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충(吳思忠)의 처음 이름은 오사정(吳思正)이다. 그의 선조는 영일현(迎日縣) 사람이며 뒤에 영원진(寧遠鎭)으로 옮겼다. 과거에 급제한 후 거듭 승진하여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고 헌납(獻納)과 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창왕 때 사의대부(司義大夫)가 되어서 사전(私田)을 되돌려준 것에 대한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또한 동료들과 함께 상서하여 이르기를, “과거 여러 간신들이 권세를 잡고 붕당(朋黨)을 끌어들여 등용하는 일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곧고 충직한 선비는 세상일을 잘 모른다고 하여 배척하였지만, 탐욕스럽고 아부하는 무리들은 현명하고 유능하다 지칭하여 높이고 승진시켰습니다. 또한 언로를 끊거나 막아버려 총명함을 덮고 막아버려 나라가 다하도록 피폐해졌습니다. 다행히 천지와 종묘사직의 신령에게 의지하여 흉악한 무리들을 처형하게 되자 조야(朝野)가 크게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처음 즉위하시자 현명하고 뛰어난 이를 널리 찾아 여러 관직에 배치하고 크게 언로를 열어 나무꾼에게도 얻어내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악과 제도 중에 마땅한 것과 시국을 타개하고 민(民)을 구제하는 대책을 대성(臺省)에서 거듭 올리자, 전하께서는 그것을 듣고 시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비록 법이 만들어졌지만 민은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토지의〉 경계를 바르게 하자는 논의에 대해서는 세력 있는 집안이 크게 꺼렸고, 뜻있는 선비의 강직한 발언에 대해서는 사악한 무리들이 깊이 질시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를 퍼뜨려 사람들의 귀를 현혹시켜 중외(中外)가 두려워하고 있으니 이는 점점 난리를 선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천재지변이 자주 나타나고 별이 궤도를 벗어나며, 상강(霜降)이 지났는데도 빠른 우레가 그치지 않고, 입동(立冬) 후에도 증기와 안개가 일어나 퍼지니 이는 이기(二氣)가 서로 괴리된 증거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보건대, 전하께서는 하늘의 경계를 신중히 삼가시어, 즐겨 배우고 간언을 좇아 위로는 수양하고 반성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은 각각 그 직책을 받들어 감히 게으르거나 대충하지 않도록 하여 아래로는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뒤에야 천재지변이 없어지며, 사람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아 무궁한 왕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신들이 매번 음악을 들으며 연회를 열어 그 비용이 엄청나니, 이는 참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민에게 부지런하며 재앙을 근심하고 변란을 걱정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는 상국(上國)의 사신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과 공을 세운 장수를 위로하는 것 외에는 공적이든 사적이든 중외의 모든 잔치에 음악을 쓰는 일을 통렬히 엄금하여 하늘의 경계에 호응하고, 나라의 비용을 절약하여 민생을 넉넉하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창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공양왕 초에 〈오사충(吳思忠)은〉 사인(舍人) 조박(趙璞) 등과 함께 상소하여 이색(李穡)과 조민수(曹敏修)의 죄를 극렬하게 논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이인임(李仁任)이 신우를 옹립한 죄는 역시 전하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헌사(憲司)에 맡기어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그 죄를 성토하소서.”라고 하였으며 다시 말하기를, “삼사우사(三司右使) 김속명(金續命)이 〈신우의〉 모친이 분명치 않다는 설을 내세웠다가 쫓겨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이자송(李子松)도 신우가 군대를 일으키는 일을 간쟁하였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라옵건대 해당 관청에 명하여 그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그 자손을 녹용하여 충혼을 위로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명령하여 이색 부자를 파직시키고 조민수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또한 〈오사충은〉 조박 등과 함께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전하께서는 위로 천자의 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신하와 민의 여망에 부응하여 반란을 뿌리 뽑고 반정(反正)하여 단절되었던 우리 조종의 대통을 잇고 신우 부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명분을 바로잡고 민심을 안정시켜 만세의 태평한 시대를 연 것입니다. 