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도권의 역사 이야기로는 思悼世子를 죽인자가 아버지인 英祖(1724~1776)라고 지정한다.그러나
원문들에 의한 실질은 '臣權(노론과 외척)에 비해 왕권의 무기력에 대한 저항과 강화' 를 위해 사도세자
스스로가 자처한 죽음이라고 볼수도 있다.인조반정(1623) 이후 부터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서인들은
그들끼리 명칭을 달리하면서 세포 분열을 했고,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의 틀은 더욱 견고해 졌다.숙종조
(1674~1720)에 이르러서는 이대로의 당쟁을 방치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중립적 대신들이 출현했
고,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노론의 玄石 朴世采 였으며,그가 제기한 것이 바로 '蕩平論' 이다.사실 인조
반정(1623)이후의 왕과 왕실이란 재력가(서인)들이 세운 하나의 허수아비 인형에 불과했다.그는 '書經
皇極說에 나오는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의 탕평을 근거로 숙종 9년(1683)과 숙종 14
년(1688),그리고 그가 죽기 1년전이자 후에 영조가 되는 연잉군이 태어나던 숙종 20년(1694)까지 무려
3차례나 탕평론을 상소한바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욕심이 대립하고 붕당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충돌하면서 오히려 이대로가 좋다는 중신
들의 의지로 탕평은 결국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그러다 왕세제로 경종의 사후 왕위에 오른 영조시대
에 와서 비로소 탕평론을 거론하기 시작했다.영조의 등극도 결국은 서인들에 의해서 였다.그렇게 왕이
된 영조는 서인의 조정과 서인들의 가문에서 추천,간택해 정비가 된 진성왕후 서씨(서종제의 딸)와 계비
정순왕후(김한구 딸)김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지만,이들 모두에게서 後嗣가 없었다.
2, 대신 정빈이씨(풍양 조문양의 딸) 사이에서 孝章세자(1719~1728)를 낳았고,영빈 이씨(풍산 홍봉한
의 딸)로 부터는 思悼세자(1735~1762)를 얻었다.특히 사도세자는 영조가 나이 40세가 되어 얻은 자식
으로 영조 11년(1735)에 출생했다.그러나 사도세자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정빈이씨 소생 孝章세자가
10살의 나이로 요절함으써,사도세자는 2살이 되자마자 세자로 책봉되었다.역사의 기록이자 노론들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군왕으로서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성군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그러나
인간 개인으로의 영조는 달랐다고 쓴다.즉 겉과 속이 아주 판이한 이중적 모습을 보였다고 쓴다.그는
천민출신 어머니(숙빈 최씨)의 아들로 살벌한 당쟁의 와중(숙종조의 치열하고 난폭한 당쟁)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오직 죽은듯 '근신' 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군주였다.
그는 왕위를 탐하여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까지 받으면서 더욱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 못했
다.할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억눌려 숨어지내는 듯 억제하며 살았다.이러한 모든 것들이 영조의 정신세
계를 움추리게 했고 외곬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영조는 조정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알력과 대립은
물론,중상과 모략에 이은 정쟁을 몸소 겪으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포함시켜 아들
인 사도세자에게 거침없이 투영했다.이것은 어린세자 입장으로 보았을 때는 정말로 못 견딜 일이였다.
3, 기록에 의한다면 영조는 조급하고 민첩한 성격인데 반해,사도세자는 말수가 적고 행동이 느린 편이
었다.이러한 세자의 모습을 영조는 못 마땅했고 누적된 불만은 서인과 노론들이 정사를 펴면서 스트레스
를 줄때마다 짜증이 늘어나 부자 사이는 트러블이 늘어났다.따라서 세자에게 있어 영조는 인자한 아버지
보다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고,그 공포는 갈수록 불신과 반항의 형태로 나타났다.세자는 영조의 바램대로
세자로 부응하지 못했고,늘 어긋난 행동을 했으며,영조의 질책은 날로 늘어났다.더하여 당시 영조의 총애
를 받고 있던 '숙의 문씨' 가 임신을 하여 위기 의식은 더욱 가중되었다.당시 영의정 이었던 소론의 李宗城
은 이런 사도세자의 처지를 동정하여 적극적으로 세자 보호를 자청하고 나섰다.숙의 문씨가 딸을 낳음으
로서 한 고비를 넘기는 듯했으나,조정의 실질적 권력자들인 老論의 내부에서 세자의 자질을 거론 함으로
서 세자의 위상은 다시 위태롭게 되었다.
당시의 조정 실권자들인 노론들이 볼때 가장 큰 문제는 세자가 소론을 가까히 한다는 것 이었다.노론들이
볼때 사도세자가 소론을 가까히 하고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앞으로의 권력 향배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
다.따라서 노론은 소론을 치든가 아니면 세자를 無力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마침 이무렵 사도세자의 생
활은 노론과 영조를 향한 저항으로 응결되어 자신을 파타지경에 빠뜨리고 있었다.특히 父王에 대한 반발
심으로 세자의 비행은 더욱 잦아졌고 마침내 민폐까지 끼치는 등 세자의 비행이 도성안의 화제가 될 지경
에 이르게 되었다고 역사서는 쓴다.이러한 세자의 행실은 바로 노론이 바라는 바였다.
