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갑신정변 발발
1884년 12월 4일 김옥균(사진)을 위시한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등에 업고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親淸) 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나라는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했다. 이에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의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정권을 잡은 뒤 개화파가 발표한 개혁 조치안에는 대(對)청 종속관계 청산, 국왕의 전제권 축소와 입헌군주제, 문벌․신분제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권 실현, 지조법(地租法) 개혁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거사는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은 비록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한계를 지녔지만,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민족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브리태니커
[1921년] 루쉰(魯迅), <아Q정전> 연재 시작
← 루쉰 1921년 12월 4일 중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 <아Q정전 阿Q正傳>이 베이징의 신문〈천바오 晨報〉부록판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작가 루쉰은 이 소설에서 '아Q'라는 날품팔이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봉건적인 중국사회가 만들어낸 민족적 비극을 풍자하여 전형화(典型化)했다. 이 작품은 신해혁명을 비판하며 혁명에 의해 진정으로 구원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루쉰은 원래 일본에 유학하여 의학을 전공했으나 중국 민중의 정신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더 유효하다고 믿고 귀국했다고 한다. 그는 그때까지 정식 문장에 사용되던 문어(文語)를 배격하고 그의 작품에 구어(口語)를 사용했으며, 날카로운 풍자를 통해 전근대적인 중국 사회의 모순을 파헤쳤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중국인들은 루쉰 기념관을 세워 그에게 바쳤다./브리태니커
[1982년] 영화 ‘ET’ 개봉
← 영화 ‘ET’의 한 장면. 엘리엇 역의 헨리 토마스(왼쪽)와 ET 미국 영화계의 귀재로 일컫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 ‘ET’가 1982년 12월 4일 미 전역에서 개봉됐다. ‘The Extra Terrestrial’의 약칭인 ET는 외계인이란 뜻이다. 한 외계인과 지구어린이와의 흐뭇한 우정을 그린 ET는 개봉 1개월 만에 흥행수입 1억 달러를 넘어섰고, 3개월 만에 2억9천만 달러를 벌어들여 ‘스타워즈’의 기록을 깨고 흥행사상 최고의 인기를 모았다. 하지만 모든 영화인들의 꿈 아카데미상(1983년)은 마하트마 간디의 생애를 그린 영국영화 ‘간디’가 휩쓸어 ET는 4개 부문만 수상하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ET는 난쟁이(1m 10cm)에 부엉이 눈을 한 괴상한 몰골의 외계인이 UFO를 타고 지구에 와 낙오됐으나 한 소년의 도움으로 다시 자기의 별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로, 둘 사이에 싹튼 뜨거운 우정이 현대문명에 찌든 관중들에게 감동의 심금을 울렸다는 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서도 1984년 5월에 개봉돼 ET붐을 일으켰다. 1994년에 미국의 대중연예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ET는 미국인 2억9천6백만여 명이 극장이나 홈비디오를 통해 본 것으로 나타나 할리우드 영화사상 미국 관객이 가장 많이 본 영화로 기록됐다. 2위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3위는 ‘101마리의 달마시안’(1961년)이 차지했다./조선
[1875년] 독일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출생
← 에밀 올릭이 1917년에 그린 릴케 1875년 12월 4일 태어남 / 1926년 12월 29일 죽음
"지금 세상 어느 곳에서 누군가 죽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릴케는 오스트리아 태생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고자 한 상징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시도시집 Das Stundenbuch>(1905)에서 <말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1923)에 이르는 그의 작품세계는 신과 인간, 자연, 시인의 소명에 관한 내적 성찰로 가득하다. 오스트리아 태생이지만, 독일․러시아․프랑스․스위스로 거처를 옮겨다녔으며, 여행도 많이 했다. 철학자 니체의 청혼을 거절한 바 있는 14살 연상의 안드레아스 잘로메와의 만남은 릴케의 삶에 일대 전환을 가져왔는데 죽는 날까지 서로 절친한 벗으로 지냈으며, 조각가 로댕과 시인 보들레르에게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32년] 노태우/盧泰愚 출생 1932. 12. 4 경북 달성~. 군인․정치가, 제13대 대통령
