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석 선생 서거 100주년 ,을미의병 창의 120주년 기념 제천의병제를 참관했다.
2015.10/8~10/9
날씨:맑음
제천의병제는 정확한 이름이 아니다. 역사적사실에 맞게 이름을 정확하게 고증하면 '제천 호좌의병제'가 맞다고 생각한다.
을미년 왕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의 이춘영 선생이 안종응(하사 안승우의 부친)을 찾아가서 거의를 논의했고 김백선 포군대장을 찾아가서 거사에 동의를 받아서 맹영재 군수 몰래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를 했다.그 이후 실곡 이필희를 대장으로 삼아서 원주를 점령했고, 제천과 단양으로 진출하였고 서상렬과 안승우를 위시한 여러 선비들이 의병진에 달려왔다.그후 장회협전투에서 관군을 크게 이겼으나 이기고도 흩어진 병사들은 영주 풍기와 순흥,그리고 영춘을 거쳐 영월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의암 류인석 선생이 의병대장에 취임을 했다.지평에서 영월까지는 지평의병이 맞고 그 이후는 호좌의진으로 칭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인근의 내사군(제천,청풍,단양,영춘)과 평창,정선,영월,원주,충주 멀리는 춘천에서까지 응원군이 밀려와서 의병을 조직화했고,충주성 공격을 앞두고 부족한 무기를 만들려고 예천의 활궁장 4명을 초빙하여 의병의 무기로 쓸 활(국궁)을 제작(장충식의 일기)하기도 했다.
장충식 선생은 류인석 대장보다 3년아래로 성재 유중교 선생 밑에서 같은 동문이었다.그래서 의병진에서 사객(司客)의 역할을 했고 두 아들도 의병에 투신하였다.
마이크를 잡은 분이 제천의병유족회 회장이신 장영구씨이다.산거만록과 일기를 썼고 단양 상진나루에 세거하던 열은 장충식(洌隱 張忠植) 선생의 고손자요 중재 장익환(中齊 張益煥)선생의 증손자이다.
이근규 제천시장과 허송절(여,연변 청소년 문화진흥회 도문지회 회장) 일가족
제천 호좌의진 거의 120주년 기념 한시백일장에 장원의 방이 붙었다.아마도 옛날 임금님 앞에서 보던 알성시에 합격자 방이 붙으면 저렇게 기웃기웃했을 겁니다...하하
자양영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혼불을 항아리에 담아 호위해서 나옵니다.
류인석 선생의 증손자분과 제천시장
제수가 나오자 봉사회 여성분들이 음복을 준비한다.
왼쪽이 습재 이소응 선생의 증종부,우측은 괴산사시는 장익환의 증손녀
이소응 선생의 종부와 장영구씨의 누님
혼불 채취를 마치고 시민회관으로 자리를 옮겨서 '제천의병의 어제와 오늘'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진행하였다.
독립기념관 박민영 연구원
세명대 권순긍 교수-제천의병제ㅔ 20년의 회고와 전망
연세대 심철기 교수의 '읠미의병기 원주의병과 호좌의진'
세명대 구완회 교수의 '제천의병의 연구성과와 대중화 전략'
제천에서 돈을 대었으니 제천의병이라고 예기를 편의상 한것이지,원래 제천의병이 아니고 '호좌창의진(호좌의진)'이 맞다.그래서 교수 몇사람이 20년간 제천의병이라고 했으니 굳어 졋다고 볼수 있는데 ,내사군을 포함한 호좌의병은 사라지고 제천의병만 남는다고 보면 역사왜곡이 아닐까?
제천의병제(제천의병축제)를 할 때 천막을 친 내사군(영춘,단양,청풍)을 유치못하면 제천의병제나 제천시민들은 우물안개구리가 된다.단양이나 영춘,청풍면 사람들이 하나도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영월과 평창,원주가 제천의병을 모른다면...관심없다면...
내가 몇년전부터 주장하는 답사와 문화,역사의 연관성을 구완회 교수는 인제 지적하고 있다.
답사안하면 의병장들이 빨간색 머리칼인지,노란색 머리칼인지 모르고 제사지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연구에 오류도 그래서 생긴다.
단양 영춘 보발리 출신 원용정 선생 후손 부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민영 연구원과 구완회 교수와 필자(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