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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가우/박창기
순 우리말로 우주의 기미(幾微)를 꿰는 어려움
-오태환 시집,『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詩로여는세상,2013)
계간 『시하늘』2016년 여름호 ‘시집 깊이 읽기’의 대상은 오태환 시인의 4시집,『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詩로여는세상,2013)입니다. 이 시집을 처음 읽고 제가 받은 충격과 부끄러움은 실로 컸습니다. 국어사전을 들고 우리말 하나하나를 찾아 그 의미를 적으면서 격 높은 시를 읽는 기쁨은 특별했습니다. 이 원고는 지난 2015년 시 전문잡지 『신생』여름호에 실었던 오태환 시인과 제가 함께 했던 <시인과의 이메일 대담>으로 대신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이종암: 오태환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과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저는 참 고맙고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난 1월 19일, 『신생』으로부터 ‘오태환 시인과의 E-mail 대담’을 하라는 원고 청탁을 받고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하겠노라고 수락하였습니다. 그것은 재작년 봄에 나온 선생님의 빛나는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詩로여는세상,2013) 때문이었습니다. 쑥색 위로 납물이 흩뿌려진 듯한 독특한 표지의 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에 갇혀 봄 한철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제가 이런 시집을 펴낸 시인과의 대담을 마다할 리 없는 것이지요.
▶오태환: 안녕하세요. 오태환입니다. 부산 유수의 문예지 『신생』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반갑고, 이종암 시인과 지면으로나마 생각을 섞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벌써 2년의 시간이 흘렀군요. 제 시집을 즐겁게 읽어 주시고 상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종암: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던 해인 1984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癸亥日記」, 한국일보 신춘문예에「崔益鉉」으로 신춘문예 2관왕의 화려한 경력으로 문단에 등단합니다. 등단과 관련된 일화(逸話)나 시인으로서의 첫 출발을 내디디며 갖게 된 포부나 각오가 있었다면 무엇입니까?
▶오태환: 덕분에 30여 년이 훌쩍 지나간, 기억 저편의 일들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그때가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무렵이었습니다. 사고라 해야 할지, 사건이라 해야 할지 저로서도 모호한 일 때문에 오른손을 다쳤습니다. 오른팔에 깁스를 한 채로 대학 마지막 학기를 맞았습니다. 9월 이후, 신춘문예를 준비해야 하는 변변치 않은 문청의 깜냥에 거의 왼손만으로 버티는 난처한 처지였습니다. 석 달 정도 되는 기간에 20편 안팎의 시를 썼습니다. 말씀하신 데뷔작 두 편도 고대 중앙도서관 구석에서 왼손으로 낑낑대며 만들었습니다. 소위 '절망 끝의 기교'라는 아포리즘과 맞아 떨어지는 국면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모로 불편하고 고단한 때에 제 삶의 분기점이 될 작품을 끌어올린 셈입니다. 문학적 완성도와 별개로요(제 개인적으로는 문득문득 부끄럽습니다). 데뷔 직후에는 시인으로서의 포부나 각오를 다잡을 겨를이 없이 취직 등의 현실적 문제로 마음이 부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종암: 선생님은 등단 3년 만에 첫 시집『북한산』(청하,1986)을 펴냅니다. 시집『북한산』에는 등단작인 「癸亥日記」와 「崔益鉉」을 비롯한 「妙淸」등이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제재로 하고 있고, 특히 3,000여 행에 이르는 장시「북한산」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의 외세의 침탈과 민중의 수난과 항쟁의 역사를 다야항 시적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시작 초기부터 감행된 우리 역사에 대한 선생님의 시적 탐사는 주목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우리 역사에 대한 선생님의 관심이 높고 뜨거웠던 같습니다. 어떻습니까?
▶오태환: 제 대학시절은 유신 말기와 10.26 사태, 12.12 군사쿠데타, 5.18 광주항쟁 등 일련의 첨예한 역사적 변곡점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이 전두환 철권통치 기간이었습니다. 교정은 늘 최루가스 냄새와 청재킷과 흰 운동화 바람의 사복경찰과 전경들의 군화 소리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불과 7〜8명의 시위대를 수십 명의 진압경찰이 삽시간에 둘러싸고 옥죄는 이상한 풍경이 일상이었습니다. 그 엄혹하고 준열한 역사의 한대에서 어쩌면 제 의식과 정서가 벼려졌는지 모릅니다. 그때 부전공으로 수강했던 한국 근대사 관련 강의도 그에 영향을 끼쳤겠지요. 이런 환경들이 역사라든가 민족 등과 같은 거대담론을 문학적 모티프로 삼도록 부추겼지 싶습니다.
