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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은혜 교리(은총론)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 회복
시작하는 말
종교개혁의 신앙유산과 교훈들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가르침들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을 주장하는 교리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인간의 노력으로 획득하거나 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한다(롬 1:7).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롬 5:17,21). 은혜를 강조하면 할수록, 선행과 성화를 무시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율법의 정죄아래에 있지 아니하지만,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자들은 의를 추구한다!
로마 가톨릭과는 전혀 다르게,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적으로 은혜의 교리를 재구성하게 되면서, 구원 교리가 완전히 다시 정립되었다.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종교개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신앙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은혜의 교리는 믿음으로 주어지는 칭의론과 구원론을 가능하게 했고, 죄의 용서와 사면을 확신케 해 주었다. 타는 목마름으로 영혼의 위로를 맛보고 싶어하던 중세 말기의 성도들은 시원한 복음의 축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일터와 삶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어, 열심히 주어진 일터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갔다.
이러한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유산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경고한 바 있다: "종교개혁에 대한 기억을 상실할 정도로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들, 상실된 진리를 회복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다."
유럽과 미국에서 그러하다면, 과연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종교개혁의 신학과 신앙적 유산을 얼마나 소화하고, 계승하고 있는가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필자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유산은 하나님의 은총을 모두 다 새롭게 체험하고, 핍박과 불행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생애를 슬기롭게 가꾸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각박한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자의 일상생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아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했던 은혜의 교리와 그와 연계된 성경적 교훈들은 설교와 책자를 통해서 시민들의 소소한 일상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침으로 남았다. 루터와 칼빈의 신학적 교리들은 성도들의 일상생활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소명의식을 불러일으키면서 깊은 감동을 주었고, 역동적인 삶에의 동기를 부여했다. 중세 말기 시대에 일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어둠이 깊이 드리워져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로마 가톨릭의 권세 아래 농촌과 가정에서 소소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성도들에게 자긍심과 행복이란 전혀 맛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전쟁과 전염병과 마귀에 연루된 소문들은 널리 팽배해 있었다. 일상은 불안하고 비참하며 우울했으며, 불행한 소식들만이 난무했었다.
중세말기에는 명쾌한 구원론이 정립되어져 있지 않았다. 칭의와 대속, 교회와 구원에 관련된 모든 가르침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흘러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과 교회론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갖게 하면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종교개혁의 신학사상들은 16세기를 살아가던 성도들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성경적 해답이었고, 주어지기 시작한 모국어 성경, "말씀의 빛"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였고 큰 감동과 평안을 제시했던 것이다.
1. 죽음과 전쟁으로 퇴락하던 사회
종교개혁은 각 사람의 마음 속에 갈망하고 있던 생존에의 위로와 평안의 메시지를 제공하였다. 로마 가톨릭의 권위 아래서 신음하던 자들이 기다려온 자유함에의 응답이기도 했다. 비록 뮌쩌의 농민혁명이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군주들과 교황에 대해서 절대 충성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유럽에 몰아닥친 전쟁과 전염병은 중세 말기의 로마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을 흔들어 놓았다. 수많은 사람들은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종교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신뢰를 저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자유에의 갈망과 근대적인 개인의 소중함을 터득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낸 개신교회로 진행하게 한 것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연옥에 가서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니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에 고행을 당해야 한다는 형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고행과 순례를 마친 후에 면죄부를 받았다. 사람들은 장래에 지은 죄에 대해서도 미리 면죄부를 주문할 수 있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교회의 사업수단으로 변질 되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형벌을 피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자들은 평범한 사람의 일상생활로부터 거대한 공적인 국가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죽음과 전쟁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새롭게 재설정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는 성직자들과 수도원에서만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들이 이뤄진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의 신학적 특징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하게 여겨지는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지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와 그것을 아는 지식으로 파헤쳐 나가도록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종교개혁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고답적인 학문탐구에 빠지지 않았고, 일상이라는 현실의 토양에서 자신들의 깨우친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들이 견고히 뿌리내기기를 갈망했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 자신들이 처해있던 시대적 상황에 깊이 관련을 맺은 사항들에 대해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새로운 서구문화의 출현을 갈망하던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적합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수도원에 격리된 경건이 아니라, 시장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중요시하여 복음을 선포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설교와 강의와 저술을 통해서 선행과 공로사상에 대해 냉철한 비판정신을 발휘하면서, 일상을 중시하는 성경적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했다. 칼빈이 수도사들을 비판했는데, 그들의 게으름, 무지, 악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수도사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적합하게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교황권의 혼돈, 권위의 위기와 민족주의
오랫동안 쇠퇴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던 유럽사회에서 무기력하고 무능하던 봉건 군주들과 결탁했던 로마 교황청에서는 자신들의 내부적인 권력쟁탈에 여념이 없었다.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는 결정적인 날을 맞이하고 있던 중세말기,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자 이를 주도했던 교황의 권위가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130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전쟁비용의 충당을 위해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자 보니파시우 8세 교황이 반발하였다. 1308년 프랑스 국왕은 교황의 별궁인 아나니를 습격하고 교황을 납치하였다. 프랑스 국왕의 간섭 하에 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출되었지만, 로마로 돌아가지 않고 아비뇽에 머물면서 힘을 잃어버렸다. 이것을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고 있는데, 1307년부터 1377년까지이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면서 프랑스에서 재위하던 변칙적인 상황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그의 후임 우르바노 6세가 로마에서 선출되자, 프랑스인 추기경들이 이를 거부하고 1379년 아비뇽에 또 다른 교황을 세웠다.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각각의 교황이 재위하는 극심한 혼란상이 빚어졌다. 두 명의 교황들은 서로를 향해 파문하였고, 어느 쪽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을 모두 취소하고 새로운 교황을 뽑았지만, 모두 다 물러나지 않아서 세 명의 교황이 재위하기도 했었다. 세 명 교황들 중에서 1415년에 마지막 한 사람이 사망하면서 극렬한 혼돈 사태가 종결되었다.
14세기 백 여 년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는 권력쟁탈전에 몰두해 있었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하지 못하는 혼돈 속에 빠져 있었다.
최고로 여겨지던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상실되고 교황청에서 관할하는 행정력도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서, 생활의 거의 모둔 분야에서 로마 가톨릭의 무능함이 드러났다. 일반 시민들은 교회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정치와 사회와 경제까지도 장악하여 지배하던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 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7세가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들어왔다.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이탈리아 주변의 유럽 거의 모든 국가들의 군사문제 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대에, 이 사건은 유럽을 뒤흔든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밀라노의 감독 사보나롤라는 부패한 교황청과 시정부 부유층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질타하였다.
유럽 각 지역에서는 로마 가톨릭과 결탁해 있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군림에 저항하는 민족주의가 등장하고 있었다. 프랑스, 독일, 스위스, 저지대 국가, 영국 등 국왕들과 군주들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황제에 맞서서 각자의 재정적 이익을 추구하였다. 로마 가톨릭에 대한 반발이 크게 퍼져있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사회적 요구가 무엇이었던가를 민감하게 파악하였다.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네델란드 등 각 지역에서 확산된 종교개혁은 개인의 자유를 향한 갈망이 서서히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주요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정치적 질서를 제시하여 재세례파의 급진적이고 과격한 분리주의를 방지하는데 앞장섰다.
2) 전쟁과 죽음
유럽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 (1337-1453)이었다. 프랑스 국왕 필립 6세 (1328-50까지 재위)가 영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키텐 지역을 장악하려 하면서 프랑스 전지역에서 피나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전쟁비용 마련을 위해서 과도한 세금을 부담시켰고, 농민들과 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6세기에 농민들의 반란이 자주 일어났던 것은 귀족들의 억압과 큰 땅을 소유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귀족들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영토 확장 경쟁에도 나섬으로서 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로마 가톨릭의 지지를 받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스위스 땅에 침략해 들어오자, 칸톤들이 연합하면서 스위스라는 산악지대의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1511년에 합스부르그 왕가의 후원을 받은 스위스 용병부대가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은 1515년에 이탈리아 마리그나노에서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지고 말았는데, 프랑스에서는 밀라노 지역을 남부의 관문으로 생각하여 장악하려고 했다. 스페인, 잉글랜드, 이탈리아 로마 교황의 군대까지 동원되어 스위스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합군이 형성되었으나, 프랑스의 새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가 스위스 부대를 전멸시켰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교황과 이탈리아에 대해서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고자 방안을 강구해 왔었다. 스위스 등 연합 군대가 참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에게는 가공할 신무기로 무장된 프랑스 군의 포병부대가 없었던 것이다.
