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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암 결사(鳳巖結社)>
1947년 결행된 봉암사(鳳巖寺) 결사(結社)는 한국불교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해방 직후 당대의 수좌들이 모여
철저한 참선과 계행(戒行)으로 일관함으로써
일제강점기의 잔재에 찌든
한국불교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었다.
결사(結社)란 불교에서 이념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수행을 함께 하면서 교단을 개혁하려는 실천운동을 가리킨다.
봉암사 결사는 당대 최고 선지식이자 절친한 도반이었던
청담(靑潭) 스님과 성철(性徹) 스님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청담(1902~1971) 스님의 행장과 법문을 모은 <청담대종사전서>에 의하면,
두 스님은 1942년 서울 선학원에서 만나 공동수행을 약속했고,
1943년 법주사 복천암에서 함께 수행했다.
그런데 독립운동가를 도왔다는 이유로
청담 스님이 상주경찰서에 구금되면서 짧게 끝난 ‘2인 결사’는,
1944년 봄 문경 대승사에서 재개됐다.
당초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꿈꿨던 건
대규모 종합수행도량인 총림(叢林)의 건설이었다.
“지금과 같은 말법시대에 부처님 당시처럼 짚신 신고 무명옷 입고
최대한 검소하게 생활할 것, 그럼으로써 납자 풍의 참모습과
말없는 가운데 풍길 수 있는 그런 중노릇을 하자는 등의
이야기를 밤새도록 대승사 쌍련선원에 앉아서 하셨다.”
청담 스님의 딸인 묘엄 스님(전 봉녕사 승가대학장, 2011년 입적)이
남긴 회고다(고경 제10호).
총림을 설치하려던 절도 원래는 봉암사가 아니라
청담 스님이 선감(禪監)으로 일하던 법보종찰 해인사였다.
해인사가 봉암사보다 사격이 컸다.
그러나 야심찬 계획은 해인사를 장악한 대처승들의 비협조로 무산됐다.
결국 대승사 인근의 봉암사가 대안으로 선택됐다.
경북 문경 희양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봉암사(鳳巖寺)는
신라 헌강왕 때 지증(智證, 824~882) 대사가 창건했고,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의 중심지였다.
예로부터 수행처로 이름난 곳이다.
그런 만큼 상징성은 해인사 못지않았다.
봉암사 결사가 시행될 수 있었던 직접적인 계기는 ‘책들’이었다.
1947년 여름 김법룡이란 이름의 거사가 소장하고 있던
불교서적 수천 권을 기증하겠다고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에게 제의했다.
서울로 올라와 불서를 인수한 스님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을 봉안하는 사찰을 총림으로 하자’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건네받은 불서를 봉암사로 보냈고,
그해 10월 성철 스님, 자운 스님, 향곡 스님, 우봉 스님, 보문 스님 등
4명이 봉암사에 입주했다. 봉암사 결사의 역사적인 출발이다.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 이 말은 봉암사 결사를 이야기할 때
흔히 회자되는 모토다.
방부(房付, 선방에 들어가 정진하겠다는 신청서)를 들인(가입한)
수행자들은 비(非)불교적 요소 일체를 없애거나 뜯어고쳤다.
무엇보다 사찰이 점집으로 전락하는 데 기여한 기복신앙이 척결대상이었다.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할 것 없이 전부 싹싹 밀어내버리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만 모셨다.
복을 빌어달라며 여염집이 부탁하는 불공을 전부 거절했으며
살림은 철저하게 자급자족으로 유지했다.
나무 하고 물 긷고 밭 갈고 탁발하는 일이 일상화됐다.
또한 율장에 근거해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홍(紅)가사 대신
현재 종단 가사색의 모태인 괴색(壞色)으로 가사를 물들여 입었다.
이것들은 현재 종단 스님들의 복식(服飾)과 위의(威儀)의 근본이 됐다.
단체생활을 위한 일련의 수칙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란 이름으로 정리했다.
규약에는 참선 수행, 포살 실시, 능엄주 암송, 자주⋅자치정신 구현,
청규와 계율 준수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수행방식뿐만 아니라 승가의 의식주 전반에 개혁을 단행한
봉암사 결사는 수행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탔다.
제대로 된 안거도량이 열렸다는 소식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뜻 있는 수좌들이 하나둘 찾아왔다.
그리하여 1948년 결사대중은 30~40대 젊은 스님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봉암사 결사에 참여한 스님 중에서
훗날 종정 4명, 총무원장 7명이 배출됐다.
