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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전쟁과 평화 그리고 종교
1. 침묵과 망각의 경계에서: 고통을 자원화한다는 것
고통이 언급되는 것에도 위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스웨덴의 젊은 환경 운동가 툰베리(Greta Thunberg) 일행과 구호물자를 실은 항해선의 소식은 가자지구(Gaza Strip)를 향한 출항 전부터 이스라엘 현지 시각 2025년 6월 9일 오전 이스라엘 해군에 의해 추방되기까지 전 세계 주요 언론사들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널리 알려진 서구 청소년 환경 운동가 일행의 팔레스타인 난민을 향한 항해라는 서사는 그 자체로 전 지구적 뉴스가 될 수 있었고, 다양한 미디어 창구를 통해 반복 보도되었다. 또 다른 지구 반대편에서는 2017년 8월 이후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강을 건너고, 맨발로 밀림을 가로질렀다. 불태워진 고향을 등지고 탈출한 로힝야(Rohingya) 난민들의 행렬은 미디어의 프레임 밖에서 조용히 이어졌다. 국제사회의 주요 회담 현장에서도 그들의 이름은 번번이 외면되었다. 누군가의 고통은 ‘이야기’가 되어 회자되고, 누군가의 고통은 ‘침묵’ 속에 남는다. 말해지는 고통은 보호받지만, 말해지지 못한 고통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을 기회조차 얻어 보지 못하고 스러진다.
이러한 고통의 서열화는 단지 미디어의 편향된 선택적 보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국가안보와 권력, 지정학적 요건, 문화적 위계 그리고 경제적 이익이 교차하는 국제정치의 구도 속에서 어렵지 않게 목격되는 현상일 뿐이다. 로힝야 난민의 고통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참혹하지만, 그 고통을 말하게 만드는 구조와 의식이 부재할 때 세계는 그들을 망각해 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묻고자 한다. 고통이 ‘기억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나 동등하게 주어지는가? 누구나 그 말을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침묵의 구조적 모순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 침묵과 무관심이 구조화된 세계 정세 속에서 서열화된 고통을 다시 꺼내어 말할 수 있는 윤리를 복원하는 일은 지금 불교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몸담고 있는 종교적 입장과 이념적 경계를 내려놓고 치우침 없는 중도의 지혜를 통해 주목받지 못하는 국제분쟁과 난민 문제를 다시 바라보고 성찰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현시대의 인류, 더 나아가 온 생명에 필요한 붓다의 유산은 특정 진영의 논리나 철학이 아닌 세계의 고통 그 자체에 응답하고 아픔의 화살을 뽑아내기 위한 보편적 지혜와 자비의 통찰일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정보 과잉으로 인한 감각적 피로 속에서 이웃의 참혹한 현실마저 선택적으로 소비하고 조건부로 기억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쟁과 난민의 고통은 더 이상 직면한 현실이라기보다 정치적으로 관리되고 경제적으로 유통되며 감정적으로 자원화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전쟁과 추방으로 인한 폭력과 유린의 현장들은 언론의 편집과 국제사회의 전략적 침묵 속에서 이내 ‘기억될 가치’를 상실한 사건이 된다. 로힝야 난민 문제 역시 그러한 ‘잊힌 고통’의 전형이다. 그것은 단순한 무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무관심 이면에는 국제정치 구도와 이익 관계로 얽혀 있는 모두가 공유하는 윤리적 침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침묵은 감정적 무관심 혹은 발화가 정지된 무표정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국제정치의 권력 구도 속에서 계산된 침묵이자 이윤과 전략의 논리에 편승한 편집된 기억이다. 로힝야 난민 문제를 둘러싼 주요 보도 역시 특정 프레임에 갇혀 반복됨을 볼 수 있다. 폭력 장면은 숫자로 환산되고 사망자 수는 전투적 수사의 배경으로 서사된다. 전쟁과 추방, 학살의 참혹함은 일정하게 유지된 감정적 거리에서 ‘소비 가능한 서사’로 가공되거나 때로는 정치적 타협의 담보물로 기능하기조차 한다.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이들의 목소리와 얼굴, 삶의 결은 실종되고 ‘국경 밖 타자’로 배제된 채 외부의 도덕적 규범과 언론 프레임 속에서 일방적인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 지어진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사건의 다층적 맥락을 소거해 버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이분법적으로 구획하는 서사에 기입하며, 윤리적 책임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해 갈 뿐이다.