츠빙글리는 전쟁의 비통함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하면서, 스위스 사람들이 참여하던 용병제도에 반대하였다.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등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살아가던 스위스 칸톤 들의 연맹은 살아남기 위해서 결코 주변국가들과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영구 중립을 선포해야만 했다.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은 민족주의자로서의 이상을 갖고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14세기에 실존했었다고 알려진 "빌헬름 텔의 신화"를 만들어냈을 정도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폭정에 거부하여 민족을 구원하려던 한 영웅의 이야기는 전쟁의 공포에 두려워하던 스위스 동맹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이탈리아 북부와 프랑스 남동부를 지배하던 사보이 공국은 수백 년 동안 인접지역에 있는 스위스 제네바를 다스려왔다. 인구 6천명이 살던 교통의 요충지 제네바는 교황이 지명한 주교가 다스리던 독립 도시였다. 그래서 사보이 공작이 새로운 주교를 임명하고, 점령군을 통해서 지배를 강화하자 목숨을 걸고 싸웠다. 1525년에 주교와 모든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두려움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웃 도시 베른 등에서 온 스위스 동맹군의 도움으로 마침내 제네바는 독립을 하게 되었고, 1535년에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과거체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교개혁으로 가입하였으며,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post tenebras lux)는 문구를 도시의 표어로 채택하였다. 1602년 11월에 다시 재침공을 가해왔으나, 완전히 무찌르고 독립하였다.
3) 흑사병과 심판의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강박관념은 중세 말기 유럽 사람들에게 강하게 남아있었다. 흑사병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간주되었다. 일반인들의 의식주 생활환경이 너무나 불결하고 위생상태가 열악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체에 필요한 기본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면역력이 극히 저하되어 있었다. 여러 항구를 드나드는 이탈리아 상선들에 실린 짐들 속에는 벼룩과 쥐가 득실거리고 있었다. 1347년 10월 이탈리아 제노아 선박들이 시칠리에 당도하면서 흑사병이 발병했고, 다음 해에는 남부 독일로 확산되어졌으며, 영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지저분한 오물들이 뒤섞여있는 더러운 거리와 습기에 가득 차 있는 건물의 음습한 곳에는 쥐와 벼룩들이 들끓었다. 일단 사람에게 감염이 되면, 기침과 재채기를 통해서 병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졌다. 한번 감염이 되면 흑사병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무시무시한 치사율을 드러내는 흑사병에 감염되면 림프선이 부어올랐고, 피부에 출혈이 있어서 검은 반점과 검은 색 버짐이 나타났다. 그래서 흑사병이라고 불렀는데, 마지막 단계는 피를 토하고 고열을 이기지 못하다가 사망하였다. 몸 속에서 나오는 물질들은 병균에 감염되어져 부패한 것들이, 땀, 배설물, 침, 숨 등에 섞여서 몸으로부터 밖으로 나오는 순간에 악취가 진동했다. 소변의 색깔도 검은 색이라서,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시켰다. 어떤 도시에는 인구의 절반이 죽기도 했다.
흑사병은 언제 어떻게 옮겨지는지도 모른 채 확산되었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박테리아에 감염이 되면 혈관 속에서 문제가 발생하여 패열증으로 쓰러졌다. 1347년부터 1353년 사이에 퍼진 전염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약 2천 5백 만명이 희생되었다. 공포스러운 죽음은 각 지역의 미풍양속을 바꿔놓았다. 부모가 감염된 자녀를 내다 버렸고, 역시 자녀들도 병으로 죽은 부모를 버렸다. 심지어 교황의 경우에도 페스트에 감염될 경우에는 종부성사를 받지 못할 정도였다.
1505년 가족의 비극적 사망을 경험하게 되는 루터도 페스트로 인해서 동생 하인츠와 바이트를 잃게 되었다. 루터는 둘째 아들이었고, 네 명의 누이들이 있었다. 자주 흑사병이 창궐해서, 유럽 전 지역에는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이 나왔는데, 1505년 6월 13일, 에르푸르트 대학에서도 교수 세 명이 한꺼번에 사망했고,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람들은 차라리 수도사로서 죽게 된다면, 위대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가 수도사의 길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런 상황에서, 집에서 에르푸르트 법과대학으로 돌아가던 길에, 7월 2일 벌어진 무시무시한 천둥번개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은 우연히 벌어진 낙뢰사건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이전에 있었던 형제들의 죽음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1519년 여름, 유럽 전 지역에 전염병이 확산되어서 인구의 삼분의 일, 혹은 사분의 일이 몰사하고 말았다. 유럽의 가정들은 엄청난 비극에 휩싸이고 말았다. 츠빙글리는 성도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고 돌보다가 자신도 감염되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시를 남겼다. 다행히 은혜를 입고 회복되었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생애 속에 개입하여서 호의를 베풀어주신 바에 따라서 살아난 것이 은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줄어들었지만, 비텐베르크에서는 또 다시 1527년에 흑사병이 발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피신을 떠났다. 루터의 집은 원래 수도원 건물이었기에 숙소로 사용되면서, 많은 환자들이 머물러서 치료를 받았다. 루터가 "치명적인 흑사병으로부터 도망해야 하는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을 정도였다. 여기에 다가 매독병도 널리 확산되어 있어서, 군인들, 성직자들, 농민들, 심지어 교황까지도 감염되었다.
이처럼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되었기에, 면죄부 판매가 상상치도 못할만큼 성공적으로 판매되었던 것은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옛 신앙이 무너져 내리던 시기에,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품게 하는 새 소식이 될 수 있었다.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유입으로 신속하게 기능적인 소상공인들과 상업이 발달하였다.
종교개혁을 받아들인 제네바는 새로운 정치적 희망을 꿈꾸고 있었다. 칼빈은 이처럼 전쟁의 공포와 불신, 주교에 대한 불신과 외부인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도시에 설교자로 사역하면서, 불안하고 두려움에 빠진 원주민들과 각지에서 몰려온 6천여 명의 종교 피난민들이 가담함으로써 도합 인구가 1만 2천명에 이르게 된 도시의 문제들을 다뤄야만 했다. 칼빈은 모든 노력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도시에 만연된 불신앙과 신성모독을 고치고,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을 경건하게 증진시키는 노력에 치중하였다는 점이다.
복음을 통하여 제시된 구원의 은총에 확신을 가지도록 선포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교리를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로 선포하였다. 오직 은혜로만! 중세말기와는 달리 은혜에 대해서 번잡한 신학적 이론만을 개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기초하여 가장 순수한 복음적 사유방식과 행동양식을 제시하였다. 죄인을 향하여 값없이 주시는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가 역동적으로 나타나서 생명이 회복되어지도록 개입하는 것을 의미했다. 중세 말기의 쇠락해가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던져진 은혜의 교리는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지만, 결국 루터와 칼빈 등은 이단자들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오직’ 은혜만인가, ‘최우선’이 은혜인가?
2. 은총의 교리 재구성
종교개혁자들은 어떻게 죄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중세 말기에는 벌어진 비극적인 사회 현상들로 인해서 (전쟁, 교황권의 대립, 전염병, 지역주의 등)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극렬한 공포심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다. 죽음의 맛을 느끼며 고통의 세월들을 보내던 사람들에게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 교회가 가르친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시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 용서와 사죄를 주시는 구원의 복음을 증거 하였다. 종교개혁은 성경에 근거하여 은총의 교리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였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고, 죄인을 긍휼히 여기사 기꺼이 만나주시고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1) 오직 은혜로만이냐 또는 은혜 최우선주의냐?
종교개혁자들은 은혜의 경륜에 주목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선포된 핵심적인 교리는 은혜의 복음이었다. 은혜란 죄인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호의이다.
은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것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가운데 은혜가 시행되어지고, 성령의 적용사역으로 성도들의 심령 안에서 빛을 비춰주신다.
"오직 은혜로만!"이라는 교리의 핵심은 죄인들이 차츰 공로를 세워 나가면서 더욱 더 하나님이 인정하실만하게 매력적으로 변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죄인은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하나님에게 용납되거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이 정죄당하지 않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때문에 죄인은 이제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되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신성한 임재방식과 행동양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은혜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호의, 자애로우심이다. 은혜란 전혀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베풀어주시는 긍휼하심이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는 더욱 넘친다"고 하였고, 죄를 이기고 왕노릇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이스 벌코프는 은혜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근본적인 개념은 축복들이 은혜롭게 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값없이 주시되 그 어떤 공로나 요청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는다. 은혜라는 단어가 사용된 대부분의 신약성경에서는, '카리스'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곳에서는 사람의 가슴 속에 주어진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호의를 의미하며, 성령의 효과적 작동에 의해서 시행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 죄인의 심령 속에는 변화된 능력이 나타난다. 은혜란 생활 속에서 엄청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은혜는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자애로운 사랑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의 인격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 시행하시는 독특한 성령의 임재와 역동적인 특성이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다" 고 고백하였다 (고전 15:10). 갈라디아서 1장 15절에서는 "내 속에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구원의 은혜를 풀이하면서, 모든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나온다고 확신했다 (엡 2:8). 여기서 은혜는 강력하고도 역동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하나님의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극렬하게 반항하고, 증거자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일망타진하려고 덤비던 사울에게 일어난 엄청난 사건을 설명하는 데에는 은혜 밖에 없다. 은혜 외에는 다른 단어란 어울리지 않는다. 사도 바울에게서 은혜라는 단어는 그의 삶 속에서 일어난 회심 사건과 같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한다.
