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오스 불상공원에 가다 (1)
윤연모
지난 해, 어머니를 위하여 온몸과 마음을 바쳤다고 감히 자부하고 싶다. 어머니를 정말 최고로 모셨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최고라기보다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에게 답한다. 나의 간절한 소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작년 연말부터 어머니 병세가 조금 나아지셨다. 이것은 가히 기적이란 말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여, 자신에게 상을 주는 의미로 겨울 휴가 때 단 며칠이라도 여행을 다녀오고 싶었다. 원래 근처에 있는 다른 나라로 가고 싶었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꿩 대신 닭이라고 라오스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라오스는 절대로 닭이 아니고 아주 매력적이고 건강한 꿩이었다. 달의 도시 비엔티엔과 유난히 보름달이 아름다웠던, 방비엔에서 보낸 며칠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라오스는 현재 여름 날씨라고 하여 뜨거운 날씨를 예상하였는데, 뿌연 안개 속에 비가 촉촉이 내려 답답한 가슴을 훅 뚫어주었다. 열대 기후라서 물과 햇볕이 풍요로워 호텔 정원을 조금만 다듬어도 아름다운 정원을 가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곳의 식물이 풍요롭고 다양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2월은 건기로 비가 오지 않아야 정상인데 특이하게도 비가 왔단다. 파인애플 나무에 커다랗고 탐스러운 파인애플이 달려있고 유칼립투스 나무들이 여기저기 모여 담소하고 불탑을 만들어 파는 가게에 황금색 탑들이 쌓여 있어서 이곳이 불교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였다. 거리는 흙먼지가 휘날려 열대의 무성한 이파리들이 먼지투성이였다. 그럼에도 여행자는 미지의 신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비엔티엔에 있는 불상 공원에도 축복의 비가 흡족하게 내려서 우리들은 우산을 들고 불상 예술품을 감상해야 했다. 인생이든 여행이든 힘들이지 않고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왓씨앙쿠앙 불상 공원은 시멘트 조각공원이다. 불상이 편안하게 옆으로 누워 미소 짓는 모습에서 라오스인들이 그리는 낙원의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이 큰 와불 상이 주변에 있는 아기자기한 모습의 힌두교 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와불 상의 크기와 내용으로 보아 주변을 압도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 어느 신도 부처보다 높을 수 없다는 것을 은근히 표현하는 듯하다. 원래 태국인이 개인적으로 만든 사원으로 태국에서 중국에 반환을 요구하며 15년 동안 재판을 하여 결국 태국인이 되찾게 되었단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불상 공원을 중국인에게 40년 동안 빌려주었단다. 중국은 라오스에서 좋은 것은 모두 빌려가는 형식을 취하였다. 그렇다면 이 불상공원의 가치가 어느 정도 평가되는지 알 만하다. 불상에 금을 입힌 것도 아니고 그저 시멘트로 만든 거대한 불상인데 빼어나게 아름답다. 어찌 보면, 누운 부처의 모습이 관능적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달관하거나 인자한 눈매의 부처상을 보아왔기에 느낌이 새롭고 신선하였다. 그곳에서 만난 프랑스 여성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며 부처 모습이 어떠냐고 물으니 느낌이 좋다, 멋지다고 탄성을 질렀다. 그야말로, 예술이란 자신의 느낌을 대상에 충실하게 넣어서 표현하여 다른 사람의 공감을 얻을 때에 더욱 아름다운 걸작으로 태어나는 듯하다. 또한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나 예술품을 보는 눈은 공통되는 모양이다.
하늘에 닿기를 염원하는 뾰족한 탑! 하늘길이 지상에서 하늘로 수직으로 뻗어 있었다. 또한 그 아래에는 불교 예술품에서 많이 본 듯한,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있는 구조물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향하였다. 맨 아래 쪽에는 지옥문이 있어서 이 문을 통과하면, 죄지은 사람은 사리탑 바깥으로 다시 나올 수 없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계단이 아주 가파르고 우리가 발을 딛는 부분이 아주 좁아서 발을 옆으로 틀어 디디며 올라갔다. 놀랍게도 시멘트로 만든 조각상들이 있어서 염라대왕이 죄인을 심문하는 듯한 상황 극을 연출하는 모습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죄를 짓고 살지 않도록 캠페인을 하는 모습일 것이다. 이 모습은 다분히 불교의 교화적인 면을 반영하는 듯하다. 먼저 올라간 제주도에서 온 부부가 나의 손을 이끌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빗물 때문에 지옥문을 제대로 통과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사고를 당했을 지도 모른다. 손을 내밀어준 제주도에서 온, 몸매가 날씬하고 착하며 살살 웃는 여동생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분들 덕택에 내가 바깥까지 안전하게 나와서 죄짓지 않고 착한 사람으로 산 것을 증명한 듯하였다.
이 전망대에 올라와서 불상공원을 둘러보니, 역시 누워 있는 부처상이 가장 아름답고 그 주변에 있는 아기자기한 조각들 덕분에 평화로운 이미지를 뿜어낸다. 덕분에 마음이 느긋해지고 행복해졌다. 이곳이 바로 지상낙원이 아니겠는가. 불교를 믿는 라오스인들이 추구하는 지상낙원의 이미지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불상에서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불상에서 그 여유로움과 평화로움에 덧붙여 관능미까지 느낄 수 있어 불교 예술품을 감상하며 묘한 아름다움을 탐닉하였다.
