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만난 제자
유난히도 무더웠던 어느 해 여름. 학교에서 가까운 두류수영장으로 현장체험학습을 걸어가면서도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다. 아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누고 노래도 부르면서 공원산책로를 걷다보니 아이들보다 내가 더 즐거워한다.
수영장에 도착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아동들을 안전요원들에게 인계하기 위해 줄을 세우고 있는데, 안전요원 중의 한 사람이 쓰고 있던 빨간 모자를 벗어들고 정중하게 꾸벅 인사를 한다. 누구신지 잘 모르겠다고 물었더니
“선생님! 저 정현덕입니다.”
“오잉? 현덕이!”
현덕이란 소리에 내 몸은 자동적으로 무거운 몸을 폴짝 뛰어 올리며 놀라움과 반가움이 동시에 일어났다.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몹시 궁금해 했던 그 아이를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말썽꾸러기였던 그 아이를 십오 년 만에 우연히도 수영장 안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우와!너 멋있게 자랐구나.”
나의 말에 잔뜩 쑥스러워하는 녀석이 말했다.
“제가 오늘 선생님 반 아이들 잘 돌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다야. 그런데 넌 어떻게 나를 금방 알아봤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걸요 머……. 나중에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궁금했던 그 아이는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그 아이가 바로 여기에 있다니 너무 신기했다. 함께 간 동료들에게 지난 이야기들과 더불어 줄곧 그 아이를 화제에 올리며 흥미롭고 즐거운 대화의 물꼬가 되었다.
겨우 새내기 교사를 면하고 경력 5년차 되던 해, 첫 이동을 앞둔 나의 마음은 마치 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어린이 마냥 무척 설레고 있었다. 새 학교에는 어떤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어설펐지만 정들었던 첫 학교를 떠나 새 희망과 기대감으로 발령이 났다. 그 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잘해보리라고 결심을 단단히 하며 새로운 학년을 맡았다. 하지만 나의 결심에도 불구하고 첫날부터 인상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 때문에.
그 아이는 영리하고 민첩했으며, 얼굴도 훤하고 웃음이 시원시원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는 호감이 가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첫날부터 예사롭지 않은 질문으로 나를 황당하게 만드는 것을 출발로 하여 매일 그 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와 반 친구들은 괴로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공부시간을 엉망으로 만들고 시선을 끌기 위한 괴상한 행동으로 아이들을 웃음으로 몰고 가기도 하는 애물단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 해는 텔레비전에서 ‘봉숭아 학당’이 큰 인기를 끌던 해였는데 ‘봉숭아 학당’의 소재는 그 아이에게도 멋진 흉내내기 감이었고 모방은 창조를 잉태한다는 말을 실천이라도 하려는 듯, 봉숭아 학당보다 더 황당한 사건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무질서의 처음은 늘 그 아이 차지였다.
“현덕이 때문에 못살겠어요.”
라는 학반 아이들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져 갈 무렵에 나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같은 학년 13반 선생님은 학교에서 호랑이로 소문난 경력이 높으신 남자 선생님이셨는데 그 아이에게 시달리는 나를 보더니 말을 듣지 않으면 자기 반으로 보내라고 늘 말씀하셨다. 바로 그 날, 13반 선생님께 미리 양해를 얻은 후에 우리 반 사건은 시작되었다. 녀석을 훈계 할 때도 가끔 어느 반에 보내버린다고 엄포를 놓으면 하던 짓을 멈추곤 하였는데 그 날은 실천으로 옮겨보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날도 여전히 현덕이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일관했다.
“너 빨리 가방 싸서 나 따라와 13반으로 가자!”
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녀석을 반은 끌다시피 하여 13반 교실에 넣고 와 버렸다. 그리고 태연한 척 몇 시간이 흘러갔다.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13반에 기웃거리며 그렇게 설치던 애가 앞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는 둥, 불쌍해서 못 봐 죽겠다'는 둥, 여러 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반 아이들에게 전체 의사를 물었다. 잘 생각해보고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현덕이가 다시 우리 반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하나, 둘, 셋, 넷…. 서로 눈치를 봐 가며 올라오던 팔은 점점 그 수가 늘어나더니 어느 순간, 반 전부의 팔이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뜨거운 동지애라도 아니 인간애라도 아님 미운 정 고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아름다운 우정이라도 발휘된 것일까? 의외의 반응에 잠깐 놀라움을 삭이며 나는 차분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여러분들이 현덕이를 원했으니 데리고 오죠.”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따라오는 현덕이를 자기 자리에 앉히고 나서 나는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잘 들어라. 너희들은 모두 친구를 원했다. 하지만 난 현덕이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 이 반에서 필요 없는 사람은 바로 나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너희들이 잘 알 것이다. 지금 바로 교장선생님께 말씀 드려서 새 담임선생님을 보내 줄 테니 새로운 선생님이 오시면 말썽부리지 말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공부 열심히 하기 바란다.”