노병수와 김태향의 맏아들로 태어나 6세에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경북 달성군 공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8년 경북중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학도병으로 헌병학교에 자진 입대하기도 했다.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1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육사 생도시절에는 스포츠에 뛰어나 육상부와 럭비부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1955년 전두환․정호용․김복동 등과 함께 육사 11기생으로 육군 소위에 임관되었다. 1956년 전방 사단의 보병 소대장을 거쳐 광주 보병학교 구대장으로 복무중이던 1959년 육사 동기생 김복동의 누이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했다. 결혼 직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특수전학교로 유학하여 6개월간 심리전 과정을 거쳤다. 1968년 수도사단 맹호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1979년 수도경비사령관 때 10․26 사태로 유신정권이 붕괴한 뒤의 권력공백기에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全斗煥) 소장이 주도한 군 사조직(私組織)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에 동참, 12․12군사반란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 1980년 국군보안사령관이 되었다. 1981년 육군대장으로 퇴역, 전두환정권 정무제2장관․체육부장관․내무부장관․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역임. 1986년 봄 민정당대표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의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었다. 1988년 9월 공산권을 포함하는 160개국 참가한 서울올림픽 개최, 1990년 9월 한․소 국교수립, 1992년 8월 중․한 국교수립을 실현하였다. 1995년 11월 거액수뢰와 부정축재로 구속되고 1996년 6월 서울지방법원에서 광주사건의 반란․내란죄 등으로 22년 6개월의 실형판결을 받았으며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1892년] 스페인의 장군․정치가 프랑코/Francisco Franco 출생
본명은 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odulo Franco Bahamonde. 별칭은 El Caudillo ('지도자'라는 뜻). 1892. 12. 4 스페인 엘페롤~1975. 11. 20 마드리드. 국민군의 지도자로 스페인 내전(1936~39)에서 스페인 민주공화국을 전복한 후 죽을 때까지 스페인 정부의 총통을 지냈다. 프랑코는 스페인 북서부지방의 해변도시이며 해군기지인 갈리시아의 엘페롤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해군 행정부대 소속의 장교였던 아버지의 성격이 괴팍하고 낭비가 심하며 방탕하여 어린시절의 가정생활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같은 또래의 다른 소년들보다 절제되고 진지했던 프랑코는 경건하고 보수적인 중상류층의 가톨릭교도였던 어머니와 가깝게 지냈다. 가문의 전통을 이어 프랑코도 처음에는 당연히 해군장교로 입신하려 했으나 해군사관학교의 입학 정원이 감축됨으로써 부득이 육군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14세의 나이로 그는 톨레도의 보병사관학교에 들어가 3년 후 졸업하여 1910년 임관되었다. 1920~26년 모로코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1927년 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1935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36년 인민전선정부가 수립되자 반정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으며, 반란군의 총사령관 겸 정부주석에 올랐다. 1939년 독일․이탈리아 파시즘 진영의 지지를 얻어 내란에 승리한 그는 팔랑헤당의 당수 및 국가주석(총통)이 되어 파시즘국가를 수립하였다. 전후 1946년 국제연합(UN)이 프랑코정부를 파시즘독재로 규정, 유엔 가입을 거부하여 국제적으로 고립되었으나 동서냉전에 편승하여 1955년 유엔에 가입하였다. 1947년 <국가원수계승법>을 발표, 공식적으로 왕국을 선언하였는데, 왕국이지만 왕은 없고 자신은 종신원수에 취임, 후계자도 지명할 수 있는 불합리한 정치체제를 수립하였다. 1969년 부르봉가의 후안 카를로스왕자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1960년대 후반 경제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 파시즘체제를 조금씩 완화시켰으나 불합리한 정치체제는 계속 유지하였다. 1973년 사임했지만 지위는 계속 보유했다.