▷이종암: 우리나라 최초의 장편 서사시인 김동환의 「국경의 밤」을 비롯한 신동엽의 「금강」, 김지하의 「오적」, 고은의 「백두산」등이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기억될 만한 장시(長詩)들입니다. 열거한 이 작품들은 시대가 병들고 절망적인 상태를 뛰어넘어 새로운 ‘신생의 삶’을 끌어안으려는 시인들의 힘겨운 시적 고투의 결과물입니다. 그리 많지 않은 젊은 나이에 고뇌에 찬 장시 「북한산」을 쓰게 된 계기랄까, 그 창작 동인(動因)은 무엇입니까?
▶오태환: 거기에 대해서는 위의 말씀과 비슷한 맥락에서 부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최익현 선생이나 공옥진 여사에 대한 관심을 조금 더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프레임 안에서 구체화하고 싶었습니다. 데뷔 이후 제 작업은 「북한산」에 집중됩니다. 역사의 파고(波高) 안에서 민중의 좌절과 분노와 욕망과 잡념과 비애가 요동치는 현장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첫 시집에 수록한 다른 것들은 모두 데뷔 전에 썼던 작품입니다.
▷이종암: 등단 초기의 첫 시집에 3,000여행에 이르는 장시 「북한산」이 수록되었다는 것은 가히 놀라울 일입니다. 앞서 언급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장시(長詩) 김동환의 「국경의 밤」, 신동엽의 「금강」, 김지하의 「오적」, 고은의 「백두산」등과 견주어도 선생님의 장시 「북한산」은 별 손색이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장시라는 장르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그리 인기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선생님의 장시 「북한산」이 독자들에게 널리 애독되지 못한 까닭이나 평단에서 깊이 조명되지 못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오태환: 답변하기가 어렵고 조심스런 질문이군요. 저는 이 시인이 열거하신 장시들에 대해 약간 생각을 달리 하고 있습니다. 그 작품들이 문학사적으로 의미를 둘 여지는 있을지언정 문학적으로 가치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그것들을 직접 읽었을 때의 아쉬움과 실망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까지 오르내린다면 그 까닭은 시의 제국이랄 수 있는 우리나라에 읽을 만한 장시가 없다는 불행한 사실과, 문학 외적인 것이 문학을 재단하는, 거의 문단의 풍토병이 되다시피한 지적 스노비즘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제 「북한산」 집필의 동기 가운데 하나도, 젊어서의 속된 결기에 머물망정, 그 장시들이 놓치고 있는 문학적 숨결을 살린다는 지점에 놓입니다. 서사와 의식이 줄기를 이룰 때 노출되기 쉬운 건조성에 예술적 습기를 불어넣고 싶었습니다. 문학적 성취의 여부와 별개로, 「북한산」이 '애독되거나 조명되지 못한' 까닭은 배경이 되는 역사적 요소들을 너무 전문적인 데서 취재했거나, 잘 안 쓰는 어휘들을 인용한 점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얼핏 생각했습니다. 독자들을 불편하게 할 수 있는 이러한 글쓰기 습벽은 지금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종암: 1시집 『북한산』에서부터 「공옥진」과 「물과 바람 사이의 戀歌」같은 연작시가 보이는데, 2시집 『手話』(문학과비평사,1988)에 오면 2부에 수록된 5편의 시를 빼곤 전부 연작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1부에는 「手話」연작시 18편, 2부에는 「빈센트 반 고흐氏에게 부치는 편지」연작시 5편, 3부에는 부제(副題)로 기명된「천수대비가 」연작시 27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해 봄에 발간된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에도 부제로 기명된 「백담시편」 18편이나 보입니다. 이처럼 연작시의 형태를 자주 활용하는 특별한 까닭이 있는 것인지요?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적 전략인지요?
