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 15-18절 사이에 기록된 내용은 본절과 같은 의문을 제기 시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미 선택과 유기를 작정하시고 바로에게서 보는 바와 같이 죄인을 강퍅케 하시고
또한 그로 인하여 더 큰 죄에 빠지도록 버려두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을 책망하며 흠잡을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다.
즉, 유기된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느냐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원이나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해서 이것을 숙명론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가시적규범은 언제나 동일한 결론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불가시적인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판단 속에서 하나님을 판단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힐문하다'(안타포크리노마이)라는 단어는 '시비하다' 또는 '계속하여 말대꾸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반대자가 누가 '대적하겠느냐'(안데스테케)라고 야유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인간 존재는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하거나 그의 뜻에 대하여 정당성을 요구할 수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는 '감히'라는 말 속에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론적 위치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논쟁하며 법적인 항변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다.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 바울은 사 29:16;45:9;렘 18:1-10을 인용하면서 하나님과 동등자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창조자를 판단할 만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피조물이 창조자에게 항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렘 18:4).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공의로우신 뜻을 따라 선택과 유기를 하는 것은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선하신 뜻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도가 하나님의 선택적 섭리를 다룬 후 하나의 가상적 질문을 제시한 19절에 대한 답변은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마치 전능자를 판단할 충분한 지혜를 갖추기나 한 것처럼 하나님께 항의를 하는 것은 부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사도는 다음절에서 토기장이와 진흙을 예로 들고 있다. 바울은 단지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자신의 절대적인 권리와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의 결정에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시사할 뿐이다.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진흙 한 덩이로...권이 없느냐 - 이것은 구약의 대표적인 두 선지자 이사야와 예레미야에 의해서 사용된 예화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사상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대변해 주고 있다. 아울러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처럼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자칫하면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면 인간의 노력은 전혀 무익한 것이냐'하는 존재론적 운명론과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빠질 위험에 봉착한다. 그러나 바울은 19, 20절에서 이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의 바른 태도는 순종과 헌신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렌스키는 본절의 의미가 단지 천하게 만들어진 그릇이 토기장에서 항변할 수 없듯이 강퍅하도록 내버려진 자들도 항의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절은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귀하게 만들었느냐 천하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일을 행하실 때에 자유하다는 사상, 즉 하나님의 주권은 무한한 자율성을 전제로 하고 있음에 강조점이 있다.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를 논증한다. 죄인의 형벌에 대하여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바울은 자주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 하나님은 죄인의 멸망을 고의적으로 조성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단지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베푸시는 일에 관여하신다. 특히 그의 인내심은 진노의 그릇이라 할지라도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시며 또한 회개한 자를 기꺼이 용납하고자 하시는 증거이다. 따라서 본절에서 '멸하기로 준비된'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을 끝내 무시하고 심판에 직면하는 죄인의 최종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준비된'이라는 말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완료 수동태'로서 누군가에 의하여 멸망이 준비되었으며 그의 멸망의 때는 무르익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구체적으로 그 멸망을 준비한 자가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설령 그가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강퍅케한 행동에 대한 형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멸망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범죄한 죄로 인하여 멸망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왜 누구는 택하시고 안 택하시느냐 ? 또, 택함을 받지 못한 것은 누구의 책임이냐 ?를 하나님께 묻는 것이 잘못된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두가 죄인인 상태에서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오로지 당신의 사랑으로 마음에 합당한 자를 일부 구원하신 것이지 근본적으로 누구는 조금 낫고 누구는 조금 못한데도 불구하고 불평등한 처사를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긍휼을 오고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는 것이고
반면에 멸망당하는 자가 있는 것은 하나님이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본래 죄값으로 멸망함을 나타낸다. 따라서 문제의 근원은 죄인인 인간편에 있음을 보여준다.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3:23)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 본절은 22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양쪽에 사용된 상징적인 표현들의 의미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동일한 원리로 작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진노의 그릇들을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지만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양자 모두를 참으시고 관용하신 것은 동일한 하나님의 섭리였으나
그들이 초래한 결과는 전혀 다른 신분을 만들고야 말았다. '긍휼의 그릇'들은 '진노의 그릇'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요함을 인하여 구원의 기쁨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를 경험하게 되었다
.따라서 본절의 '영광'은 개인의 구원에 관계된 하나님의 은혜일 뿐만 아니라 민족과 개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죄의 타락으로부터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