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집회 이현래 목사님 화답
장례식이 진짜 크게 발표될 것인지 아니면 부활의 소식이 나올지 궁금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참석했다. 그런데 재분 자매가 새롭게 간증함으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다. 이제 우리 교회의 어떤 전환기가 왔다.
뭐냐면, 구속의 복음이 선포하는 사람들이 엠지 세대 사람들이라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면서 너희는 그렇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마치 그런 사람들만 하는 복음선포로 치부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청심회도 나오고 장년부도 나오고 새로운 간증이 터져 나온다. 전기를 이루고 있다. 젊은 아이들이야 아무것도 모르니 간증하지, 또 누구는 과거가 있으니 간증하지 그렇게 생각하던 것이 바뀌고 있는 시간인데, 재분 자매는 그중에 대표적인 한사람이다. 말 없고 얌전하고 문제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도 어려운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가 이 복음으로 벗겨지니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니 복음 확산의 새로운 전기라고 할 수 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게 아니다. 새 언약의 내용을 보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게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 어린아이라도 하나님을 알라 할 필요가 없는 날이 온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복음은 어떤 특수한 사람들만 하는 말이지 정상적인 사람은 할 필요 없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상당히 있었다.
과연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그렇지 않아. 나는 적어도 저렇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던 판단이 이제 끝날 때가 되었다. 하나님 말씀대로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아는 때가 왔다.
왜냐면 이 복음 때문이다. 다른 복음은 어떤 복음이라도 다 조건이 붙어있다. 그런데 이 복음은 조건이 없다. 장대에 달린 놋뱀을 놓고 쳐다 보라. 그러면 산다. 그러니 아무 조건이 없다.
쳐다보기만 하면 다 살았다고 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우리가 해석할 수 없다. 그다음 구절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장대에 놋뱀을 달아놓고 쳐다보라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이 감상적으로 말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장대가 두 개인가? 놋뱀이 두 개인가?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독생자다. 누구든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그렇게 유명한 구절인데 세상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전혀 다른 세계를 돌고 있다.
그날이 언제 올 것인가 했는데 지금 왔다. 눈을 크게 뜨고 공중에 매달린 놋뱀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왜 예수는 놋뱀인지 알 필요가 있다. 이 놋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어떤 사람은 심판이다. 어떤 사람은 독이 없다. 이렇게 해석했다. 이것도 상당히 진전된 해석인데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도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독이 없는 뱀을 보니 독이 빠져나갔다는데 시원찮기는 하지만 그것밖에 답이 없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요한복음 3장 16절이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든지 매달려있는 놋뱀 하나를 보면 다 살게 되어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그 사람을 보면 다 살게 되어있다. 우리에게 아무 조건이 없다.
어떤 사람은 되고 어떤 안 된다는 조건이 없다. 어떤가? 이것이 만민을 구원할 복음이 아니겠는가.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있는 사람도 없는 사람도, 얌전한 사람도 얌전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구원받을 복음이다.
이 복음을 보고도 이러니 저리니 한다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왜 놋뱀을 안 보냐는 것이다. 놋뱀이 보기 싫으니까 안 본다.
군의관의 어깨에 있는 뱃지를 보면 그것이 놋뱀이다. 뱃지를 달고 다니는데 왜 달고 다니는지 모른다. 쳐다본즉 살았다. 의사를 바라보면 산다는 말이다.
이제 복음이 세계로 확산되는 길이 확 열렸다. 요즘에 뜸해 있던 청심회가 막 움직이고 있다. 더군다나 대구 사람들이 움직이면 힘이 엄청나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움직이면 힘이 대단하다.
안동에 있던 옛날 CCC 한 간사가 안동은 안 동하는 곳이라고 하다. 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충주 가서 표정이 없는 사람들에게 걸렸다. 내가 성경 말씀을 열심히 연구해서 가도 좋다는 표정도 없고 안 좋다는 표정도 없다. 오늘 저녁에 모이라고 하면 온다는 말도 없고 안 온다는 말도 없다. 그 시간에 가봐야 안다
내가 여기에 부딪혀서 왜 이런가? 하다가 결국은 워치만 니를 만나는 동기가 되었다. 대구 와서 보니 혼자는 말 안 하는데 한두 사람 말하면 떼거지로 나온다. 그러면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한다
오늘 재분 자매 말을 들으니 재분 자매가 먼저 부활해버렸다. 나는 장례식이 끝나서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나나 기대를 하고 있는데 부활의 소식이 한 사람밖에 안 나왔다.
장례식장에 갔던 사람, 장례식 주위에 사람들이 있다. 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서 향 백근을 넣어서 새 무덤에 넣고 돌로 막아놓았단다. 3일째 되는 아침에 가봤더니 막아놓은 돌이 열려 있고 안에는 입었던 옷이 차근히 개켜져 있고 죽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누구를 찾느나고 물으니 예수 찾는다고 하니 벌써 살아났다고 한다. 벌써 살아나서 갈릴리로 가셨느니라. 성경에 그렇게 써있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우리 교회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 나는 그런 일이 발생하기를 정말 기다리고 있다. 수요일 저녁에 얼마나 재미있던지 해경 자매가 나왔는데, 생전 말 안 하던 자매가 외쳤는데 오늘은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말 좀 듣고 나오려 했는데 안 나와서 할 수 없이 먼저 나왔다.
장례식이 확실해야 부활도 확실하다. 장례식 없이는 부활도 없다. 죽지 않았는데 어찌 다시 살겠는가? 죽지 않고 다시 사는 법은 없다. 죽고 다시 사는 것을 부활이라고 한다. 누구든지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다.
작든지 크든지 누구든 자기대로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나온다. 오늘 재분 자매도 자기 속에 죽음이 있어서 이 부활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 두려움이 없다.
죽음을 거치지 않으면 두려워서 말 못 한다. 이것이 잘못됐니 저것이 잘못됐니 하는 건 여유있는 사람의 말이고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세상에 내놓기 부끄럽다는 얘기다. 자기가 이런 교회 다닌다는 게 부끄럽다는 말이다
우리가 세상 좋게 하려고 예수 믿는가? 그게 아니라 세상과 정반대의 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말을 함부로 해도 좋다는 게 아니다. 어긋나는 말을 해도 안 되지만 그래도 선포는 바로 해야 한다. 세상이 싫어해도 해야 한다
세상에 좋은 말만 하고 있으면 뭐가 되는가? 우리 대구교회처럼 대혼란을 겪게 된다. 그래도 나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것 없이 세상에 부딪히지 않을 소리만 하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 당연히 갈라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