▶오태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요즘 작업도 그렇고요. 아마 비슷한 분위기와 모티프의 시들을 한 카테고리에 묶음으로써 그 분위기와 모티프의 외연과 내포를 나름대로 확장하거나 심화하면서 통일성을 살리려는 무의식적 작용에 따른 듯싶습니다. 물론 이 경우도 결과적으로 텍스트 수용자의 독서태도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의도에 주목하면 "독자에게 다가가는 시적 전략"이라기보다 글의 방향을 요량껏 다듬어 쓰려는 글쓰기 전략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종암: 2시집 『手話』는 발간 연도를 봤을 때, 1986년 말에서부터 1987년을 거쳐 1988년 전반기까지의 작품을 묶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때는 군사독재정권의 고문에 대학생 박종철 군이 죽고, 시위하던 대학생 이한열의 죽음으로 87년 6월민주화 대항쟁이 일어나고 전국적인 노동자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전투경찰 백골단의 방망이와 대학생의 화염병이 난무하던 ‘불의 시대’였습니다. 언어의 정상적인 통로가 끊어진 시대에 시인은 담화(談話)가 아니라 수화(手話)로 자신의 주변 일상의 삶을 그려놓았던 것입니까? 불의 시대인 1980년대를 향한 천수대비(千手大悲)의 마음으로.
▶오태환: 혹시 질문의 요지가 질곡의 시대로 명명할 수 있는 1980년대의 분위기 때문에 정상적인 소통수단인 '담화'가 아니라, 비일상적인 소통수단인 '수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가라는 의미인지요? 그렇다면 저는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시대와 역사에 맨몸으로 노출된 채 그것에 응전하는 자세로 글을 쓴 적이 있다면, 그것은 『북한산』으로 끝을 맺습니다. 설사 『手話』에 그 부분을 암시하거나 환기하는 구절이 있다하더라도 단지 '소재'에 머물지 '주제'의 필드로 육박하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 수록된 시편은 사회가 아니라 개인, 민족이 아니라 인간, 경험이 아니라 언어로 가파른 관심의 선회를 보입니다. 그러한 선회의 향방은 제 현재의 문학안(文學眼)과도 닿아 있습니다.
▷이종암: 선생님은 1984년에 등단하고, 1시집 『북한산』(청하,1986)과 2시집 『手話』(문학과비평사,1988)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열정적인 시작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 놀라울만한 정력적인 시 창작의 힘은 어디서 연유된 것입니까? 문단 초기의 주로 교유했던 시인들은 누구였으며, 시작 활동에 특별히 영향을 받으며 사숙한 선배 시인으로는 어떤 분이 있습니까?
▶오태환: 결과적으로 2년이 채 안 되는 동안에 새로 시집을 묶게 되었습니다. 당시 《문학사상》, 《현대시학》, 《문학과 비평》 등 몇 안 되는 문예지와 동인지 사화집에 발표한 시들을 모았습니다. 서둘러 시집을 내게 된 데는 《문학과 비평》 김시태 주간의 성화(?)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선생님은 <문비시선>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제 시집을 1번으로 올려놓았다며, 제게 시 쓰기를 독려 내지는 독촉하셨습니다. 실제로는 김춘수의 『라틴點描․其他』가 1번, 제 시집이 2번이었습니다. 그게 비교적 짧은 시기에 여러 편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문단 교류라면 아무래도 동인활동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시힘> 동인을 창설하면서 고형렬․양애경․강태형․김백겸․고운기․김경미․안도현 시인과, <세상읽기> 동인을 만들면서 박세현․이승하․원재길․윤승천 시인과 어울렸습니다. 습작할 무렵 가르침을 주신 분으로 모교 교수셨던 오탁번 선생님이 계셨고, 사숙한 시인으로는 정지용․서정주․김춘수 선생을 들 수 있습니다.