이 멋진 작품을 여유롭게 감상하지 못하고 우산을 들고 사진을 찍으며 다녔으니 그야말로 ‘고생 반 감상 반’ 한 셈이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였던가. 입구 쪽으로 나가는데 사람들이 모여 서서 뭔가를 먹고 있었다. 라오스 바나나를 석쇠에 구워 먹고 있는데 하나 먹어 보라고 권하기에 맛보니 군고구마 맛으로 맛이 아주 좋았다. 세상 어느 곳이나 식재료가 있으면 그냥 먹거나 쪄먹거나 구워먹으며 맛을 재창조하는 것 같다. 고구마와 바나나! 그 성분이 탄수화물이니 구우면 비슷한 맛이 날 수도 있겠다. 야자의 흰 속살을 둥근 떡처럼 구운 것도 먹어보았는데 이 맛도 일품이었다. 라오스 사람들이 담백하고 부드러운 것처럼 음식 맛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길가에 아주 커다란 칸나 꽃이 많았다. 그런데 그것이 칸나 꽃이 아니라 바나나였다. 바나나 한 송이가 푸짐하게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 비엔티엔을 돌아보는데 온통 열매가 달려 있는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노니가 가득하다. 하늘은 풍요롭지 못한 이 나라에 먹을 것으로 기막힌 보상을 해주는 듯하다.
가끔 나뭇가지에 잎은 하나도 없는데 아주 예쁜 꽃이 피어 이방인의 눈길을 끌었다. 홍콩의 국화 비슷하기도 한데 차창 밖으로 휙휙 지나가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묶는 호텔의 방 한가운데 있는 액자에 담겨 눈길을 끌었다. 사진을 찍어 라오스인 여성 가이드에게 보여주며 물어보니, 이 나라의 국화인 찬파 꽃이란다. 야시장에서는 이 꽃을 액세서리로 만들어 파니, 외국인 여성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젊거나 늙거나 나이를 가리지 않고 머리나 가슴에 장식하고 다녔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젊고 늙고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나의 예상을 뒤엎고 편안하게 옆으로 드러누운 부처의 미소! 이 부처와 만나는 것만으로 라오스에 온 기쁨과 보람을 충분히 느꼈다. 아직 개발이 덜 되어 날것의 맛이 나는 도시라도, 자신의 불심을 무엇으로 표현하든 걸작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였다. 나도 그 불상 옆에 누워 도를 닦으며 오고 가는 사람들의 진솔한 세상 이야기를 여유롭게 들어주는, 미소 띤 보살이 되고 싶다. 그 멋진 불상 덕택에 세상이 더욱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비엔티엔의 오후를 만끽하였다.
방비엔의 블루라군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다 (2)
윤연모
라오스 비엔티엔에서 버스를 타고 자연을 감상하며 네 시간을 달려 방비엔에 도착하였다. 먼저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이 산과 강에 둘러싸여 얼마나 아름다운지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호텔 앞에 쏭강이 조용히 제 갈 길을 가고 그 앞에 순박한 느낌의 탐짱 산과 팡은 산이 호텔을 이용하는 여행객으로 하여금 사색의 장을 만들어주었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 우리가 튜빙, 롱테일보트, 카약킹, 버기카, 지프라인을 체험한다니 가슴이 두근두근하였다. 다양한 체험을 하며 자연을 즐기고 두려워서 소리도 지르며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호텔 앞에 있는 작은 수영장에서 서로를 느끼고 있는 외국인 연인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서양인들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연인끼리 초집중하여 즐기니 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하여 자신들에게 동양인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어쩌면 우리가 젊은 날에 하였던 행복한 광경이기도 하여 잠시 기분 좋은 추억여행을 다녀왔다.
산의 모습이 특이하여 재미있다. 우리 집에서 잘 보이는 도봉산이 케네디 얼굴을 닮은 듯하여 매일 바라다본다. 게다가 아버지 별명이 케네디였기 때문에 볼 때마다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곤 하였다. 그런데 이곳 산의 윤곽은 어디를 보아도 원숭이의 옆얼굴 모습이라 특이하고 재미있어서 사진기의 셔터를 계속 눌렀다.
이곳에서의 하이라이트는 블루라군에서의 여러 체험활동이다. 튜빙을 하기 위하여 탐남 동굴을 찾아갔는데 동굴 앞에 코끼리 모양의 종유석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라오스인들이 코끼리를 좋아하니 부처님이 코끼리 모양의 종유석을 선사한 것 같아 신기하였다. 아마도 신이 있다면 인간이 좋아하고 간절하게 원하면 슬쩍 제공해 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여러 동굴을 탐험해 보았다. 하지만 동굴 안에 흐르는 물 위에 드러누워 튜브를 타고 밧줄을 잡고 이동하며 동굴 안을 구경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조용한 라오스인들의 오락거리 치고 상당히 활동적이다. 수영복을 속에 입고 간단한 티셔츠를 위에 입고 이마에 랜턴을 끼고 보호 모자를 쓰고 들어가는데 처음에 물에 젖지 않겠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가이드의 한 마디에 원주민 처녀총각들이 우리에게 물을 뒤집어씌워 옷이 물에 왕창 젖어버렸다. 온몸이 물에 젖었으니 바야흐로 우리가 튜빙 준비를 한 셈이 되었다.
물놀이용 신발을 준비하지 않아서 튜빙을 할 때에 맨발로 하였다. 그들은 날렵하고 긴 배를 롱테일보트라고 불렀다. 그것을 타러갈 때 신발이 없어서 걱정을 하자, 원주민 청년이 자신이 신고 있던 검은 색 슬리퍼를 기꺼이 벗어주고 자신은 맨발로 다녔다. 고맙게 생각하고 그 신발을 신어보았는데 더 불편하여 돌려주고 내 신발로 갈아 신고, 고맙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1달러 팁을 주니 고맙다는 라오스 말 ‘컵짜이!’를 연발하였다.
롱테일보트를 탈 때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배를 타며 경치를 즐기고 있는 듯한 느낌과 비슷하였다. 그곳 강변 양 쪽에 아름다운 조각 같은 건물을 눈으로 즐기며 성악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 가이드가 불러주는 이탈리아 가곡 ‘산타 루치아’를 감상하였다. 그때 마치 강물도 일어나 함께 환호성을 질러 내 귀도 번쩍 뜨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저 점잖고 말없는 가이드가 조용히 노만 저었다. 나는 그의 태도가 너무 숙연하여 처음엔 조용히 경치만 감상하였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강물이 나보고 자신처럼 노래 불러보라고 말을 건네는 듯하였다. 뒤에 앉은 사공에게 노래를 불러도 좋겠냐고 허밍을 하며 손짓발짓을 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맨 먼저 거의 365일 내내 어머니께 불러드리던, 내가 작사한 ‘어머니’ 노래와 ‘구름 향기’를 부르고, 앞에 있는 우리 그룹의 여성에게 같이 부르자고 하니 ‘선구자’를 부르자고 하여 함께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뒤를 돌아보니 사공이 미소를 띠어주어 다른 나라의 노래를 듣는 것이 그에게 괜찮아 보였다. 하여, 노래가 우리 모두를 또 다른 낙원으로 데려다주었다.