어거스틴의 생애를 바꿔놓는 엄청난 변화는 밀라노에서 일어났다. 세속적인 출세를 향해서 달려가던 그가 회심을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한량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작동한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황제의 권세 아래서 출세하려는 야망을 갖고 달려가던 어거스틴은 청년기에 꿈꾸고 살았던 길에서 급격히 돌아서게 된다.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자신의 영적 상태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급기야, 진정으로 죄악된 자아를 회개하고 밀라노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아들이 죽음에 이른다. 그는 고향 아프리카 북부로 돌아가서 일생동안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노력했고, 「고백록」에서 전 생애를 걸쳐서 추구하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어거스틴의 회심 이야기는 청교도들이 가장 듣기를 즐겨하던 예화가 되었고, 수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
훗날 어거스틴을 일컬어서 "은총의 신학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에 맞서서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성취를 이뤄야만 구원의 은총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죄를 용서받고 원죄의 형벌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라고 하는 "선행적 은총"이 있어야만 한다. 믿음과 회개를 수반하면서 "유지하는 은총"을 주시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향해나가도록 "예방하는 은총"도 내려주신다.
2) 스콜라주의자들과 종교개혁자들의 대립
중세 후반 유럽에서는 낡은 종교에 대한 신앙이 무너져 내렸다. 사회의 갖가지 처절한 현상들 속에서, 해답을 갈망하던 자들에게 은혜라는 해답이 주어졌다. 종교개혁자들은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절망하던 자들에게 낡은 종교의 허울을 벗어버리는 변화를 경험하게 허락하셨다. 종교개혁들 대부분은 중세 말기 가톨릭 신부들이었다. 루터와 그 주변에 있던 동료들, 츠빙글리, 부써, 파렐 등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자 로마 가톨릭에서는 파문하였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란 교리적 구호가 아니었다. 그저 모호한 말로서 체계화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자들의 삶 속에서 체험되어지는 생명의 증거들이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이 나타나서 새 힘을 부여하여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죽음과 전쟁과 죄가 넘실대던 폭풍의 바다에, 암흑같이 어두워서 전혀 소망이 보이지 않던 좌절의 시대에, 하늘로부터 은혜의 생명줄이 던져졌다. 칼빈은 극적으로 제네바의 설교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시편 주석 서문에 밝힌 바 있다. 마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나게 되는 것과 같다고 고백했다. 칼빈은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가장 좋아하였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은혜의 개념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규정들을 설정해 놓았다. 먼저, 확실하게 행동 가운데서 구체화되는 "실제적 은총"(actual grace)과 새로운 피조물의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습관적 은총"(habitual grace)으로 나누었다. 습관적 은총이 보다 실제적 은총으로 행동화하는 것이 강조되었다. 중세시대에는 "비창조된 은총"(uncreated grace)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 자신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 모든 다른 은혜의 기초가 되는 것이고, "창조된 은총"(created grace)은 개인의 성격과 본성에 따라서 비창조된 은총이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은총이다. 따라서 신비적인 성례를 통해서 은혜의 주입을 강조했다. 미사, 고해성사 등 일곱 가지 성례들에 참석하게 되면, 자신들의 영혼 속에 주입되어진다는 초자연적 실체를 받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그러한 맹목적이고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은총을 받게 된다는 허상을 깨트려 버렸다. 성직자들이 성례의 시행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입시켜주고자 각종 예식을 시행한다는 것이 허구적인 도그마, 강압적 권세를 동반하는 억지주장이었음을 파헤쳐 버렸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전 과정은 "오직 은혜로만"(sola gratia) 주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의 최우선주의"(gratia prima)을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용어는 매우 비슷하지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은혜가 최우선적이다는 말은 먼저 은혜를 받은 후에 사람의 의지가 작동해서 선한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앞서는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은혜가 제일 먼저 고려되어야할 선행적인 위치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여전히 신인협력을 주장하는 반펠라기우스주의(Semi-pellagianism)를 강조하고 있다.
은혜에 근거하여 인간의 의지적 성취로 선행을 하게 되면, 공로를 쌓아서 의롭게 되고자 했던 것이 스콜라주의였다. 의로운 일을 행함으로 의인이 된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가르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과 행복의 절정을 이루는 자족적인 순수 관조를 강조하면서, 스스로 중용의 미덕을 발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헬라의 도덕철학이 스콜라주의에 혼합되어져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을 강조한다. 루터는 오직 은혜로만!을 강조하였고, 은혜야말로 칭의를 주시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는데, 그 누구도 율법주의와 자기 우월감에 빠지지 말아야할 하나님의 조치라는 점을 성경에서 파악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1516년 가을, 의로움에 대하여 경이적인 깨우침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사람이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즉 성례에 참여해야만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움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을 루터가 알게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스스로 노력하는 방법만을 강조하였기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을 깨우치지 못한 것이다.
만일 인간이 스스로 노력과 고통을 통해서 의로움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자신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루터는 로마서 1장 16-17절에서 깨우친 것이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시켜 주신다(imputation). 죄인으로 하여금 성령의 임재와 보호 가운데서 은혜가 작동하게 하신다. 죄인의 변화와 보호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단독적으로 작동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단독 사역이다. 스콜라주의는 은혜의 신학을 변질시켰다. 중세 시대에는 은총의 교리는 세례를 받고 여러 가지 성례들에 참여하면서 주입되어지는 것(infusion)이라고 가르쳤다. 루터는 로렌조 발라의 저술을 통해서 스콜라주의자들의 은혜 주입설이 불가타 역본 속에 왜곡되어져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는 구절을 은혜 주입설에 맞게 고쳐서 번역했던 것이다. 지속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가 성도의 내적인 본성 속에 채워지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율법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성도들에게 전가되는 것(imputation of active obedience)과 죄의 씻음이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성경해석에 공통적으로 담겨있다. 루터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율법에 대해서 순종하셨고 이것이 성도들에게 전가된다"고 밝혔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와 성경주석과 설교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매우 강조하였는데, 지식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와 올바른 경외심으로 구체화 된 "경건의 신학"을 세우고자했다. 칼빈은 성경 안에서 구원을 주시는 지식을 아는 것은 결국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가 되었고, 죄인들은 예배와 성만찬의 예식에서 은총에 대한 맛을 보면서 감격과 감사를 토로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근간으로 하는 칼빈의 구원론은 로마서 5장 19절에 대한 주석과 「기독교강요」 (최종판, 1559)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용납하신다는 해석으로 제시되었다.
오시안더가 그리스도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주입된다고 가르치는 "본질적 칭의론"에 반대하여, 칼빈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으심이 성도들의 의로움으로 간주된다고 반박했다.
칼빈은 로마서 5장 16절,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는 구절에서, 은혜의 개념을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사도가 은혜를 죄와 대조시키고, 은혜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사를 죽음과 대조시키는 것은 적절하다. 따라서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비참함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그의 선하심 또는 사랑을 값없이 거저 베풀어 주시고 그 증거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을 의미하고, "은사"는 이 긍휼하심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 곧 우리로 하여금 생명과 구원, 의와 새 생명을 비롯해서 온갖 축복을 얻게 해주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은혜를 정의할 때에, 사람들의 심령 속에 주어지는 하나의 속성에 불과하다고 가르쳤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근원으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충만으로부터 생명수의 은혜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풍성하심으로부터 우리의 가련함과 결핍이 해결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 흘러나온다.
은총의 교리는 훨씬 더 정교하고 광범한 주제에 연결되어졌다. 은혜가 주어지면, 죄인이던 성도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칭의는 성화와 뗄레야 뗄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행되어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신분이라는 주어진다(고후 5:17). 은혜의 교리가 확장된 곳은 일반 세상에서의 일터였다.
칼빈은 "특별은총"과 "일반은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택함 받은 자녀들만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성도가 되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런 반면에, "일반 은총", 혹은 "보편적 은혜"를 통해서 사회에 죄가 억제되고, 여러 선한 일들이 증진되어진다. 일반 은총을 받아서 신앙적인 열망, 관대하게 남을 배려하는 행동, 사회적인 친밀관계를 유지하게 되고, 예술, 학문, 의학 등을 성취해 나간다. 보편은혜는 본질적으로 비구원적인 은혜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공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계속)
칼빈 “칭의와 성화, 구별할 뿐 분리할 수 없다”
3) 십자가를 재발견하다
은혜의 교리는 그저 오래 동안 잊혀져 있던 주제들 중에서 하나를 재발굴했다거나, 왜곡된 교리를 재해석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은총으로만"은 종교개혁의 신학사상을 전체적으로 규정짓는 근본적인 원리이다. 루터가 자신의 내면적인 죄와 싸우면서 객관적인 구원의 증거들에 대해서 고뇌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죄의 권세를 부수고 정죄를 깨끗이 없애버림으로써 죄인에게 마음의 평온을 내려주시는 것을 확실하게 터득하였다.