[1997년] 초대 통일원장관 이용희 박사 별세
← 이용희 초대 통일원장관 초대 통일원 장관을 지낸 동주 이용희(81) 박사가 1997년 12월 4일 별세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이씨는 1975년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로 관계에 나올 때까지 서울대 교수로서 한국 국제정치학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대우재단-세종연구소 이사장, 아주대 총장 등을 지냈다. 동주는 학문(국제정치학)과 예술(한국 고미술) 양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드문 인물로 꼽힌다. 국제정치학 쪽에서는 `태두`로 불릴 만큼 연구와 제자 양성 면에서 업적을 쌓았고, 고미술은 특히 회화사 분야에서 손꼽히는 `감식안`이었다. 동주가 국제정치학자로서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민족주의론이었다. 우리나라 국제정치학의 탄생을 알린 것으로 평가되는 저서 `일반국제정치학(상)`(1962년)에서 그는 "국제정치는 강대국의 시각이 아니라 내 땅, 내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제창, `한국 민족주의` (1977년) `한국과 세계정치` (1987년)에 이르기까지 주체적 학문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위창 오세창에게 그림보는 눈을 배운 이래 당대의 감식안이자, 수장가로서 평생 한국미의 탐색에도 정열을 기울였다./조선
[1795년] 칼라일/Thomas Carlyle 출생 1795. 12. 4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셔 에클페칸~1881. 2. 5 런던.
영국 평론가․역사학자. 스코틀랜드 출생.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하였고 어려서부터 풍부한 재능을 보여 1809년 15세로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으나 수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대학 졸업 후 잠시 학교의 교사를 지내면서 차츰 문학에 뜻을 두어 《런던 매거진》에 연재한 《실러전(1825)》을 출판해 독일 낭만주의 소개자로서 자리를 굳혔다. 1826년 결혼, 외딴 농장에 살면서 사색에 몰두하였다. 1832년부터 《의상철학(衣裳哲學)》을 잡지에 연재,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형식․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경험론과 공리주의 철학에 도전하였다. 그 뒤 역사에 관심을 가져 34년 런던으로 가서 《프랑스혁명(1837)》을 완성, 혁명을 지지하는 한편 영웅적 지도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841년 《영웅과 영웅숭배》에서는 영웅은 우주의 질서를 깨달아 성실로서 대응한 용기 있는 자라고 논하고 역사에서 개인의 역량을 강조하였다. 39년의 《차티즘》과 1843년의 《과거와 현재》에서는 노동자 계급의 생활을 동정하면서도 올바른 영웅의 지배와 중세와 같은 질서있는 경제생활만이 유일한 구제수단으로 보고 보통선거와 자유방임경제를 비판하였다. 그 뒤 《크롬웰의 서간과 강연집(1845)》 편집과 《프리드리히 대왕전(1858~65)》 등을 저술하였으며 1865년 에든버러대학 명예총장에 취임하였다. 물질주의와 공리주의에 반대, 영혼과 의지의 힘을 존중한 그의 세계관은 반민주주의적 견해로 그 시대의 주요 흐름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99년] 독립신문 4년 만에 폐간/1899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며 한국역사상 최초로 인쇄된 한글 전용신문이었던 ‘독립신문’이 창간 4년만인 1899년 12월 4일 폐간됐다. 독립신문은 한글전용으로 민중을 위해 알기 쉬운 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한국 신문사상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해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독립신문은 정부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1896년 4월 7일 창간, 처음에는 가로 22cm, 세로 33cm의 국배판 정도 크기로 4면이 발행됐다. 1면 머리에는 ‘논설’을 싣고, 이어서 ‘관보’, ‘외국통신’, ‘잡보’의 순으로 1면에서 2면으로 넘어가면서 기사를 배치한 뒤에 3면에는 광고를 실었다. 광고는 영문과 한글 2종류였다. 4면은 영문판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로 편집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여 두개의 신문으로 발행했다. 독립신문은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시대상을 담아내고 민중계몽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민간신문이었으나 정부의 탄압과 수구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고 핵심인물이 바뀌는 등 혼란을 겪었다. 결국 이날 정부가 서재필에게 4천원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매수했고 이날부터 독립신문은 더 이상 발행되지 않았다. 언론계는 1957년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의 탄생을 기념하고 신문의 중요성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 있다.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 폐막 1517년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유럽전역으로 번져가자 로마 가톨릭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트리엔트공의회가 소집됐다. 공의회(公議會)는 교회의 교의(敎義)나 규칙 등 중요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하는 가톨릭 최고회의로, 트리엔트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이름이다. 1545년 12월 13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제안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가 동의해 소집된 트리엔트공의회가 1563년 12월 4일 폐막됐다. 18년동안 논의가 두 차례나 중단되고 교황이 세 사람이나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쇠퇴해가던 교세는 회복할 수 있었다. 절대적인 교황권을 재확인하고, 루터의 교리를 오류로 판정함으로써 분열됐던 전열을 가다듬었다. 신․구약성서를 정경(正經)으로 확정하고 라틴어 성서 ‘불가타(Vulgata)’가 교리를 증명하는 데 유효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논란도 잠재웠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이었다. 공의회 결과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많은 악습은 사라지게 됐지만, 신․구교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돼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절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상실감에 빠졌고 신앙심의 굴절을 겪었다. 종교개혁이 몰고온 시대의 대세였다.
