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경계종주기(9구간)
1. 일시 : 2005년 4월 24일 09:45 ~17:07분(7시간 22분)
※ 식사, 휴식 포함된 시간임
날씨 : 맑음
2. 코스 : 봉계교(70) → 568.4봉 → 490봉 → 745봉(태화강맥 갈림길)
→ 751봉 → 785봉 → 721봉 → 치술령(766.9) → 639봉 →
150.8봉 → 관문(115)까지 도상 15.5Km임
※ 136Km중 116.9Km(86.0%) 돌파
3. 참가자 : 장호동, 이귀순, 김용섭, 이수경, 박영자, 김상수(계 6명)
4. 종주산행길
이번주는 치술령의 능선으로 좋은 코스라고 하였건만 가겠다고 연락이
온 사람은 몇사람이 되질 않는다.
테마산행이 아니더라도 치술령 능선은 산행할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산이건만...
차 두대를 가지고 14번국도의 울산과 경북의 경계지점인 관문에 도착한다.
거기에 차를 한대 주차시키고…
돌아서 내려와 은을암이 있는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가 우측으로 새로이 뚫린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접어들고 그리로 넘어가니 소나무숲이 빼곡이 들어찬
곳을 지나 도착한 곳은 은편리… 삼동면 소재지를 지나 지난번 산행종점인
봉계리에 도착한다.
09:45분 산행시작
노곡2교에서 논두렁을 따라 진행을 하니 하얀 배꽃이 피어있는 배밭이 나오는데
눈두렁에는 민들레를 비롯한 야생화가 만발하여 온통 야생화 천국이었으며
그 아름다움에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들녘에는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고 모판을 만드는 모습과 밭에 비닐을 깔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경운기를 몰고 나오시는 분에게 시경계에 대하여 확인을 해보니 이곳도 지도와는
조금의 차이는 있는지... 이 땅은 경주땅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지도 뿐이니…
지난번에도 지도와 차이가 나는곳이 있었지만 이곳도 차이가 있단 말인가??
배밭옆으로 난 길을 거슬러 올라가니 묘지가 있고 오바우 및 한국산악회 그리고
경주GREEN OAK산악회의 시그널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분들도 지도를 보고 올라 왔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순간이었으며, 조금전 그분이
확실하게 알고 말했는지 도리어 의문이 생기면서... 그냥 숙제로 묻어두기로 한다.
희미한 길이 이어지면서 잡목이 다소 성가시게 하였으나 생각보다는 양호한 길이
이어져서 다행 스럽다.
야산에는 간벌이 되어 있었으며, 간벌된 나무들이 도리어 우리의 발길을 잡아챈다.
"진씨"묘소 있는 부근에서 직진을 하니 아차 이곳이 맥이 아님을 알아채고 다시
뒤돌아서고 진씨묘소에서 우측으로 조금을 내려서니 금방 능선이 나타나고
임도(묘지를 쓰기위한 임시도로?)가 있다. 그리고 임도를 따라 조금을 나아가니
묘지 이장을 하는지 포크레인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10:55분)
여기서 부터는 국제신문의 시그널이 붙어 오늘 산행 내내 따라 다녔고
봉계의 배내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데 엄청나게 가파른 능선길을 따라 임도작업을 하려는지
오름길을 따라 벌목을 해 두었다.
오름길을 올라가는데 난초가 꽃이 피어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고
그 옆에는 새알 하나가 땅바닥에 나뒹굴어 깨어져 있었다.
어미새의 잘못인 것 같지는 않은데…
뻐꾸기란 놈은 자기알을 품지 않으며 남의 둥지에 자기알을 낳고, 남의 알은 바닥으로
떨어 뜨린다고 하니 그런것이 아닌가 싶어 윗쪽 나무에 새집이 있는지를 확인하였지만
확인이 되질 않는다.
요즘 사회의 톱뉴스를 장식하는 비정의 자식들 이야기를 접할때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살모사는 새끼한테 잡아 먹히지 않을려고 나무에서 새끼를 낳는다고 하고.~
부엉이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어서 암놈이 새끼를 놓고 그냥 날아가 버려
처음부터 새끼는 스스로 삶을 영위하여야 하는데..