은혜를 주시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위에서 흘리신 고결한 보혈로 대속적 형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루터는 구원의 방법을 찾아서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하다가, 십자가의 신앙을 터득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난 결정체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되었기에,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고난과 핍박을 견디어 냈고 박해를 당하다가 순교하였다. 이름없이 고통 속에서 신음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소망이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루터가 강조했던 십자가 신학(theology of cross)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그거야말로 기독교 신자라면 당연히 믿어야할 기본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주장을 내놓고 논쟁을 하다가, 교황청과 황제로부터 동시에 이단으로 정죄를 당했다. 현대 복음적인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은 모두 다 예외 없이 십자가를 믿는 신앙인들이다. 1518년 4월에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루터가 처음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토론 주제로 삼아서 강력하게 설명했다. 사실 요즘에 이런 설명을 듣게 되어지면, 다소 어리둥절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은 복음의 핵심으로 십자가를 믿는 신앙이 당연한 일인데, 스콜라주의와 수도원 제도에 빠져 있던 16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주장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루터가 십자가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는 글을 접하면서, 지극히 상식적인 소리를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 주제에 대해서 박사학위 논문들이 많이 나왔는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금 종교개혁이 오백주년에 이르게 되니까, 그가 발표한 것들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루터가 하이델베르크 논쟁에서 제시한 십자가 신학은 마치 새로운 보물을 가져다가 성도들에게 나눠준 것과 같았다. 무지한 상태로 무작정 로마 교회에 끌려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통해서 깨달은 바, 하나님이 하신 일들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깨달음을 제시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지극히 어리석은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무지한 성도들을 도와주려는 목회적 동기에서, 강요된 신앙에 따라서 무작정 휘들리고 있던 당시 성도들에게 루터는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스콜라주의 신학의 왜곡들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졸업생을 위한 토론을 위해서 1517년 9월 4일에는 97개 논제들을 작성했다. 이 논제들은 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성과 의지에 기초를 둔 공로주의와 스콜라주의 신학을 맹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어서 10월 31일에 발표한 95개 조항은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점차 논란이 커지면서, 루터는 1518년 4월 11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28개조를 발표하고 토론에서 승리했다. 그 중 20번째 항과 21항에서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강조했다. 루터는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라고 주장했다. 그 반대 개념은 영광의 신학이라고 21항목에서 설명하였다:
"영광의 신학자는 악한 것을 선하다 말하고, 선한 것을 악하다고 말하는 자이다.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물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말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시 고난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고난보다 행위들을, 십자가보다 영광을, 연약함보다 권세를, 어리석음보다 지혜로움을,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선호한다. 바로 여기에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 존재한다(빌 3:18).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십자가와 고난을 증오한다. 하지만 그들은 선행들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선함을 악하다고 부르고, 선행의 부끄러움을 선하다고 부른다. 그러나 이미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와 고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벗들은 십자가를 선하다고 하고 선행을 악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십자가를 통하여 선행들이 허물어지고 공로를 통해서 세워진 "옛 아담"이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미 고난과 치욕을 통하여 완전히 비워지고 낮추어짐으로써 인간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요 선행들도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 자신의 선행들을 근거로 우쭐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자가 신학에 담긴 중요한 교훈들에 대해서 구별해 보자.
첫째,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위대한 영광과 큰 권능을 수반해서 승리를 드러내실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정반대의 계시이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는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시는 수동적인 모습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수치스럽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십자가 위에서 죄인의 몸으로 죽으시는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나타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성도들은 겸손하게 배워야만 한다. 인간은 연약하고 어리석으며 비천하고 낮은 사람들을 천하게 취급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살아가라는 교훈이요, 겸손한 생활 방식이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시고자 인류에게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낮아지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의 원천이요, 신앙인의 삶에서도 모범이 되는 행동양식이다.
둘째, 이성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모순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도 이성을 의존하여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이성은 장엄하고 거대하며 영광스럽고 권능이 충만한 분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을 기대한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슬픔, 비통, 비극, 절망, 연약한 상태로 자신을 드러내셨다.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모습으로 이성이 가진 한계를 지적하신다. 사람들은 성공과 재물과 건강이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의 모습이라고 가르친다.
건강과 성공, 재산과 명예, 출세와 야망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오직 고난과 실패로 다가올 뿐이다.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운 일도 서슴지 않고, 오직 자기만족과 자기 영광을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다. 땅위에 쌓은 재물과 지위가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이자 신앙의 모델이라고 강력하게 증거하여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모든 욕망들은 다 어리석은 것이라고 전도서에서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신령한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인간의 주도권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신다. 십자가의 고난, 연약함, 치욕을 당하심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심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졌던 선입견을 포기하도록 요청하시는 것이다. 그래야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게 된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말미암아 큰 영향을 받는다.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넘겨지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고난을 통해서 영광으로 나아간다(행 11:26).
이제 십자가의 신학은 소망의 신학이다.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고난의 진정한 목표는 부활이요, 승천이며, 재림에 있다. 현대 교회는 십자가 신앙을 회복함과 동시에,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과 교회설립, 재림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더 큰 비전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3) 칭의와 인간의 공로
중세시대 구원론에서는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다루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과의 격차가 너무나 크고, 엄중했기에, 중세교회에서도 정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 마치 새로운 골칫덩어리로 등장한 루터가 여러 논쟁에서 성경적 신학 사상을 제시하자, 새소식이 순식간에 독일, 스칸디나비아 북구 유럽, 영국 등으로 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우리는 루터가 성경을 강해하는 동안에, 특별히 칭의론 혹은 칭의 교리에 대해서 깊은 깨우침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터의 칭의교리는 1515년 겨울부터 1516년까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지속된 로마서 3장 28절에 대한 강해에 담겨있는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결국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려야한다고 우리는 주장하고, 인식하고, 확증하여야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율법의 행위로부터 떠나서 믿음으로 얻는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죄인임을 자각하였고, 결코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의로움을 획득할 수 없음을 절감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의로움이란 인간의 내부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의 깊은 인격 속에다 쌓아가거나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중세시대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집중했었다. 그 이유는 상당히 오랫동안 일부 어거스틴의 저술들에 의존하면서도, 다소 명쾌하지 않은 선행과 공로사상이 큰 세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칭의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에서다. 그는 이 구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의로움이 있기에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심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거스틴이 풀이한 바에 따르면, 죄인의 칭의는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주시는 값없이 베풀어주신 선물이다. 어떻게 이런 의롭다하심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한마디로 말로 하자면, 행위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법에 의한 것이다. 기록된 문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이다. 행동의 공로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은혜에 의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믿음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칭의란 외부적 선언만이 아니라, 죄인의 변혁도 포함된다는 어거스틴의 주장도 있었다.
헬라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성경본문에 포함된 기본적인 개념이 변질되었다. '의롭게 하다'는 뜻은 헬라어 "디카이오운"(dikaioun)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번역되면서, "유스티피카레"(iustificare)로 바뀌었는데, "의롭게 만들다"는 의미로 일부 재해석 되었다. 이러한 기본 개념에 따라서,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펠라기언주의 혹은 은총과 의지가 합력하여 성취한다는 반펠라기우스주의를 만들어냈다. 신인협력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기 보다는 사람이 의를 쌓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졌다.
초대교부들을 연구한 데이빗 라이트 교수는 어거스틴의 칭의론 부분을 보다 상세하게 연구하여 발표하였다. 어거스틴의 문장들을 살펴볼 때에, "내가 의롭게 하다"는 "유스티피카티오"(justificatio)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다소 후대의 학자들처럼 명쾌하지가 않았다고 주장한다. 어거스틴에게서는 의롭다는 것이, 성도의 내적 변화냐 혹은 하나님으로 나오는 외부적인 선언이냐를 구별할 만큼 명쾌하게 제시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를 논박하는 문서에서 어거스틴은 "불의하는 자들은 반드시 의롭게 되어져야만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 의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고, 합당하게 법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로마서 1장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도들에게 제공하여 주심으로써 의롭다고 만드신다는 것이다 (justos facit). 시편 3:8절에 대한 해석에서도, 어거스틴은 두 가지 내용을 모두 다 한 문장에 넣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불의한 자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이다"(qua induit hominem cum justificat impium). 하나님의 의로움을 은혜의 선물로 주시는 방법을 통해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율법의 개념을 통해서 가르쳐주실 뿐만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수단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마치 물길과 같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에게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루터는 신앙을 부부 사이의 혼인서약과 같은 이미지로 풀이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견고하고도 분명한 지식이라고 규정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우리가 가진 신앙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신앙마저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외적인 기초이고, 신앙은 개개인에게 주는 내적인 수단인데, 모두 다 하나님의 은혜로 제공되었다.