▷이종암: 제가 선생님께 질문을 드리는 것은 비평가의 입장이 아니라 선생님 시를 사랑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지요. 제가 외람된 말씀을 드려도 널리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생님께 시 한 편이 건너올 때 어떻게 오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2시집 『手話』읽다가 「手話6」에서는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 「手話15」에서는 정지용의 「장수산」, 「手話17」에서는 김승옥의 「力士」를 무심결에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1시집 『북한산』의 「별의 位相學」에서는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얼핏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오태환: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꺼내 읽어 보았습니다. 아마 「手話6」에서는 '풍문 같은 죽음'의 정황이, 「手話15」에서는 '바둑판을 맨 동자'의 에피소드가가, 「별의 位相學」에서는 '관자놀이의 정맥'이라는 표현이 그렇게 느끼게 한 듯싶습니다. 그런데 「手話17」은 어떤 이유 때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종암: 선생님! 2시집 『手話』에 수록된 “오른쪽 세 번째 손가락의 지문 위에 하나/왼쪽 새끼발가락의 緯度線上에 하나/다시 오른쪽 발바닥 상단 중심부에 하나/劣性인 숨과 몸이/꿈꾸는 맑고 따뜻한 바람의 産卵/의욕적인 도발/문질러도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별빛의 청빈한 제전 별빛의 흉터/내 넋의 본적 위에 주춧돌/세우는 정갈한 예각의 별자리”의 「티눈-천수대비가·25」를 저는 선생님이 시로 쓴 자화상으로 읽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시집 속에 ‘자화상’이라는 이름의 시는 없지요? 한 번 써 볼 생각은 없는지요?
▶오태환: 시집에는 뺐지만, 7․8년 전에 「노랑별이」란 제목으로 비슷하게 써 본 적이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쓸 수도 있겠죠.
▷이종암: 선생님, 2시집 『手話』맨 마지막 작품인 「조국-천수대비가·28」끝부분에는 “내가 아스피린으로 다시 태어나 그대에게 희망을 줄 것이니/아무도 나의 무덤을 찾지 마라/내 무덤의 아침빛이 썩은 주춧돌처럼 무너져 뒹구는구나”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현실에 대한 도저한 절망적 탄식을 끝으로 선생님의 시는 오랜 시간동안 독자들 앞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 후 2시집『手話』(문학과비평사,1988) 이후 무려 17년 만에 3시집 『별빛들을 쓰다』(황금알,2005)가 발간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선생님의 시편들이 세상에 나오게 된 까닭이 무엇인지 한 사람의 독자로 무척 궁금합니다.
▶오태환: 특별한 까닭은 없습니다. 언젠가 다른 책에다 '10년 동안 나와 내 문학을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다' 비슷한, 꽤 비장해 보이면서 한편 장난기 잔뜩 어린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手話』를 발간한 1988년부터 시 계간지『詩眼』이 창간된 1998년까지, 말하자면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만 10년 동안 시를 발표한 적도 문단 행사에 기웃거린 적도 없었습니다. 은사인 오탁번 선생님께서 문예지를 내시면서 보낸 청탁서가 제가 다시 펜을 잡는 유일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手話』의 끝 작품이 적어도 의도적인 암시를 준 것은 아닙니다. 10년의 공백은 작심한 것도 강박된 것도 아닙니다. 좀 피곤하므로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10년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문학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그 10년의 공백은 분명히 그저 빈 공백은 아닐 것입니다.
