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라훌라 경 [Rāhulasutta] (*0)
(숫따니빠따 2-11)
1. [세존]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어진 이를 무시 하는 것은 아니냐?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너는 존경하고 있느냐?
2.[라훌라] “늘 힘께 살고 있다고 해서
어진 이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횃불을 비추는 님을
저는 항상 존경합니다.”
3.[세존]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1)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4.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이 없이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살아라.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5.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 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으로 돌아가지 말라.
6.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을 지켜,
네 몸에 대한 사띠(*11)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12) 떠나라.
7.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표상을 회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21) 집중시켜라.
8. 표상이 없는 경지를 닦아라.(*22)
자만의 잠재적 성향을(*23) 버려라.
그리하여 자만이 그치면,
너는 고요하게 지내리라.”
9. 이처럼 거룩한 세존께서는
라훌라 존자에게
참으로 이와 같은 시로써
되풀이해 가르치셨다.
주해(*0) 세존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후에 차츰 까삘라왓투로 갔다. 그곳에서 아들 라훌라로부터 ‘수행자여, 저에게 유산을 물려주십시오.’라고 유산을 요청받았으나, 세존께서는 사리뿟따 장로에게 ‘라훌라를 출가시켜라’라고 명했다. 이와 같이 출가해서 라훌라는 성장해서 사리뿟따에게 구족계를 받고 목갈라나에게 갈마의규(羯磨儀規)를 배웠다. 세존께서는 라훌라가 ‘출생, 성씨, 가문, 계급의 화려함 등으로 자만하고 수다스러워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해서 어렸을 때부터 고귀한 자의 경지에 오를 때까지 항상 이 경의 가르침을 말씀하셨다.
주해(*1) prj. II. 341에 따르면 출가하는 것은 왕이나 도적이나 빚 때문이나 공포에 시달림 때문이거나 생계가 곤란해서가 아니라,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라훌라는 왕국의 유산을 바라고 무리하게 출가한 것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주해(*11) 올바른 사띠(正念)를 말한다. 올바른 노력은 올바른 사띠의 기반이 되는 것으로 거기에 필요한 힘을 제공하며, 올바른 사띠는 주의력을 위한 안정된 기반을 제공하고 올바른 집중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삼매의 구성요소 사이의 수반적 관계에 관해서는 붓다고사의 재미있는 비유가 있다.
‘세 소년이 정원에 놀러 갔다. 걸으면서 꼭대기에 꽃이 활짝 핀 나무를 보았다. 그래서 그 꽃을 따 모으기로 했다. 꽃은 제일 큰 사람의 키를 넘는 것이었으므로 친구가 엎드리고 키 큰 친구가 그 위에 올라갔으나 떨어질까 두려워했다. 그때 또 다른 친구가 그 옆에 서서 어깨를 짚게 하여 키 큰 친구는 그 어깨에 기대어 꽃을 따 모을 수 있었다.’
여기서 꽃을 따 모으는 키 큰 친구는 올바른 집중을 의미하고, 등을 제공한 친구는 올바른 노력을 의미하고, 어깨를 빌려준 친구는 올바른 사띠를 뜻한다. 올바른 집중은 이와 같이 올바른 노력과 올바른 사띠의 지원을 받아 그것들을 수반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띠하는 것은 마음이 활동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의도나 사유는 직접적인 체험을 방해하는 장애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것이 소멸됨으로써 사띠 속에서 대상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서 사띠는 그냥 수동적인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띠는 강력한 기능을 발휘한다. 그것은 우리를 현실 속에 닻을 내리게 하며, 사유작용과 더불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방황하게 두지 않는다. 사띠가 없는 마음은 호박에 비유되고, 사띠를 수반하는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 호박은 수면 위를 떠다니지만 돌은 물 밑바닥에 이를 때까지 가라앉는다. 이처럼 강한 사띠를 수반하는 마음은 대상의 겉모습 속에 떠돌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대상의 속성 속으로 깊이 침투해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통찰하는 기반을 제공한다.
디가 니까야는 네 가지 사띠의 토대(四念處)를 설명하고 있다.
‘무엇이 네 가지 [사띠의 토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이 가르침에서 비구는
열심히 노력하며, 올바로 사띠하여, 분명히 알면서,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몸에 관해 몸을 관찰하면서 살아간다.
열심히 노력하며, 올바로 사띠하여, 분명히 알면서,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느낌에 관해 느낌을 관찰하면서 살아간다.
열심히 노력하며, 올바로 사띠하여, 분명히 알면서,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마음에 관해 마음을 관찰하면서 살아간다.
열심히 노력하며, 올바로 사띠하여, 분명히 알면서,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법에 관해 법을 관찰하면서 살아간다.’
주해(*12) prj. II. 343에 따르면, ‘윤회의 소용돌이에 아주 절망해서 모든 세상을 기뻐하지 않는 지각을 가져라’라는 뜻이다.
주해(*21) prj. II. 343에 따르면 근접삼매에 의해서 하나로 된 것과 근본삼매에 의해서 잘 집중된 것을 말한다.
주해(*22) prj. II. 343에 따르면 이와 같이 근본적인 삼매의 경지에 들어 통찰을 가르치기 위해 ‘표상이 없음(無相)’이라고 말한 것이다.
주해(*23) prj. II. 344에 따르면 자만은 ‘나는 있다는 자만’을 말한다.
- 라훌라의 경이 끝났다. -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42rb/748 ~
https://cafe.daum.net/vipassanacenter/42rb/751
쿳다까니까야 (小部阿含) “숫타니파타” 221-223쪽.
전재성 역주. 한국 빠알리 성전협회.
일부용어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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