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15일 녹동마을 사람들이 전라남도지역 관광여행에 나섰다.
대상지역은 강진 만덕산 백련사, 다산초당 등 다산유적지 탐방, 땅끝 마을, 두룬산 대흥사, 초의선사의 일지암,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을 관람하는 것이다.
이번 일정은 14일 오전7시 녹동마을을 출발해서 강진의 만덕산 백련사, 다산초당 등 다산유적 관람하고 땅끝마을 전망대와 토말비를 둘러본 후 완도를 거쳐 주작산 자연휴양림에서 1박을 하고 15일에는 남도의 대표적인 사찰 두륜산 대흥사를 거처 끊어져가던 우리나라 치문화를 일으켜 다성으로 일컬어지는 초의선사가 몸담았던 일지암을 둘러보고 순천만 자연생태 공원을 관람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백련사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한다. 사찰의 창건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 스님이 창건하였다. 사찰의 이름은 만덕산 백련사라고 불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만덕사로 불렀다. 하지만 근래에 다시 이름을 고쳐 백련사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 스님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창지대로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 스님이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1430년부터 대대적인 불사작업이 시작되었고 효령대군의 도움이 컷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동생(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면서 강진땅 백련사에 들어 8년 동안 기거하였다. 효종 때 3차 중수를 하면서 탑과 사적비(事蹟碑)를 세웠다.
이 밖에 시왕전(十王殿)·나한전(羅漢殿)·만경루(萬景樓)·칠성각(七星閣) 등의 건물이 있다. 절 앞에는 비자나무와 후박나무, 그리고 푸조나무와 함께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151) 등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초당은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약천(藥泉)·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역동적으로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40m 높이의 땅끝 전망대
땅끝마을
북위 34도 17분 21초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끝은 한반도 최남단 땅끝이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000리라 보고 우리나라를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했으니 우리 땅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이 이곳에 와서 사자봉을 솟게 하고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형세다. 사자봉 아래 갈두마을은 땅끝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해발 156.2m의 사자봉 정상에 세워진 땅끝마을 전망대와 땅끝에 관련된 시들을 모아 다양한 시비를 만들어 놓은 공간이 있어 들러볼 만하다.
역동적으로 타오르는 횃불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40m 높이의 땅끝 전망대에 오르면 흑일도, 백일도, 보길도, 노화도 등 섬과 바다가 조화된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 한라산까지 볼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어 매년 해넘이, 해맞이축제가 열리기도 하는 곳이다. 전망대에서 나와 조선시대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갈두산 봉수대를 둘러보고 500여 미터를 내려가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삼각형의 땅끝탑을 만날 수 있는데 여기에 새겨진 시가 한반도 땅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감동적인 심경을 대변해 준다.
완도 건어물시장
대흥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 도립공원내에 있는 절이며 대둔사라고도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이다. 면적은 약 60,163㎡에 이른다. 이 절의 기원은 426년 신라의 승려 정관(淨觀)이 창건한 만일암(挽日庵)이라고도 하고, 또 544년(진흥왕 5)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고도 하며, 일설에는 508년(무열왕 8)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승이 중창하였다는 등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확인할 길이 없다. 그 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사찰의 규모를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西山大師)가 거느린 승군(僧軍)의 총본영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1604년(선조 37) 서산이 자신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전한 후 크게 중창되었다고 한다. 그 후 1665년(현종 6)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하고, 1669년에는 표충사(表忠祠)를 건립하였으며, 1813년에는 불탄 천불전(千佛殿: 지방유형문화재 제48호)이 재건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억불(抑佛)의 탄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길러 내어 의심(義諶)·삼우(三遇)·도안(道安)·문신(文信)·추붕(秋鵬) 등 13인의 대종사(大宗師)와 원오(圓悟)·광열(廣悅)·영우(永愚) 등 13인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시킨 명찰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침계루(枕溪樓)·명부전(冥府殿)·나한전(羅漢殿)·백설당(白雪堂)·천불전·용화당(龍華堂)·도서각(圖書閣)·표충사·서원·서산대사기념관·대광명전(大光明殿)·만일암 등 기타 많은 당우(堂宇)가 있으며, 보물로 지정된 응진전전(應眞殿前) 3층석탑, 북미륵암(北彌勒庵) 3층석탑이 있고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있다. 또한 서산대사를 비롯한 여러 명승의 부도(浮屠)와 탑이 있으며, 특히 서산대사의 유물과 이광사(李匡師)·김정희(金正喜)·이삼만(李三晩) 등 역대 명필들의 필적으로 된 각종 현판도 남아 있다.
일지암과 자우홍련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차 유적지인 일지암은 우리나라의 다도를 정립해 다성(茶聖)으로 부리는 초의선사가 머물던 고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 머물면서 다산, 추사 같은 당대의 석학들과 교유하며 다선일미사상을 확립하며 동다송, 다신전 등의 명저를 남겼으며 특히 시, 서, 화에 능했으며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을 가르쳤다.
