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근 安定根 (1885 ~ 1939)】 "포용력이 강한 ‘전천후 독립운동가’ 안정근"
포용력이 강한 ‘전천후 독립운동가’ 안정근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안정근(安定根)은 안중근 의사의 바로 아래 남동생이다. 그는 청산리전투에 직접 참전했고, 임시정부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너무나 유명한 형’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안정근은 1885년 1월 17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안태훈과 조마리아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안중근과 동생 안공근(安恭根, 1939년 상하이에서 사망)이 자기주장이 강한 호걸형이었다면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포용력을 갖춘 외유내강형의 독립운동가였다.
안중근은 사형집행 일주일 전인 1910년 3월 19일, 두 동생과 마지막 면회 자리에서 안정근에게 한국에도 공업이 필요할 것이라며 실업가의 길을 걷도록 권했고, 안공근에게는 “너는 재주가 있기 때문에 학문을 연구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유언을 남겼다.
서울로 유학을 떠나 양정의숙 법률과에 다니던 안정근은 학업을 중단하고, 1910년 5월경 가족을 이끌고 형의 활동무대였던 연해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도움을 받아 1911년 4월 무링현(穆陵縣)에 정착해 잡화상을 경영하며 그 수입으로 가족들의 생활비와 활동비를 충당했다. 그 무렵 그의 집은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1914년 3월, 안정근 일가는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니콜리스크(蘇王嶺)로 거처를 옮겼고, 여기서도 안정근은 4천 원의 자본금을 갖고 국내에서 건너온 인사들과 함께 잡화상점와 벼농사 농장을 운영했다. 그는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계의 유력인사로 자리를 잡게 됐고, 이 무렵 동생 안공근, 북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밀정 김정국(金鼎國)을 처단하는 일에도 나서기도 했다.
독립단체 통합운동과 청산리전투 종군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 그는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인 도산 안창호의 요청이 있자 벼농사 농장과 여타 사업을 동생 안공근에게 맡기고, 상하이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안정근은 임정의 외곽단체였던 대한적십자회의 부회장, 임정의 내무차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상하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신한청년당에 이사로 참여했다. 특히 그는 1920년 임시정부 국문원의 파견원으로 북간도(두만강 건너 용정, 명동, 훈춘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이뤄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고, 이는 얼마 후 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졌다. 이 전투에 직접 참전한 안정근은 3일째 전투가 끝난 후 현장에서 긴급보고서를 작성해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1921년 가을 상하이로 돌아온 안정근은 대한적십자회 등 다양한 단체에 몸담으면서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다. 다음 해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됐다. 그 무렵 임정은 지도체계 개편 문제를 놓고 한창 논란 중이었다.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던 안창호의 견해에 동조해 ‘임정개조론’을 편 안정근은 임정의 기존체제를 옹호하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등 기호세력과의 갈등이 심화되자 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한 후 임정 외곽단체인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 상하이 교민단, 노병회 등에서 활동했다. 1924년 2월 그는 가족을 이끌고 베이징(北京)으로 이주했다. 해전(海甸)농장 개척과 운영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해전농장은 안창호, 안정근, 김승만, 이동필(의사) 등 4인이 공동으로 건설한 농장으로, 이들은 해전지역을 장차 흥사단의 근거지로 만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만년의 활동과 서거
그러나 베이징 생활 1년 만에 안정근은 해전농장 생활을 정리하고 산동성 위해위(威海衛·현 지명은 威海)로 이주했다. 이유는 그의 ‘뇌병(腦病)’ 때문이었다. 10년 정도 요양한 끝에 안정근은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고, 1935년경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역이 일본군의 영향 하에 들어갔고, 안정근 가족들은 중국 땅 어디에서도 신변안전을 확보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동생 안공근의 주선으로 홍콩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해 김인(김구 장남), 안우생(안공근 장남) 등과 함께 동지규합과 정보수집에 힘썼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안정근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해 그의 나이 만 60세였다. 그는 한국적십자회(대한적십자회 후신)의 회장과 한국구제총회 회장을 겸임하며 동포들의 귀국지원과 구호사업을 펼쳤다. 초기에는 안경근, 안홍근, 안민생 등 여러 친인척이 함께 했다. 이들 인척들이 1946년 대부분 귀국했지만 안중근 집안의 ‘수장격’이었던 그는 계속 상하이에 남아 활동하다 다음 해 3월 17일 뇌암으로 타계했다.
안정근은 포용력을 갖춘 ‘전천후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형의 유언대로 가는 곳마다 농장 경영 등 ‘실업가의 면모’를 보이면서도 마지막까지 독립운동과 재중동포 지원사업에 헌신했다. 그는 가톨릭 예식에 따라 상하이 만국묘지에 묻혔는데 1949년 5월 상하이가 인민해방군에게 점령되면서 묘의 행방을 찾을 수 없게 됐다. 광복된 지 77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동생들인 안정근, 안공근의 유해 또한 찾지 못하고 있다.
2020년 민화협과 롯데장학재단이 공동으로 진행한 ‘독립유공자 후손 장학사업’에 안정근 선생의 후손(천재윤 서강대학교)이 선정되어 그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본다.
정창현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국민대학교,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평화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