이러한 반복은 인간과 세계를 고립된 단위로 이해하는 무지의 산물이다. 존재는 결코 고립되지 않는다. 그 누구의 고통도 완전히 타자의 것이 될 수 없다. 연기의 통찰이 잊힐 때,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자신을 연결 짓지 못하고 무관심이라는 연쇄적 무지를 확산시킨다. 로힝야 난민을 향한 세계의 침묵은 결국 연기의 진실을 망각한 채 고통을 외부화하는 마음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2. 국제정치 속의 주변화된 생명들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큡ski)는 그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The Grand Chessboard: American Primacy and Its Geostrategic Imperatives)》(1997)에서 유라시아를 둘러싼 헤게모니 경쟁을 ‘지정학적 체스판’으로 비유하였다. 21세기 국제정치 질서의 핵심은 전략적 요충지의 선점과 통제를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대화와 협력의 진영 간 영향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 본 이론의 핵심이다. 체스판 이론에서 주권 국가는 자율적 주체이기보다 전진과 후퇴를 적절히 조절해 주며 강대국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위해 기능하는 하나의 ‘말(chess pieces)’ 역할로 간주된다. 이 같은 국제 정세 인식은 미국을 포함한 소수 패권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고, 지정학적 가치에 따라 윤리적 사각지대가 발생하는 외교 안보 정책의 출현은 필연적이었다.
로힝야 난민의 고통이 국제사회 논의 테이블에서 반복적으로 누락되는 작금의 현실은 ‘체스판’ 위에서 생명의 존엄과 고통이 얼마나 가볍고 부서지기 쉽게 주변화되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헤게모니 선점을 위한 전략적 가치가 생명권의 보편성과 우선순위를 압도하며 자본과 결탁한 외교·안보의 논리가 탈국가적 연대와 도덕적 책임의 지분을 후순위로 밀어내는 현실 속에서 로힝야는 언급될 권리조차 상실한 채 ‘지정학적 체스판’ 바깥 넘어 배제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정학적 무관심은 한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방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제정치 전반의 윤리적 기반을 침식시키는 구조적 문제로 작동하고 있다.
로힝야 문제는 단순한 인도주의 위기를 넘어선 국제법적 정의와 국제 인권 보호 체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이다. 2017년 미얀마군의 ‘소탕 작전’ 이후 약 70만 명에 달하는 로힝야 주민들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피신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은 지금까지도 콕스바자르의 쿠투팔롱 난민캠프와 같은 임시 수용소에서 열악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콕스바자르의 난민캠프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캠프가 되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이 사태를 ‘교과서적인 인종청소(textbook example of ethnic cleansing)’로 규정하였고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일부 사안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하며 예비 조사에 착수하였다. 국제사법재판소(ICJ) 역시 57개국으로 구성된 이슬람협력기구(Organization of Islamic Cooperation)를 대표한 감비아의 제소를 통해 유엔 제노사이드협약(UN Genocide Convention) 위반 혐의로 미얀마 군사정부의 책임을 묻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법상의 대응은 구조적 제약과 정치적 압력 속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얀마 사태에 대한 결의안 채택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거부권을 지닌 상임이사국들,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 때문이다. 거대한 체스판에서 ‘말’로서의 기능조차 하지 못하는 국가적 현실의 반증이라 하겠다. 국제형사재판소는 미얀마가 비당사국이라는 점에서 법적 관할권에 제약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로힝야 집단학살 및 강제추방과 같은 중대범죄도 여전히 실효성 있는 국제적 사법 판단을 받지 못한 채 시간이 흐르고 있다. 결국 로힝야의 고통은 국제법 체제 내에서 ‘인식은 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보호받지 못하는’ 국제법의 사각지대 아래 존재하게 되었다.