궁극적으로 봉암사 결사는 염결한 삶 덕분에
스님의 대사회적 위상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당시만 해도 조선시대 억불의 악습으로
승려들은 일반인들에게 천시와 반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봉암사 대중 스님들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좌선으로 일관하며 사람들의 불신과 냉대를 조금씩 씻어갔다.
스님은 무속인이 아니라 수행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스님에 대한 삼배(三拜) 문화 역시 봉암사 결사를 통해 자리를 잡았다.
결사를 주도하던 성철(1912~1993) 스님의 불호령이 압권이었다.
“스님은 부처님 법을 전하는 당신네 스승이고
신도는 스님한테서 법을 배우는 제자야.
법이 거꾸로 돼도 분수가 있지.
스승이 제자 보고 절하는 법이 어디 있어,
조선 500년 동안 불교가 망하다 보니 그렇게 됐는데,
그게 부처님 법은 아니야!
부처님 법에 신도는 언제나 스님들께 절 세 번을 하게 돼 있어.
그러니 부처님 법대로 스님들에게 절 세 번 하려면 여기 다니고,
부처님 법대로 하기 싫으면 여기 오지 마라!(<수다라> 10집, 1995년)”
아쉽게도 결사는 길지 못했다. 당시 한국전쟁이 임박한 혼란기였다.
사찰에 빨치산이 자주 나타나고, 이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찾아온 우익 경찰과 군인들이 스님을 연행하는 등
수행이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군경은 빨치산으로 빨치산은 군경으로 변장한 채 봉암사에 잠입해
스님들의 정치적 성향을 떠봤다는 전언이다.
수행은커녕 목숨마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이에 1950년 3월 동안거 해제 직후 결사는 막을 내리게 됐다.
그러나 비록 짧은 기간의 결사였지만
봉암사 결사가 오늘날 조계종단의 법통을 바로 세운
결정적 계기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사 기간은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로 2년 6개월 남짓,
비교적 짧은 시간이지만, 종단의 청정가풍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지다.
2014년 원적(圓寂)에 든 전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은
봉암사 결사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재영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논문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퇴옹 성철의 역할>에서
“불교가 세속의 변화를 따라잡는 길은 세속의 가치와 질서를 초월해
불교만의 세계를 올곧게 지키는 것”이라며,
“그것이 바로 봉암사 결사가 우리에게 보여준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는 논문
<봉암 결사의 역사적 의미>에서 “결사의 정신은 불교정화운동의
이념적 모태가 됐다”며, “조계종단 재건과 운용의 기초를 제공했다”고 짚었다.
----일화----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목표로 대중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하고 치열하게 수행해나갔다.
자급자족하고, 가사와 장삼을 율에 맞게 정비한 뒤 포살법회와
보살계 수계법회를 봉행하는 등 봉암사의 생활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일부 스님과 신도들은 봉암사 결사 대중을 ‘외도’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여름에 육환장 짚고, 삿갓 쓰고 삼베 장삼 입고,
걸망지고 비를 줄줄 맞고 가면 모두 큰스님 오신다고 비아냥거렸다”는
묘엄 스님의 회고가 이런 분위기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왜곡된 한국불교가 제 모습을 찾는 과정에서 겪는
작은 고난에 불과했다.
봉암사에서 스님들이 부처님 법답게 살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신도 수백여 명이 수계법회에 동참하면서 봉암사의 위상은 점점 높아졌다.
일제시대 피폐해지고 왜곡된 한국불교를 근본으로 돌아 세우는데
핵심 축이었던 봉암사 결사였다.
당시 봉암사 스님들의 생활이나 공주규약을 살펴보면,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찰의례들이 여기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봉암사의 기풍은 새로웠고, 탁월했다.
결사에 동참한 스님들의 뼈를 깎는 자성과 노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성철, 청담, 향곡 스님 등은 한국불교의 선 가풍을 다시 세우는데 일조했고,
자운 스님은 율장연구를 통해 흐트러진 계율을 바로 잡는데 큰 족적을 남겼다.
스님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현대불교사에서 봉암사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에 의해 왜색화 된 한국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부처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청정승가의 가풍을 되살리자는
결사의 목소리는 오늘날까지 종단에 영향을 미쳤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봉암사에서 성철 스님을 따라 수행할 때 이야기다.
성철 스님은 함께 수행하는 스님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며
걸핏하면 멱살을 잡고 끌고나가 계곡 물속에 처박았다.
