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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후반에 오면서 유럽과 태평양 전전선에 걸쳐 연합군은 점차 승세를 굳히며 공세를 강화합니다. 추축군은 도처에서 연전연패를 당하고 43년 9월 8일 이탈리아가 가장 먼저 백기를 든후 연합군에게 붙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합니다. 추축진영 자체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중국 역시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기 위해 본토 탈환을 위한 일대 반격계획을 추진합니다. 스틸웰에 의해 인도와 운남에서 X군과 Y군의 재편과 훈련이 어느정도 완료되고 본격적으로 북부 버마 탈환이 시작되자 1943년 11월 군사위원회 산하 군령부는 "국군총반공작전지도계획대강"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은 구체적인 계획이라기보다 향후 전쟁 방침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일본군의 주력이 몰려 있는 화중 무한지구에 대한 탈환을 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며 영, 미군과 연계하여 점진적으로 장강과 황하를 거쳐 동남 연해의 적을 일소하고 나아가 만주를 회복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44년 2월 제4차 남악군사회의에서 제3, 제4, 제6, 제7, 제9전구의 주요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장개석은 "항일전쟁은 새로운 전환점에 도달했으며 이제는 적에 대한 반공결전을 시작할 단계"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현재 두가지의 상황을 고려할 수 있는데, 첫째 일본이 먼저 선제공격을 한다면 아군은 우선 방어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둘째 일본이 수비에 주력한다면 5월 이후 각 전구의 준비가 완료되는대로 전 전선에 걸쳐 공세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따라 군령부는 3월초 "宜沙반공계획"을 입안하였는데, 무한의 서쪽 관문이자 전략적 요충지인 의창, 사시의 탈환을 목적으로 제3, 제5, 제9전구가 삼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무한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5월 15일까지 각 전구는 준비를 완료하며 정확한 공격 개시일자는 추후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또한 "국군총반공작전지도계획대강" 乙안에서는 "각 전구는 동시적으로 반격으로 전환하여 당면한 적을 섬멸한후 계속 진격하여 동북 4성을 회복한다"하는 것을 전제로 그 시기는 "의창-사시 수복후 일본군의 붕괴 조짐이 보이고 각 전구의 주력이 보충과 훈련을 완료하고 연합군이 필리핀, 대만을 공략하여 국군이 충분한 보급 및 지원을 획득할 수 있을 때"라고 언급합니다.
만약 스틸웰이 버마탈환을 고집하지 않았다면, 그가 전략의 중점을 중국 본토에 두고 X군과 Y군을 장개석에게 돌려주었다면, 미군이 필리핀 대신 당초 계획대로 대만을 공략하여 중국 동남 연안의 제공, 제해권을 확보했다면, 미치나에서 교착상태가 되지 않고 순조롭게 44년 여름이나 가을까지 레도 공도를 개통할 수 있었다면, 또는 일본군이 이치고 작전을 강행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늦어도 44년 가을까지는 준비를 완료하고 총반격으로 전환하여 자주적인 역량으로 본토를 탈환해 나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개석에게는 그다지 운이 없었습니다.
44년 4월 20일부터 시작된 일본군 최대최후의 공세인 이치고작전으로 장개석이 준비하고 있던 반격계획은 중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다, 반격의 핵심이 될 Y군은 버마전선에만 집착한 루즈벨트와 스틸웰의 압력으로 가장 위급한 시기에 버마전선에 투입되었고 동부전선은 붕괴직전까지 몰립니다. 44년 12월 일본군은 병참의 한계와 예비병력의 부족으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였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지만 중국군 일선 부대들은 너무 큰 타격을 입어 완전히 누더기나 다름없었습니다. 따라서 반격을 위해서는 이들에 대한 재편성과 전력 회복부터 우선이었죠.