로힝야 사태가 국제정치에서 구조적으로 주변화되는 또 다른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외교적 무관심과 선택적 윤리의 문제에 있다. 미얀마는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서 핵심 경로로 간주되는 국가이다. 벵골만을 지나 중국의 윈난성과 구이저우성으로 이어지는 송유관과 가스관은 미얀마의 지정학적 요충성을 짐작게 한다. 중국은 미얀마 군부와 전략적 연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국제무대에서 미얀마를 비판하거나 제재하려는 시도에 대해 반복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이는 유엔 안보리 차원의 개입이 실질적으로 무력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국가들도 로힝야 문제에서 일관된 입장을 유지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 보호와 민주주의 회복을 강조하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이해관계를 배제할 수 없는 정책 기조는 난민 발생의 실질적 가해자인 미얀마 군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선택적 윤리는 로힝야의 고통을 외교 안보적 계산 속에 방치된 도구적 대상으로 전락시켜 체스판의 유지와 강대국 간의 긴밀한 협조 가운데 보이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위치시킨다. 결과적으로 국제사회 공동의 책임의식은 약화하고, 동등하게 간주되어야 할 인권의 가치는 국적에 따라 위계를 형성하는 현실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결국 로힝야 사태는 단순히 ‘말해지지 않는’ 고통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구조적 고통, 즉 국제정치의 지정학 및 국제법적 한계 그리고 윤리적 선택성에 의해 지속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는 고통이다. 여기에 더하여 권력과 자본이라는 숙주의 선택에 따라 미디어는 선택적으로 고통을 조명하여, 전시되고 소비되며 외면되고 방치되는 고통의 위계는 한층 굳건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보편적 인권’과 ‘국제 정의’라는 담론이 실제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3. 연기의 관점에서 본 로힝야 사태
‘모든 것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의 진리는 인간존재에 국한되는 분석만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此有故彼有 此無故彼無)’는 붓다의 존재론적 천명은 인간존재뿐 아니라 공업이 발생하는 사회적, 정치적 고통의 문제 범주로 확장 적용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특정 지역에서 발생하는 고통이 반드시 그 지역만의 몫이 아니며, 결국 연결된 모든 생명이 그 고통과 연결되어 있음을 연기의 진리는 여실히 보여준다. 이는 로힝야 난민 사태뿐 아닌 세계 각국에 발발되고 있는 전쟁 상황들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국경 너머의 고통은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삶 또한 공업의 질서 속에서 그들과 중중무진 얽혀 있다는 사실은 불교적 관점에서 무거운 성찰을 요한다. 심리적 공감의 범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지구 생명체 모두의 물리적 생존이 얽힌 현실이다.