▷이종암: 2시집『手話』와 3시집 『별빛들을 쓰다』사이 17년이라는 격절(隔絶)의 시간만큼이나 시 세계의 변화도 커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 세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때 17년이라는 단절의 시간이 그 기준점이 될 것 같습니다. 전기의 1시집『북한산』(청하,1986)과 2시집 『手話』(문학과비평사,1988)의 세계가 피와 고름을 흘리는 시대의 환부에 언어의 손길을 쓰다듬는 것이었다면, 후기의 3시집 『별빛들을 쓰다』(황금알,2005)와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詩로여는세상,2013)의 세계는 시대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천지간(天地間)의 풍광과 시인의 내면세계, 동경의 세계를 낭만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오태환: 시인의 손을 벗어나 발표된 순간부터 시는 독자의 것입니다. 그렇게 여기시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자기 시의 지형변동에 대해 시시콜콜히 따지고 밝히는 건 어색해 보이는 면이 있습니다. 굳이 속내를 드러낸다면 1시집의 거대담론이 2시집을 거쳐 3․4시집의 미시담론으로 이행한다고 보았을 때, 앞으로 나올지 모를 5시집은 다시 거대담론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하지만 5시집에서 보이는 것은 1시집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무늬가 되리라는 점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종암: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후기의 3시집과 4시집의 시세계가 훨씬 더 좋습니다. 시인 내면세계의 무늬가 자연 풍광을 빌려 선명한 이미지로 다채롭게 펼쳐지는 후기의 시편들은 독자의 눈을 오래 붙들고 있습니다. 3시집 『별빛들을 쓰다』에서 「천마산 물소리」「토란잎에 빗물 들다」「언해」「대련」「늪」「하늘 따히 이리 가벼이 진수進水할 수 있겠구나」등이 예의 시편들입니다. 그 가운데 「늪」리는 시는 굳이 독자 여러분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늪
다슬기는 다슬다슬 물풀을 갉고 난 뒤
젖몽우리 생겨 젖앓이하듯 하얀 연蓮몽우리
두근두근 돋고 난 뒤
소금쟁이 한 쌍 가갸거겨 가갸거겨
순 초서草書로 물낯을 쓰고 난 뒤
아침날빛도 따라서 반짝반짝 물낯을 쓰고 난 뒤
검정물방게 뒷다리를 저어 화살촉같이 쏘고 난 뒤
그 옆에 짚오리 같은 게아재비가
아재비아재비 하며 부들 틈새에 서리고 난 뒤
물장군도 물자라도 지네들끼리
물비린내 자글자글 산란産卵하고 난 뒤
버들치도 올챙이도 요리조리 아가미
발딱이며 해찰하고 난 뒤
명주실잠자리 대롱대롱 교미交尾하고 난 뒤
해무리 환하게 걸고 해무리처럼 교미交尾하고 난 뒤
기슭어귀 물달개비 물빛 꽃잎들이
떼로 찌끌어지고 난 뒤
나전螺銓 같은 풀이슬 한 방울 퐁당!
떨어져 맨하늘이 부르르르 소름끼치고 난 뒤
민숭달팽이 함초롬히 털며 긴 돌그늘, 얼핏
아주 쬐끄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고 난 뒤
선생님의 위 시는 늪 아래 아니 늪 아래와 위, 하늘에 이르기까지 연결된 생명의 본 모습이 구체적이고도 생동감 있게 잘 그려져 있습니다. 종결어가 없이 ‘-고 난 뒤’로 끝맺는 미완의 구조가 끝없이 연결되고 펼쳐지는 자연 생명의 세계를 더욱 완결된 형태로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아주 쬐끄만, 고요가 어슴푸레 눈을 켜”는 모습을 그려내는 시인의 깊은 사유가 독자의 심안(心眼)을 크게 열고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문학평론가 장석주 시인도 표사에서 「늪」이라는 시를 명편으로 손꼽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러한 명시는 어떻게 쓰는 것입니까? 또 시를 쓰면서 얻은 깨달음이나 기쁨 같은 것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오태환: 이건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냥 낱말 하나하나가 품는 소리맵시와 자모음의 그늘이랄까 질감과 양감 같은 것들을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써내려 간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종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선생님의 1,2,3시집들에는 그렇게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3시집도 구입해 두고는 읽는 둥 마는 둥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대학원 학위논문을 조금 변형하여 펴낸 저서 『미당 시의 산경표 안에서 길을 찾다』(황금알,2007)는 신문의 ‘책 소개’를 보고 서점에 주문하여 꼼꼼하게 그리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지금 책을 펼쳐 봐도 연필로, 몇 가지 색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22-23쪽과 144쪽에는 별표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제가 미당의 시를 엄청 좋아하여서인지는 몰라도 ‘미당 詩의 무속적 상상력 연구’라는 부제가 붙은 선생님의 저서를 아껴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선생님, 학위 논문을 특별히 미당의 시 세계 연구로 삼은 특별한 까닭이 있습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미당 시의 매혹은 어디에 있다고 보시는지요? 너무 큰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태환: 제가 미당을 논문 주제로 정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그의 시와 언어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花蛇集』에서 『歸蜀道』․『新羅抄』․『冬天』을 거쳐 『질마재신화』에 이르기까지, 존재와 욕망의 극채색 열도와 동양과 신화를 향한 황홀한 투신, 그리고 토속의 원형적 비경(秘景)에 대한 탐구의 전 과정은 하나의 완미한 인문학적 드라마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문명과 교양 이전의 어떤 절박한 카오스에 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미당에서 시선(詩仙)이나 시성(詩聖)이 아니라 시귀(詩鬼)를 떠올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습니다.
