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유은성 목사님
[눅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하고 바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꼭 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이죠. 우리는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유지해야 되는 것이죠.
2014년도에 제가 사는 워싱턴 주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기도하는 도중에 그때 하나님께서 한 그림을 보여주셨어요. 구름이 한 단어를 만들더라고요. 영어 단어였는데 아베디였습니다. 한국 번역으로는 이 아베디가 냉담이라고 번역됐는데요. 관심이 없는 감정 자체가 없는 상태라는 말이고요. 이게 무감각하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냉랭하고, 교회가 감각이 없는 곳으로 점점 돼 가니까 왜 학생들이 왜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까? 교회 힐링이 없어요. 교회 감각이 없어요. 그리고 교회가 케어 안해요.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무감각이란 영을 주의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근데 영어로는 그 부분을 [웅크리고 있다]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이 바로 우리 문 앞에 와서 웅크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점점 식어지면 우리의 마음이 무감각해지면 그럼 마귀는 이기는 거죠. 우리의 다음 세대가 마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구름을 들어 올려달라고 주님께 간구했어요. 그렇게 기도하는 도중에 우리 주님께서 누가복음 오늘 본문 말씀 12장 49절을 주신 거예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그래서 그때 이 말씀을 받고 딱 깨달은 게 아, 무감각을 없애는 방법은 이 불밖에 없는구나, 예수님이 던지시는 이 불을 받아야 하는 것이구나 그걸 깨달았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이 세 가지의 불 먼저 아는 거예요.
이 세 가지 중에 첫째 불은 소멸하는 불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9절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이렇게 소멸하는 불이 있는데 이 소멸하는 불 아래 하나님은 두 종류의 것들을 소멸하십니다.
첫째 종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원수들을 소멸하십니다. 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 도다[시 97:3]
또 우리 하나님은 악인들을 소멸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께로부터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비같이 내리사[창 19:24] 우리 하나님께서는 또 불순종하는 자들을 소멸하십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양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또 마지막 심판에는 믿지 않는 자들을 영원한 불에 던지실 것이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
첫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소멸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소멸하시는 둘째 종류의 불은 이제 좋은 거예요. 나쁜 것들을 소멸하시는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에요.
그럼 이 소멸하는 불이 우리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고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절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절대로 악인 불순종하는 자 믿지 않는 자가 되면 안 된다는 말이겠죠. 우리는 절대로 이 무서운 심판의 불을 받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죠.
구약 시대의 제사법은 완전치 못했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옮기면 우리의 귀한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보시고 예수님의 귀한 피를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증거로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만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자들은 성령의 소멸하는 불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거는 죽이는 불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받아주시는 그런 소멸하는 불이에요. 이 성령의 소멸하는 분은 우리의 악한 것들을 다 용서의 불로 태워주시고요, 우리의 약한 것들에게 능력의 불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첫째 불, 소멸하는 불을 봤습니다.
둘째 불은 “연단하는 불”입니다. 말라기의 3장 2절을 보면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우리 주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이 연단하는 또는 성결케 하는 불을 보내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에 보면 이렇게 써 있어요.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용광로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이 연단의 불이 우리에게 어떻게 옵니까? 그건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올 것이라고 하시죠.