초의선사의 사상은 선(禪)사상과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으로 집약되는데 특히,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는 것이다. 즉, 차(茶) 안에 부처님의 진리[法]와 명상[禪]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아래 네 개의 돌기둥을 쌓아 만든 누마루 건물이 자우홍련사(자우산방)이다.
순천만에 나타나는 주요 지형은 갯벌, 염생습지, 구하도, 자연제방, 하천지형(범람원, 배후습지) 등을 들 수 있다.
만내에는 고흥군의 장도(獐島)·지주도(蜘蛛島)·해도(蟹島)·백일도(白日島)·진지도(陣地島)·원주도(圓珠島)·해하도(海鰕島)·미덕도(美德島)·저도(猪島)·좌도(座島)·오도(吳島)·대운두도(大雲斗島)·소운두도(小雲斗島)·대여자도(大汝自島) 등의 섬이 많으며, 만 입구에는 낭도(狼島)·적금도(積金島)·둔병도(屯兵島)·조발도(早發島) 등의 작은 섬들이 입구를 막고 있다.
동천하구의 동쪽 해안 지역은 해식애를 이루고 있고, 서쪽 해안 일대는 뻘질 간석지로 나타나는데 현재는 방조제를 만들어 간척하였다. 순천만의 토양은 표토는 암회갈색의 사양토가 기층에는 뻘질의 점토성분이 많아 배수가 불량한 편이라 홍수 등 재해대책에 어려움이 있다.
연평균기온은 13.9℃ 정도이며, 연강수량은 1,083.8㎜를 약간 넘는 정도이고, 해양의 영향으로 겨울에는 비교적 따뜻하여 유자재배를 비롯하여 고등원예재배지로 발전하고 있다.
순천만에는 갈대가 고밀도로 단일군락을 이루고 있다. 바다와 인접한 갯벌 주변에 약 5.4㎢에 달하는 갈대밭이 있는데 이는 하천이 직강화되면서 토사의 유입량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습지면적이 늘어나면서 이뤄진 것이다. 동천 하구 대대동의 갈대군락이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이루는 동시에 잘 보전된 갈대 군락이다.
잘 보전된 갈대 군락은 새들에게 은신처, 먹이를 제공하여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 국제보호조인 흑두루미, 검은머리갈매기와 같은 조류 외에도 저어새, 황새, 흑부리오리, 민물도요 등이 서식하고 있다.
순천만의 역사는 약 8,000년이다. 지구상의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해수면의 높이가 160m 정도 높아지면서 서해가 육지에서 바다로 변하였을 때 처음 생긴 것으로 보인다. 즉 전라남도의 산지를 형성하는 소백산맥의 지맥(支脈)인 고흥반도로 뻗은 지맥과 여수반도로 뻗은 지맥이 남해안으로 침강하여 형성된 만이다. 이 때 기수지역으로 바뀐 순천만은 강물을 따라 유입된 토사와 유기물 등이 쌓이면서 지금의 넓은 갯벌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만의 지질은 백악기의 하양층군과 유천층군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의 주위로 구성되어 있는 백악기 지질층 밖으로 신생대의 퇴적암류가 자리하고 있다.
현재 순천만 주변의 하천의 직강화로 인해 유속이 빨라져 퇴적물들이 빨리 퇴적하여 갯벌이 확장되고 있다. 또한 갯벌로 갈대의 군락이 확대되고 있다. 순천만의 구하도 주변에 축사가 들어서고 오폐수의 유입으로 부영양화 현상을 보이고 있고, 구하도의 물이 항상 고여 있어 오염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또한 구하도가 자연적으로 퇴적되어 하천의 깊이가 얕아지게 되어서 구하도는 매립되어 농경지와 도로로 변하면서 사라지고 있다.
복잡한 해안선은 약 58.7㎞에 이르며 간석지가 발달하고 흩어져 있는 섬들 주변은 어업발전에 입지조건이 좋다. 연안에는 조기·멸치·갈치·장어·문어·전어 등의 어업이 성하며, 김·고막·굴 양식도 행하여진다.
순천만을 크게 동천을 중심으로 나누면 동쪽은 곡물위주의 농업을 하고 있고, 서쪽은 시설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1918년과 1995년의 토지이용을 비교하면 순천만의 토지이용은 논의 비율은 줄고 새롭게 시설재배를 이용한 원예농업이 발달하고 있는 추세이다.
순천만의 S자형 수로는 우리나라 사진작가가 선정한 10대 낙조 중 하나이기도 하다. 2007년 7월에 남해안 관광벨트 개발계획 사업으로 자연생태공원이 조성되어 2004년 11월부터 운영되고 있다. 또한 순천만은 생물학적 가치가 크고 해안생태경관이 수려하여 2008년 6월에 명승 제41호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전남 순천시는 2009년 9월 16일 국제기구로부터 유치를 확정하였다. 201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와 관련하여 순천만 일원에는 수목원, 순천만국제습지센터, 저류지 등이 조성될 예정이다.
첫댓글 반가운 얼굴 건강하신 모습... 정말로 보기좋습니다...
전라도까지 가셔서 멋진폼 잡으셨군요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 하세요~~
좋은사진 유익한 정보 잘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