흔들리는 배를 타고 그저 자연을 감상하면 된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나무들과 풀이 뒤엉켜 밀림을 이루는데 신기하게도 그 무리 중에서 눈에 띄는 꽃이 있다. 엷은 남보라 색깔의 나팔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락없이 오후에는 꽃이 시들어 영광은 사라지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여기는 땡볕에 나팔꽃들이 무법의 세상에서 피어난 작은 아기 꽃 역할을 한다.
가슴에 주황색 구조용 베스트를 입고 쏭강에서 카약의 노를 젓는다. 흐르는 물살 따라 배 한 대에 세 명씩 타고 노를 저으며 간다. 혼자 유유자적하며 타는 카누가 아니라, 셋이서 타는데 맨 뒤에서 원주민 청년이 노를 저어주고 가운데 한 명이 앉고 맨 앞에서 내가 노를 저었다. 맨 앞에 앉아서 오랜만에 노를 저었는데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다. 그 옛날 해양소년단을 하며 배웠던 해양활동이 오늘의 활동을 즐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이 나라 저 나라로 함께 시간을 공유 했던, 내가 인솔하고 간 학생들과 나에게 온갖 친절을 베풀어주며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던 외국인 지도자들이 주마등처럼 내 머릿속으로 지나갔다. 그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세계의 젊은이들과 소통하며 두려움 없이 자연을 즐겼던 젊은 날이 그리워서 이 여행을 즐기고 있는지 모른다. 빛나던 과거로의 여행과 자신에게 휴식을 주는 여행! 이 두 가지가 다 내 몸에 필요한 필수아미노산 같은 느낌이 든다. 어느 강이나 호수이든, 보트 탄 사람들이 자신의 몸 위에서 흔들흔들 느끼게 하니, 사람들은 그 느낌을 찾아 자연과 하나 되기 위하여 강의 이곳저곳으로 찾아다니며 노를 젓는다. 빛나는 자연과 함께 아무런 고민이나 고통 없이 인생의 노도 힘껏 저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산악자동차 ‘버기카’와 보편양 문화 (3)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기카라는 것을 여행지에서 몰아 보았다. 도대체 버기카가 무엇인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궁금하였는데, 버기카는 네 바퀴로 굴러가는 소형 산악 자동차이었다. 이 자동차를 타는 것을 많이 기대하였지만 실전에서 당황하자 엉뚱한 일을 당하였다. 구조가 다른 차를 평소의 습관대로 운전을 하게 되어 다른 차와 부딪혀 조금 고생하였다. 하지만 크게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였고 라오스의 ‘보편양 문화’라는 것을 맛보게 되었다. 과연 그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으로 좋다, 혹은 괜찮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하다.
‘버기카’는 2인승이며 왼쪽에 운전석이 있는데 일반 자동차와 달리 왼쪽에 브레이크, 오른쪽에 액셀 페달이 있어서 혼돈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국에서 몇 십 년 운전을 하였으니 괜찮겠지 생각하고 혼자 타기로 하였다. 그런데 길거리로 나오자마자 다른 버기카가 앞에 서 있어서 브레이크를 밟는다는 것이 무심코 액셀을 밟았다. 그 순간, ‘어어’ 하는 사이에 꽈광꽝 앞 차를 받아서 머리와 엉덩이가 심히 아팠다. 허! 여행지에서 충돌사고라니 어처구니없었다.
가이드가 달려와서 환불해 줄 테니 그만 타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하지만 끝까지 탈 터이니 옆에 조수를 붙여달라고 부탁하였다. 하여, 흙먼지 날리고 진흙탕 물이 온몸에 그대로 튀기는 비포장도로를 경주용 차 달리듯이 몰고 갔다. 엄청나게 조심하면서도 이렇게 거친 맛에 사람들이 버기카나 경주용 차를 운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큰누님이라고 정겹게 불러주는 가이드 동생은 내가 타겠다고 하니 라오스 청년을 조수석에 앉혀 주었다. 돌아올 때 내가 거칠게 몰며 버기카 몇 대를 뒤로 보내고 아주 거친 길도 잘 통과하자, 라오스 청년은 처음과 다르게 편안하게 뒤로 기대어 앉아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며 칭찬하여 주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옆에 앉아준 그에게 팁으로 2달러를 주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도전하고 싶었다. 설마 죽기야 하겠는가. 덕분에 스케줄이 모두 끝나고 라오스에서 아주 큰 병원이라는 종합병원 구경을 하게 되었다.
라오스는 사회주의 국가라서 이동의 자유가 없다고 한다. 하여, 외국인이 단체여행을 할 때 라오스인 가이드를 데리고 다닌다. 그녀는 키가 아주 작으며 여행지를 다니면서도 치마 정장에 스타킹까지 신고 다니며 한국인 가이드가 묻는 것에만 대답하고 조신하게 앉아서 조는 것이 주된 특기처럼 보였다. 아가씨인줄 알았는데 아이가 다섯 살과 아홉 살인 두 아이의 엄마로 2년 전에 이혼하여 자신이 두 아이를 키운단다. 재혼을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가끔 외롭지만 재혼하는 것이 쉽지 않단다. 자신은 서른둘인데 라오스에서 서른 살 이상은 아기 낳기에 늙었다고 생각하여 재혼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요즈음 온 세상이 결혼을 안 하거나 늦게 하고 연애를 즐기는 것이 주된 현상인 듯하다. 하여, 그녀에게 결혼과 상관없이 멋진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엷은 미소로 답해 주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며 기다리다가 겨우 엑스레이를 찍게 되었다. 찍고 나서 아무리 기다려도 환자를 부르지 않아서 병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응급실의 야전침대에 누운 환자는 양호한 편이고 바닥에 누워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도 많이 있었다. 내가 그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자, 이방인처럼 생각되는지 약간 경계하는 얼굴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아서 급히 발걸음을 엑스레이실로 옮겼다. 기사가 나를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여 그 방에 다시 가보고 싶었다. 오, 맙소사! 선풍기 바람에 그 필름을 약 삼십 분 동안이나 말리고 있었다. 그는 의자 위에 올라가서 핀셋으로 필름을 뒤집어 앞뒤로 정성껏 말렸다. 드디어 그가 나에게 진찰실로 가지고 가라고 하였다.