적어도 어거스틴에게는 사람이 수동적으로 은혜를 받아서, 그 후에 의롭게 되어지는 노력을 하므로써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는다는 구절이나 개념은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시행된다고 보았다. 반펠라기우스주의라고 볼 수 있는 여지란 전혀 없다는 의미이다. 선행을 하면 은혜를 얻게 된다는 개념은 전혀 없다. 정반대로 되어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기준을 채우기 위해서 성도가 먼저 스스로 공로와 선행을 통해서 은혜를 채워나가는 과정을 중시하였다. 그러한 칭의론의 핵심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제공하는 일곱가지 성례를 통해서 은혜가 주입되어진다고 해결책과 연계되어졌다.
루터의 칭의론 이해는 1514년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사람의 노력이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어지던 스콜라주의 신학을 버리고, 칭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혁신적인 변화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루터는 신학파 (via moderna)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었으나,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의로움"이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수동적인 성격으로 이해해야만 성경을 제대로 풀이한 것임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1515년과 1516년 사이에 로마서 강해를 하면서, 루터는 어거스틴의 은총론을 재발견하면서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의 가르쳐 온 인간의 공로사상을 버리고 새로운 해결방안을 찾게 되었다. 결국 루터는 "의롭게 되다"는 동사는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게 되었다. 물론, 은혜를 입은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음으로 인해서 주어지는 화목의 관계이다. 중세교회에서는 그 누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시원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죄의 실체는 분명히 사람들의 양심적인 가책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죄의 삯인 사망에 대해서 용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 역시 실체가 있다. 정죄가 아니라 용서와 의롭다하심이 주어진다. 그리스도의 보혈은 인간의 죄값을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신 것이지만, 망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리스도는 승리자가 되신 것이다! 이것이 루터가 주장하는 승리자 그리스도라는 대속의 교리이다.
4) 죄의 사면과 의로움의 전가
종교개혁은 예민하고 냉철한 신학자들의 지도력에 의해서 로마 가톨릭의 문제점들과 오류들을 깨닫고 새롭게 성경적 신앙을 회복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그런 확신들이 전파될 수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인 변화를 염원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려던 사람들에게 부응하는 해답이 신앙의 중심지인 교회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회질서를 염원하던 성도들의 갈망을 받아주면서도, 가장 적절하게 감동을 주는 대중적 지도자들이 바로 개혁신앙을 토해내던 설교자들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이 남긴 저술들에는 핵심적인 기독교의 진리가 새롭게 잘 정리되어져 있어서, 누구든지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칼빈의 핵심적인 성경연구가 담겨있는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대전이라고 불리운다. 1536년 초판은 성경의 기초적인 가르침을 요약해 놓은 소책자였는데, 1559년 최종본에서는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하는 교과서로 확장되었다. 가장 순수한 믿음의 내용을 포괄하겠다고 마음에 다짐을 거듭한 칼빈은 교회의 목사이자, 교사로서의 소명의식을 강렬하게 느끼면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집약한 신학적 교훈집이며, 간추린 성경의 교과서이자, 간략한 지침서로서 모든 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제공되었다. 종교개혁이 낳은 최고의 걸작품이다.
총 80장으로 확장된 「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칼빈이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 주제는 칭의 교리이다. 그만큼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던 교리이자, 루터의 유산을 물려받은 칼빈의 연구가 돋보이는 부분이다. 칼빈은 다섯 장에 걸쳐서 칭의의 개념과 믿음과의 관련성, 성화와의 구별됨을 명쾌하게 제시하였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자신의 호의로서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받아주심이다. 그리고 칭의는 죄의 씻음과 그리스도의 의로움의 전가라는 요소로 구성되어진다."
칼빈은 칭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중요성경 구절들을 제시하였는데, 로마서 4:6-7, 5:19, 그리고 고린도 후서 5장 18-21절이다. 성도들은 값없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는다는 칼빈의 강조는 어거스틴에게서는 전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칼빈은 의의 전가를 가능하게 만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교리를 견고하게 강조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은 결코 동일하지 않음을 강조하였다. "사람들이 자유의지의 능력에서 나오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에 덧붙이고자 아무리 애쓸지라도 결국 그것은 좋은 포도주를 더러운 물로 희석하는 것처럼, 그저 오염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서 은혜로 받아주시는 것 뿐이다. 성도가 노력으로 세우는 그 어떤 공로나, 도덕적 변화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5) 은혜의 표지들과 훈련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근거로 삼고,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철저히 은혜를 입은 결과이자, 그 은혜를 표현하는 삶의 과정이다. 은혜를 입은 성도들의 성숙과 영혼의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주셨다. 종교개혁자들이 성례에 대해서 뜨거운 논쟁을 전개했던 것은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보았기에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춰주셔서 성례라는 은혜의 표지들을 주셨다. 세례와 성찬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표적들이며, 이를 통해서 타락한 죄인들이 다시금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든든하게 세워져 나간다. 루터는 성례란 은혜의 약속들이라고 보았다. 죄에 대한 용서의 약속이라는 것이다. 칼빈은 말씀의 약속이 없다면 성례란 의미가 없다고 가르쳤다.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실재하는 것이다.
은혜의 방편으로서 성례는 믿음을 뒷바쳐 주고자 제정된 것이다. 약속을 믿는 신앙이 없다면, 성례란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바꿔놓았고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었는데, 앞으로 나아가도록 연약함을 고쳐주신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으로 훈련을 받아서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루터는 신앙이란 나무의 뿌리와 같아서, 견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하고, 열매가 맺어진다고 가르쳤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심령을 가진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소원을 이루어 나갈 때에 선한 열매가 맺어진다. 갱신의 과정이 성화인데, 성령님은 적절한 원동력을 제공한다.
우리는 칼빈의 구원론에서 중요한 통찰을 발견하게 된다. 즉, 성도에게 베푸신 믿음의 축복은 결코 공로가 될 수는 없지만, 은혜를 받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거룩한 노력을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성화가 칭의로부터 자라나서 평생 동안 점점 더 자신의 부족을 절감하게 되어지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 단지 구별할 뿐이지,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신은 성화를 동시에 붙들지 않고서는, 칭의를 붙잡을 수 없다.... 믿음과 선행이 함께 결합되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칭의의 근거를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 둔다는 사실이다."
칭의를 얻은 성도는 자신과의 싸움을 지속하며, 내적인 투쟁을 지속한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활동하는 가운데 죄와 싸우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신다. 칼빈은 로마 가톨릭에서 가르치던 바, 성화가 완성되면 칭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들은 죄와 죽음의 통치아래 있었던 상태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움을 드러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필자는 칼빈이 남겨준 중요한 구원의 교리가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믿음으로 역사하는 성령의 적용 사역들은 모두 다 사람이 능동적으로 노력하여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믿음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받은 은혜를 가지고 능동적인 믿음의 생활을 하는 측면에 대해서, 칼빈은 성도의 노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믿음을 선물로 받아서, 인간은 수동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항상 수동적인 상태로만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성도는 언제나 사랑을 베풀어야 하고, 이웃을 향해서 은혜를 되돌려 주라고 자극을 받는다.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된 기독교인들은 수동적 태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을 이루려는 성도는 세상을 향하여서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순종하는 삶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성화의 진보를 향한 종교적인 노력을 하면서, 철저하게 인간의 자존심과 자만심을 벗어버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있기는 하지만, 구원의 공로가 되기에는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거짓되고, 하나님만이 참된 분이시다.
어디에나 알곡과 가라지가 있다(마 13:24-30). 참된 성도와 거짓 성도들 구별하는 일은 하나님께 달려있다. 오직 목회자와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서 분명한 설명을 제시하도록 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훈련된 군사를 배출하듯이 성도들에게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며 함께 격려하고 성찬을 나누는 제자훈련을 실시했다. 기도에 힘쓰면서 서로 환란의 시대에 격려하는 등, 작은 성경공부 모임은 경건한 성도들의 훈련에 필수적이었다.
칼빈의 칭의론과 성화론에서는 완벽주의와 갱신주의가 철저히 배척되었다.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이상적인 영적 훈련을 제시하면서 도덕적 완전주의를 향해서 노력했지만, 자기진보와 자기 정당화에만 몰두하다가 그치고 말았다. 중세시대 스콜라주의와 각 종단들은 이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은사를 활용하지 않았고, 오직 현재 시대에서 완전한 상태에 이르고자 진력했던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좋은 평가와 높은 점수를 받으려 했던 자들이었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의를 세우고자 하여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고,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칼빈은 고립된 영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도리어 가정, 세상에서의 소명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사소한 집안일들이 곧 성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이다.
‘성속 이원론’ 극복을 위한 종교개혁자들의 관점
3. 세상에 대한 긍정적 관점과 비판정신
훈련을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전진해 나가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빛을 비춰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죄인을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셨음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살아가는 인생관 전체를 재구성하였다. 은혜의 선물을 받은 성도들이 구성원이 되어서 건설한 세속사회, 세상과 정부와 문화 예술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보았다.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의 세상과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심이 베풀어주신 선물"로 환영을 하면서, 기쁨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중세말기 로마 가톨릭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관점으로서, 종교개혁자들이 세상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교회 안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는 기독신자의 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확장된 것이다. 타락한 피조물들의 세상에 질서를 회복하게 하도록 성도들이 참여하여 고쳐나가고 자극하는 것이다.