옛날 위(衛)의 군(君)이 공자를 모셔 정치를 맡기자 공자는 먼저 명분을 바로잡기 위해 말하기를,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민(民)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한(漢)의 여후(呂后)가 궁첩(宮妾)의 아들 홍(弘)을 데려다 혜제(惠帝)의 후사로 삼았지만, 태위(太尉) 주발(周勃)은 홍이 혜제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여 처형한 후에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왕위에 올려 민심을 안정시키고 4백 년 동안의 태평한 〈시대를〉 열었습니다.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다른 성씨인 무삼사(武三思)를 세워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승상 장간지(張柬之)가 측천무후의 일당인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 등을 처형하고 다시 중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무삼사를 놓아둔 채 중종이 스스로 처형할 것을 기다리자, 설계창(薛季昶) 등이 장간지에게 이르기를, ‘풀을 베면서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비록 세 간흉을 처형했지만 무삼사가 아직 남아 있으면 공들은 결국 장사지낼 땅도 없게 될 것입니다. 만약 빨리 도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장간지 등이 그 말을 좇지 않고 말하기를, ‘대사가 이미 판가름 났으니 저 하나의 무삼사는 도마 위의 고기와 같을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무삼사가 과연 장간지 등을 죽였고 중종도 역시 시해를 당했습니다. 군자가 이를 논하여 이르기를, ‘측천무후가 이미 당의 종묘에 죄를 지었으니 중종 역시 모친이라는 사사로움을 두어서 안 된다. 장간지 등이 이미 중종을 세운 뒤에 측천무후에게 사약을 내리고, 또한 중종은 대의로써 그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면 조종의 분노를 풀고 천지의 올바른 도리가 섰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역시 공자가 명분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한 두 대신들이 전하를 추대해 공민왕(恭愍王)의 뒤를 잇게 하여 신우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님을 바로 잡고 이를 온 나라에 포고하였습니다. 이에 삼한의 백성들은 서로 말하기를, ‘내가 살아서 다시 태조의 후손을 보는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지난번 홍륜(洪倫)이 난을 일으킨 근원 및 신우의 어미 반야(般若)가 말을 꺼냈다가 죽게 된 일은 역시 전하께서도 잘 아시는 바이며, 명(明) 천자께서도 이미 들은 내용입니다. 지금 이색이 마음속으로는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이인임이 신씨를 세울 때 일찍이 한마디 말도 없었고, 조민수가 신창을 왕위에 세울 때는 계책을 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금년에는 또 신우를 복위시키려고까지 하였으니 그의 죄는 앞의 상소에서 미처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이미 정통을 이으셨는데도 이종학(李種學)은 혼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를, ‘현릉(玄陵)〈공민왕〉께서 우를 강녕군(江寧君)에 봉해 부(府)를 세워주었고 천자도 우왕에게 작위를 내렸다. 이성계가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감히 현릉의 명을 어기고 우리 여흥왕(驪興王)을 폐위시켰는가?’라고 떠들었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신우 부자의 죄를 바로 잡아 태묘(太廟)에 고하고 민심을 안정시키지 않는다면, 또한 이색 부자가 신우·신창에게 붙은 죄를 바로 다스려 소인배들의 음모를 끊어버리지 않는다면, 전하 또한 하루라도 편안히 왕위에 계시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자는 말하기를, ‘신씨 부자의 일은 천자도 아는 사실이니 분명한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려 그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천자께서 이미 삼한의 신하들이 다른 성씨를 왕으로 삼은 것을 꾸짖었으니 어찌 또 다른 명령이 있겠습니까? 또한 혹시 상국(上國)에서 신우를 살려두려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살피지 않고 전하께서도 역시 그를 놓아두어 민심을 불안하게 하시렵니까? 