여의사가 필름을 한 번 죽 훑어보더니 부러진 곳은 없으니 괜찮다고 영어로 말해주었다. 그 순간, 부러지지 않으면 하나도 다친 곳이 없냐고 반문하니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괜찮다고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온 가이드에게 라오스 말로 다시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나는 그녀의 설명에서 ‘보뺀양’이란 말을 주워들었다. 그 말은 ‘보편 양’ 즉 보편적으로 괜찮다는 뜻이다. 여행 중에 사진 찍어 주어서 고맙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뺀양이라 하고, 내가 고맙다는 표현을 할 때마다 보뻰양이라고 하여 그 뜻이 ‘괜찮다’는 뜻이라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도 그 말을 즐겁게 자주 사용하였다.
나중에 가이드가 이 나라에 ‘보편양 문화’라는 것이 있다고 소개해주었다. 라오스에서 보편양 문화란 어떤 경우에도 거절하지 않고 질문에 다 답해준단다. 하지만 자신이 싫으면 약속을 하고도 나오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난단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좋은 문화일까 생각하게 된다. 약속을 해 놓고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나오지 않는다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을 것 같다. 약속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곤란할 것이다. 그 사람과 그 다음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바로 전달해야 자신과 상대방에 피해를 미치지 않을 것이다. 어찌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거절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일단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동의해서는 안 되는, 동의하고 싶지 않은 문화현상이다. 하지만 이것이 풍요로운 문명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라오스인들의 소박한 삶의 형태, 혹은 문화라면 굳이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들만의 이유가 있을 터이다.
엑스레이 두 장 찍고서 미국 돈 70달러이니 우리 돈 팔만원에 해당하는 돈을 청구하며 영수증을 써준다. 그래서 이 엑스레이를 내가 가져갈 수 있냐고 물으니 어떤 증명서도 요구하지 않고 돈도 청구하지 않고 그냥 주겠다고 한다. 이 나라의 일반 서민들의 한 달 월급이 20만원이라는데 엑스레이 두 장 찍는 의료비가 이렇게 비쌀 수 있는지 의문이었지만 외국인 신분인 나로서 별 수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보뺀양!’을 외쳤다. 하루 종일 즐겁게 물속에서 체험하며 작년 일 년 동안의 피로를 다 풀지 않았는가. 게다가 머리도 심하게 다치지 않고 팔다리도 부러지지 않았으니 보편적으로 양호하지 않은가. 마음속으로 ‘괜찮아! 괜찮아!’라고 연발하고 있었다.
소금마을과 라오스의 아이들 (4)
옛날에는 화폐 구실을 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돈이 되지 않는 소금을 만드는 마을이 있다. 라오스는 바다가 없지만 태초에 이곳이 바다였다는 것을 이 마을이 증명하여 주는 셈이다. 소금 만드는 곳은 난생 처음이라 큰 기대를 하고 갔다. 소금마을과 젓갈마을은 나에게 어떤 놀라움을 펼쳐 보여줄지 궁금하다.
소금마을에 오니 비 오는 날씨조차 음산하다. 슬레이트 지붕에 통나무로 만든 집들이 세월에 찌든 채, 양쪽으로 줄 지어 서 있다. 게다가 인적이 끊어진 듯 조용하여 영화 세트장처럼 보였다. 입구에 들어갔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정도 되는 아이 셋이서 여름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겨울옷을 입고 나타나서 갑자기 “대한민국! 짜짜짜짠!”을 외쳤다. 처음 그들을 만났을 때 우리는 그들을 한 번 흘깃 쳐다보고 소금이 쌓여 있는 곳으로 갔다. 하얗게 무더기로 쌓여 있는 소금을 손가락으로 집어먹어 보니 찝찔하지 않고 깨끗한 맛에 염도가 높아 맛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소금을 생산할 뿐 팔지는 않는단다. 단지 이곳을 여행 오는 사람들의 주차비를 받는 것이 실질적으로 이익이 된다니 소금 생산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씁쓸하겠다.
입구로 나오는데 그들이 한 번 더 대한민국 세리모니를 해주었다. 그들의 얼굴은 당당하지도 않고 희망도 없어 보였고 뭔지 모르는 슬픔이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다. 다만 입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을 환영한다고 소리를 지르니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현실에 여행객이 슬펐다. 라오스까지 준비해간 볼펜, 사인펜을 깜박 잊고 가서 하는 수 없이 사탕이라도 한 줌씩 그들에게 주니 좋아하며 받았다. 버스에서 가이드가 아이들에게 돈을 주지 말자고 하였다. 얼마 되지 않는 1달러이지만 그들에게 준다면 그 아이들은 더 이상 노력하지 않고 1달러를 계속 구걸할지 모른다는 논리이다. 그 아이들이 그것을 깨우치기에 너무 힘든 현실이겠지만, 그도 그럴 듯하고 어길 수도 없어서 그의 말을 따랐다.
