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셉션>을 지탱하는 두 축은 동서양을 가로지른다. 서양에서 온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나눈 프로이트의
심리 치료다.
동양에서 온 것은 삶 자체가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물음이다.
스포일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줄거리를 얘기해 보면 이렇다. 남의 꿈에 접속해 생각을 훔치는
주인공 코브는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도망 다니다 사이토를
만난다. 사이토는 라이벌 기업의 후계자의 생각을 바꿔달라는
제안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죄를 없애준다는 엄청난
보상이 따른다.
기계로
연결된 사람들이 꿈을
공유하고, 타인의 꿈을
설계하며, 꿈을 통해 의식을 바꾸는 과정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문법 속에 버무려졌다. 제목처럼 이런 줄거리를 관통하는 핵심은 '인셉션'이다.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것에 개입해 타인의 생각을 변화시킬 것인가?
<인셉션>에서 중요한 장면은 후계자인
피셔가 아버지의
금고를 열어
바람개비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바람개비는 피셔가 어려워했고 두려워했던 아버지와 자신과의 애정을 증명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상속 유언이 들어있으리라 예상했던 곳에서 아버지와
자기가 같이 만든 바람개비를 보면서, 피셔는 아버지와
화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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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전형적인 프로이트의 심리 치료의 한 전범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마음은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 의식은 "현실
사회에 적응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할 수 있는 나"이다. 무의식은 내가 모르는 나이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힘이 느슨해져 있을 때, 꿈을 통해서 이 무의식이 실체를 드러낸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무의식에 대해서 아는 일("무의식의 의식화")을 통해서 마음의 병의
원인을 파악하면 심리 치료가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인셉션>에서 피셔가 어린 시절 무의식에
각인돼 있었던 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바람개비를 보면서, 아버지와의 뿌리 깊은
불화를
극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프로이트식 심리 치료 과정이다.
그렇다면, 동양의 흔적은? 역시 <인셉션>에서 중요한 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는 꿈인지 현실인지를 판가름하는
팽이가 쓰러질듯 말듯하면 결말을 내리기 때문이다. 코브가 겪은 일이 현실인지 꿈인지 묻는 것이다. (코브를 모험으로 이끈 사이토가 일본인(동양인)이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굳이
장자의 "호접몽"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꿈속의 꿈'이라는
화두는 동양의 여러 사람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자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말은 이랬다.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지는 내 운명이로다. 오사카의 영화는 꿈속에 꿈이던가."일본과
조선의 수많은 백성을 전쟁의 고통으로 이끌던 권력욕의
화신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많은 전쟁으로 얻었던 권력이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분명한
깨달음과 함께,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엇인지 묻는 허망함이다.
오다 노부나가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만찬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인생은 덧없는 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그 어디 있으랴."도쿠가와의 대답은 좀 더 현실적이다.
"서쪽은 십만억토로 아득하고 먼 세상이지만 이 곳 역시 내가 사는 불국의 나라다."이렇게 일본 전국시대를 풍미한 세 사람 모두 비슷한
철학을 공유한 것이다.
이런 시각은 <채근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요한 밤, 종소리가 꿈속의 꿈을 깨라고 부른다."
마치 <인셉션>에서 꿈을 깨고자
충격을 주는 장면을 연상하는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불교적 관점이다. 일체가 고요한 가운데 마음의 바탕을 깨우치면 삶이 꿈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삶이 꿈이므로 깨어서 자신을 되돌아보라는 얘기다. 부처라는 말도 바로 대각자 즉, 크게 깨어있는 자라는 뜻 아닌가.
이처럼 <인셉션>에 나타난 동서양의 두 관점은 꿈에 대한 양측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서양은 몸과 마음을 구별한 다음에, 마음을 그 자체로
분석한다. 그러니 남의 마음에 개입해서
심지어 다른 의식을 심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발상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적 관점은 다르다. 이 모든 일이 허망한 꿈일 뿐이라는 결론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한의학에서는 꿈을 어떻게 파악할까? 예로부터, 한의학은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한 결과가 꿈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꿈을 마음만의 작용으로 본 서양의 관점과는 명백히 다르다. <
동의보감>의 꿈의 해석을 보면, 이런 입장을 잘 대변한다.
"간의 기운이 실하면 화내는 꿈을 꾸고, 간의 기운이 허하면 버섯이나 산의 풀이 보인다."즉, 오장육부라는 신체적 허실이 꿈의 내용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정신
질환에 많이 쓰이는 약이었던 용골, 모려는 어떤 원리로
처방된 것일까? 여기서도 심신일치의 관점이 강조된다. 용골, 모려는 '정(精)'을
만들고 보존하는 약이다. 정은 육체에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고도로 집적된 것이다.
즉, 몸의 에너지를 보충함으로써 정신 질환을 치료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서도 몸과 마음이 서로 연결돼 있음을 강조했던 한의학의 관점이 잘 드러난다. 문명이 안겨준 각종 환상 때문에 현실과 꿈의 경계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때야말로, 바로 이런 관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