연기의 사유는 로힝야 사태와 같은 국제적 난민 분쟁 문제를 단일 원인이나 이분법적 도식으로 분석하는 단선적 접근을 지양하고, 보다 복합적이고 관계적인 이해의 틀을 제공한다는 데 유의미함이 크다. 로힝야족에 대한 지속적 박해와 집단적 추방은 특정 시기나 집단의 일방적 행위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적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되며 산출된 결과물이다. 식민지 시대의 영국 이주 정책·제2차 세계대전 시기 민병대 간 충돌·버마 민족주의의 강화·민족국가 형성 과정에서의 배제적 정치·이슬람에 대한 종교적 편견 그리고 21세기 국제정치 현장의 전략적 무관심 등 수많은 역사적·정치적·지정학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오늘날 로힝야 사태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힝야 사태는 불교의 연기적 사유에서 말하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는(此有故彼有)’ 다르마의 원리가 현실의 정치와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서 이해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로힝야 사태는 단순히 한 민족의 피해 혹은 타민족의 가해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연기적 인드라망 속에서 형성된 결과이다. 연기적 사유가 외교 정책을 해석하는 데 사용될 때, 전통적 주권 국가 중심의 사고 혹은 대립적 민족주의 담론이 가지는 분절적 인식 틀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관계 중심적 외교 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연기법은 복잡한 구도의 국제분쟁을 단일한 ‘가해자-피해자’ 구도로 환원하지 않으며 역사적·경제적·문화적·지정학적 요인들이 중첩적으로 얽혀 있는 다중적 인과 구조 속에서 문제의 재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예컨대 로힝야 사태나 팔레스타인 문제 같은 국제분쟁 상황을 단순히 종교나 민족 간의 갈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 배경에 놓인 식민주의적 잔재, 글로벌 안보 질서, 군산복합체 및 자원배분 갈등 구조 등의 다양한 조건들을 함께 고려하게 만드는 비환원적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시미즈 고수케(清水耕介)에 따르면, 대승불교의 관계성(relati-onality)을 전제된 일정 주체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무주체적인(sponta-neous) 관계성으로 이해할 때 국가라는 실체나 주권이라는 개념 역시 본질적인 것이 아닌, 타 존재와 고정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관계 속에서 생성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관계성 자체도 사실은 일시적이며 무상한 것으로서 이러한 관점을 국제관계학에 적용한다면 국가를 실재로 간주하는 현실주의(realism)의 패권 개념 혹은 자유주의(liberalism)의 시장경제적 질서 중 어떠한 노선이라도 타인을 통제하려는 권력을 정치의 핵심으로 이해하는 일반적인 사고방식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국제 정세는 구조적 특징상 항상 역동적인 과정에 있으며 그 과정은 예측 불가능하고 계획되지 않은 연기의 흐름 안에 놓여 있다. 이는 정치적 갈등에서 작동하는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 서사를 넘어 폭력의 구조 속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다층적 관계성을 성찰하게 한다. 물론 구조적 박해와 폭력의 직접적 피해자인 로힝야의 인권은 명백히 보호되어야 하며 그들의 고통은 결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연기적 사유는 고통의 책임을 단순히 특정 집단에 귀속시키기보다 현상의 직시를 가로막는 무명(無明, avidyā)과 그로부터 비롯된 삼독심의 번뇌 작용 속에서 폭력의 구조를 통찰하게 한다.
따라서 불교적 관점에서의 국제관계 인식은 특정 국가나 민족에 주체성을 국한하지 않는 이유로 불평등과 혐오를 방조하거나 외면하는 국제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일정 부분 공유되어야 할 윤리적 응답의 책임(responsibility of response)을 제기한다. 더 나아가 이는 단순히 상호 의존성을 인식하는 수준의 유전연기(流轉緣起)를 넘어 세계적 고통의 원인을 직시하고 그 반복을 멈추려는 환멸연기적(還滅緣起的) 통찰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세계의 관계성을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관계성 안에서 생성되는 구조적 폭력과 차별을 멈추기 위한 관심과 책임의 실천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불교의 연기적 사유는 오늘날의 국제관계적 윤리와 평화 구축을 위한 유효한 사상적 자원이 될 수 있다.