『춘추(春秋)』의 법에 난신적자는 누구나 죽일 수 있으며, 먼저 죽이고 뒤에 알리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니 어찌하여 분명한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이인임이 신씨를 추대한 죄는 하늘에 계신 태조와 하늘에 계신 조종의 영령이 함께 처형할만한 데도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신 등의 청원을 따르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하여 죽이지 않으면 만세의 난신(亂臣)이 생기는 문을 열게 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난적을 부관참시하고 그의 집을 연못으로 만들게 하며 가산을 몰수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이색(李穡)과 이종학(李種學) 부자는 정직시키고 산관(散官)에 속하게 하는 데 그쳤는데, 이러면 만세의 간악한 역적을 어떻게 징계할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해당 관청에 명령을 내려 그 죄를 분명하게 바로 잡아야 합니다. 이숭인(李崇仁)과 하륜(河崙)은 과거 이인임의 심복이었다가 뒤에 이색의 간계를 좇아 신창이 〈명에〉 입조할 것을 독촉하고 신우를 복위시켜서 조종의 혈식(血食)을 영원히 끊으려고 하였으니 그 죄는 처형해야 마땅합니다. 역시 해당 관청에 분부하시어 논죄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종학은 신창을 세운 것이 아버지의 공이라고 환관 이분(李芬)에게 말하였고, 이분은 이림(李琳)의 딸에게 말을 건네 이림의 당여가 되어 간계를 이루어보려고 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이분을 해당 관청에 내려 그 정상(情狀)을 국문하여 그 죄를 바로잡으소서. 권근(權近)은 사사로이 황제의 조서를 뜯어 먼저 이림에게 보이고 다시 이색에게 보였으니 그 마음이 왕씨에게 있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이미 이숭인의 일에 의탁하여 글을 올렸다가 탄핵을 받았으니 그간의 〈일들도〉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먼 곳으로 유배만을 보내고 그 죄를 바로잡지 않으면 어떻게 후세의 불충한 신하들을 징계하겠습니까? 전 한양윤(漢陽尹) 문달한(文達漢)은 이림의 인척으로 궁중에서 권력을 장악하여 불의를 자행하였습니다. 이림의 족속들이 이미 모두 유배되었는데도 혼자 전하 곁에 있으니 바라옵건대 직첩을 회수하고 외지로 쫓아내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이인임의 집을 파서 연못으로 만들고 이색 부자와 이숭인·하륜·이분·문달한을 유배 보냈다.
〈오사충이〉 다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환관은 본래 궁내를 청소하는 직책으로 다른 일에는 간여하지 못합니다. 진(秦)이 옛 제도를 훼손하는데 이르러서 조고(趙高)를 중거부령(中車府令)으로 삼아 이세(二世)가 그의 손에 죽게 되었습니다. 또 서한(西漢)이 홍공(弘恭)을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자 그가 충량한 인물들을 살육하여 왕망(王莽)의 찬탈이 일어났으며, 이어 조절(曹節) 등이 권력을 장악하자 동한(東漢)이 망하게 되었습니다. 당(唐)이 구사량(仇士良)을 중위(中尉)로 삼자 그가 황제의 폐립을 하게 되었고, 송(宋)이 동관(童貫)을 장수(將帥)로 삼자 두 황제가 여진(女眞)에게 사로잡혔습니다. 또 전원(前元)에서는 원사(院使)가 권력을 장악하여 결국 천하를 잃었으니, 〈이는〉 고금의 명백한 귀감입니다. 우리 조종의 제도에도 환관은 관직이 없었습니다. 문종(文宗)의 시대는 태평성대로 불리었고 우리 조종의 현명하고 성스러운 군주였지만, 환관과 급사(給事)가 십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역시 녹봉을 타먹지 않았습니다. 충렬왕(忠烈王) 때에도 또한 관직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릉〈공민왕〉에 와서 환관에게 양부(兩府)의 숙위하는 반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마침내 최만생(崔萬生)의 변란을 이르렀던 것은 또한 전하께서 직접 보신 바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다시 내시부(內侍府)를 두어 품계를 3품으로 하였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중흥의 군주로서 다시 망국의 전철을 밟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지금부터 궁중의 환관과 급사에게는 단지 의복과 먹일 것만 지급하고 내시부를 혁파하소서.”라고 하였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사충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는데, 이는 그가 탄핵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언관(言官) 직책을 빼앗은 것이었다. 뒤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는데, 간관이 정몽주의 사주를 받아 조준과 윤소종 등을 논죄하고 극형에 처하라고 요청하자 헌부(憲府)도 오사충을 탄핵하여 죄가 윤소종과 같으니 함께 죄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그를 삭직하고 멀리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정몽주가 죽자 소환하여 좌상시(左常侍)로 옮겼다. 그 이후의 일은 본조의 〈기록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