필자는 헨델의 메시야에 나오는 "할렐루야"라는 웅장한 찬양곡을 자주 듣고 있다. 맑은 트럼펫이 고음을 내는 부분을 필자는 아주 좋아한다. 만왕의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왕, 주의 주라고 외쳐 부른다. 모든 청중이 일어나서 경청한다. 만왕의 왕 앞에서 감히 앉아있을 수 없다. 이런 찬양곡은 하늘나라에서도 천사들이 연주할 것이다. 요한 세바스챤 바하의 찬양곡에서도 동일한 감동을 느낀다. 찬양 음악은 은혜를 입든 자들에 의해서 빚어진 것들이요, 창조적 노력의 산물이다.
개혁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긍정적 관점과 적극적 참여론을 제공하였다. 중세시대에 스콜라주의에서는 기독교 교리가 개념적인 신학이론으로 그치고 말았는데,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는 영혼의 고통에 짓눌려 있던 자들의 고뇌를 풀어주게 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느냐로 고심하던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복음으로 주어지는 의로움에 근거한 구원을 신뢰하게 되면서, 신자들은 일상의 삶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확신마저도 갖게 된 것이다.
칼빈은 타락한 피조물이 건설한 세상 문화와 도시 문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창조하신 "극장"이자 "무대"라고 보았다.
세상은 마치 하나의 극장과 같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관객들에게 펼쳐지고 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지혜를 펼쳐 보이신다. 칼빈의 창조론에서 바라본 세상 질서는 타락한 피조물이 건설한 죄악된 세상이라서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세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타락한 자들의 세상이라도 회복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려주셨던 창조의 질서는 모두 죄로 인해서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있어서 회복과 재창조의 소망이 살아있듯이, 인간사회와 문명도 역시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11편 4절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세상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처음 세우셨던 그 질서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신다는 점이야말로 우리 신앙의 영광이다"고 풀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모여서 구성하는 사회에서도 질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공동체와 지도자에게 사랑과 보살핌을 베풀어주시기에 여전히 세속적인 사회라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의 적극적인 사회적 관점은 히포의 어거스틴이 남긴 사상과 관련되어져 있다. 어거스틴은 로마 제국주의 시대가 무너져 내리는 공포를 직접 체험하면서, 개인과 사회에 영향을 끼친 죄의 효과를 명쾌하게 규정하여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저술을 남겼다. 인간의 조직은 죄로 인해서 손상되고 왜곡되었으며, 단순히 개인 차원의 고백만으로는 무너진 질서를 회복할 수 없다. 죄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구조적 문제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칭의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관계의 틀을 올바르고 똑바로 회복시키는 일이 제일 먼저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어거스틴과 칼빈에게서 공통적인 점은 이원론의 극복이다. 개인 차원의 칭의와 공동체 차원의 칭의가 각기 따로 따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세상 속에서 타락한 인간의 질서를 바로 잡으면서 회복해 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인간성을 재창조하시고, 만물의 창조 질서가 회복되도록 사용하신다.
세상에서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실제적으로 무슨 역할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감당하려는 동기를 갖게 되었다. 이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들은 인간 사회를 하나님의 뜻에 따르도록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최전방에서 뛰어보려는 추진력을 갖추게 되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되, 성도들은 결코 세상 속에서 몰락해서는 안되는데, 기독신자의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비판정신이 있어야하고, 세속 문화에 함께 휩쓸려가지 않도록 한걸음 떨어져서 평가할 수 있는 비판적 태도가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세상을 향해서 선지자적인 안목으로 비판적 설교를 서슴지 않았다. 칼빈은 "구별은 하되, 분리시키지는 않는다"는 원리를 자주 선포했다. 각기 독특성은 인정하지만, 결코 따로 분리시켜서 떼어버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세상에 나아가서 일하는 것이다. 돈에 휩쓸려서 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신자들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자 세상에 나아가서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행위이다.
16세기와 17세기에 자연 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한 사람이 칼빈이다. 피조된 자연만물을 더욱 자세히 알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천문학, 의학, 자연과학이 장려되었다. 벨직 신앙고백서 (1561)에서도 자연만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이 반영되어져 있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은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였고, 신부로서 성당에서 사역하다가 성경을 통해서 개혁적인 비판 정신을 터득하였다. 루터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던 독일 동북부에서 봉건 영주의 지배체제 아래서 사역을 했다. 대부분의 개혁자들은 근대 도시 사회에서 새로운 행동방식과 신앙적인 생활을 주도해 나갔다. 츠빙글리는 쮜리히에서, 마틴 부써는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바디아누스는 성 갈렌에서, 삐에르 비레는 베른에서 종교개혁을 지도해 나갔다.
특히 스위스 도시들이 종교개혁에 앞장을 섰던 것은 지리적으로 특수한 자유도시가 급속히 발전해 나갔기 때문이다. 스위스에는 절대왕정이나 봉건 군주가 없었고, 로마 가톨릭 주교들이 다스리던 체제가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차츰 도시마다 귀족들이 이끄는 도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개혁자들의 도움으로 신앙적인 통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교회는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유익하고도 결정적인 원리들을 제공하였고, 세상 질서의 회복을 위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생활의 요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수단으로 받아들여졌다.
각 도시 지역에 있던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이었다가 회심한 종교개혁자들은 새로운 형식의 삶을 추구했다. 개인적인 신앙의 고민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영혼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서 공동체 안에서도 필요하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도시 문화 속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는 일이다. 도시의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고립된 수도원 운동을 강조하지 않았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이 세상을 먼저 있는 그 모습대로 받아들이면서 변화를 시켜야만 한다. 도시의 문화는 이중적인 면모를 다 가지고 있어서, 기회와 부패, 희망과 타락, 역동성과 비정함이 혼재한다. 도시 문화는 경쟁적인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서 지어진 사회의 하부 구조와 상업적인 추악함이 죄악과도 깊이 결부되어있다. 현대의 도시에서는 도덕적 인간성의 고상함보다는 죄악과 방탕한 쾌락주의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큰 도시일수록 더 많은 구조악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비판하게 된다면, 수도원주의자들처럼 분리하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 세상의 도성 속에 함께 혼재한다고 가르쳤다. 안토니우스가 전개한 이집트의 수도원 운동에 따라가지 않고, 어거스틴은 도시의 교회의 감독이 되어서 영향을 발휘했다. 중세 시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책은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인데, "근대의 헌신"(Devotio Moderna) 이라는 경건주의 운동의 물줄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세상을 경멸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으로 압축된다. 수도사들은 현세에 관심을 갖지 말고 도피하여 고독한 은둔 생활을 추구해야만 한다. "근대의 헌신" 운동을 주도했던 헤르트 더 그루트(Geert de Groote)는 철저하게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여 물질적 소유에서 벗어나려 했다. 심지어 학문적 추구마저도 부인했다. 금욕주의와 독신주의를 고수하려면 수도원 경내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고, 가능한 한 자기 방 안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세상보다는 피안의 세계를 깊이 묵상하라는 것이다.
재세례파와 같이 급진적 개혁운동을 추진했던 자들도 세속질서에 저항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 세상이란 악의 소굴이라고 규정하고, 재산을 소유하는 것, 무기를 잡고 싸우는 것, 도시의 권세자들에게 세금을 납부하는 것 등 모든 것을 부정하였다. 이런 후예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 공동체 생활을 추구하고 있다. 재세례파는 지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아미쉬(17세기에 메노파에서 분리되어서 스위스 야곱 아만이 만들어낸 그룹으로 미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메노나이트(저지대 지방에서 메노 시문을 따르면서 농사를 짓던 자들이 미국 펜실베니아에 이주하여 세운 공동체), 후터라이트(스위스 산간지방에서 제이콥 후터를 따르다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사우스 다코타, 노쓰 다코타에서 살고 있는 자들) 등이 세속 문화로부터 분리적인 신앙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수도원의 성적인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자 세워진 수도원은 풍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되는 것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이고, 기독신자로서 공적인 책임을 폐기하는 행위였다. 세속사회의 공통적인 신념과 사회구조를 거부해버리면, 공동체의 질서체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체계와 조직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다. 수도원에 은둔자가 되어서 이 세상과는 어떤 접촉도 회피하는 길이 영혼의 고통을 벗겨주었던가?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교리가 수도원 운동에서 제공하지 못한 해답으로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의 확신을 제공하였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교훈들이 엄격한 규율과 개인적인 내핍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감격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1511년 경, 추기경 콘타리니가 남긴 서신들에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원리 속에서 구원의 기쁨을 발견하였다. 콘타리니 추기경은 미켈란젤로 등 일단의 "영적인 사람들"과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면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공유하였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가면서 퇴락의 길에 빠지기 쉽다.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요일 2:15-17).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다(요 17:15). 기독교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서 살아가는 길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목수로서 그렇게 가정을 위해서 일하였고, 제자들과 함께 세상 속에서 지혜와 진리를 깨우쳐 주셨다. 사도 바울은 스스로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했고, 시간을 아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16세기 초반,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타락과 퇴폐에 물들어서 순수성과 도덕적 권위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속적인 방법들을 직접 소유하고 사용했다. 보르지아, 교황 알렉산더 6세와 레오 10세 등은 교황직을 돈으로 사들였고, 군대를 동원하였으며, 쾌락을 즐겨서 자녀들도 많았다. 교황들은 사냥을 즐기면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거대한 건물과 호화로운 예술에 돈을 물쓰듯이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세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랑했다. 이들은 세상을 정복한 자들이 되려고 분투했는데, 결국 세상에 정복당한 꼴이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도시 지역의 사회문제를 품어 안고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루터와 칼빈이 그저 확신에 찬 설교와 출판물을 통해서 지역의 정치와 문화에 영향력을 준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직접 정치적인 권세자들과 맞부딪혀서, 술집을 축소하고 범죄자들을 몰아내며 교육의 확대와 출판업의 확장을 지속시켜 나갔다.