더 나쁜것은 암부엉이가 새끼를 놓고 나면, 기다리던 숫놈이 그 새끼를 잡아 먹는 끔직한
새가 부엉이라고 들었다.
말못하는 무지한 짐승들이니 어찌하랴마는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고
생각을 해 본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벌써 많이 더워져 있었지만 오늘은 바람이 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고
벤치가 설치된 지점을 지날즈음 부산에서 나물 뜯으려 온 몇분과 조우하고
늦게 핀 진달래와 빠른 철쭉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면서 가끔씩 눈에 들어온다.
△ 겨울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 춘란의 모습
12:12분 568.4봉 도착(13:20 ~ 14:06분까지 식사)
568.4에는 언양307, 1982년 재설이라는 삼각점이 있었고 정상일대는 온통 진달래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이미 힘을 잃어 버린 상태이다.
다시 내림길을 한참을 내려가는데.. 이미 배가 고파왔으나 올라갈 것이 걱정이 되어
장호동님이 준비한 떡 등 간식으로 허기진 배를 조금 채운다.
그리고 다시 오름길…
여기는 우측으로 우회하여 길이 이어졌으며, 가파른 쪽으로 길이 이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누군가 말한다.
원시림에 가까운 길을 한참을 거슬러 올라 능선으로 올라설 즈음 철탑이 지나는 지점을
통과하고.. 좌측에 서라벌CC가 보이고 745봉을 오르기 전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오름길에는 아직도 한창 무르익어가는 진달래를 확인한다.
헬기장이 있는 751봉에서 부터 785봉으로 이어지는 비스듬한 능선길에는 진달래가
만발하여 그 모습이 실로 장관이다.
15:05분에 녹동에서 올라오늘 길이 뚜렷한 약수터 갈림길을 지나고...
드디어 치술령에 도착한다.
△ 진달래를 배경으로~
15:12분 치술령 도착
치술령에는 조그마한 정상표석이 자리잡고 있으며 "신모사지(神母祠址)" 라는 비석이
서 있다.
용섭님은 경주망부석, 다른분은 울산 망부석 등으로 갈라져서 바위를 보면서 망부석의
뜻을 새김해 본다.
다음은 울산망부석과 경주망부석의 표지판을 인용해 본다.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설에 의하다보니 어느곳이 정확한 망부석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우나
두 바위의 위치로 볼때 똑같이 동해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울산망부석의 위치는 주능선이 아닌 서쪽능선에 위치해 있으나, 울산만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이니 이 또한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망부석(望夫石)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1호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연화리 산1
『망부석은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던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다 죽어서 돌로 변했다는
전설(傳說)을 가진 바위를 말한다.
이러한 전설은 몇 군데에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박제상(朴堤上)의
부인이 남편을 그리며 통곡하다가 굳어서 바위가 되었다는 이곳 망부석의 전설이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 제위 417~458) 때의 유명한 충신(忠臣)이었다.
눌지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 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 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隧述嶺)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이 돌로 변해 이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한다.』
치술령망부석(隧述嶺望夫石)
소재지 : 경주시 외동읍 석계리 산 20-1
『이곳은 나라를 위하여 떠난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가 죽어서 돌로 변해버린 바위가
있다고 하여 유명한 곳이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 때의 신하였다.
눌지왕은 신라가 힘이 약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그리워하였다.
이에 박제상은 눌지왕의 은밀한 명령을 받들어, 우선 고구려로 가 있던 복호(卜好)를
구해왔다.
다시 왜국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여 신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지만 그
자신은 탈출하지 못하였다.
이에 왜국왕은 박제상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라고 강요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여 순국하였다.
한편 그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에 올라 왜국쪽을 바라보며 슬피 울다가 죽어서
마침내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치술령 정상부근에는 이 바위 외에도 망부석이라고 전해지는 바위가 있으나 정확히
고증되지는 않았다.
그 중 이 앞의 거대한 바위에 올라서면 울산 앞바다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므로 이 곳이
망부석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
치술령에서 조금더 진행하면 잘 정비된 헬기장이 금방이라도 헬기가 내릴 듯이
잘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남방리와 은을암을 가리키는 표지들이 자주 보이며 비슷한 위치의 팻말에
은을암 3.2Km, 4.2Km등으로 서로 다르게 거리가 표기되어 있다.