마지막 불은 예레미야 20장 9절에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 이 견딜 수 없는 불이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전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사람들로부터 계속 핍박이 오기 때문에 핍박이 와서 입을 닫고 안 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또 안에 골수에 있는 그 불이 너무나 뜨거워서 안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예레미야는 열정과 사명의 불을 너무나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골수에 갇혀 있는 불이 인간들이 아무리 박해를 하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고는 우리가 견딜 수 없게 하는 이 뜨거운 사명의 불이 구약 성경에만 이렇게 써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신약의 대표 인물 사도 바울에게도 이 불이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나오는데요.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사도 바울이 말하시는 거예요. 이 불타는 에너지가 바울의 가슴에 늘 폭발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바울은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주님의 일을 열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 불은 우리 예수님 안에 이 불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성전을 더럽게 한 자들의 상과 의자를 다 엎어버리셨죠. 또 이 불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불입니다. 이 사랑의 불이 예수님 안에 타고 있었기 때문에 악한 자들이 우리 주님의 손과 발을 못으로 박아도 불이 막 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힘드셔도 우리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이 불은 사람의 목숨보다 더 강한 불입니다. 이 불은 왜냐면 죽은 사람도 다시 부활하게 할 수 있는 불이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성령의 불을 던지시러 하늘로 가신 것이죠. 이 불을 받아야 우리도 예레미야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뼛속에 갇혀 있는 불의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렘 23:29] 방망이 너무 강하단 말이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불같고 하나님은 말씀은 강하다. 우리 주님은 이 성령의 불을 사명의 불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던져주셔서 뜨거운 불이 뼛속 깊이 불타오르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주님께서 던지실 수 있는 불덩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불을 주시고 우리 자체가 불이 되는 거예요. 불이 돼서 주님께서 쓰실 수 있는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소멸하는 성령의 불을 받기 원합니다. 저의 안에 있는 무감각과 미지근함, 무관심을 뱉어내는 자 되기 원합니다. 주님의 연단하는 불을 받기 원합니다. 뼈속에서부터 타오르는 사명의 불을 받아 주님께서 이 세상 어느 곳에 던지실 수 있는 불덩어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 요셉의 추수감사
창세기 41장 48절 49절
요셉이 애굽땅에 있는 그 7년 곡물을 거두어 각 성에 저장하되 각 성읍 주위에 밭에 곡물을 그 성읍 중에 쌓아두며 쌓아둔 곡식이 바다의 모래 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아멘!
요셉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열일곱 살 때까지는 아버지 사랑의 품 안에서 남 부러운 것 없이 너무너무 잘 살았는데 어쩌다가 이 못된 형놈들 때문에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서 종살이하면서도 또 얼마나 고생을 했어요. 그러다가 또 보디발의 아내에게 고난을 당해서 감옥에 갇히고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바로의 꿈을 해석해주게 되고 그래서 출세길이 확 열리면서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가 하루아침에 변해서 애굽이라고 하는 큰 나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때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해 줄 때 그런 얘기를 했잖아요. <앞으로 7년 동안 큰 풍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칠년 동안 큰 흉년이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지금부터 좋은 사람을 잘 세워가지고 이 풍년 들었을 때 곡식을 잘 관리해서 흉년 때에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이 농경을 잘 해야지만 합니다> 그랬더니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세웠잖아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 읽으면서 그렇게 해석을 해요. 애굽의 총리가 돼가지고 그때가 나이가 서른 살이었어요. 30살에 총리 돼가지고 바로 그 해부터 또는 그 이듬해부터 7년 동안 풍년이 있었다.
이어서 흉년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모셔오게 되는데 그때가 흉년 지나서 2년 지났을 때에요. 요셉의 나이가 얼마였겠느냐, 30세에서 7년 풍년 2년 흉년 그러면 39세 그렇게 되었겠죠. 그때에 야곱이 애굽으로 왔는데 그때 야곱의 나이가 얼마라고 그랬습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다. 우리 조상의 연수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야곱이 백서른살, 요셉은 39살 그러면 야곱과 요셉은 나이가 91살 차이가 난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나와가지고 외삼촌댁 찾아올 때 그때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요셉이 외삼촌 집에 와 가지고 <라헬을 아내로 주세요. 7년 동안 내가 봉사하겠습니다> 보수도 안 받고 그래서 7년 동안 고생 고생하고 라헬을 아내로 얻었어요. 레아와 먼저 결혼하고 일주일 지나서 또 라헬을 아내로 얻고 이렇게 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그 대가로 7년 동안 또 무보수 노동 종살이를 하는 거죠. 14년 동안 그렇게 살았어요. 레아가 10명의 아들을 이렇게 야곱에게 안겨줬는데 라헬은 하나도 못 낳고 있다가 이렇게 해서 세월이 14년이 흘러간 거예요. 그러다가 십사년 끝날 때 가서 드디어 라헬이 아들을 낳았죠. 그 아들이 요셉입니다. 그리고 14년을 마치고 돌아오게 될 그때 오는 길에서 낳은 아들이 막내 베냐민, 그런데 라헬은 그 아들 베냐민을 낳고는 죽습니다. 이렇게 해서 야곱은 열두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러면 이 요셉은 언제 나왔느냐 야곱이 부모의 자기 고향 땅 떠나서 외갓집에 와가지고 14년 동안 종살이 한 그 끝에 낳은 게 요셉이라 그 말이죠. 그러면 아버지하고 아흔한살 차이가 난다. 그러면 14년을 거기서 빼야 돼요. 그래야 고향에서 떠날 때 몇 살인가 나이가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몇 살입니까? 그러면 91에서 14를 빼면 77살이 되잖아요. 그래 갖고 많은 성경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부모의 집에서 나와서 이 외삼촌 집에 올 때 나이가 일흔일곱살이었다.