▷이종암: 2013년 봄에 발간된 선생님의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詩로여는세상,2013)는 저를 참 부끄럽게 만든 시집이었습니다. 시집을 읽어내려 가는데 제가 모르는 순우리말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어휘까지 사전에 찾아 그 정확한 의미를 시집 속에 적다보니 시집 전체가 낙서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이자 현직에 있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제가 이렇게도 우리말을 모르고 있다니 말이 되는 것인가? 시를 읽고 어휘를 찾으면서 심한 자괴감이 밀려왔습니다. 이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저분하게 되어버린 선생님의 시집을 제가 가르치는 문예반 아이들 앞에 내보이며, 그렇게 실토를 하면서 여러분들도 시집뿐만 아니라 신문까지도 잘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인터넷 사전을 활용하여 꼭 찾아가면서 어휘를 공부하라고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시집들에 비해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에 와서 시 속에서 순우리말의 구사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그리고 그 어려운, 많은 우리말을 어떻게 공부하신 것인지요?
▶오태환: 시간을 따로 내서 토박이말을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표준어에 비해서 사투리는 우리말의 순혈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전라도 분이셨습니다. 어려서부터 들어서 어쩌면 몸에 배었던 전라도 사투리가 제가 갖다 쓰는 토박이말의 수원(水源)이 된 성싶습니다. 그 언어 공간에 절실한 토박이말이 있을 법한데 잘 기억이 안 나면 찾아보고, 그러면서 전혀 몰랐던 낱말들을 새로 알게 된 경우도 꽤 있었습니다. 이 과정이 축적되면서 제가 토박이말을 많이 아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제 작업이 토박이말의 시적 가능성을 염탐하는 계기가 되고, 그래서 모국어로 쓰인 시가 조금 더 풍성해질 수 있다면, 저로서는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이종암: 선생님의 4시집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을 읽으면서, 우리가 시 속에서 살려 써야 할 순우리말이 이렇게도 많은데 그동안 나는 뭘 했나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표제시 「복사꽃,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를 독자 여러분과 같이 읽습니다.
복사꽃,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
삐뚜루만 피었다가 지는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백금白金의 물소리와 청금靑金의 새소리가 맡기고 간 자리 연분홍의 떼가, 저렇게 세살장지 미닫이문에 여닫이창까지 옻칠경대 빼닫이서랍까지 죄다 열어젖혀버린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맨살로 삐뚜루만 삐뚜루만 저질러 놓고, 다시 소름같이 돋는 참 난처한 그리움을 만난 적 있으신가 발바닥에서 겨드랑이까지 해끗한 달빛도 사늘한 그늘도 없는데, 맨몸으로 숭어리째 저질러 놓고 호미걸이로 한사코 벼랑처럼 뛰어내리는 애먼 그리움,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 금니金泥도 다 삭은 연분홍 연분홍떼의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말이 외래어와 한자어, 비속어 등으로 온통 망가지고 있는데 우리말로 노래를 하는 시인들이 앞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순우리말이 시속에 봄산에 피어나는 꽃처럼 곱게 자리해 있는 「안다미로 듣는 비는」「춘사春思」「복사꽃, 천지간天地間의 우수리」「그 고요에 드난살다」「꽃끼리 붐비다-원서헌 뜨락에서」「두루미-백담시편·2」등의 시편들은 참 소중하고 귀하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오태환: 토박이말이 시어의 유일한 재료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지만 모국어의 가장 극지(極地)를 구성하는 시에서 모국어의 원형질이랄 수 있는 토박이말을 제대로 구사하려는 노력의 중요성 역시 자명합니다. 그러한 노력이 현대적이지 않다거나, 심지어 낡았다고 여기는 시각이 있다면, 시의 본질에 대해 고민을 더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시각의 근원적 책임을 소위 탈근대라는 조류에 빙의된 채 새로운 것만을 엽색적으로 추수하는 현대컴플렉스에서 찾습니다.