639봉에서 사방을 조망한 뒤 급한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마사흙이라서
상당히 미끄러운 길로서 산행중 전혀 미끄러지지 않던 막내 수경님도 엉덩방아를
찧는다.
이어지는 길을 일전에 산불이 났던 지역으로 가끔씩 소나무들이 보일뿐 잡목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요즘들어 강풍을 타고 계속 대형 산불이 난다는 소식이니 모두들 불조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내려오는 길에 남방과 반용저수지(은을암 측)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두어번 만나고
반용저수지의 푸른물이 저녁 햇살에 은빛을 드리운다.
내려서면 금방 끝이 날 것 같던 산행이 두어번의 오르내림을 가진후 좌측의 저수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을 통과하고 저멀리 오늘의 목적지인 성저마을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런데 우측편 울산의 산기슭은 뭣을 하는지 산전체가 중간 중간 도로가 뚫려 있어
흉칙한 모습으로 다가와서 난개발의 현장임을 보여준다.
△ 치술령 정상에서~
△ 치술령 내려오는 길 전망바위에서~
△ 가파른 하산길
17:07분 산행 종료
성저마을에는 석축(성곽)과 함께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관문성(關門城)
사적 제48호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 외
관문성은 신라 성덕왕(聖德王) 21년(722)에 왜구를 막고자 쌓은 것이다.
이 성은 경주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21Km 떨어진 외동읍 부근이 산에 축조되어 있다.
한 개의 성이 아니라 치술령(隧述嶺)과 모화리 동편의 산 사이에 길이 12Km 정도의
장성과, 양남면 신대리으 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1.8Km 정도의 두 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의 규모는 치술령에서 경상북도와 울산광역시의 경계를 따라 신대리 동쪽
산까지 이른다.
관문성을 모벌군성(毛伐郡城),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마을사람들은 만리성(萬里城)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터로 추측되는 석축이나 창고터, 병사터 등이
군데 군데 남아 있다.
현존하는 남산성과 관문성의 석벽을 비교해 볼 때,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해서
관문성을 쌓은 기술이 훨씬 발달된 것으로 여겨진다.
△ 하산지점의 보리밭의 보리 - 색이 얼마나 고운지!!!
△ 관문성의 모습
5. 치술령에 대하여~(울주군 홈페이지 등에서 발췌)
1) 치산서원지(박제상 유적지)
이곳은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사당의 터이다.
박제상은 신라 시조(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후예이다.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이 임금이 된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그를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隧述嶺)에 올라가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그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隱乙岩)에 숨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隧述神母)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 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2) 은을암
은을암은 새(乙)가 숨은(隱) 바위(岩)라는 뜻이다. 이 바위에는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신라 충신(忠臣) 박제상(朴堤上)과 그 아내에 관한 것이다.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訥祗王 : 재위 417∼458) 때의 유명한 충신이었다.
눌지왕이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박제상은 임금의 명령을 받아,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卜好)를 구출해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많은 상을 주겠다고 일본왕이 달랬지만, 박제상은 끝내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일본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말았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이곳 치술령(隧述嶺)에 올라 일본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는데, 그 몸은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
이 바위에 숨었다고 한다.
은을암은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 산152번지 국수봉에 지리잡고 있는 절이다.
은을암을 세운 유래는 신라 충신 박제상의 부인 치술신모와 관련지어 구전되어 오고 있다.
박제상이 눌지왕의 명을 받아 고구려에 가서 왕제 복호를 구출하고 다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왕제 미사흔을 왜국으로부터 도망쳐 돌아오게 한 후 그는 끝내 신라의 신하됨을
욕되게 하지 않은채 왜국에서 죽었다.
오랜 뒤 제상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정을 못이겨 치술령에 올라가 남편이 죽은 왜구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슬퍼하다가 마침내 죽으니 치술신모가 되었다.
이 치술신모에 관한 설화에 덧붙여 울산에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도 있다.