[1777년] 레카미에/(Jeanne-Francoise) Julie(-Adelaide), dame de Recamier 출생
← “Portrait de Mme Récamier,” oil painting by Jacques-Louis David, 1800; in the Louvre, Paris 결혼 전 성은 Bernard. 별칭은 Madame de Recamier. 1777. 12. 4 프랑스 리옹~1849. 5. 11 파리. 대단히 매력있고 재치있던 프랑스의 살롱 여주인. 리옹 출생. 결혼 전의 성은 Bernard. 전 로망파 문인들과의 교우관계로 알려진 여성이다. 은행가의 딸로 태어나, 16세 때 42세의 은행가 레카미에와 결혼하였다. 뛰어난 미모와 풍부한 감수성, 남다른 재치를 지녀 나폴레옹 시대에서 왕정복고시대에 걸쳐 많은 작가들의 흠모를 받았다. B.콩스탕과 연애한 뒤, 1819년 이후 세브르 근처 아바예오부아에 은거, 그 곳에 문학 살롱을 열고 F.샤토브리앙과 깊은 우정을 맺었다. 유고를 정리한 《회상과 서한 Les Souvenirs et correspondances》(1859)을 조카딸이 간행하였다.
[1999년] ‘유럽최고 신랑감’ 필립 벨기에 왕세자 결혼 필립 왕세자(41)보다 13살이 어린 마틸드 두데켐 다코즈 왕세자비는 벨기에 태생의 첫 왕비가 될 예정이다. 최근까지 6명의 왕비들은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스웨덴, 스페인, 이탈리아등 모두 외국태생이었다. 필립 왕세자와 마틸드 왕세자비는 지난 1999년 12월 결혼했다. 부왕 알베르 2세와 파올라 왕비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필립왕세자는 현재 건강이 좋지않은 부왕을 승계할 예정이다. 알베르 2세는 형 보두엥 1세가 자식을 남기지 않은채 돌연 사망하자 지난 1993년 8월 즉위했다. (연합뉴스) /Google
[1999년] 요르단 후세인국왕 방한
압둘라 2세(Abdullah Bin Hussein, 1962~ ) 1962년 1월 30일생. 고 후세인 국왕의 2번째 아내인 모나 왕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임. 80년 영국의 샌드하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88년에는 미국의 조지타운 대학원을 수료. 94년 왕실경호특별부대 사령관과 97년 특별부대 사령관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에 소장으로 진급. 99년 1월 26일 수십년간 황태자 자리에 있었던 전 국왕의 동생이었던 핫산을 밀어내고 황태자에 취임했으며, 다음 달인 2월 7일 후세인 국왕의 서거로 인해 차기 국왕에 즉위. /Google
[1996년] 미국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 발사 미국의 화성탐사선 패스파인더호가 1996년 12월 4일 새벽 플로리다주의 케이프 커내버럴 우주기지를 떠나 화성으로 발사됐다. 3백60kg의 패스파인더는 발사된지 7개월 만에 1억9천1백만km 거리의 화성에 도착, 광할한 아레스 밸리스 평원에 연착륙했다. 패스파인더는 무인우주선으로는 사상 처음 직경 1m 가량의 풍선 24개에 의존해 착륙했다. 패스파인더의 작업에는 첨단기술이 동원됐다. 탐사선은 모선 '프로브'와 탐사로봇 '소저너'로 나뉘어 있다. 프로브는 착륙지점에 정착해 소저너를 풀어준 뒤 대기를 분석, 자료들을 지구에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흑인노예 폐지론자 소저너 트루소의 이름을 딴 소저너는 초속 1cm 정도의 거북이 걸음으로 축구장만한 크기의 지역을 돌아다니며 지질 탐사활동을 벌였다. /조선