▷이종암: 앞서 언급한 우리말이 시속에 질펀하게 녹아들어 있는 시편들도 좋았지만 저는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뒤쪽에 편재된 「설송도1174×527-그림 읽기·1」「세한도 233×1083-그림 읽기·2」「주상관매도 1640×760-그림 읽기·3」「칼에 대하여·1-몽유도원도에 늦은 발문을 써서 부치다」라는 작품들에 더 오래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높은 문화적 소양과 철학적 깊이가 다른 작품들보다 더욱 분명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적 제재를 갖고 쓴 시편들로 한 권의 시집을 묶어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떤지요?
▶오태환: 요즘 시단의 유행과는 많이 벗어난 소재의 시들을 말씀해 주셨군요.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생각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이종암: 『신생』2015년 여름호에 수록된 선생님의 특집시를 비롯하여, 3시집과 4시집을 보면 산문적 경향이 강한 시편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시가(詩歌)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는 원래가 운문(韻文)이 아닙니까. 선생님께서 산문적 경향의 시들을 많이 쓰게 된 연유는 무엇입니까? 선생님의 연작시에는 자의식이 강하게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런 시편들은 대체로 쉽게 읽히지 않는 좀 어려운 작품이 많습니다. 시의 대중성 문제에 관한 고민을 진진하게 고려해볼 필요는 없겠습니까?
▶오태환: "산문적 경향"이라고 하셨는데, 미상불 산문이라 해도 좋을 시가 이번 호 『신생』에 발표하는 시를 포함하여 몇 편 있습니다. 그러한 경로를 이용한 바탕에 시의 본질은 형식에 있지 않다는, 고정관념에 대한 원심력 같은 게 깔려 있었지 싶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삶과 세계와 언어의 은폐된 한 층위를 찰나일지언정 정직하고 절박하게 노출시킬 수 있다면 시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 글이 쉽고 편하게 읽혀지지 않는다는 말은 더러 들어본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북한산」을 집필할 때부터 최근의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런 조건」 연작을 써 내려갈 때까지 저는 한 차례도 독자들의 입장이나 태도를 전제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편하게는 만들어도 조롱하거나 백안시한 적은 없습니다. 외래어든 한자어든 토박이말이든 비속어든, 어려운 낱말이든 쉬운 낱말이든, 또 오래 전에 사멸한 낱말이든 갓 태어난 낱말이든 저는 그 언어 공간에서 유일하게 어울린다고 판단하면 망설이지 않습니다. 의지의 문제보다 생리의 문제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요즘의 대중사회와는 궁합이 영 안 맞겠지만, 그것은 제 문학적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이종암: 오태환 선생님, 원고 마감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서야 부랴부랴 이렇게 이메일 대담 질문을 하게 된 것을 용서하십시오. 제 천성적인 게으름과 한 달 가까이 앓아누운 심한 독감으로 일이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생님과 동년배나 후배 시인들 가운데 질투가 날 정도로 시를 잘 쓰는 시인이 있다면 누구이며 어떤 면에서 그러합니까?
▶오태환: 괜찮습니다. 유념하지 마시고요. 글쎄요. 그냥 시가 좋다는 느낌을 받을 때는 있었지만, 그런 감정이 든 경험은 기억에 없습니다. 질문에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르네상스시대 피렌체의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같은 동시대 거장들을 의식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경쟁상대는 오로지 미래의 자신밖에 없다는 발언을 합니다. 스스로 하나의 파라곤이 된 예술가의 오연하고 냉랭한 자부심이 읽히는 장면입니다. 정치나 포즈로 시를 쓰려하지 않는 예술가로서의 시인이라면 새겨둘 만한 일화입니다.
애초의 의도를 만족시키는 답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제 시를 종(縱)과 횡(橫)으로 세밀하게 읽어주신 점 다시 한 번 고맙게 생각합니다. 언제 이종암 시인과 소주 한 잔 기울일 날이 있겠지요.
▷이종암: 선생님의 시와 시 세계에 대해 어눌하고 부족한 제 질문에 이렇게 알차고 충실한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의 E-mail 대담이 오태환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독자 여러분들께 작은 창(窓)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나누다 보니 선생님의 5시집이 어떤 모습일까, 더욱 궁금해집니다. 오태환 선생님,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ㅡ『詩하늘』(2016.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