4. 무명과 삼독심 그리고 침묵
로힝야족에 대한 박해의 역사는 영국 식민 통치기로부터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무렵 벵골 지역(현 방글라데시)에서 미얀마 서부 아라칸(Arakan, 현 라카인 주)으로의 대규모 노동력 이주 정책은 지역 내 인구 구성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영국 식민 정부는 식민 행정의 효율성과 경제적 이득을 위해 민족 간 구획과 지역 경계를 무시한 채 이주를 장려하였고, 이에 따라 로힝야 무슬림들은 버마족 불교도들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점차 국가 내부적 타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로힝야 난민 문제의 가장 최근 상황, 특히 2017년 미얀마 군부의 ‘소탕 작전’으로 대량 학살과 강제추방이 자행된 사건은 과거사와의 단절 속에서 파생된 단일 사건이 아닌, 오랜 적대감과 국가주의적 정체성 정치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공식적 설명에 따르면 이 사태는 무장 조직인 ‘아라칸 로힝야 구원군(ARSA)’의 경찰 초소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촉발되었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앞선 수년간에 걸친 로힝야 공동체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폭력이 점증적으로 확대되어 온 결과였다. 미얀마 정부는 1982년 국적법을 통해 로힝야족을 시민권 목록에서 제외하고 ‘불법 이주민’으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로힝야족은 교육, 의료, 이동 및 결혼 등 기본권 전반에서 구조적 제약을 받아왔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맥락은 2017년 로힝야 집단학살 사태의 직접적 원인으로 미얀마 군부의 소탕 작전이 지목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디지털 네트워크 플랫폼, 특히 페이스북을 통한 혐오 확산 기능이 사태의 주요한 촉매제로 작용했다는 점에 학계와 국제기구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 200달러에 달하던 유심카드의 가격이 규제 완화로 인해 2달러로 급락하며 누구나 인터넷 접근이 가능하게 된 미얀마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국어 서비스가 제공된 페이스북은 인터넷 접근의 주요 통로이자 실질적인 정보 유통망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인터넷 세계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미얀마인들은 선전 선동에 취약한 상태로 페이스북을 접하기 시작하였고 사용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정부 관리들과 군부 세력 그리고 소수의 불교 민족주의자들 역시 페이스북을 적극 활용하여 로힝야족에 대한 부정적 프레임을 확산시키는 데 일조하였고, 사용자들 사이에서 확인되지 않은 반로힝야 노선의 정보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유엔 진상 조사단은 공식 보고서(Independent International Fact -Finding Mission on Myanmar, 2018)를 통해 “페이스북이 로힝야족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실제 인종청소와 집단 폭력의 촉매로 기능했다”고 지적하였다. 보고서는 특히 로힝야 공동체에 대한 가짜 뉴스와 조작된 이미지 및 영상이 반복적으로 유포되었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집단적 혐오 감정과 배제적 민족주의 정서가 강화되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정보 확산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환경이 특정 의도를 지닌 권력에 의해 악용되어 타 노선 집단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명백한 사례임을 보여준다. 실제 페이스북 내부 문건 및 메타(Meta) 측의 후속 조사에서도 미얀마어로 된 혐오 발언을 감지·차단하는 시스템의 부재와 알고리즘이 혐오 콘텐츠의 도달률을 오히려 확대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며, 이는 플랫폼의 기업 윤리와 글로벌 책임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페이스북(현 메타) CEO인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미얀마의 민권단체들에 공식적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전달하였고 이후 증오 발언과 폭력 조장에 대응하기 위한 회사 차원의 구체적 조치들을 소개하였다. 2017년의 로힝야 사태는 이처럼 오프라인의 국가 제도적 차별뿐이 아닌 온라인상에서 디지털 폭력의 대상으로 약자에 대한 이중의 타자화가 가능하며 온라인상의 소요 사태가 현실의 대규모 폭력으로 비화할 수 있음을 극명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증오의 디지털 언어’는 기술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언어와 의도 그 자체가 가지는 업력의 왜곡된 실현임을 인식해야 한다. 타자의 고통을 왜곡 혹은 외면하며 재생산되는 무명과 어리석음[癡]의 현대적 발현은 디지털 플랫폼이라는 창구를 통해 더욱 신속하고 보다 정교하게 확산되어 증오와 혐오의 일상화 및 구조적 공고화에 기여하고 있다.