세상에 대한 긍정적 관점과 비판적 정신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던 칼빈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포도주를 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목회자들은 생활비의 일부로써 포도주를 제공받았다. 음식은 단순히 생존만이 아니라 풍미를 즐기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는 하루에 한잔, 주일에는 두 잔 이상의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타락한 물질주의에 맞선 종교개혁자들의 ‘노동 윤리’
4. 노동과 직업의 윤리
인류사회에서는 국가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정치적 직책과 정부에 관련된 일들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노동이나 생산을 담당하는 자들은 멸시하고 천대했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출현한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도, 정치 권력자들의 통치철학, 사회구조적 이념들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을 매우 천하게 취급하였다. 동양의 모든 사회에서는 유교적 가치개념에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노동자들은 권력자들이나 국가적 권세를 장악했던 자들에게 이용을 당할 뿐이었다. 군사력이나 경찰력을 장악한 자들과 학식과 학문을 가진 자들은 고상한 지위와 권위를 향위 했다. 생산자 계급을 경멸하던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도 만들어낸 계급사회의 당위성에서 나왔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일상 생활 속에서 노동을 감당하도록 격려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직업의 윤리를 제공했다.
1) 노동은 천한 것이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먹고 살아가기 위해서 몸으로 땀을 흘리는 생계형 노동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도 수도원에서는 노동을 천박하고 비루한 행위로 간주했다. 성직자들은 신령하고 중요한 일에 수종 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대해서만 최상의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고대 로마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으니, 노동을 하는 자들은 천민으로 취급하였고, 귀족 정치인들은 손을 사용하거나 땀을 흘리는 일을 멀리하였다.
노동을 천하게 취급하고, 노동하는 세상의 직업들을 하찮하게 멸시하게 된 것은 심각한 로마 가톨릭적 이원론과 윤리적 가치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두 다 고대 귀족적 계급사회의 유산이었다. 플라톤 철학자들은 이원론에 빠져 있었는데, 육체를 무시하고, 노동을 경시했다. 영혼과 이성의 활동을 높이평가하고 사람이 통찰력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구분했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이 저속한 것도 아니다
중세시대 수도원 제도 하에서는 하나님과의 완벽한 관계를 위해서 묵상이나 기도를 강조하였다. 일반적으로 노동은 부끄럽고 비천한 일이라고 취급하였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노동이 기도다"(laborare est orare)라는 구호를 내 걸었었고, 수도원 주변의 포도밭을 가꾸기도 했지만,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단 수도원 영내에서만 노동을 했고, 묵상이나 기도가 더 고귀한 일이라고 구별했다. 수도사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가꾸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노동이 필요하다고 가르쳤다. 수도원에서 수사들이 감당하던 노동의 대명사는 방 안에서 성경을 사본을 필사하는 일이었다. 출중한 어학 지식을 갖춘 수도사들의 노동으로 인해서, 지금 인류사회는 위대한 성경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1521년, 루터는 「수도원 서약에 대한 반론」을 출판하였는데, 한번 서약한 것을 기본적으로 영구히 지켜야할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Luther, Luther's Works, 44:251-400.
수많은 수도사들과 수녀들이 수도원을 벗어나는 양심의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독일에 있었던 수도원들이 대부분 해체되어졌다. 루터가 이분법적인 로마 가톨릭의 구분을 비판하였고, 세속적이라고 평가절하했던 일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세상에서 하는 일보다 더 고상하고 높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제기했다.
노동은 사람의 품위를 떨어뜨리게 하는 것이고, 비천한 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관념은 세속적인 직업을 가진 성도들을 일류가 아니라 이등 백성이라는 식으로 모두 다 얕잡아 보게 하였다. 중세시대 수도원제도 하에서는, 세상 속에서 살면서 일상 생활을 위해서 노동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에 대해서 걱정해야한다고 보았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밭에서 땅을 가는 농부가 하는 일을 택한 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노동을 귀하게 여기시고,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비천하다고 평가절하하지 않으신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자 휴 라티머(1485-1555)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사는 동안에 목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고된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신 분이었다고 지적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 모든 직업과 기술을 터득하는 복을 받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노동의 결과가 어떠했냐보다는 성도들의 노동이 더 큰 중요성을 가진다. 영적인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일이 저속한 것도 아니다. 사람의 노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될 수만 있다면, 매우 소중한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자신들이 노동한 결과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올렸다 (창 4:2-4). 유대인들은 매년 소출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서 감사 제사를 올렸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노동에 대해서 영예로운 평가를 내리셨다. 친히 노동의 결과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며, 교회 밖에서 하는 모든 생산적 활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성도들이 세상 속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는 것은 이웃과 다른 사람들을 돕는 행위로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의 가치를 화폐로 계산하고 있다. 급료를 통해서 그 비중을 평가하는 것이다. 돈은 노동의 대가에 대한 수량적 계산이다. 자본주의를 떠 받들고 있는 이념은 결과를 근거로 하는 세속적 가치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서는 이런 높은 급료를 받는 일에 대해서만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것은 타락한 물질주의 노동관을 낳고 말았다.
2) 노동의 윤리
종교개혁자들은 노동의 윤리를 새롭게 제시했다. 자기 집안을 정리하거나 정원을 가꾸는 일은 급료를 받는 일이 아니다. 이처럼 급료는 없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수고가 많이 있다. 사람의 행위 속에는 성취를 향해서 움직이게 하는 기본적인 동기가 숨어있는데, 기독교 신자들의 경우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보답하려고 움직이는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성도는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것이다. 일을 통해서 창조적인 표현을 하게 되며, 공공의 선을 창출한다.
노동윤리에 대해서 강조하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매우 혁신적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바울의 훈계를 경청할 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촉구했다. 제네바에는 수많은 이민자들, 여행자들이 원래 살던 주민들과 반반 정도 뒤섞여 있었다. 6천여 명이 살던 도시가 두 배로 불어나게 되었고, 우선 급선무는 거주할 주택을 증축하는 일이었다. 여기에서는 프랑스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귀족들도 많았다. 그들은 노동이라는 것에 익숙지 않았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칼빈은 이런 귀족들에게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라고 절박하게 촉구했다.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등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에서 나온 결론이다.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노동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되었다. 맥그라쓰 교수는 트랜퀼리(Vittorio Tranquilli, 1944-1998)가 쓴 「노동의 개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칼빈까지」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자들의 노동에 대한 태도가 칼빈의 제네바에서 완전히 바꿔졌다고 평가했다. 노동의 가치를 왜곡한 마르크스 공산주의자들은 소유주가 생산에 기여하는 것이 없고, 노동자들만이 가치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의 제네바에서 노동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영광스러운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의 특권이자 의무이다. 단순히 경제적 번영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행복을 더해주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노동에 대해서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서, 개신교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더욱 더 풍요롭게 되어진 것은 부산물이다.
