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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를 그리다
꽤 오래전 일이다. 아무래도 정확하게 옮길 필요를 느껴 메모를 검색하니 2015년 11월 17일 새벽이었다. 평소 쓰는 핸드폰 일지 메모장 ‘네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새벽 3:20 파티마에서 전화. ‘십자가가 많아서 뭘 사야 할지...’(김승현). 졸지에 깨어 쉽게 잠들지 못했으나 행복했다.”
일찍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난 고(故) 김승현 집사님이 나를 깨운 그 새벽녘의 아뜩함은 지금도 낯설다. 안양체육회 임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난 모양이다. 미리 언질을 받은 바가 없어 오밤중에 전화를 받고 놀란 가슴을 쓸었다. 지금 포르투갈 파티마 성지에 왔는데, 성물 가게에서 내게 선물할 십자가를 고르는 중에 전화했다고 한다. 사실 파티마를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졸린 눈을 비비며 적당히 둘러댔다. “파티마에서만 구할 수 있는 십자가를 찾아보세요.”
꼭 9년 전 일이었다. 허둥지둥 전화를 끊고 나서 아쉬움이 컸다. 그해 낸 <송병구 목사가 쉽게 쓴 십자가 이야기>에서 파티마 십자가를 인용한 일이 있다. ‘제10장 십자가를 보라’라는 주제였는데, 요르단 느보산에 있는 놋뱀 십자가와 함께 나란히 포르투갈 파티마 십자가를 관련 자료로 실었다. 순례를 다녀온 분이 제공한 사진이었는데, 언젠가 나도 파티마에 가면 제대로 된 십자가를 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했다. 그 밤 정신이 없었던 터라, 세세한 말을 미처 다 전하지 못해 미련이 남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포르투갈을 여행 중이다. 군포지방에서 떠난 여정인데 나로서는 꽤 오래전부터 벼른 일이기도 했다. 처음에 ‘영성순례’라는 제목이 너무 작위적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다니면서 영성과 순례 어느 한 단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주제 의식에 충실한 여행이었다. 물론 여행의 후폭풍으로 늘어나는 체중과 쌓여가는 카드빚이 걱정된다며 서로 웃기도 했다.
우리 일행은 스페인의 몬세라트 수도원,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산티아고 순례 종착지 콤포스텔라를 거쳐 파티마 성지에 왔다. 앞으로 안달루시아 여러 도시들(세비야, 그라나다, 톨레도)을 거치면서 그리스도교 문명과 아랍 세계의 충돌 속에 새겨진 종교적 무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여느 유럽과 달리 이베리아반도에는 여전히 종교적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다. 산 위, 해안, 도로 등 곳곳에 높이 선 경건한 십자석들은 기념물이거나, 경계석이었다. 심지어 오레오라고 불리는 농촌 마을의 건조 창고에는 어김없이 작은 십자가를 세웠다.
어제는 파티마 성지 인근 호텔에서 잠을 잤다. 거리 이름을 딴 포르투갈 천사(Anjo) 호텔이었다. 잠시 걸으면 파티마 성지의 높은 종탑이 보였고, 경내로 들어서니 광장 가장자리에 우뚝 선 철제 파티마 십자가가 반갑다. 10여 미터를 훌쩍 넘는 높이의 녹슨 십자가는 부피감 없이 후리후리하고 각진 모양이다. 게다가 사각기둥 위에 매달린 그리스도상은 전통을 벗어난 지극히 모던한 감각이었다. 무수한 성물 가게의 여느 십자고상들과 전혀 달랐다.
저녁을 먹고 다시 성지를 찾았다. 밤에 열리는 촛불 행진을 보고 싶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성모상과 함께 뒤따르는 촛불 행렬은 요즘 한국에서 자주 보는 광장의 행진처럼 의연해 보인다. 곧 성모발현일(10.13)을 앞둔 시기여서 더 많은 순례객을 맞을 준비로 들뜬 분위기였다. 포르투에서 파티마로 달려오는 길에 본 영화 ‘파티마의 기적’처럼 눈앞에서 세 아이의 목격담이 인상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사실 파티마에 온 목적은 광장에 우뚝 선 십자가 모형을 구하려는 욕심이었다. 성지를 둘러싼 수많은 성물 가게들은 얼마나 많은 순례객이 이곳을 찾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인 같았다. 그 많은 숫자만큼 기대를 부추겼으나, 곧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파티마 십자가는 새끼손가락보다 가느다란 기념품 외에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어느 성물집 주인은 가게를 비운 채 집으로 달려가 십자가를 가져왔으나, 유사할 뿐 아주 다른 것이었다. 9년 전, 김 집사님의 선물이 안목 탓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실망감을 보상해 준 것은 스무여 곳을 헤맨 끝에 눈에 띈 앤틱 십자가이다. 고전적인 품모의 그리스도상이 금색 받침대 위에 세운 삼위일체 스타일의 십자가에 매달린, 역설적으로 아주 클래식한 십자가였다. 한눈에 보아도 엄두를 못 낼 가격인데, 잔주름이 얼굴에 가득한 할머니 사장님은 익숙한 솜씨로 흥정을 받아 주었고, 서로 기꺼운 지점에서 타협하였다. 빈손으로 파티마를 떠난다면 미련이 더 크게 남을 뻔하였다. 고마운 마음에 사장님과 사진을 찍으면서, 이 정도면 김 집사님도 만족했으리라,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