"밥값 내 놓아라"라는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놋쇠행로를 머리에 덮어쓰거나
몽둥이로 두드려 맞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성철 스님은 늘 "송장 불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불교가 되려면
죽을 각오로 수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7년 가을에 나는 큰 환상을 안고 문경 봉암사로 갔었다.
우봉 스님은 사찰운영의 전 책임을 지고,
보문 스님은 10년간 장경수호에 진력하겠다는 철석같은 약속이었다.
자운 스님과 법웅 수좌도 함께 왔었다.
주지로는 보안 노장을 모시고, 십여 대중이 동거했다.
그러나 칠성각의 철폐, 일반 불공 및 기재의 거부 등으로
막심한 식량난에 빠지게 돼 우봉 스님의 노력으로
군청에서 다대한 양곡 특배를 얻어서 임시 모면을 했다.
자운 스님은 율장연구에 여념이 없었고,
신춘이 돼 월산 스님 기타 몇 스님들이 더 입주했다.
나는 하기의 공주규약 초안을 대중에게 제시하고 상세한 설명을 했다.
고불고조의 유칙을 완전하게 실행한다 함은 너무나 외람된 말이기는 하지만,
교단의 현황은 불조 교법이 전연 민멸됐으니
다소간이나마 복구시켜보자는 것이 주안점이었다.
그리고 교법 복구의 원칙하에 나의 수시 제안이 있을 것인 바,
그 제안에 오점이 발견되지 않는 한 대중은
무조건 추종할 것을 재삼 다짐하고 실천에 옮기게 됐다.”
- 성철스님이 1965년 8월22일 토요일 자 일력(日曆)에 적어놓은 메모
성철 스님의 메모를 보면, 당시 봉암사 대중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봉암사에 모인 스님들은 먼저 일반 불공과 천도재를 거부하고
수행에만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이에 앞서 ‘법당정리’를 위한 대중공사를 열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외에는 모두 정리할 것에 의견을 모았다.
칠성각, 산신각 등을 철폐하고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도 치워버렸다.
법당을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곧 어려움이 찾아왔다.
신도들의 발길이 끊어진 것이다. 먹고 살게 없었지만
스님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전 종정 혜암 스님의 회고다.
“모든 대중은 자급자족해서 살림을 하는 동시에 탁발을 해서 공부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하루에 나무 두 짐은 꼭 해야 했는데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부를 못 들어 야단이었다.”
불교에서 결사(結社)의 역사란 오래다.
‘결사(結社)’의 사전적 의미는 다수인이 공동 목적을 이루기 위해
상설 단체를 결성하는 것을 말한다.
민주국가에서는 ‘결사의 자유’가 보장돼 있다. 헌법에 명시된 결사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결사의 자유란 다수인이 일정한 목적을 위해
계속적인 결합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세속의 결사는 어느 단체를 막론하고 처음부터 정치적인 목적이 내포돼 있다.
하지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결사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목적을 위해 행동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는 세속의 결사와 동일하다.
하지만 불교 결사는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처음부터 탈정치(脫政治)ㆍ탈권력(脫權力)을 추구한
순수한 수행공동체의 모임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세속의 결사와 불교의 결사는 그 의미와 성격이 다르다
‘결사(結社)’란 뜻을 같이 하는 승속(僧俗)의 도반들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신앙을 실천하기 위한 결집체를 만들어
집단적으로 수행하는 불교신앙운동의 한 형태다.
신앙결사는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공동체까지도 포괄하기 때문에
사회변혁운동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결사운동은 중국 동진시대 혜원(慧遠, 334~416)이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맺은 백련결사(白蓮結社)를 그 시초로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통일기를 전후해 불교가 대중화되면서
결사운동이 활발해져 왕실과 귀족의 지원에 의한 화엄결사가 조직되기도 하고,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염불결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 화상이 간성 건봉사에서
만일 염불결사를 맺고 염불수행을 하다가 29년만인 786년(원성왕 2)
31명이 인로왕보살의 인도로 모두 육신등공(肉身騰空) 왕생한 일화가
우리나라 결사의 효시라고 본다.
그리고 개혁운동 차원으로 승화시킨 가장 대표적인 결사로는
고려시대 지눌(知訥, 1158~1210) 스님이 지금의 송광사를 중심으로
개창했던 정혜결사(定慧結社)와 천태종 요세(圓妙了世, 1163∼1245) 스님이
전남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에서 민중을 대상으로 한
정토신앙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진한 백련결사(白蓮結社)가 유명하다.