젓갈 마을에 가기 위해서 방비엥에서 버스를 타고 가며 라오스의 풍광을 느끼고자 창밖을 내다보며 간다. 가는 도중에 화려한 사원들이 지나간다. 커다란 사원이 나오기에 유명한 절인 줄 알고 물으니 마을마다 하나씩 있는 절이란다. 라오스에서 마을 구성 요소는 단연코 학교, 사원, 시장이란다. 학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후손들에게 문화를 전수하는 곳이며,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시장이 서고 불교에 의지하며 사는 불교국가에서 사원의 의미는 깊을 것이다.
사원이 아닌 곳인데 아주 멋진 저택이 있었다. 밀림만 계속되다가 어쩌다 천막집 정도가 나오는데 저런 현대식의 호화주택이라니 입이 떡 벌어진다. 이곳은 마을의 원로인 이장, 즉 야이반의 집이란다. 결혼식과 같은 큰일이 생기면 야이반의 도장을 받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야이반의 세력이 엄청나서 주민에 대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을 정도라고 하니 그들의 재력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라오스는 인구 720만 명에 68개의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오스인들 중에서 주로 메콩 강 유역에 사는 타이 계통의 룸족이 68퍼센트를 차지하며, 농경을 주로 하는 크메르 계통의 라오 몽족이 22퍼센트를 차지하고 그 밖의 소수민족이 있다. 룸족의 경우, 공산당 당원이나 공무원이 될 수 있지만 몽족이나 다른 소수 민족들은 그런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도 이미 태어나기 전에 금 수저나 흙 수저를 입에 물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셈이다. 젓갈 마을이나 시내 공익 광고물에 여러 번 만나게 되는 광고문이 있었다. “라오 인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라!(Proud to be lao!)”이었는데 아마도 이 글귀에서 라오족의 의미는 라오 몽족과 룸족을 구별하지 않고 두루뭉술 말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라오스 지폐마다 들어가 있는 카이손 홈 피안이란 위인이 있다. 우리나라 지폐에 나오는 인물로 세종대왕이나 신사임당을 들 수 있다. 그 위인도 우리나라의 인물들처럼 국민에게 존경 받는 위인임에 틀림없다. 통일 이전에 싸완나 캣 주에서 40년 동안 내전을 해왔는데 그가 스스로 작전을 짜고 베트남 공산당을 아군에 끌어들여 내전을 종식시켜 라오스 국가를 세웠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의 문무왕이다. 그는 신라에 당나라를 끌어들여 나. 당 연합군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다시 당나라를 내쫒아 676년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불완전하나마 통일로 이끌었다. 문무왕의 능은 우리나라 경주 해변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수중릉이 있으며 대왕암이라고도 불린단다. 자신의 몸을 수장하여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라 문무왕의 엄청난 애국 의지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하게 되지 않는가. 수학 여행길에 학생들과 함께 들러 역사 공부를 하며 그의 위업을 기렸던 기억이 난다.
가이드가 지폐를 꺼내 보이며 설명을 해주어 라오스에서 그 위인이 얼마나 숭앙 받는 대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사진이 들어있는 돈 중에서 돈의 가치가 가장 적은 2,000킵짜리 한 장을 나에게 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기꺼이 주어 고맙다며 지갑 속에 넣었다. 1달러가 8,000킵 정도이니 우리나라 돈 약 300원이다. 적은 돈이지만 기꺼이 자신의 돈을 내준 가이드에게 감사한다. 만약에 카이손 왕이 이 광경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면 흐뭇하게 여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젓갈 시장에 갔더니 우리나라 1970년대 시골에서 보았음 직한,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가게들이 죽 늘어서서, 구경만하고 존재감 없는 산들바람처럼 지나가는 손님들이라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해산물들이 건조 되어 상품으로 나왔는데 아무리 보아도 상품의 신선도를 믿을 수가 없어 그냥 어슬렁어슬렁 지나갔다. 그 중에는 가죽을 나무젓가락 크기로 잘라 파는 것도 있는데 물소 가죽이란다. 그 길게 자른 가죽에 털도 그대로 달려 있는데 어찌 보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문화충격일 것 같다. 그들이 영양가 있다고 먹는 식품재료를 다른 나라 사람인 여행객이 이렇게 폄하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시장에서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젊은 여성들이 모여 앉아서 도박을 하고 있다. 그들이 도박하며 지르는, 환희에 가득한 탄성을 듣고 다시 한 번 그들을 돌아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잘 살 수도 없는 환경이지만, 생활 습관이 이 정도라면 가까운 미래에 잘 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라오스가 평화로워 보이는 이유는 가난하지만, 길거리에 걸인 소년과 소녀들이 거의 없는 점이다. 소금마을에서 아이들 세 명을 만났을 뿐이다. 이 아이들 세 명을 제외하고 관광지에서 돈을 구걸하는 아이들을 본적이 없다. 최소한 부모들이 자식들을 길거리로 내보내 걸인을 만들어 1달러를 구걸하게 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인도와 캄보디아에서 무수한 걸인 소년과 소녀들이 대거 몰려와서 물건을 팔거나 관광객에게 일 달러만 달라고 외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에서 만난 청소년들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을 찾기 어려웠다. 암울한 미래에 대한 걱정만이 그들 얼굴에 가득하였다. 국가가 청소년 교육에 관심이 없고 그들 또한 그들의 인생의 한계, 삶의 한계를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들도 그저 밥 먹고 살다가 성인이 되면 결혼하여 자식 낳고 부모들이 하던, 그들의 일상을 되풀이 하며 살 것을 생각한다면 현재의 삶이 즐거울 리가 없을 듯하다.
소금마을에서 아이들에게 건네주지 못한 볼펜, 사인펜을 식당의 어린 아가씨들에게 나누어주니 받아들고 기뻐하였다. 나는 그 작은 미소에도 흐뭇하였다. 부디 가까운 미래에 라오스 청소년들이 가슴에 희망을 품고 얼굴에 미소 띠며 살 그 날을 기대해 본다.