박제상 부인은 죽어 몸은 화석이 되어 망부석이 되고, 넋은 날아가 새가 되었다.
이 새가 날아오른 자리를 비조라 하여 두동면 만화리에 비조라는 마을 이름이 되고,
또 새가 바위 틈에 숨었다하여 이 바위를 은을암이라 했으며, 여기에 암자를 지어
은을암이라 하였다.
은을암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인데 박제상유적지를 제대로 답사하려면 두동
치산서원에서 출발하여 치술령 망부석을 거친 뒤 은을암에 도착하는 것이 좋다.
은을암과 치술령의 망부석은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있다.
3) 치술령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 동쪽 울산과 경북의 경계에는 765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는
치술령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이 치술령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관한 애절한 전설이 있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박제상은 눌지왕 즉위 후 고구려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두 왕제를 구출코자, 먼저
고구려에 가 있는 복호를 구출해 귀국시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미사흔을 구출해 내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일본에 잡혀 심한 고문 끝에 소사 당했다.
이때 박제상의 김씨부인은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
죽으니 그 몸은 돌로 변하여 망부석이 되고, 그 영혼은 날아가 숨었는데 그 곳을
은을암이라 한다.
그 후 왕은 박제상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 대아찬으로 관위를 높혀
주고, 김씨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으며, 사당을 짓고 그 뜻을 기리는 제를 봉행토록
한 곳을 치산서원이라 한다.
이 치산서원에서 1㎞쯤 가면 하천을 끼고 갈림길이 나온다.
바로 가면 망부석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은을암(국수봉(580m)에 자리 잡고 있는 절)으로
가게 된다. 망부석쪽 으로 가면 충효사라는 절이 나오고, 절 위에 망부석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조그만 팻말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로 법왕사까지 갈 수 있다.
법왕사에서 40분 정도를 정상을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오르면 정상부근에 이르면 멀리
동해가 펼쳐진다.
정상 근처에서 왼쪽으로 돌아 30m를 걸어가면 망부석이 임을 기다리는 자세처럼 서 있다.
5. 총평 : 금일 시경계종주는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과 경북 경주시 내남면의 경계(490봉지나 300m까지)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과 경북 경주시 외동읍의 경계(치술령지나 800m까지)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과 경북 경주시 외동읍의 경계(관문까지)를 종주하였고
이번 코스는 울산광역시와 경북 경주시의 경계선상에 있는 치술령은
지아비를 기다리다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이 있는 곳으로
현세에 와서 경주 망부석과 울산 망부석... 둘로 갈라져 있지만
어느 바위가 진정한 망부석인지 알길은 없다.
치술령 정상 표석있는 위치에 바위가 있고 그곳이 망부석이라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테지만…
어느 바위가 망부석이던 상관없이 두곳 모두 태화강 하구가 빤히 바라다
보인다는 것으로 보아 실제 양쪽바위를 다 올라가지 않았을까 하는
개인의 생각도 가미해 본다.
오늘 탐방길은 처음 진입지점을 빼고는 상당히 잘 다듬어진 길이 반복되어
수월한 시경게 종주가 아니였나 생각이 된다.
그것도 가는 길목마다 핀 아름다운 진달래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종주 하였다.
진작 글을 써야 한다고 했지만 업무가 바빠서 일주일이 지난 지금 쓰다보니
메모는 해 두었지만 기억 저편으로 살아져 버려서 현장감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든다.
어찌되었던 이번 코스 종주에도 같이해준 여러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번 코스는 일반 등산객들도 많이 이용해 줘도 좋은 코스가 아닌가
생각이 들어 산을 좋아하는 모든분에게 이 코스를 추천하고 싶다.
6. 차기종주(10차) 안내
차기산행 코스는 산행지로는 매력은 없을것으로 보이나 관문을 비롯하여
만리성 등 역사에 얽힌 곳을 답사한다는 의미가 크리라 생각된다.
코스는
관문(110) → 천마산(245) → 273봉 → 293.7봉 → 268봉 → 모화교(7번국도)
→ 만리성(603) → 옛성(590) → 기령(490)까지 도상 11Km로 코스가 짧으며
5시간 정도 소요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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