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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전설로 보는 식민사학계 (3부) |
일제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 불신론을 신봉한 이병도 |
신라, 백제, 고구려 3국은 기원전 1세기에 건국되었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병도 이후 학계에서는 두 사서에 있는 3국의 건국연대를 인정치 않고 3국의 시조에 관한 기록은 전설로서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6대 태조왕 때 엄밀한 의미의 고대국가의 건국이 되었다고 보는 한편, 백제는 8대 고이왕 또는 13대 근초고왕에 와서야 실질적 건국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신라는 가장 빠르게 잡아도 17대 내물왕 때 건국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의 역사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3국의 역사를 전하는 1차적 사료로서 무엇보다 소중하며 우선적으로 취급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두 책에 나타난 초기 수백 년의 역사를 조작이라 하여 불신하는 학계의 그릇된 입장은 이제 비판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학계의 잘못된 입장에 대해 고려대의 최재석은 『한국고대사회사 방법론』(1987)에서 이병도를 위시한 이홍직, 이기백, 김철준, 이기동, 문경현 등의 주류 고대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일본 식민사학자들에게서 연유된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그러한 식민사관의 대표격인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 등의 3국 초기 역사 부정이 『일본서기』의 잘못된 기록을 근거로 하였을 뿐, 『삼국사기』의 내용 중 조작이거나 윤색되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부분 거의 모두가 근거가 불확실한 허구임을 각인별 대표 저작을 낱낱이 분석하여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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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대왕의
고구려 건국이 실제로 존재한 역사였는지 아니면 전설에 불과한지 여부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주몽이 부여에서 남하할 때 추격군을 따돌린 부분이 『삼국사기』에
“주몽은
오이, 마리, 협보 세
사람을 벗으로 삼아 엄사수(淹사水)에
이르러 건너가려 했으나 다리가 없었다. 뒤쫓는
군사들이 곧 닥칠까 두려워 강물에 고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자다. 지금
도망하는데 뒤쫓는 자들이 거의 닥치게 되었 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떠 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몽이 건 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져 뒤쫓는 기병은 건널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관한 내용이 고구려 당시 세운 「광개토대왕릉 비문」에도 “길을 떠나 남으로 순행하는 도중에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 가게 되셨다. 왕이 물가에 임해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은 떠오르라.’ 하시니 말씀에 감응해서 즉시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떠올랐다. 그런 후에 강물을 건너······”라고 유사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 두 기록을 비교하면 건넌 강 이름이 다소 차이가 있고 다리를 만든 것이 물고기와 자라, 갈대와 거북으로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고구려인이 기록한 광개토대왕릉의 비문 내용과 거의 유사하다는 점이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청나라 말기에 발견되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 당시 그 비문 내용을 모르는 상태에서 기록한 것인데도, 이와 같이 두 내용이 거의 같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이 조작이라거나 전설이 아니라는 유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또 『삼국사기』보다 약 백 년 후의 이규보의 「동명왕편」에도 위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이 있는데, 이덕일은 이규보가 「동명왕편」 서문에 『구삼국사』「동명왕본기」를 보았다고 했으므로 『삼국사기』 역시 『구삼국사』의 기록을 토대로 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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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삼국사기』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기록이 사실임을 보았는데, 아래에서는 이병도의 저술에서 보인 고구려 건국관련 내용들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지적하겠다. 우선 다음 문장을 보자.
“고씨 왕실의 시조는 주몽(또는 추모, 동명)이라고 하거니와, 그러면 그(계루부 주몽) 이전에 소노부가 왕노릇을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 왕이라는 것은 한문류의 표현으로서 실상은 유력한 거수(맹주격)를 지칭한 것에 불과하니, 처음 에는 계루부(홀본)보다도 소노부가 맹주적 지위에 있어 대한(對漢) 관계에도 주도적 인 역할을 하였던 모양이다. 따라서 한으로부터의 봉작 등도 여기에 먼저 수여되다 가 그후 소노부의 세력이 쇠하고 계루부가 대신 맹주가 됨으로부터는 거기에 개수 (改授)되었던 것이라고 보아야겠다.”
이병도는 계루부의 주몽 이전에 소노부에서 왕 노릇을 했다고 강조하였으나 이는 『삼국지』동이전의 ‘고구려’ 조에 나오는 내용일 뿐, 『삼국사기』에는 계루부나 소노부 등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며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왕이 된 사실만 기록하였다. 또 『삼국지』에 ‘왕’이라고 표현했는데도 자기 임의대로 ‘거수(맹주격)’로 격하하여 해석했을 뿐아니라, 고구려를 한나라에서 봉작을 받는 제후국인 것처럼 취급했다.
이런 발상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추종하여, 우리 기록은 무시하고 중국측의 기록만 받아들이는 사대주의적 행태로서 크게 잘못이다. 일례로 고구려가 한의 봉작을 받지 않았음은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 조의 “2년 6월, 송양왕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므로 왕은 그 땅을 다물도라 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도주로 삼았다. 고구려말에 옛 땅의 회복을 다물이라 하므로 이와 같이 이름한 것이다."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동명성왕은 원년에 말갈 부락을 물리쳤으며 다음 해에 비류국왕 송양의 항복을 받아 영토를 넓혔는데 그곳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했다. 다물이란 말이 옛 땅의 회복을 뜻하므로 고구려를 세운 큰 뜻이 고조선의 잃어버린 옛 땅을 찾는데 있다는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다물도라 이름한 것이 틀림없다.
고조선의 잃어버린 땅이 요동, 현도, 낙랑군 등 한나라의 영토가 되어 있어 이를 되찾기 위해 요동, 현도와의 경계 부근에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 한나라의 봉작을 받는 제후가 되기 위해 나라를 세웠다고 봄은 너무나 고구려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사대적 착상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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