요컨대 2017년의 로힝야 사태는 단순한 무력 충돌의 문제가 아닌 국가 제도적 차별과 지정학적 배제에 디지털 혐오까지 더해 삼중으로 결합된 연기적 폭력 구조의 발현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날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분쟁의 양상은 더 이상 전통 주권 국가 또는 집단 주체의 책임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디지털 네트워크 플랫폼의 확산은 개별 주체의 무명과 탐진치 삼독심이 집단적 응축과 증폭으로 실현되는 장(場)을 제공하며, 그 결과 인종청소와 같은 국가와 민족단위 폭력의 구조를 현실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한다. 로힝야 사태에서 드러난 페이스북의 역할은 업(業)이 더 이상 개인의 행위로 한정되지 않고 개인으로 이루어진 집합적 구조 내부에서 더욱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업력의 장(場)이 단일한 개인들의 인과적 귀속을 넘어서, 상호의존적 확산성을 지닌 공업의 상속에 대한 책임을 새롭게 성찰해야 함을 시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5. 베스트팔렌 체제에 대응하는 보살도의 요청
국민국가 형성의 주요한 토대가 된 베스트팔렌 체제(Westpha-lian system)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을 통해 확립된 근대 국제정치의 기본 구조로서 주권 국가의 자율성과 영토 보전 그리고 상호 비간섭의 원칙에 기초하고 있다. 이 체제는 국제사회에서 영토 중심의 국가를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주체로 간주한다. 그러나 국경을 기준으로 하여 자국 영토 내의 배타적 주권을 확립하는 폐쇄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질서를 전제로 한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러한 구조적 체제는 연기적 세계 이해와 본질적으로 충돌하며 ‘주권’과 ‘국경’이라는 분별의 전도망상이 지어내는 구조적 폭력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
베스트팔렌 체제는 국민국가를 주권 단위로 실체화함으로써 국경과 내정의 불가침 원칙을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권 중심의 질서 속에서 국가는 실재하는 고정된 주체로 간주되고, 국경 외부의 생명 주체들은 제도적 시야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되어 보호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한다. 나아가 국경 내부의 상황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국가권력 테두리를 벗어난 소수자와 주변화된 존재들 또한 가시성을 상실한 채 동일한 배제의 논리에 노출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국경과 주권에 기반한 불변의 안전 보장은 사실상 허구에 가깝고, 이는 곧 전 지구적 차원의 생명 권리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현실이다.
특히 주권 국가의 실재화는 타자화된 고통이 국경 외부에 발생할 경우, 해당 사안에 대한 국제사회의 실질적 개입을 지연시키거나 무력화하는 경향을 수반한다. 로힝야 난민 사태,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팔레스타인 분쟁 등을 그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주권의 논리가 인도주의적 개입과 보편적 생명권의 윤리보다 우선시되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의 권리와 생존은 반복적으로 유예되고 외면당해 왔다. 이러한 현실은 제도적 대응의 결여를 뛰어넘어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의 상실이라는 구조적 결핍을 드러내 준다.
국가 중심의 국제질서는 각국의 이해관계와 전략적 이익에 중점을 두고 고통받는 타자를 위한 윤리적 연대를 구조적으로 제약하는 반면, 연기적 사유에 입각한 국제관계 인식은 깊은 상호연결성과 공감의 윤리를 강조한다. 연기법은 어떤 것도 고정된 자성을 지니지 않음을 강조한다. 국가 주권 역시 본질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관계적 산물에 불과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국가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다층적 상호작용의 집합체이며, 타국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비로소 그 존재와 권위가 정당화된다. 이 같은 상호의존적 세계관은 베스트팔렌 체제 내부의 실체화된 주권, 고립된 자아 개념, 국경 중심주의 그리고 경제적 실익 우선의 정치적 질서에 대한 근원적 비판을 제기하며 국제정치 질서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하는 명백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불이(不二)의 연기관은 오늘날의 난민 문제, 기후 위기 및 무력 분쟁과 같은 글로벌 위기 속에서 더욱 중요한 대안적 세계관으로 적합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불교적 세계시민주의 또는 보살의 실천윤리로 확장되어 정치적 국경과 이념적 경계를 넘어선 윤리적 책임 감수와 연대적 행동의 필요성을 촉구한다. 보살은 국경 넘어 타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언급될 기회마저 상실한 이들의 고통을 나 자신의 것으로 함께 짊어지며 공존 속에서 자기 구원을 실현해 나간다. 정서적 연민을 넘어 배제된 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기의 해탈이자 구원을 이루는 인간적 지향점이자 수행의 종착지가 ‘보살’이라 할 수 있겠다.
