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 임동옥
건축을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 12월 말인데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다. 내부 실내장식과 방 보일러 공사가 남았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었다.
아는 형님이 토막말을 전했다. “집 짓기는 밥 짓기라네. 쉽지 않지. 고생하네.” “네, 맞아요.” 집 짓기는 밥 짓기라고 되뇌면서 이게 무슨 말이지. 직영으로 집을 짓는 것은 자급자족했던 시절 밥 짓기와 같다는 말로 들렸다. 논과 밭에 벼와 오곡을 심고 수확하여 말려서 곳간에 저장하던 시절. 우리의 어머님은 새벽에 일어나 나락 방아를 절구로 찧은 다음 쌀을 돌확에서 갈고 조리질을 하여 가마솥에 넣어 물을 잡으셨겠지. 아궁이에 불을 때고 밥물이 넘치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뜸을 들이는 군불을 한숨 때 주었겠지.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서툴면 돌을 씹거나, 밥이 거칠거나 설거나 탄 밥을 먹었을 거다. 집 짓기도 밥 짓기처럼 어느 공정을 빼도 안되고 하나라도 잘못되어도 안 된다는 말일 터다.
20여 년 전부터 전원생활을 꿈꾸었다. 십수 년 전에 터를 장만하고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가끔 오갔다. 땅 경계에는 반송으로 울타리를 만들었다. 가끔 들르면서 집 짓기를 궁리했다. 목조주택, 컨테이너 하우스, 샌드위치 패널 집, 양옥집 등. 설계는 건축사인 친구에게 부탁했다. 친구는 처음에 가성비가 좋다는 샌드위치 패널 집을 그려 주었다. 왠지 창고 분위기여서 썩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들은 화재에 취약하고 보기 싫다고 했다. 아내가 덧댔다. ‘아들 말이 맞아 기왕 지으려면 잘 지어봐.’ 불현듯이 ‘집을 잘 지으면 심원에 갈게’라고 했던 아내의 말도 생각났다. 가족과 상의하여 노출콘크리트 집을 짓기로 했다.
다시 친구에게 노출콘크리트 설계를 부탁했다. 대지 건축의 설계에 내 생각을 반영하도록 여러 번 주문하였다. 아내는 평수가 작다고 하였지만, 나의 주머니 사정과 향후 유지하고 즐길 수 있는 넓이를 생각하여 ‘소확행’ 설계를 요구했다. 건축 경비를 줄이기 위해 내가 총괄 지휘자가 되고 각 분야 기술자를 불러 쓰는 직영방식을 택했다.
2021년 7월 12일에 노출콘크리트 건축을 시작했다. 건설업자는 한 달이면 거푸집을 완성한다고 장담하였으나 3달 이상 걸렸다. 재촉도 할 수 없는 공정이었다. 건축하는 도중에 나는 감리자(?) 역할을 했다. 목수는 망치로 거푸집을 만들고, 철근-쟁이는 철근을 자르고 구부려서 서로를 엮었다. 그 후 레미콘을 쳤다. 시멘트 강도는 27로 했다. 1층을 만들고 같은 방식으로 2층을 만들었다 목수가 설계에 따라 형틀을 붙일 때 곁에서 지켜보다가 때로는 목수에게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건물이 우뚝 서니 뿌듯했다. 건물을 다 지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건물 외벽 면 갈이를 하고 난 후 고르지 않은 내부는 미장했다. 또한 스티로폼으로 마감된 내부는 목 작업을 했다. 타일은 타일공이, 상하수도설비는 설비업자가, 시스템 에어컨은 에어컨 설치 기사가, 전봇대 공사와 삼상 교류 인입은 한전에서, 내부전기는 전기기술자가 각각 마무리해야 했다.
건축하면서 목수, 철근, 레미콘, 미장, 방통, 창호, 전기, 설비, 타일, 내부 실내장식을 하는 이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각자 자기 분야에서 30, 40여 년 이상 ‘선택과 집중’을 한 분들이었다. 마치 오케스트라 협연처럼 서로 존중하고 협업하여 건축물을 완성하는 거였다. 처음으로 지휘봉을 잡고 집 짓기를 하는 경험은 쉽지 않았다. 분야마다 각각 토막말을 뱉어도 나는 묵묵히 마음속에 삭이고 상대에게 옮기지 않고 일을 도모했다. 기술자와 보조는 큰 차이가 났다. 사수인 미장이는 이 건물을 내가 짓는다는 자세로 임하고 보조는 오늘만 잘 보내면 된다는 식이었던가. 하루는 미장이가 아침부터 투덜거렸다. ‘새벽에 전날의 보조를 찾아 30분을 헤맸다’라고 했다. 전날 보조가 일을 잘하기에 내일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그가 약속을 어긴 거였다. 아마 돈이 생기면 술을 잔뜩 먹고 잠들어버렸을 거로 단정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마음이 들었다. 젊은 나이에 하나라도 진득하게 배워 전공으로 삼는다면 장차 사수 미장이가 될 텐데 말이다.
집을 지으면서 십인십색의 장인을 만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아무리 태 나는 옷을 입어도 하루만 지나면 먼지투성이지만 그들의 손을 거치면 맵시 나는 집으로 자꾸 변모해 갔다. 연말에 집이 완성되면 내 일이 하나 남아있다. 친구가 제안한 상량식은 안 할 거지만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화룡점정은 하려고 한다. 내가 전서로 ‘택산헌澤山軒’이라 글을 쓰고 느티나무 목판에 서각書刻 하여 간판을 달 거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터전에 지은 택산헌澤山軒은 못택, 묏산, 집헌이다.
택은 주장택자미珠藏澤自媚에서, 진주를 숨긴 연못, 하전리 바지락 갯벌은 스스로 아름답고.
산은 옥온산함휘玉韞山含輝에서, 옥을 품은 산, 선운산 도솔암은 빛을 머금고 있다는 의미다.
임인년 새해에 택산헌 현판을 걸고 대장부 기개를 품으며 인생 2막의 전원일기를 쓰고 즐기며 살아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