노동윤리의 핵심은 스스로 성공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쳤던 노동 윤리의 순수한 지침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하였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하 종교개혁자들이 얼마나 은혜의 신학을 강조했던가를 생각해 보라. 노동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전도서에서 강조하는 것도 역시 헛되고 모순된 세상에서 노동의 기쁨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전 2:24)는 것이다. 역시 전도자의 가르침에서도 자기 성취를 즐기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하나님께서 해 아래서 살도록 허락하신 한계를 인정하고 깨우칠 때에만 진정한 기쁨이 주어진다. 기독교 노동윤리의 핵심은 사업의 성공을 자기성취라고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은혜’만이 구원론의 기초이자 교회론의 근거
3) 가치체계의 재설정: 거룩한 것과 속된 것?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대로,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의 이원론,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의 구별에 대해서 강력히 반대하였다. 노동은 노예들과 종들이 감당하던 업무였고, 이들을 사용하여 온 귀족들이나 왕족들에게는 정당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들에서 마저도, 중세시대에 노예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동일한 형상을 부여받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루터의 새로운 평가가 나온 것은 1520년이다. 루터는 "독일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제사장이라고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오직 성직자들에게만 한정적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이란 모든 세상 일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노동마저도 거룩한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겉으로 드러나는 거룩함에 속지 말 것을 주문했다.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요, 그분을 기쁘시게 하려는 순종이라고 하였다. 일반 가정에서 여성들이 감당하는 일이나 신부와 수녀들이 하는 일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소명(calling)이라는 개념을 확장시켰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예정하시고 선택한 백성들을 부르신다. 신앙을 갖도록 중생케 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도록 생활의 성화를 위해서 일어나게 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성도들은 거룩한 생활에 힘쓰게 된다. 중세 수도원에서는 소명이란 오직 세상을 떠나서 은둔과 고독한 삶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길이라고 왜곡시켜 버렸다. 이에 따라서, 윤리의식도 크게 왜곡되어져 버렸던 것이다. 수도원에서 하는 일이 거룩하기에, 세속사회에서 하는 일은 항상 더럽고 부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도원 운동은 부패한 세상을 개혁시키지 못하였고, 마침내 수도원 내부에서도 온갖 죄를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소명의식을 재해석했다. 루터가 "소명" (Beruf)이라는 개념을 처음 창출해낸 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단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소명의식이 널리 확산되었다. 세상에서 편리하게 살고자 하거나 세상에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특권을 누리고자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변화는 논리가 아니었다. 영국의 초기 종교개혁자, 윌리엄 틴데일은 가정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과 들판에서 양떼를 돌보는 목동의 일과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각각 다른 행동들이지만, 모두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나가서 직업을 가지고 노동의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을 더욱 고취시키는 행동이고, 하나님을 향해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헌신하면서 감사를 표현하도록 원하셨다. 노동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성도들이 일상의 삶에서 근면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하여 올바르게 섬기는 방식이다. 바울 사도의 모범을 통해서, 성도들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살후 3:10)는 말씀을 듣지 않았던가!
칼빈의 소명의식은 제네바에서의 사역과 깊이 연관을 맺고 있다. 처음에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에나, 한번 쫒겨 났다가 다시 부름을 받고 돌아올 때에나, "이 도시가 당신을 필요로 한다"는 동료들, 기룜 파렐과 삐에르 비레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추기경 샤도레토에게 보내는 답변서에서도,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도록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에 대해서 강변하였다.
소명의식을 감당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발견하도록 은혜가 각 사람에게서 역사하여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을 온전히 새롭게 하여 죄의 수렁에서 건져냈을 뿐만 아니라, 돌이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헌신하게 하는 능력이다.
4)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귀천이 없다
노동의 개념과 윤리적 가치평가에 이어서, 종교개혁자들로부터 새롭게 배우게 된 개념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교훈이다. 사실 이런 말을 한국에서도 자주 사용하고는 있지만, 모두 다 대학교 이상의 고등학문을 추구하고, 일류 명문 대학교를 졸업하고자 하는 이유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기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도 실제로 강한 영향력이 있다. 험한 노동에 대한 차별의식이 오랫동안 심화되어져 있다. 칼빈은 성도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부여해 준 위치에 있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을 두고 싶어하는 자리에 위치시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신다. 사도 바울은 그릇의 비유를 들어서,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 귀히 쓰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쓸 그릇도 있다 (롬 9:21) 고 하였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일들을 다 알 수는 없다. 칼빈은 우리의 지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해서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무한하신 지혜를 우리의 작은 그릇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오로지 바로 그 이유로 인해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일 뿐이고, 그 대신에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처지와 본분을 깨달아서 제정신을 차리고 절제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직업이나 지위에 대해서 영적인 중요성과 우월성을 부과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평가나 안목이 아니라, 사회적 인식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사회적 지위가 무엇이냐를 가지고 평가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인간의 욕망을 비판하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의 지위와 직책을 가지고 사람의 인격과 중요성을 폄하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내려 주시는 행동의 범주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의 욕심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직업에 대한 인간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어떤 직업이라고, 어느 직책이라도 하나님의 평가를 사람의 기준으로 왜곡시켜서는 안된다.
그러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종에는 젊은 사람들이 지원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매우 높이 평가하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그 실상은 마찬가지다. 어느 직업이나 위험과 고통이 수반되며, 누구나 힘들어 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대륙을 오가면서 비행기를 조종한 분이 은퇴 후에, 지난 날 조종사로서 직무를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에 대해서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의사라는 직업을 매우 존귀히 여기고 흠모한다. 하지만 어느 마취과 의사로 일하던 분이 환자를 돌보면서 겪어야 했던 긴장감을 설명하는데 필자는 그 하소연을 들으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다른 사람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어찌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한국 사회에서는 은퇴한 분들이 자녀들과 함께 지내면서, 다시금 어린 손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다. 예전 같지 않은 몸을 가지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육체적 고통이야말로 또 다른 체험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곳에서나, 노동은 힘들고 고단하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종교학 교수 헌터 박사는 현대인들에게서 노동의 중요성이 상실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에서 마저도 노동에 대한 영적인 가치와 영원한 중요성이 모두 다 사라져 버렸다고 탄식한다.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고백하는 것과 세상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 사이에 커다란 불일치가 커지고 있다. 노동의 신성함을 잃어버리고 주말을 즐기고자 하는 기독신자들이 많아지는 것은 참으로 신앙의 역설이자 비극이지만, 동시에 가능성이자 희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신자들이 노동과 직업의 존귀함을 회복해야만, 성경적인 삶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땅을 경작하고 지켜 나갈 것을 명령하셨다(창 2:15). "경작한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바드"인데, 일하다, 영양을 공급하다, 유지하여 가꾸다는 뜻이다. "지키다"는 단어는 "샤마르"인데, 보호하다, 돌보다, 지키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 솔로몬 등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예술, 음악, 문학, 상업, 목축, 작물 재배와 경작, 법률시행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가족, 집안, 국가, 교회 등 여러 공동체를 건설하여서 인간의 관계를 구축하고 정착하게 하였다.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생명의 구원을 얻은 자들이다. 하지만, 구원선을 타고서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을 수행해야만 한다(마 5:14-16).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담겨있는 영적이고 도덕적 축복과 기쁨을 제공하고, 신실한 믿음을 보여 줄 때에 황폐화된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실하고 헌신하는 모습, 순수하고 고상한 인품,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품격 등은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인데, 성도들의 참여 속에서 제시되어질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향기는 매우 독특해서 용기와 생명력이 넘치며, 아량과 지혜로 메마른 영혼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
교회의 지속적인 개혁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원론 전체의 기초로 삼았고, 교회론의 근거로 재설정했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핵심으로 손꼽았다. 루터는 은혜와 율법과의 관계를 매우 세밀하게 대조시켰다. 칼빈은 은혜 안에 있는 율법의 용도와 특징을 풀이했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믿음을 통해서 성도의 것으로 전가시켜주신다는 개념을 강조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죄인에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발동되어진다고 설교하였다.
종교개혁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확신이 들어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무능력과 부패, 수도원 중심으로 전개된 왜곡된 세계관이 성도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나치게 구원을 판결하는 권위를 장악해서 제도화되고, 세속적인 권력을 사용하면서 전혀 왜곡된 기능을 수행하다가 신뢰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과 교회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종은 전혀 다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제도들처럼, 교회라는 모임도 역시 죄로 오염되어있다. 교회의 연합체인 교단이나 노회나 지방회나 전국 총회마저도 역시 개혁의 필요성이 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정통 교회의 역사적 정통성과 신앙적 유산을 계승하였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완전하다는 보장은 없다. 그 누구라도 안심하거나 방심할 수 없다.
첫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감당해야만 한다. 냉소적인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개혁교회에서는 교회에 소속감을 갖고 있는 성도라고 하면, 진정한 사랑과 기도를 병행하면서,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것도 허용되어야 한다.
셋째, 그러나 무리를 지어서 당파를 만들고, 교회의 분란을 자초하는 행위는 엄히 책벌을 받아야 한다.
넷째, 교회의 소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온갖 교리적 왜곡과 혼란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단들과 사이비 기독교를 경계하고, 순결한 복음의 생명령을 회복시켜야 한다.
다섯째, 현대 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해야만 한다. 세속적인 방법과 원리를 흉내 내려던 교회들은 심각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세속주의의 영향이 몰려 들어와서 교회가 혼탁해지고 말았다. 신선한 성경적 경건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청교도들의 정결운동과 각성운동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지만, 교회를 깨끗하게 하였다. 오늘날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비판정신과 저항정신을 갖고 선지자적인 지침을 제공해야만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절대적 권위를 부여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지켜 나가야만 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을 지켜주신다 (계 1:4,8).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