보살의 현존은 연민의 확장을 발판 삼아 존재론적 전환으로 도약한다. 《보살지(菩薩地, Bodhisattvabhūmi)》에 따르면 “어떠한 형태의 노력에 의해 비심(悲心)을 붙잡고 있는 보살은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100번까지 버리는” 경지에 이르며, 이러한 보살의 보리(菩提)는 비심 위에 건립된다. 보살도는 개인적 구제를 최종 목표로 삼는 해탈관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상호 구제적 존재 방식을 의미하는데, 타자의 해탈이 곧 나의 해탈이라는 불이(不二)의 통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살은 존재론적으로 자타의 분리 가능성을 부정하며 연기적 관계성에 기반한 실천의 행위자로서 자리매김된다. 따라서 자비는 일회적 감응이나 동정심의 표현이 아닌 ‘구체적 행위로서의 자비’가 될 것이다. 즉, 보살의 응답은 ‘관망하는 자비’로서가 아닌 고통의 현장에 직접 발을 들이고 그 고통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며 구조적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윤리를 내포한다. 이는 달라이 라마가 반복하여 언급한 바 있는 “자비는 비폭력에 대한 소극적 감정이 아니라, 정의를 추구하는 적극적 윤리이다”라는 견해에서 역시 확인해 볼 수 있다.
보살이 걷는 시대의 길은 단순히 선행의 반복을 통한 도덕적 실천의 축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자기 존재적 경계를 끊임없이 해체하고 확장해 나가는 존재론적 재구성의 여정이며 이러한 길 위에서 보살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세간의 유위법을 누구보다 명확히 통찰하고 인지한다. 그녀 혹은 그는 ‘보살’로서의 자각된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주권 국가의 시민으로서 사회적 책무와 공동체적 소명이라는 정체성을 함께 끌어안으며 현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들의 구도 공간이자 삶의 현장은 고요한 수행처를 벗어나 전쟁터, 난민촌, 재난 구호 현장, 기후 위기의 현장 및 디지털 네트워크 플랫폼과 같은 새로운 시대적 삶의 조건이 구성되는 시공간 모두를 아우르게 될 것이다.
6. 다시, 연기의 그늘에서 말하다
국제정치 구도 속에서 언급되지 못하고 좌표조차 지니지 못한 다종다양한 세계의 고통은 윤리적 언어의 결핍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경험의 주체가 ‘나’였을 수도 있었던 국경 넘어 누군가의 고통이 선택적으로 ‘들리고’ ‘보여지는’ 세계, 곧 윤리적 관심과 제도적 반응이 계층화된 구조에서 발생하는 침묵의 정치적 결과이다. 로힝야 난민 사태는 전쟁과 폭력으로 인한 고통이 단지 우연히 간과되는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 이익, 주권 중심의 국제질서 그리고 디지털 정보 환경이라는 21세기의 복합적 구조 속에서 체계적으로 비가시화되는 과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불교는 되물어야 한다. 고통이 ‘기억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나 동등하게 주어지는가? 누구나 그 말을 들을 수 있는가? 그리고 불교는 이러한 침묵의 구조적 모순 앞에서 어떤 말을 할 수 있는가?
전쟁과 폭력의 고통은 결코 개인화되거나 국지화될 수 없음을 붓다의 연기법은 함의한다. 로힝야와 가자지구 그리고 우크라이나와 분쟁지역 국경 넘어 난민캠프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할 때 그리고 그들이 세계의 침묵 속에 설 자리를 잃어갈 때, 국경 반대편의 우리 역시 스스로를 외면하고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그들이 보듬어지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온전히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 그들과 우리는 실체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닌 상호 의존 속에서 존재하는 연기적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고통을 기억하고 언어화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로 자원화되어야 한다. 고통의 기억은 단지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찰나적 연속성 내부에서 그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사유하는 윤리적 자각의 장이 된다. 고통을 자원화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에 대한 연기적 성찰을 사회적 책임과 실천의 동력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그것이 낯선 언어와 종교 그리고 문화적 배경을 지닌 국경 너머의 사건이라 할지라도. 혹은 내가 속한 집단과 이념적으로 상이한 정체성을 지닌 이들의 고통이라 하더라도. 전쟁과 폭력의 참상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피해 갈 수 없는 인연의 고리이자 반드시 직면하고 응답해야 할 시대적 공업의 생생한 현실이다.