그런데 내가 볼 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쌍둥이 형 에서가 40세에 장가들었어요. 어떤 어머니가 쌍둥이 큰 아들은 마흔 살에 장가들었는데 쌍둥이 동생은 일흔일곱 살 되기까지 무려 37년 동안을 자기 집에서 끼고 있다가 77살 다 된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되니까 <야 너 내 친정에 가서 장가들어라> 그러고 보낼 엄마가 어디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에는 물론 40은 넘었지 그렇지만 사실 조금 넘었지 많이 넘지는 않았을 거다.
둘째 더 큰 이유는 뭐냐 우리 창세기 이제 뒤에 보면 유다의 이야기가 나와요. 유다는 넷째 아들입니다. 넷째 아들하고 요셉하고는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날 거예요. 왜? 이 7년 사이에 11명이 태어난 거야.
요셉이 이렇게 큰 풍년이 들어서 양식을 가득 쌓아놓았는데 형들이 이렇게 찾아왔다. 바로가 꿈을 꿨습니다. 하나님이 속히 행하실 것이다. 당신이 똑같은 꿈을 두 번이나 꿨어요. 7년 풍년 들고 7년 흉년 든다는 꿈을 두 번이나 겹쳐서 꾸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기로 마음에 작정하셨고 이제 속히 행하실 것이라
우리가 요셉이 특별히 이 풍년 든 거를 볼 때 얼마나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이것을 생각하자고 하는 거죠. 우리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지금 우리는 추수기에 살고 있는데 나의 추수기에 대해서 깊은 감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돼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 추수감사절은 요셉에게 있어서의 추수감사절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추수감사절이었다 하는 거죠.
둘째는 뭡니까? 흉년을 대비해야 된다.
그런 대비를 요셉은 잘 했어야 했고 또 실제로 잘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 추수감사절은 그냥 단순한 감사가 아니고 대비하는 거다. 지금 우리는 은혜의 풍년 시기에 살고 있어요.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낸다> 무슨 기근이에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오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예수님 말씀했어요.
셋째로는 그렇게 해서 이 양식은 만민을 내 백성들 먼저 다 살려내고 칠년 흉년이 올 거니까 그거를 대비해야죠.
그 다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납니다. 요셉의 이 풍년으로 말미암아서 드디어 형들하고 화목하게 되고 형들을 만나게 되고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형들이 요셉의 앞에 와가지고서 잘못했다고 빌게 되고 이런 놀라운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왜 이 말씀을 오늘 이렇게 전합니까? 큰 환란이 온다면 환난이 오기 전에 풍년의 때가 반드시 온다. 지금이 풍년 기간이라 지혜로운 사람은 풍년 기간에 은혜받아야 해. 기도 많이 해서 성령 충만하고 이 기간에 성경 열심히 읽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해야 되고
세상 떠나는 날까지 열심히 성경 읽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모두가 말씀으로 풍년을 맞이하고 풍년의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백성들이 되도록 인도하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기름을 부어주시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은혜 가운데 우리가 더 새로워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1)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마태복음 2장 1~2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니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아멘
오늘 말씀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먼저 동방 나라에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 어디 계시냐 하고? 물었더니 그 일로 인해 예루살렘이 내 큰 소동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깜짝 놀라야 될 사람은 제사장들 장로들 비롯한 유대교의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란 사람은 사실은 헤롯왕이였어요. 박사들이 헤롯왕에게 자세히 설명했어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동방에서 우리가 별을 보고 유대 땅에 왕이 나신 것을 알아서 멀고 먼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왕께 경배하려고 찾아왔노라 하는 것입니다. 이 박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을 알았어요. 유대의 왕이신 것을 알았어요. 그런데 유대 왕이 어떤 왕인지에 대해서는 이 사람들은 좀 잘 몰랐겠죠.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 유대인의 왕이 태어나셨다, 또는 메시아가 태어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으로 누구 누굽니까?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에요.