라오스에서 지프라인을 타며 내 마음속을 엿보다 (5)
사람들이 지프라인 타는 것을 TV로 볼 때마다 즐거울 거라고 상상하는 한편, 마치 내가 타는 양 마음을 졸였다. 뉴질랜드에 갔을 때도 오클랜드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지프라인 시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누가 저렇게 간 떨어질 듯이 무서운 것을 탈까. 누가 내 가슴에 돈다발을 안겨준다고 해도 탈지 말지를 고민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방비엥의 휴양지 블루라군에서 지프라인을 타며 내 마음속에 있던 세 마디를 소리쳤다.
쏭강에서 버기카를 타고 블루라군의 지프라인 타는 곳으로 왔다. 온몸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여 축축한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 활동을 즐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축을 실을 것 같은 트럭이 이곳의 대중적인 교통수단이다. 사람들이 닭장 트럭에 타고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농담도 하고 바깥도 내다보며 라오스의 한낮을 즐긴다. 이 여행객만 탄 닭장 트럭에 라오스 청년들이 몇 몇 올라탔다. 비켜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트럭 끝에 매달려 가니 불안하고 안쓰러웠다. 내가 옆에 있는 여행객들에게 앞으로 좁혀달라고 하고 그들보고 앉으라고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앉았다.
한국인들은 라오스 말 중에서 인사말인 ‘싸바이디’와 감사하다는 ‘컵짜이’와 괜찮아요에 해당하는 ‘보뺀양’밖에 모를 터이다. 그런데 여행객들과 원주민 청년들은 의사소통을 기가 차게 잘하였다. 짓궂은 한국인 여행객은 묘하게 몸짓언어를 하며 나이 지긋해 보이는 라오스인의 나이를 알아내고 키드득키드득 웃어대며 생활 속의 농담을 이어가니 참으로 신기하였다.
아름다운 휴양지인 블루라군에 오니, 여기가 지상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니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 있고 풍요로운 나무의 열매가 탱글탱글하고 진분홍 히비스커스 꽃이 목을 길게 내빼고 자신의 요염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라오스 국화인 찬파 꽃이 아름답다. 게다가 너무 아름다워 사진을 찍으려고 갔더니, 세 그루가 모두 조화라서 크게 실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에 꽃나무들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말았다. 여자들에게 꽃이란 참으로 유혹적인 존재이다.
이 아름답고 작은 휴양지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을 드러내며 마음껏 즐긴다. 작은 풀에서 수영을 하고 그늘 진 평상에 누워 오수를 즐기는 사람도 있고 흔들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가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을 적극적으로 떨어뜨리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장난은 물놀이에서 언제나 순서가 정해져 있어서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얄궂은 이벤트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기 마련이다. 굴러 떨어지도록 장난을 치는 사람이나 당하는 사람이나 모두 즐거워한다. 나도 건너고 싶어서 건너가려고 조심조심 발을 떼는데 초등학생 꼬마가 적극적으로 흔들어대니 떨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상황이 긴박하니 나도 모르게 평소 직장에서 하던 선생 기질이 나왔다.
“꼬마야! 너 한 번만 더 흔들면 아줌마가 야단 칠거야. 하지 마!”
단호하게 한 마디 던지니 깜짝 놀랐는지 녀석이 멈추어서 다행히 그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마에게 다가가서 아줌마가 무서워서 그랬으니 이해하여 달라고 한마디 하니 그 녀석도 씨익 웃어주었다.
드디어 지프라인을 타는 곳에 왔다. 방비엥의 지프라인 여행사의 선전물이 간판에 여러 나라말로 쓰여 있었다. ‘블루라군에서 지프라인’이라고 영어와 라오스말로 쓰여 있으며 한국인을 위하여 ‘이중 트랙라인’이라고 한국어로 친절하게 써놓아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었다. 먼저 안전모를 쓰게 하고 상반신을 엑스 자로 묶어 하반신과 함께 고정시킨, 두터운 쇠고리를 지프라인의 쇠줄에 묶을 준비를 해주었다. 이곳에서 우리 모두는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모두 모여 기념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렇게 단체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마다 우리는 정말 하나가 되는 듯하여 서로 장난치며 협동을 하였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단체로 지프라인을 타러 가니 신기하게도 무서운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프라인은 정글에 있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 지프로프를 매달고 밧줄을 타게 하거나 흔들다리를 건너게 하거나 물 위를 가로질러 타게 하거나 높은 나무에서 수직으로 떨어지게 하는 등, 12코스를 다양하게 맛보게 해주었다. 신기하게 그런 체험이 무섭지 않고 즐거웠고 남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는 것이 또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이들은 구간이 아주 짧고 낮은 곳부터 연습하게 하여 지프라인에 대한 공포를 없애주고 도전정신을 싹트게 해주었다. 오, 이 정도라면 누워서 식은 죽 먹기! 나중에 하면 더 두려울까봐 처음에 하겠다고 앞장섰는데 맨 처음 긴 구간을 하게 되니 조금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코와이!”라고 일본어로 소리 질렀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순간에 왜, 도대체 한국말로 하지 않고 ‘두려워’라는 일본어가 튀어나왔을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흔들다리를 걸으며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제주도에서 온 사람들과 사진도 함께 찍으니, 서울에서 바쁘고 힘들었던 생각은 마술처럼 사라지고 오로지 여행지에서 나만을 생각하며 휴양 하였다. 정말로 신기한 체험이었다. 정글에서 엄청 큰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밧줄을 타고 가로질러 가야한다. 이 때 나는 두 번째로 “사랑합니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득 무의식 속에서 어머니와 가족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특수하고 긴장 되는 순간에 나는 나의 근원인 어머니를 생각하고 사랑을 외쳤다. 그래, 인생은 사랑이다.
라오스 청년들이 이 활동에 대해 철저히 준비하고 봉사하여 이국의 도전자들 마음을 놓이게 하였으며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서비스도 해주었다. 체험하는 사람들이 나무 끝에 있는 발판까지 닿지 못하고 줄에 매달려 있으면, 그야말로 원숭이처럼 방향을 거꾸로 타고 가서 그 사람을 함께 데리고 오는 힘든 서비스를 해주어 우리에게 감동을 주었다. 아래는 물이 있는데 쇠밧줄을 타고 나무와 나무 사이를 가야 한다. 12코스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나는 “고맙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나의 인생에 대한 긍정적인 감사, 라오스인들의 배려와 친절, 함께 간 여행객들과의 즐거운 만남, 이 모든 것을 내포한 감사의 인사였던 것 같다.