특히 보조국사 지눌은 수선사(현재의 송광사)에서 정혜결사를 하면서
유명한 '정혜결사문'에서 세속화된 호국ㆍ미신불교의 타파와
타락한 형식불교의 척결을 통해 성불도생의 수행불교와 정법불교를 주창했다.
정혜결사란 명칭 그대로 정혜(定慧)를 근수(勤修)하는 결사이다.
그 사명(社名)을 '정혜(定慧)'라고 한 이 두 글자가 결사의 이념이며 취지였다.
불교의 수행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정(定)과 혜(慧)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는
정혜쌍수론(定慧雙修論)을 바탕으로, 세속화되고
정치와 연관돼 타락한 불교를 지양하며
산림에서 선(禪) 수행에 전념하자는 운동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선 수행이론을 지향함으로써
고려 선불교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으며, 보조선(普照禪) 전통의 기원이 됐다.
• 2007년 10월 봉암사 결사 제60주년 행사에의 경과보고에 나타난
봉암결사의 공식적인 내용을 보자.
1942년 가을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서울 선학원에서 만남.
당시 한국불교의 상황은 대처와 식육이 만연해
비구승단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수행종풍이 해이해져
조조상전(祖祖相傳)해온 정법의 불씨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함.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은 불교가 처한 이 같은 위기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왜색불교의 폐단을 일소하여
청정 비구승단을 재건하기 위해 부처님 법대로 함께 수행하기로 약속함.
• 1943년 봄 청담, 성철, 금포, 도우 스님 등이
법주사 복천암에 모여 공동수행에 들어감.
그러나 청담 스님이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상주경찰서에 구금되면서
공동수행은 중단되고, 대중들은 불가피하게 해산됨.
• 1944년 봄 청담, 성철, 청안, 자운, 서암, 도우 스님 등이
대승사 쌍련선원에 모여 공동수행을 다시 시작함.
여기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굳건한 결의를 다지고
수행가풍 진작을 구상함. 이때 봉암사 결사의 주축으로 활동했던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은 영산회상도(靈山會相圖)를 그려놓고
율장, 청규 등 불법에 의거한 총림체제의 구축 방안을 논의함.
• 1945년 해방 해방과 함께 대승사 수행대중들이 해산함.
• 1946년 가을 청담, 자운, 홍경, 종수, 도우 스님이
봉암사에 선방을 열고 수행하기 위해 봉암사에 입주함.
이 때 능엄주 수행도 하기 시작함.
• 1947년 봄 종단적 차원에서 해인사에 가야총림이 설립되자
봉암사 대중들도 이 총림에 참여하기 위해 해인사로 떠남.
그러나 성철 스님은 수행환경과 지원 조건에 대한 협의가
원만히 진행되지 못해 해인사를 떠나 통도사 내원암으로 들어감.
반면 청담 스님은 가야총림에 남아 초기 총림 운영에 참여함.
• 1947년 여름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이 서울에서
김법룡 거사로부터 경전을 비롯한 불교와 관련된 귀중한 책을 인수함.
47년 하안거를 마친 후 공동수행을 재개하기로 약속하고 장소를 물색함.
이에 청담 스님께서 봉암사가 수행환경이 좋다고 제안해
봉암사를 결사장소로 결정함.
• 1947년 가을 결사를 약속한 성철, 보문, 자운, 우봉 스님이
1차로 봉암사로 들어가 결사를 단행함. 결사 대중들은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는
굳건한 기치를 내걸고 철저한 규칙 아래 수행을 시작함.
수행결사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음.
첫째, 율장과 청규 등에 근거해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제정하고,
이에 의거해 부처님 법대로 수행을 전개함.
둘째,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백장청규의 정신에 따라 수행과 운력을 병행함.
셋째, 발우, 가사, 의례, 육환장 등 수행과 생활 전반에 걸쳐
혁신적인 개혁조치를 단행함.
넷째, 식민지불교의 극복, 교단개혁의 단행, 불교 발전이라는
대승적 목표의식아래 정진함.
다섯째, 비구니스님들도 봉암사 산내암자인 백련암에서 결사에 참여함.
이는 비구니를 교육해 불교발전에 동참케 하려는
청담, 성철스님의 원력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평가됨.
봉암사 결사 참여 대중
현재까지 문헌기록이나 증언에 의해 밝혀진
봉암사 결사 참여자 명단은 다음과 같음.