그다음에 40일이 지나가지고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결례를 행하려고 결례는 성결 예식입니다. 이 성결 예식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아기 예수님을 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찾아왔는데 그때에 만났던 사람이 시므온이라는 사람하고 안나라고 하는 사람이고 나이가 많은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셋째로가 누굽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이 나신 것을 알았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분이 정말 세상을 구원하신 구주시다 하는 거를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또 한 사람 엘리사벳, 이렇게 하나님은 극소수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분들에게 메시아가 태어나셨다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아모스 3장 7절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하나님은 반드시 무슨 일을 하시기 전에 먼저 알려주신다. 왜 가르쳐 주십니까? 기도하게 만드시려고, 그래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일에서부터 구원해내는 사람도 있고 그 일에 피해를 줄여주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려고 가르쳐주시는 거 아니겠어요.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목자들이었어요. 하늘에 천군들이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천사 하나가 나타나서 이 목자들에게 말씀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 힘을이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는 찬송과 함께 이 천사가 이 목자들에게 전하는 말씀은 뭐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해서 구주가 나섰다. 곧 그리스도 출신이라 메시아가 태어나셨다. 너희가 빨리 가서 찾아봐라, 그 아기를 낳아서 강보에 싸가지고 구유에 뉘어놓아라 그가 바로 메시아가 이것이 표적이다> 막 뛰어가서 베들레헴 가서도 어느 집인지를 또 어떻게 찾았겠어요. 하나님께서 찾게 해주셨겠죠. 이렇게 해서 찾아가 봤더니 정말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뉘어놓았는데, 이거 얼마나 신기해요.
둘째로 시므온과 안나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 찾아 들어갔어요. 그랬더니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막 마음에 감동을 주셔서 <빨리 성전에 가봐라, 성전에 가봐라> 이래서 시므온이 성령의 강건함을 받아서 성전에 찾아 나와 아기를 봤어요. 아기를 볼 때에 성령께서도 감동을 주시고 깨닫게 해주시지 않았겠어요.
<이 아기가 바로 메시아라 내가 너희에게 이미 이르지 않았느냐 니가 죽기 전에 메시아를 만나볼 것이다. 그 메시아가 바로 이 아기다> 그래서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마디가 뭡니까? 주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드디어 내가 이 한 분을 만나보기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주시옵소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이루어 주시옵소서 애타게 기도해 왔는데 드디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고 이 아기를 보내주셨는데 이분이 이 엄청난 일을 이루어낼 분이라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분은 안나라고 하는 분이죠. 결혼한 지 7년 만에 남편과 사별하게 돼요. 주야로 주님 앞에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내 남편을 데려가시고 나를 이렇게 청춘, 과부로 만들어 주신 것은 나에게 다시 결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 땅에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 같은 거를 택하셔서 기도하라고 하시는구나, 이걸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분도 드디어 메시아를 만나보고 자기가 해방된 거를 느끼는 거죠.
셋째로 예수님을 만난 이분들은 예수님이 애굽으로 가시기 직전에 아마 그 전날 밤이죠. 그날 밤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물을 드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통해 빨리 떠나라 이런 계시를 받고 후닥닥 일어나서 다른 길로 해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요. 요셉도 마리아도 그냥 허겁지겁 일어나서 아기 예수를 안고 애국 땅으로 도망을 갔다.
이 세 종류의 이런 사람들에게 특징이 있어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첫째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을 물리치시고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더라 이것이 사도 바울도 똑같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택하심을 너희가 보아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둘째로 이분들의 특징은 신비를 체험했다 하는 동방박사들 신비를 체험했죠.