난생 처음 지프라인을 타며 내 마음속을 엿볼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이 짧은 인생에 무엇이 특별하겠는가. 두려워도 도전하고, 사랑하고 고마워하며 지프라인의 줄을 타듯이 긴 듯 짧은 인생을 즐기며 살 일이다.
왓시사케 사원과 어머니 사원에 가다 (6)
라오스가 불교국가라고 하여 떠나기 전부터 어떤 불교 유적지가 나를 반겨줄지 어떤 특별한 불교문화가 있을지 기대하였다. 라오스는 가난하지만 착하게 살며 불교에 귀의하여 행복하게 사는 나라인 것 같다. 그들의 삶은 넉넉지 못하지만 불교 사원에 가서 그들의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흐뭇하였다. 하늘이 맑고 햇볕이 쨍쨍한 여름날에 라오스의 명품 유적인 호파께우 사원, 왓시사켓 사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빠뚜사이 독립문, 탓루앙 사원을 돌아보았다.
호파케우 사원은 스님이 거주하지 않으며 현재 박물관이 되어 여행객을 맞이하였다. 왕의 개인 사원으로 쓰였으며 1964년에 복원할 때에 금색 페인트를 칠하였다. 태국과의 전쟁에 져서 에메랄드 불상을 태국에게 빼앗겼는데 태국의 치앙마이에서 발견되었지만 태국이 돌려주지 않고 있단다. 세상의 어느 곳에나 전쟁의 상처가 남아 있다. 싸움에서 이긴 자들의 약탈 행위로 인하여 주인을 잃은 예술품이나 문화재가 해외에서 갈 길을 잃고 주인을 마냥 기다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왓시사케 사원은 1818년에 건립된 비엔티엔에 있는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십 년 뒤에 태국의 시암 왕조가 침입하여 비엔티엔이 점령당했을 때에도 화마에 휩쓸리지 않은 유일한 사원이다. 사원의 본당 건물이 마치 경봉궁의 경회루와 비슷한 느낌을 자아낸다. 갈색 지붕에 라오스인들이 명물로 여기는 긴 갈치가 용마루와 날렵한 지붕 끝에 앉아서 신비로움을 자아내었다. 그야말로 바다에 사는 갈치를 육지의 사원의 용마루에 올렸으니 그 자체도 신비로웠다. 본당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지만 여행자의 욕심에 불상을 찍다가 안내원에게 걸렸다. 그는 나에게 심하게 대하지 않았고 웃으며 찍지 말라고 하여 그 안내원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마침 한 여인이 노란 서광 꽃과 비슷한 꽃을 한 아름 가져와서 불공드리기 위하여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께 바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내원에게 이것은 찍어도 괜찮으냐고 물으니 웃으며 허락해주어 한 장 찍어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꽃 사진을 라오스인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녀는 빛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따오흥왕’이라고 말해 주었다.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화단에 노란 꽃을 심으시기에 그 꽃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는 꽃 이름이 서광이며 중국의 황실에 심어 냄새를 제거하였다고 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우연히 서광 꽃을 만나면 아버지 생각이 나곤 하였다. 그런데 라오스에서는 그 꽃이 부처님께 바치는 꽃이라니 놀랍다. 그렇다면 서광 꽃은 놀랍도록 귀한 꽃이 아니겠는가. 꽃이든 사람이든 크고 작음을 떠나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듯하다.
이곳은 본당을 중심으로 하여 회랑이 있는데 그곳에 시멘트 불상이 백스무 개나 있었으며 회랑 뒤의 벽감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불상이 있어 놀라웠다. 우리나라 부처의 모습이 점잖고 인자한 모습이라면 라오스의 부처 모습은 라오스인들처럼 쌍 꺼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옆모습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을 보는 듯 특이하게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눈 부분이 훼손된 것은 보석을 박아놓은 것을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 벽감 속의 그 작은 불상들은, 외국으로 볼모로 잡혀갔던 라오스 왕자가 고국이 생각나고 그리울 때마다 불상 하나씩을 만들어 모았다고 하여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가슴이 아려왔다. 슬픔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천 개나 되는 불상을 만들었다니, 도대체 그 슬픔의 깊이가 어느 정도일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벽감에 있는 수많은 불상들을 보니, 서울 성북동에 여스님들만 수도하는 보문사가 생각난다. 이 절의 남 별당에 내 나이 또래의 금주 스님이 계신다. 고운 얼굴에 뵈러 갈 때마다 청아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신다. 십여 년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보문사에 갔다. 금주 스님은 보문사 교육관의 5층에 있는 법당에
일천 불을 모실 계획인데 어머님 앞으로 한 부처를 모시는 게 어떠냐고 의향을 물으셨다. 어머니께서 흔쾌히 좋다고 말씀하시며 시주를 하셨고 나도 기쁜 마음으로 희사하여 어머니 부처와 나의 부처를 모시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초파일에 보문사에 가서 기도도 하고 스님도 뵙고 오는데, 가서 일천 불의 부처를 볼 때 그리고 어머니께서 모신 부처와 내가 모신 부처를 한 번 확인할 때의 즐거움도 크다. 금주 스님이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시고 더불어 신도들도 행복한 삶을 영위하길 빌어 본다.
