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의 수괴 안록산은 비상한 처세술로 3진陣 절도사의 지위까지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그는 소그드 상인과 돌궐무사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부친은 실크로드를 오가는 대상이었기에 늘 밖으로만 나돌아 사실상 편모슬하에서 자랐다. 정착민들과 달리 수시로 이동해야하는 유목민 집단에서 부친의 부재는 치명적 불이익이다. 어른 몫까지 감당하며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아이에게는 하루하루, 그리고 매 순간순간이 투쟁의 장이었다. 덕분에 생존본능이 비상하게 발달했다. 그렇게 갈고닦은 지혜로 훗날 양귀비를 휘어잡고 황제도 주무르게 된다.
젊은 시절,
그는 유주(북경 일대) 절도사 장수규 수하의 하급 무관이었다. '비대한 둔텡이' 라며 구박하자 밥을 반만 먹었다. 상관에게 잘 보이려고 살을 뺀 인물은 역사상 안록산이 유일무이할 것이다. 여하튼 효과는 단단히 보았다. 기특히 여긴 장수규가 그를 달리 대한 것이다.
그렇게 남다른 노력으로 성공가도를 달린 그는 불평분자들에게 냉혹했다. 필요한 것을 가진 자에게는 아부의 달인, 약자에게는 승냥이였던 그는 늘 아부와 승냥이의 경계에서 살았다.
하급 무관에서 일약 평로병마사로 승진한 그는 더 높은 자리를 노렸다. 변방을 점검하러 조정 관리들이 올 때마다 극진히 대하며 잘 말해 달라 애걸했다. 그들은 돌아가 그를 칭찬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좋은 인상이 조정에 박혀갔다.
그가 스스로를 각인시킨 수단은 실로 고명했다.
어느 날 현종이 태자(이형 李亨)에게 인사시켰으나 멍하니 서서 절하지 않았다. 왜 절하지 않느냐고 하자 짐짓 물었다.
" 신은 오랑캐라 조정 예절을 모릅니다. 태자는 어떤 관직인가요?"
" 태자는 장래의 황제이니라."
록산이 기다린 것은 이 한 마디였다.
" 우둔한 신은 그저 폐하 한 분만을 알 뿐 태자는 몰랐습니다."
이 말을 보라. 얼마나 뛰어난가!
구질구질하지 않으면서 강직한 충성을 드러내지 않는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는 심사숙고를 거친 주옥같은 아부였고 듣는 사람을 감복시키는 힘이 있었다.
비대한 그는 늘어진 뱃살을 양쪽에서 쳐들어야 허리띠를 맬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를 아부의 소재로 삼는 재치 또한 있었다. 어느 날 비대한 체구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날렵하게 호선무★를 춘 록산이 배를 불룩이며 가쁜 숨을 추스르고 있었다.
"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장난기가 동한 현종은 불룩한 배를 가리키며 농을 건넸다.
" 폐하를 향한 붉은 충심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실로 순발력 있는 응구첩대였다.
그러나 평소 준비해두지 않았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재치 넘치는 아부이기도 했다.
어느 날 양귀비와 그 자매들이 있는 자리에 불려온 그는 더듬었다.
" 아신兒臣 저, 저, 저 신 안록산이 귀비 낭낭娘娘을 배알합니다."
계산된 말인지 얼떨결인지는 모르지만 뜻이 묘했다. 아兒란 어린 아들이며 낭낭은 어머니다.
" 사람은 원래 무의식중에 진심을 뱉는 법이다. 짐은 록산이 원하는 바를 알겠구나. 귀비를 어머니로 모시고 싶다고?"
황제의 말에 자매들은 박장대소했지만 막상 귀비 본인은 어이가 없었다. 이십대에게 40대 아들이라니! 하긴 황제의 나이는 아비 벌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 소자 록산이 어머님의 만복을 바라옵니다."
록산은 능청스레 삼배를 올렸다.
" 예의를 모르는 아들이로구나. 절은 아버지부터 해야 하느니!"
" 소자는 호인胡人 입니다. 저희 풍습은 어머니를 더 받듭니다."
모르기는커녕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귀비 말이라면 황제는 무사통과라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반의 노력으로 배의 효과를 보는 길이었다.
과연 그러했다.
그는 얼마 되지 않아 평로平虜, 범양范陽, 하동河東의 삼진 절도사를 겸하게 된다. 절도사는 보통 자리가 아니었다. 직급은 군구 사령관에 불과하지만 실제로는 군권뿐 아니라 행정, 재정까지 장악한 지방 토土 황제다. 10명의 절도사 자리 중 록산 혼자 3개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게 승승장구 하던 와중에 귀비의 수양오빠인 양국충이 승상으로 부임했다. 귀비의 총애를 놓고 둘이 경합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唐은 한인 외의 족속은 모두 호인胡人으로 취급한 철저한 인종차별 국가다. 심지어 4종류로 등급까지 매겨 최 하등급인 삼한출신 사민沙民 들은 노예가 되기 일쑤였고 돌궐과 소그드의 혼혈인 안록산 역시 그러한 차별에 대한 뿌리깊은 불만이 평소부터 있었다.
귀비의 위세에 기댄 국충은 오랑캐 록산을 여지없이 궁지로 몰아붙였다. 상대에게 삼진의 병력, 18만이 있는 반면에 금위군은 6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한 어리석음이었다. 궁지에 몰리자 록산은 거침없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러한 암투의 내막을 모르던 황제에게는 이 사태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록산은 신하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자 아닌가? 사랑에 눈 먼 늙은 황제는 결국 반란이 귀비에 대한 흑심 때문이라고 믿어버렸다. 그래서 서둘러 귀비의 피신부터 준비시켰다.
왜의 유학승 변정辯正이 은밀히 황궁으로 불려왔다. 그의 속성은 진陳씨다. 견당사였던 그는 장안에서 혼인해 형제를 두었다. 철저한 인종차별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여인을 아내로 얻을 만큼 변정에 대한 조정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는 차남과 당나라에서 살았고 왜국 조정에 출사한 장남 조경은 이번 견당사 판관으로 장안에 와 있었다. 밀명을 받은 변정은 견당사 키비노 마키비(길비진비 吉備眞備)를 찾아 밀담을 나누었다.
며칠 후 황궁에서 나온 많은 짐수레가 견당사가 머무는 태화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 어딘가로 떠나갔다. 몽진 보름 전의 일이었다. |
첫댓글 부지런한 우리의 작가 선생은 이른 새벽부터 황해를 집안에 있는 작은 연못으로 삼아 고금(告今)을 넘나들고 있구려..
하오 하오 띵 하오!
점심하고 나른해진 오후에 8세기 중반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요.
계속 좋은글 공짜로 읽어도 되는 것인지..... 하여튼 서생 작가 고맙소
<서생 작가>란 표현이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역시!
장면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