○ 비구 스님 - 청담, 성철, 자운, 우봉, 보문, 향곡, 종수, 혜암,
월산, 응산, 홍경, 도우, 청안, 일도, 성수, 법전, 보경, 보안 영신,
정천, 만성, 지관, 혜안, 보일, 혜명, 혜정, 혜연, 혜조, 의현 등
○ 비구니 스님 - 묘엄, 지원, 재영, 묘찬, 응민, 오선, 혜민, 재용,
혜일, 원명, 지현, 혜해, 수진, 묘각, 묘명 등
• 1949년 가을 남북분단으로 인한 좌우대립이 격화되면서
봉암사 일원에는 빨치산이 등장해 수행환경이 위협 받게 됨.
이에 따라 성철 스님이 1차로 기장 묘관음사로 옮겨가고,
뒤이어 백련암에 머물고 있던 묘엄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감.
• 1950년 3월 잔여 대중들이 경남 고성 문수암으로 옮겨 감.
• 1950년 4월 결사를 다시 구성하기 위해 15명 내외의 대중들이
문수암에 다시 집결하여 결사를 준비함.
• 1950년 6월 한국전쟁의 발발로 문수암에 모인 대중들이 해산하면서
봉암사 결사가 중단됨. 그러나 봉암사 결사의 정신과 수행가풍은
이후 정화불사의 이념적 근거가 됐으며, 조계종단의 수행가풍과
사상적 뿌리로 자리 잡게 됨.
나아가 봉암사 결사를 계승한 조계종은 현재 5대 총림과
100여 개의 선원에서 매년 2,500여명의 수행자들이 정진하고 있으며,
1만 3천여 명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전법교화를 위해 헌신하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청정 비구승단으로 발전함.
• 2007년 10월 19일 봉암사 결사 60주년을 맞아
결사의 정신을 되새기고, 수행종풍을 계승해
불교중흥의 계기로 삼고자 사부대중들이 모여 기념법회를 봉행했음.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共住規約)>
1. 엄중한 부처님의 계율과 숭고한 조사들의 가르침을 온힘을 다해
수행해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목적을 빨리 이룰 수 있기 바란다.
2. 어떠한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개인적인 의견은 절대 배제한다.
3. 일상에 필요한 물품은 스스로 해결한다는 목표 아래 물 긷고
나무 하고 밭일 하고 탁발하는 등 어떠한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4. 소작인의 세금과 신도의 보시에 의존하는 생활은 완전히 청산한다.
5. 신도가 불전에 공양하는 일은 재를 지낼 때의
현물과 지성으로 드리는 예배에 그친다.
6. 용변 볼 때와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늘 오조가사를 입는다.
7. 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으며 반드시 함께 다닌다.
8. 가사는 마나 면으로 한정하고 이것을 괴색(壞色)한다.
9. 발우는 와발우 이외의 사용을 금한다.
10. 매일 한번 능엄대주를 독송한다.
11. 매일 두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12. 초하루와 보름에 보살대계(菩薩大戒)를 읽고 외운다.
13. 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14. 앉는 순서는 법랍에 따른다.
15. 방사 안에서는 반드시 벽을 보고 앉으며 서로 잡담은 절대 금한다.
16. 정해진 시각 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17. 필요한 모든 물건은 스스로 해결한다.
18. 그 밖에 규칙은 청규와 대소승의 계율 체제에 의거한다.
이상과 같은 일의 실천궁행을 거부하는 사람은 함께 살 수 없다.
최근 ‘봉암사 결사’가 크게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07년 10월 19일 봉암사에서 개최된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에는 비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스님 1,000여 명과 재가불자 9,000여 명 등 1만여 명의 대중이 운집하였다.
그러면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대법회에 운집하였을까?
한마디로 봉암사 결사 정신에서 현재 추락한 한국불교 위상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원래 ‘봉암사 결사 6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왔다.
봉암사 결사의 의미를 학문적으로 재조명해 보자는 취지에서였다.
지금까지 한국불교는 결사의 정신에 의해
청정한 승단을 유지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종교가 권력과 결탁하면 자연적으로 부패해질 수밖에 없다.
종교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게 되고 세속화의 길로 치닫기 마련이다.
그럴 때 누구라도 바른 정신을 갖고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붓다의 본래 가르침대로 실천하겠다고 몸부림친다면
그것이 곧 ‘결사’인 것이다.
현재의 이 혼탁한 한국불교를 개혁하기 위해
외부의 힘을 빌려 정화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결사와 같은 자정(自淨)의 노력이 아닌 다른 방법은 또 다른 부작용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결사는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한다.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사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마성 스님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