셋째로 이분들의 특징은 어디 가서 함부로 막 발설하고 돌아다니지 않았을 것 같아요. 이것이 하늘의 비밀이 동방박사들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서 헤롯을 찾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시므온과 안나 아기 예수님을 만나봤지만 하나님께서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셨겠죠. 이거를 만약에 두 사람이 성전에서 막 떠들어 댔으면 그러면 예수님이 얼마나 위태했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러주시고 택하시어 하나님의 신비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해주시고 예수님을 삶의 구주로 영접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가운데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십자가에 못 박혀 내 죄를 대속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옵소서! 이것이 우리 마음의 아름다운 자세가 되고 또 우리의 소원이 될 수 있도록 은혜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2) 임마누엘의 생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을 죄에서부터 구원하신다> 말씀을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이론이 아닙니다. 구원은 체험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모세나 다윗이나 엘리야나 모든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100년 넘게 산다고 할지라도 인생과 함께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헛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소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대관절 누구신가? 사도 요한이 하나님이 누구시다 하는 거를 네 가지의 단어로 아주 간단한 단어로 설명을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처음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한다는 것이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이 턱 생각이 나야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하는 생활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는 이 땅에 말씀의 기근이 온다고 했어요. 세상에 성경은 가득하게 넘쳐납니다. 교회도 많습니다.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생명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때는 말씀의 기근이 옵니다. 더 늦기 전에 말씀으로 무장을 해요.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곧 말씀의 기근을 보낸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고 물이 없어서 갈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온 세상을 가득 덮는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4장 23절 24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자는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우리 한국 성경도 영과 진리로 그랬는데 영과 진리가 아니고 성령과 진리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교회에 찾아 나오시면 아마 그렇게 하실 거예요. 교회에 성령이 계신가요? 교회의 진리가 있나요? 하나님은 영이세요. 성령이세요. 성령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대답을 잘해야 돼요. 이제까지 거짓된 예배를 얼마나 많이 드렸나, 나는 예배를 잘 드렸다고 하는데 하나님은 <아니야, 나는 너희의 예배를 받은 일이 없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면서 열심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난 40년 동안 나는 너희의 예배를 너희의 제사를 받은 일이 없느니라> 모세가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인 아론이 제사를 드립니다. 근데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의 제사를 받은 일이 없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이게 사도행전 7장 42절 스데반이 설교하는 가운데서 한 말씀입니다.
<거짓된 예배 더 이상 드리지 말라. 형식적인 제사 드리지 말라. 너희들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라>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찾으세요. 성령의 불이 있는 예배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게 더 이상 소원이 없다고 하셨어요. 불이 안 붙어요. 사람들은 성령 받을 생각을 안 해요. 성령이 뭔지도 몰라요. <우리는 성령이라는 거 들어보지도 못했어요> 전부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어요.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건가요. 언제까지 여러분은 그렇게 살겁니까? 요한복음 1장 5절에는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쁨으로 주님께 사랑을 고백해 보셨습니까?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어떨까요? 가난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그까짓 거 상관없지요. 몸이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그런 거 중요하지 않아요. 어려운 것이 산같이 쌓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그런 거 하나도 겁날 것 없습니다. 우리 인생살이에는 어려움이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면서 사세요. 행복을 돈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명예 권세에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 없어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 우리에게 행복이 넘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남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을 사랑해서 자기의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가륫 유다 빼놓고 나머지는 다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후세 2천 년이 지나도록 우리가 이 열두 제자들의 이름을 외우고 있잖아요.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세요. 그래서 박해를 받고 욕을 먹고 많은 고난을 당해보세요. 하늘나라에 가서 별같이 빛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땅에서 빛나는 사람 되려고 하지 말고 하늘나라에 가서 빛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합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첫째 말씀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영이시다, 셋째 요한일서 1장 5절 하나님은 빛이시다. 죄 짓지 말고 빛으로 삽시다. 넷째 하나님 사랑이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원합니다. 올해도 하나님과 함께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