[1979년]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김재규 등 박정희 시해 관련자 공판 개시 1979년 10월 유신체제 말기 정치세력간의 갈등이 날카롭게 빚어짐에 따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냈던 김재규가 직속부하인 박선호, 박홍주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사건(10.26사태)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1979년 12월 4일 첫 공개재판을 받았다. 이후 12월 18일 결심공판이 오전10시 육군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재판장 김영선 중장, 법무사 황종태 대령 심리로 열렸다. 재판 결과, 육군군법회의에서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김재규, 김계원, 박홍주, 박선호에게 사형이 선고됐으며, 김계원을 제외한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조선
[1956년] '체신의 날' 제정 1884년(고종 21) 우정총국(郵政總局)을 창설한 날을 기념하여 1956년 설정되었다. 정보통신부 주관으로 각종 기념행사를 하며 공휴일은 아니다. 1973년 대통령령으로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공포·시행하여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하였다. 1994년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확대·개편되면서 정보통신의 날로 바꾸어 해마다 4월 22일 정보통신부가 주관해 행사를 개최한다. /naver
<체신의 날, 집배원의 날, 정보통신의 날> 1956. 6. 4 - 우정총국 개설 축하연을 베푼 날(1884. 12. 4)을 '체신의 날'로 지정(체신부훈령) 1967.11.27 - 5월 31일을 '집배원의 날'로 지정(체신부훈령) (1964. 5.31 - 충남 금산군내 기자단이 집배원의 노고를 위로 격려하고, 1966. 5.30부터는 모범 집배원을 포상하고 노고를 치하하는 행사 를 가짐) 1972. 7. 7 - 고종황제께서 우정총국 개설을 명령한 날 (1884. 4. 22)을 '체신의 날'로 개정(체신부훈령) 1973. 1.24 - 집배원의 날을 '체신의 날'에 통합(체신부훈령) 1973. 3.30 - 「각종기념일에관한규정」에 규정 1996. 5.30 - 명칭 변경(체신의 날 → 정보통신의 날)
[1890년] 독일의 세균학자 베링(Behring, Emil Adolf von), 혈청요법 발명
← 베링 혈청요법(血淸療法 serotherapy) : 항독소 등 면역혈청을 주사하여 감염증을 치료하는 방법. 백신요법으로 대표되는 능동적 면역요법에 대하여, 혈청요법은 대표적인 수동적 면역요법이다. 1890년에 독일의 세균학자 E. 베링과 일본의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柴三郞(북리시삼랑)]가 디프테리아 독소나 파상풍 독소로 면역된 동물의 혈청이 독소를 중화(中和)시킨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혈청요법은 화학요법과 마찬가지로 원인요법의 하나이며, 여기에 쓰이는 혈청을 면역(치료)혈청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병원체가 생성하는 독소에 대한 항체(抗體)를 다량 함유하는 항독소혈청(抗毒素血淸)과, 균체에 대한 항체를 함유하는 항균혈청(抗菌血淸)이 있는데, 주로 말의 혈청이 이용된다. 따라서, 이종혈청(異種血淸)에 의한 부작용으로 알레르기성 반응이나 혈청병이 나타날 수 있다. 항독소요법은 항생물질 등 화학요법이 진보한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즉 균체 밖으로 분비되는 세균성 독소에 의한 질환(파상풍·보툴리누스중독·디프테리아 등) 및 독사교상 등의 경우, 증상이 나타난 뒤에는 화학요법제만으로는 효과가 없으므로 되도록 조기에 항독소혈청을 사용한다. /Google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 폐막 1517년 마틴 루터가 가톨릭의 부패상을 고발하는 9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촉발된 종교개혁이 들불처럼 유럽전역으로 번져가자 로마 가톨릭이 대책마련에 부심했다. 