 결국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진리와 기도의 삶이다. 말씀의 기쁨과 기도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 순명이다.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떡으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영생이 얼마나 더 기쁘고 행복한 것인지를 체득하며 사는 것이 순명이다.
결국 청빈은 모심의 평안이요 순결은 섬김의 행복이요 순명은 나눔의 기쁨이다. 위에 계신 하나님만을 모시고 앞에 계신 그리스도만을 섬기고 안에 계신 성령만을 섬기며 말씀과 은혜를 나누고 누리는 삶이 곧 청빈과 순결과 순명인데 이것이 생활로 나타낸 모습이 동광원의 영성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고 오직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오직 성령님께 인도함을 받는 신앙생활이 곧 청빈과 순결과 순명의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할 때 죄와 욕심의 나는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모실 때 만물은 내 형제자매가 되고 이웃들은 내 지체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가 될 것이며 오직 성령의 인도를 따를 때 기쁨과 평안과 사랑이 충만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런 동광원의 귀일영성이 우리 사회에 빛이 되고 길이 될 때 갈라지고 찢어지고 허무와 분노에 지쳐 어둠과 절망에 빠진 우리민족과 씨알의 영혼들이 다시 소생하고 일어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에 진리의 눈을 뜨게 되고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기쁨의 힘을 얻게 되고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와 감사로 모든 생명의 하나 됨을 되찾게 될 것이다. 우리민족에 주신 이런 소명과 소망을 바라보며 이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 우리 주님께 감사하며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