4, '蕩評' 이란 군왕은 蕩蕩平平한 마음으로,그리고 신하들은 無偏無黨한 자세로 정치에 임하는 것을 말한
다.그러나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그렇게 탕평을 외쳤던 영조시대에도 정파와 당파들은 존재했다.현실
이 그랬다.더하여 영조는 노론의 기반하에서 성장했고 또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노론들의
힘이 아니였다면 그는 왕이 될수 없었다.따라서 英祖도 말은 탕평이라 했지만 결국은 노론에 비중을 둘수
밖에 없었다.영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정치적 안정을 기한 다음 그 바탕에서 노론과 소론의 탕평을 꾀했을
뿐이다.따라서 두루 인재를 등용하는 공평정대의 탕평은 처음부터 있을수가 없었다.왕이 혼자 정사를 펼수
없는 것이니 만큼,당시는 서인에서 갈라진 이 두정파(노론과 소론)들의 도움없이는 왕이 정사를 펼수없을
정도로 권력판은 기울어져 있었다.
특히 영조 31년(1755) 乙亥獄事(尹志등이 처형된 사건)를 계기로 노론의 권력은 더욱 확고부동하게 되어 왕
인 영조도 노론들의 권력 마당을 어쩌지 못했다.東人은 권력을 장악한후 남인과 북인으로 갈렸고,서인도 전
권으로 행사하게 되자 노론과 소론으로 세포 분열했다.이렇게 힘을 합쳐서 싸워야 할 대상이 없어지면,어제
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정치의 속성이라고,현실의 한국 정치판이 잘 말해주지 않은가?이런 법칙은
인간들에게 욕심이 작용하는 한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5, 더이상 방해할 자가 없어진 老論은 다시 주도권 장악을 위한 자체분열을 일으켰다.당시 노론의 핵심으로
김재로 가문 이외에 영조의 인척관계로 맺어진 '민진원,김진규,申晩,洪鳳漢' 가문이 있었다.영조는 권력기반
을 노론 척신계(왕과 세자의 외척관계)에 두는 한편,소론의 척신 가문인 鄭羽良,조문명 가문을 통해 이들을
견제하는 탕평을 했다.즉 긴장의 줄다리기가 매일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영조가 척신을 향한 의존적 태도
가 심화되면서 척신 상호간의 견제가 있기는 했으나,金尙魯를 중심으로 하는 非척신계열에 의한 척신계의
견제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영조가 외척들을 비호하는 정책을 펴면서 척신 세력들은 급속한 성장을 이
루었다.척신들 중 핵심세력으로는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헤경궁 홍씨(혜빈 홍씨)의 아버지인 '洪鳳漢' 과 그
가문이었다.
따라서 노론의 세력구도는 다시 홍봉한 가문을 중심으로한 척신계와 이들을 견제하는 非척신계로 나누워지
게 되었다.비척신계 김상로 계열은 척신계의 홍봉한을 꺽기 위해 당시 문제가 되고 있던 사도세자의 비행을
거론하게 되었으며,여기에 홍봉한의 척신계는 세자의 비행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뇌물로 입막음을 하는 지경
에 이르기 까지 했다.장인 홍봉한이 세자를 잘못된 길로 가도록 방치 한 것이다.이때문에 조정은 홍봉한의 수
뢰를 공격하는 '攻洪派' 와 홍봉한의 입장을 옹호하는 '扶洪派' 로 나뉘게 되었다.
6, 이때 쯤 또 하나의 새로운 외척 세력이 등장했다.영조 35년(1759)이자 영조가 66세가 되는 해에 16살 된
새 왕비(정순왕후)를 맞아 들이면서 노론의 金漢耉(김한구) 가문이 새롭게 등장을 했다.그러나 김한구는 홍
봉한의 가문의 그늘에 가려 힘을 쓸수가 없었다.따라서 김한구 가문이 공홍파 계열에 가담하게 된 것은 지극
히 자연스런운 일이다.이처럼 조정의 내부에서 권력의 노론들이 스스로 공홍파와 부흥파로 갈려 갈등이 심
화되기 시작할 무렵,노론의 공홍파들이 사도세자의 질병과 자질을 거론하기 시작했다.이때는 노론들에 의해
홀대받는 세자를 향한 동정론을 폈던 소론의 李宗城 마져 죽고 없을 때였다.공홍파들은 부홍파의 홍봉한
세력들을 약화시키기 위해 세자의 비행을 들추어 내는 것(약점)에서 찾았다.여기에 홍봉한은 그동안 무시하
던 소론들에게 까지 도움을 청할 정도로 급했다.
부홍파들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조정의 중론은 이미 세자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있었고,따라서 세자
의 장인이었던 홍봉한 조차도 입막음을 할수없게 되자 세자를 포기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홍봉한은 계산하기
에 이때는 이미 후에 정조(이산,1776~1800)가 되는 세손(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 사이의 아들)이 10살이나
되어 보위에 오르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나이였고,결혼을 시켜도 되는 나이였다.따라서 비행의 사도세자를
포기함으로서 일찍 세손을 향한 정권이양 트러블과 리스크를 여기서 멈추고자 했던 것이다.이에 홍봉한은 사
위인 사도제자를 버리고,세손 보호에 나서게 된 것이다.권력을 위해서는 부자지간 이라도 나누지 않는다는 것
을 그가 역사를 통해 증명한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