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金寧金氏)
[유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오다가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년)에 김녕으로 확정하였다.
[가문의번영]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이 고려 시대에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 : 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김광저(金光儲)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등극전의 정의(情)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산 도고산에 은둔 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 1399년(정종 1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 때 이조판서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 2년) 6월 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인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 지리와 실학에 능통 한 인물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를 등에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응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의 아들 김기남(金起南), 김난생(金蘭生) 형제는 병자호란에 순절하여 김준걸(金俊傑 : 선조 때의 공신), 김득성(金得誠), 김영길(金永吉 :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김진행(金鎭行)은 효행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과 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계 파] 대사성공지파(大司成公智派) 도순찰사공문제파(都巡察使公文齊派) 만은공길상파(晩隱公吉祥派) 상서공문희파(尙書公文熙派) 송암공질파(松菴公秩派) 영돈영공준파(領敦寧公遵派) 진주목사공파(晋州牧使公派) 충경공경세파(忠敬公景世派) 충의공문기파(忠毅公文起派) 충정공준영파(忠貞公俊榮派)
[본관지] 경상남도 김해의 옛 지명
김녕(金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文化)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서기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新羅)에 병합돠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후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으나 경덕왕(景德王)이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고려초기 (高麗初期)인 940년(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 등으로 불리웠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 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 (金州牧)·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朝鮮) 때 와서는 태종(太宗)이 다시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가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김녕 김씨(金寧金氏)의 시조(始祖)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明宗)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下賜)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말에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계통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칭하다가 1865년(고종 2) 왕명(王命)에 의하여 김녕(金寧)으로 확정(確定)하였다. 고려말기부터 충절(忠節)로 가통(家統)을 이은 김녕 김씨는 시조(始祖) 시흥(始興)의 증손(曾孫) 중원(重源)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 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恭讓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광저(光儲 : 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忠節)로 절의(節義)를 지켰는데,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광저(光儲)의 아들 순(順)도 고려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號)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忠北) 옥천(沃川)의 백지리(白池里)에 정자(亭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정갑(挺甲)의 아들 질(秩)은 태조(太祖)가 등극전의 정의(情)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응(不應)하고 아산(牙山) 도고산(道高山)에 은거(隱居) 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렇게 충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김녕 김씨는 이조판서(吏曹判書) 관(觀 : 시조의 8세손)의 아들 문기(文起)가 더욱 빛냈다. 그는 1399년(정종 1) 2월 16일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서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 2) 6월 8일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居昌)과 양지 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현석(玄錫)도 아버지인 문기(文起)를 따라 순절하였고, 문기의 손자 충주(忠柱)와 증손 현남(玄南), 현손(玄孫) 약전(約前) 등이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閭)이 세워졌다. 한편 준(遵 : 시조의 10세손)은 천문(天文)·지리(地理)와 실학(實學)에 능통 한 인물로 단종(端宗)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全南) 고흥(高興)으로 내려가 학문(學問)에만 전념했다. 그 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복룡(福龍)의 아들 응수(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 부사(潭陽府使) 언공(彦恭)은 권 율(權 慄)의 영천(永川)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팔공산(八公山)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기남(起南)·난생(蘭生) 형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하여 준걸(俊傑 : 선조 때의 공신), 득성(得誠)·영길(永吉 :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父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진행(鎭行) 은 효행(孝行)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忠)과 효(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김녕 김씨(金寧金氏)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남한에 총102,896가구, 424,32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녕김씨(金寧金氏) :2:
▣ 유래
시조 : 김시흥(金時興)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여 오다가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 계통의 김해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김씨는 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구분을 확실히 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년)에 김녕으로 확정하였다.
▣ 인물
김시흥의 증손자 김중원(金重源)이 고려 시대에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形部侍郞)을 지내고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김광저(金光儲 : 김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鹿山)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김광저(金光儲)의 아들 김순(金順)도 고려 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이 개국되자 벼슬에서 물러나 호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 옥천의 백지리에 정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김정갑(金挺甲)의 아들 김질(金秩)은 태조가 등극전의 정의(情)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아산 도고산에 은둔 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조판서 김관(金觀)의 아들 김문기(金文起)는 1399년(정종 1년) 2월 16일 충북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서 출생하여 세종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 때 이조판서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 2년) 6월 8일 사육신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과 양지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김현석(金玄錫)도 아버지인 김문기를 따라 순절하였고, 김문기의 손자 김충주(金忠柱)와 증손 김현남(金玄南), 5세손 김약전(金約前) 등이 모두 충효로 가문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이 세워졌다. 한편 김준(金遵)은 천문, 지리와 실학에 능통 한 인물로 단종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 고흥으로 내려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밖의 인물로는 판서(判書) 김복룡(金福龍)의 아들 김응수(金應壽)가 형제들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으며, 담양부사(潭陽府使) 김언공(金彦恭)은 권율(權慄)의 영천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粱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노모를 등에 업고 팔공산 전투에서 공응 세운 김유부(金有富)와 그의 아들 김기남(金起南), 김난생(金蘭生) 형제는 병자호란에 순절하여 김준걸(金俊傑 : 선조 때의 공신), 김득성(金得誠), 김영길(金永吉 :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김진행(金鎭行)은 효행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과 효의 전통을 이어왔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진영(金鎭永, 1852 壬子生) : 문과(文科) 고종30년(1893) 별시2 병과(丙科) 김용덕(金溶悳, 1863 癸亥生) : 문과(文科) 고종30년(1893) 별시 병과(丙科) 김만원(金萬源, 1872 壬申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김인호(金仁浩, 1851 辛亥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2년(1885) 식년시 삼등(三等) 김지원(金止源, 1808 戊辰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17년(1880) 증광시 삼등(三等) 김승룡(金昇龍, 1850 庚戌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4년(1867) 식년시 삼등(三等) 김용직(金溶直, 1842 壬寅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8년(1891) 증광시 삼등(三等) 김우성(金宇聲, 1832 壬辰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25년(1888) 식년시 삼등(三等) 김성모(金性模, 1870 庚午生) : 사마시(司馬試) 고종31년(1894) 식년시 삼등(三等) 김서범(金書範, 1812 壬申生) : 사마시(司馬試) 헌종12년(1846) 식년시 이등(二等) 등 모두 14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2명, 사마시 12명)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이며 김녕(金寧)은 경상남도 김해(金海)의 옛 지명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해 오다가 532년(신라 법흥왕 19)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680년(문무왕 20)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이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금주(金州) 등으로 불렸으며, 1270년(원종 11) 방어사(防禦使) 김훤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 김해부(金海府)로 개칭되었다. 조선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세조 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김해군이 되었다. 1931년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김해군의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하여 분리 되었으며 1995년에는 김해군이 김해시로 통합되었다.
▣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김녕김씨는 2000년에는 총 162,204가구 513,01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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