곧바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막상 나오고 보니 갈 곳도 없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회의감과 절망감, 패배감 등이 가득 서려 있는 나의 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니 너무 슬펐다. 아니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이젠 아예 어깨마저 들먹이며 컥컥 소리까지 나왔다.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근 채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빨간 눈을 수습하고 교실로 들어오니 내 책상위에는 몇 통의 편지들이 놓여 있었고,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무엇인가 쓰고 있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는 교실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캐비넷 문을 열고 내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짐을 다 꾸려 갈 때 쯤, 현덕이로부터 가장 많이 괴롭힘을 당한 여자 부회장이 나오더니
“선생님! 가지 말아요. 현덕이가 괴롭혀도 이젠 참고 잘 지낼게요. 제발 가지 말아요.”라며 매달렸다. 그러자 그 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책상에 엎드려만 있던 현덕이가 엉엉 울면서 쓰러지듯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선생니~임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가지 마세요. 엉엉.”
그 아이를 가슴에 안고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함께 우는 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가 되어 울었다. 교실 전체가 마치 울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이.
그 후로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현덕이의 행동들, 그 애는 변화되고 있었다. 봉사활동에 누구보다 먼저 앞장서고, 내 마음 상태를 가장 먼저 살펴주며 늘 정의로운 편에 서서 친구들을 위해 주는 사람으로 나날이 변화되고 있었다.
현덕이의 바람직한 행동 변화에 아이들도 감동을 받았는지 2학기 때는 친구들의 신임을 얻어 학급어린이회 부회장으로 당선 될 만큼 크게 변화되었다.
그 아이의 일로 인해, 학교라는 곳이 공부와 지식을 습득하는 장(場)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건강한 정신과 교우간의 사귐, 공동체의식을 느끼는 과정에서 인격체가 형성되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점점 계발시켜 나가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높여나가며 자아존중감이 형성됨으로써 자기 자신이 자랑스럽고, 꼭 필요한 인물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게 해 준 현덕이. 나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라는 소중함을 일깨워준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희미하게 살아나곤 했다.
언제 왔는지 두 손에 시원한 음료수를 들고 달려온 현덕이는 선생님들과 나눠 드시라고 인사를 하더니 아이들 쪽을 곧장 달려간다. 동료교사들은 외모도 멋있는데 인성까지 멋있다며 다들 한 마디씩 했다. 한 때, 나를 너무나 힘들게 했던 그 아이가 이렇게 멋있는 청년으로 변하여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고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현덕이가 또 찾아와서는 몇 시에 갈 거냐고 묻더니 자기가 진행 측에 가서 미끄럼틀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특히 안전에 신경을 써서 우리 학교 아이들도 탈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한다. 그 말에 동료교사들의 박수를 받으며 꾸벅 인사까지 멋있게 하고 진행 측으로 달려가는 의젓한 뒷모습을 보니 마음속에는 기쁨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현덕이는 우리 아이들이 높은 미끄럼틀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붙들어 주거나 안아서 물 밖으로 안전하게 이끌어주었다. 몇 달 전에 군복무를 마치고 모대학교 생활체육학과 3학년에 복학하여, 방학 동안 수영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면서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피부와 반짝이는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의 현덕이가 너무도 믿음직해 보인다. 우리 아이들과 함께 놀아도 주고,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바닥이 미끄러우니 뛰지 말라고 양팔을 벌려 가로 막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덕아, 너도 엄청 뛰었단다. 그저 가만히 있질 못하고. 그런데 이젠 너도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구나.
수영을 마친 후에 그 아이의 배려 덕분에 미끄럼틀도 안전하게 타도록 해줘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며 수영장을 나섰다. 언제 보았는지 현덕이는 내 앞에 또 달려와서는 모자를 벗고 작별인사를 정중하게 한다. 그 아이를 만난 그날은 너무나 행복했다. 바르고 씩씩하고 건전하게 자라 준 그 아이에게 한없이 고마워하는 내 가슴은 뿌듯함으로 가득 찼다. 하늘을 올려 다 본다. 현덕이의 밝고 환한 웃음처럼 맑고 푸른 하늘엔 흰 구름이 나를 내려다보며 포근히 웃고 있었다.
첫댓글 선생님,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줄곧 눈물이 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생님의 힘듦이 그대로 느껴져서일까요?
현덕이가 친구들과 선생님으로 인해 저리 멋진 청년으로 변해서일까요?
아니면 지금 처한 중현이의 현실이 선생님의 그 때처럼 큰산처럼 느껴져서일까요?
무엇보다 현덕이의 삶이 바뀌어진데 대해 무한한 박수를 보냅니다.
이처럼 지금의 많은 어린 학생들이 교육의 파장으로 친구들의 따뜻함으로
올바른 인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수고 많으셨어요~~
사랑합니다.
무한한 박수에 제가 감사드립니다.
아드님도 현실 적응 잘하며 군생활 씩씩하고 지혜롭게 할겁니다.
힘내셔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