해법을 찾기 위해 트리엔트공의회가 소집됐다. 공의회(公議會)는 교회의 교의(敎義)나 규칙 등 중요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교황이 소집하는 가톨릭 최고회의로, 트리엔트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이름이다. 1545년 12월 13일 교황 바오로 3세가 제안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5세가 동의해 소집된 트리엔트공의회가 1563년 12월 4일 폐막됐다. 18년동안 논의가 두 차례나 중단되고 교황이 세 사람이나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다행히도 쇠퇴해가던 교세는 회복할 수 있었다. 절대적인 교황권을 재확인하고, 루터의 교리를 오류로 판정함으로써 분열됐던 전열을 가다듬었다. 신·구약성서를 정경(正經)으로 확정하고 라틴어 성서 ‘불가타(Vulgata)'가 교리를 증명하는 데 유효하다고 선언함으로써 성서에 대한 논란도 잠재웠다. 그러나 절반의 성공이었다. 공의회 결과 종교개혁의 원인이 된 많은 악습은 사라지게 됐지만, 신·구교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돼 서방 기독교 세계의 절반이 로마 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결과를 낳았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상실감에 빠졌고 신앙심의 굴절을 겪었다. 종교개혁이 몰고온 시대의 대세였다. /조선
그밖에 2003년 국회,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며 재의(再議)를 요구한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법안 재의결 2002년 국내 2위 광고회사 LG애드 외국회사에 매각 1999년 남대문시장내 대도마켓 건물 화재로 인근 5개건물과 내부 1천평 전소, 23억원 피해 1998년 나이키 허큘리스 지대공 미사일, 인천상공서 오발 사고 1996년 한국-칠레, 통신협력협정 체결 1984년 쿠웨이트기 공중피납, 테헤란공항 착륙 1983년 베네수엘라 총선 야당 승리, 루신치 대통령 당선 1982년 제9회 아시안게임 폐막, 한국 금 28개로 3위 1981년 소련, 극동전역(戰域) 핵제한협정에 중국 참여 촉구 1980년 일본내 반(反)한단체. 김대중 재판항의 빙자로 주(駐)요코하마 한국총영사관 난입 1977년 당대 최고 남자 고전 무용수 에글레프스키 사망 1974년 네덜란드 전세기 DC-8기 스리랑카 콜롬보 부근서 추락, 191명 사망 1973년 남북조절위 제1차 부위원장회의 개최 1970년 남산 제2호터널 개통 1969년 제주도서 당나라 때 엽전 2만개 발굴 1966년 조나단 레소토국 수상 내한, 국교수립에 합의 1964년 본에서 한-독 경제협정 체결 1961년 근로기준법 개정(해고의 예고, 퇴직금제 신설) 1959년 대법원, 박태선 장로 원심 1년 파기하고, 징역 1년6개월 언도 1958년 일본-소련 무역의정서 조인 1958년 영국 로이드 외상, 유럽에 군비관리지대 설치를 제안 1954년 유엔총회, 원자력 평화이용결의안 채택 1950년 유엔군 평양 철수 1947년 불가리아, 터키로부터 독립 1945년 초파리 실험으로 염색체 유전설을 확립한 미국의 유전학자 모건 사망 1922년 프랑스 배우 제라르 필리프 출생 1922년 일진회장 이용구, 한일합방 상주문-청원서 제출 1922년 조선사 편찬위원회 설치 1920년 독일 스파르쿠스단 독일통일사회당 결성 1916년 영국 로이드 조지 전시내각 성립 1908년 만국해군회의 런던에서 개최 1904년 일진회, 진보회와 통합 1897년 그리스-터키 콘스탄티노플 평화조약 체결 1871년 독일 금본위제 채택 1792년 루이16세 재판 개정 1679년 영국의 철학자, 정치 이론가 토마스 홉스 사망 1649년 스코틀랜드 시인 윌리엄 드러먼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