왓시사케 사원을 나올 때에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를 팔고 있기에 보니, 사원의 사진도 있지만 특히 눈에 띠는 흑백 사진이 있다. 원시적인 남자와 여자들이 일렬로 죽 서있는 사진이다. 남자들은 신체의 중요한 부분만 가리고 여자들은 목에 미얀마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하여 장식하였다던, 쇠고리를 목에 걸고 있다. 여성들은 목 고리를 하고 온몸을 천으로 발끝까지 가리고 있으며 남자들은 목에 고리를 한 사람들도 있고 안 한 사람도 있으며 허리 부분만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가리고 있거나 그 위에 망토를 걸치고 있다. 엽서를 사서 가이드에게 물어 보니, 라오 몽 족의 사진이라고 한다. 그들이 라오 룸 족보다 수적으로 열세이다 보니 많은 탄압을 받았고 라오스 조상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이 한 장의 사진이 모두 알려주는 듯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슬픔이 나에게 전해져서인지 그 사진 한 장의 무게가 많이 무거워 씁쓸하였다.
갑자기 눈앞에 황금색 거대한 성전 같은 건물이 나타났다. 라오스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파탈루앙 사리탑이다. 파탈루앙은 높이가 45미터이다. 부처가 35년은 인간의 삶을 살았고 45년은 부처로서의 삶을 살아서 그것을 기리기 위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하여, 라오스에서는 건물을 지을 때에도 부처의 높이인 45미터를 넘을 수 없다고 한다. 파탈루앙 사리탑 앞에 무릎에 올려놓은 긴 칼을 잡고 근엄하게 앉아 있는 사람의 황금 동상이 있다. 셋탓티랏 왕의 동상으로 파탈루앙을 세운 왕이라고 하는데 지금은 탓루앙 타이 사원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어 여행객을 맞이하여 준다.
탓루앙 타이 사원은 어머니 사원이라고 불린다. 이 사원에 오니, 놀랍게도 불상공원에서 보았던 그 관능적인 시멘트 와불 상과 비슷한 황금색 부처가 누워서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와불 상과 다르게 얼굴이 정숙하고 단정한 느낌을 준다. 정숙하다, 단정하다는 느낌은 오로지 얼굴의 표정에서 느끼는 것이다.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만든 침대와 화려하게 장식한 부처의 베개는 예술품으로 승화하였다기보다 부처상이라서 온갖 치장과 정성을 들였음을 느꼈다.
부처상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열 개의 발가락이 똑같은 크기로 붙어 있는 점이다. 게다가 각각의 발바닥에 불화에서 볼 수 있는 수레바퀴 그림을 그려 넣어 부처임을 한 번 더 확실히 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와불 상을 보지 못하였고 거의 어느 곳에서나 앉아서 득도의 경지에 있거나 서있는 부처를 많이 만났다. 하여, 이곳에서 두 번째 와불 상을 만나니 감회가 더 새로웠다. 물론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엄청난 규모로 누워있는 부처상을 보고 감동 받았다. 당시 숨이 탁 멎고 눈이 크게 떠졌던 기억이 난다.
누워 있는 부처의 모습이야말로 도를 닦고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부처의 모습일지 모른다. 다른 종교와 다르게 불교는 신도들이 부처를 믿는다고 하나 그 스스로 득도하면 부처가 되므로,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그 자세가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불교예술 작품으로서 황금색으로 칠해져 있으니 그 와불 상에서 풍기는 빛나는 밝은 에너지와 풍요로움에 가슴이 시원해졌다.
가이드는 여행객들에게 단체 사진을 찍자고 하더니 일렬로 서서 두 손을 들어라, 얼굴에 두 손을 받쳐 자는 시늉을 해봐라, 등등 많은 주문을 걸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것으로 내 마음의 배를 채우기에는 사진에 대한 욕심으로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하여, 혼자 그 불상을 전체로 혹은 여러 각도에서 이미지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내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하여 와불 앞에서 비슷하게 눕지는 못하였지만 서서 자는 모양, 나의 독창적인 사진 찍는 모습 즉, 두 팔을 양 옆으로 활짝 펼치고 앞을 멀리 응시하는 포즈도 취해보았다. 역시 여행에서 남는 것은 아름다운 절경이나 예술품을 만났을 때의 감흥일 터인데 그 감흥을 바깥으로 표출하여 영원히 남기는 사진 또한 귀한 것이다.
우리가 죽기 전에 한 번 꼭 가봐야 할 곳으로 라오스를 꼽는다는데 라오스의 남부만 보아서인지 무어라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정신세계, 가난하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을 끝까지 지키려 노력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모습에서, 왓시사케 사원에 쳐들어온 침입자들마저 그 사원을 파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열대의 나무들도 라오스 사원을 더 풍요롭고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다음에 북부 라오스의 르왕프라방에 가서 왜 라오스가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장소인지 탐구해 보아야겠다.
자료 사진
5482-비엔티엔의 불상공원의 와불 상(글1)
5495-선상에서 포즈를 취한 필자(글4)
5511-젓갈시장 앞에 선 필자(글4)
5561-어머니 사원의 와불 상 앞에 선 필자(글6)
5557-부처님께 바치는 꽃, 따오흥왕(글6)
5553-탓루앙 타이사원을 만든 셋탓티랏 왕과 파탈루앙 사리탑(글6)
<윤연모(尹淵謨) 프로필>
한국외국어대 일본어과, 동대학원 일본어교육학과와 영어교육학과 졸업,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번역가협회,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
현대시인협회 회원, 한국가곡작사가협회 이사, 서라벌고교 교사(현)
시집: 「세상을 여는 출구」(2001), 「하얀 사랑꽃」(2004), 「물고기춤」(2009),「어머니 그리고 터키의 별」(2015) 「베고니아의 승천」(2019).
수필집: 「아버지와 피아노 교본」(2003), 「내 노래는 아무도 모를 거예요」(2006), 「갠지스 강의 여명」(2012), 「원숭이 빵나무와 돈 씨 부부」(2017),
번역서 「리고베르타 멘츄」(1993), 윤연모 시가곡 제1집 「구름 향기」(2009),
서울시교육감상, 황희문화예술상, 황금마패문화상, 시 예술상, 등 수상
|
첫댓글 안녕하세요?
윤연모입니다.
처음에 글을 올렸을 때 사진의 용량이 너무 커서 글이 잘려서 부득이 사진을 제거하였습니다.
미안합니다.
모든 님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