전쟁과 폭력의 고통은 분리되지 않은 존재들의 인드라망을 타고 확산되어 폭력의 직접적 관련자가 아니더라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물질적, 심리적 그리고 생태적 파장을 일으킨다. 경제적 불안정은 물론이며 생태계 파괴와 그로 인한 자연재해 및 식량 고갈, 디지털 환경을 통한 공포와 증오의 전이 그리고 분쟁으로 인한 이주와 난민 발생은 지리적으로 원거리에 위치한 개인들에게도 역시 상당한 수준의 실질적 피해를 야기한다. 불안과 혐오의 정서 확산은 타자를 더욱 타자화하게 되는 악순환의 연기를 만들어 간다. 더욱이 불교윤리적 차원에서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하며 침묵하는 행위는 무명(無明)의 카르마를 재생산하여 이로 인해 인류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이 침식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궁극적으로 보살도는 추상적 이상향에 그치지 않는 윤리적 전환의 구체적 개입 방식으로서, 현실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비국가적 윤리 주체가 될 수 있다. 연기를 보는 지혜와 자각은 국민국가와 주권에 대한 비분할적 연관성의 자각을 포함한다. 이러한 자각은 감정적 연민의 차원을 넘어 제도적, 정치적 및 기술적 조건에까지 확장되는 윤리적 책무를 함의한다. 이러한 비국가적 윤리 주체로서의 보살은 고통의 원인을 타자화하거나 구조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며, 관계적 존재로서의 자각을 바탕으로 연기의 그늘이 형성되는 조건들에 주목하고 이를 최소화하는 실천을 모색한다. 보살도는 바로 그와 같은 윤리적 감수성과 행위 능력을 갖춘 비국가적 행위자의 이상형이자 비가시화된 고통에 응답하는 규범적 좌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기의 그늘’이란, 고통의 원인이 가려지고 구조화되어 있는 그대로 여실히 말해지지 못하고 여실히 기억할 수 없는 현실을 은유한다. 붓다는 이 그늘에 여리작의(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라는 한 줄기 빛을 비추는 사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 사유는 설명과 학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어깨를 맞대고 고통의 현실을 함께 짊어지는 실천적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고통에 대한 자비의 감응을 넘어 ‘연민을 정치화’하는 새로운 과제로서 국가와 제도의 언어를 넘어서는 수행자의 언어, 곧 보살의 언어로 다시 말해져야 할 과제이다. 고통을 말하고 또한 고통에 응답하는 윤리는 ‘내가 아닌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인식은 연기의 사유를 경유해야만 가능하다. 다시, 연기의 그늘에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또 기억해야 한다. 말하지 않는다면 고통은 다시 침묵 속에 묻히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고통을 공적으로 기억하고 전환하는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
문유정 jenista@naver.com
중앙대 국제관계학과, 능인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석사),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박사) 졸업. 주요 논문으로 〈《화엄경》 보살 사상으로 바라본 ‘세계시민보살(Universal Bodhisattva citizenship)’의 덕목-불교 시민성 정립의 이론적 토대〉 〈무아의 행위자가 지니는 실천윤리학적 의의-초기 유가행 유식학파의 공성 인식을 중심으로〉 〈비선형 인과 속 인격 동일성의 윤리적 함의-파핏(Derek Parfit)의 심리적 환원주의에 대한 보완 가능성을 중심으로〉 등이 있다. 현재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강사, 월정사 화엄선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