이 역할은 스틸웰을 대신해 중국전구의 참모장이 된 앨버트 웨드마이어중장이 맡았습니다. 그는 전쟁을 거치며 유례없을만큼 고속출세한 사람이었는데,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던 41년 12월만 해도 일개 소령에 불과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소장이 되어 마운트배튼의 참모차장이 되었고 중국에 부임하면서 중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전통있는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출신으로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30년대 후반에는 독일 육군대학에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웨드마이어에 대해 스틸웰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으나 그는 전쟁기간 동안 참모장교의 보직을 맡아 각종 작전을 수립하였으며 매우 성실하고 치밀하며 또한 신중하면서 상대에게는 정중하였습니다. 따라서 스틸웰과 달리 장개석과 셔놀트와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중국 부임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자리이며 어쩌면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였습니다. 육군부가 그에게 부여한 역할은 42년 스틸웰에게 제시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 명료하였습니다. 첫째로 장개석을 보좌할 것, 둘째로 중국내 항공작전을 수행하고 중국군의 작전, 훈련, 보급을 지원할 것, 셋째로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지 말 것. 덕분에 웨드마이어는 스틸웰보다 좀 더 명확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44년 11월 1일 웨드마이어가 중국에 처음 왔을때는 중국은 그야말로 혼란과 무질서 그 자체였습니다. 버마에서는 승리했지만 중국 전선은 패주의 연속이었으며 11월 10일 계림과 유주가 공격을 받아 동시에 함락되었습니다. 중국군의 주력은 후퇴했지만 그 과정에서 제131사단장과 제170사단의 부사단장, 계림방위사령부 참모장 등이 전사했고 1만3천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11월 24일에는 광서성의 성도인 남녕이 함락되었으며 12월 10일 일본군은 중불 국경에 도달함으로서 중국을 남북으로 완전히 관통하였습니다. 서안에서 공산군과 대치중이던 부대를 광서의 수비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지만 전선에 도착함과 함께 문자 그대로 녹아내렸습니다. 귀주성까지 침공을 받고 중경도 위태롭자 웨드마이어는 장개석에게 수도를 곤명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했으나 장개석은 중경을 사수하다가 죽음을 택하겠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45년 1월이 되자 최악의 상황은 넘어갔고 전선은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지나파견군은 이 여세를 몰아 중경까지 공략할 것을 주장했으나 대본영은 병참문제를 이유로 거부하였고 태평양에서 미군이 북상함에 따라 지나파견군 역시 더이상 대규모 공세를 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곤명 수비를 위해 웨드마이어가 Y군중 2개 사단을 항공기로 긴급 공수하여 곤명 주변에 배치했지만 이미 불필요한 것이었죠.
이제 웨드마이어에게 당면한 문제는 오랜 전쟁으로 완전히 지치고 피폐해졌으며 거의 반기아상태에 직면한 중국군을 재건하여 일본군에 대한 공격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버마탈환을 위해 대중조차물자의 대부분을 독점했던 스틸웰과 달리 레도공도와 험프루트를 통해 들어오는 물자를 적극적으로 중국에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가장 민감하고 복잡한 정치적 문제인 공산군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는데, 전략사무국(OSS)가 공산군에게 대량의 무기를 지원하여 그들을 무장시킨후 필요하다면 65만의 공산군과 250만의 공산민병대의 협력을 얻을 것을 제안하자 스틸웰과 달리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중국의 중앙정부는 장개석정권이며 그들의 승인없이 공산군이나 지방 군벌들, 여타 반장개석 세력들에 대한 어떤 지원도 금지한다는 훈령을 내립니다.
44년 말 가우스를 대신해 신임 주중 대사로 부임한 헐리 역시 전임자에 비해 장개석에게 훨씬 우호적이었고 공산군에게 무기나 재정적 원조를 하는 것은 위험한 전례가 될 것이며 장개석정권만이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한다는 정책에도 위배된다고 반대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의 대중정책은 여전히 애매하고 딜레마의 연속이었습니다. 45년 2월 얄타에서 루즈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중국을 완전히 배제한채 소련의 대일전 참전 댓가로 과거 제정러시아가 만주에서 누렸던 모든 권익을 보장하기로 약속하였습니다.
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우크라이나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미영소 삼거두가 모여서 얄타회담을 개최합니다. 여기에서 종전후 패전국들에 대한 처리문제와 뉘렌베르크 전범재판의 개최, 패전국 식민지의 독립문제를 논의하였고 또한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 대한 비밀의정서를 채택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저항이 아직 완강한 상황에서 소련의 참전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나 소련은 여기에 대한 준비가 부족했고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지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야 비로소 부랴부랴 참전하게 됩니다.
※ 사진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9096
이미 병이 극도로 악화되어 죽음을 앞에 두고 있었던 루즈벨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매우 허약한 상태였고 웨드마이어와의 면담에서 일본과의 전쟁에 가능한 중국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할 것과 공산당과의 관계는 계속 유지해야 하며 미국이 바라는 "통일된 중국"은 반드시 장개석정권일 필요는 없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헐리는 미국이 잘 중재한다면 국공 양자를 충분히 화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주중 대리대사인 조지 애치슨은 공산당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를 통해 그들이 소련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야 하며 장개석에게 공산당과 타협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습니다.
당시 루즈벨트를 비롯해 워싱턴의 관료들, 중국에 파견된 외교관, 군인들의 입장은 서로 상반되고 모순이었으며 자기들끼리도 의견을 끝까지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장개석에게 맹목적일만큼 우호적인 반면 어떤 이는 극도의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이 나서서 장개석정권을 때려부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들은 실상 중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에서 중국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죠.(또는 개인적인 이유까지) 근시안적이고 신중하지 못하며 일관성없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중, 미 양쪽 모두에게 해가 되었을 뿐이며 불신감만 키우게 됩니다.
웨드마이어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중국은 군대의 재건과 반격 작전을 준비합니다. 반격의 거점은 곤명이었습니다. 장개석은 곤명에 "중국육군총사령부"를 설립하고 군정부장인 하응흠을 총사령에 겸임케 합니다. 45년 1월 29일 하응흠은 국민정부군 재건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위해 우선 12개군 36개 공격사단 50만명을 편성하기로 합니다. "알파사단"이라 불리게 되는 각 공격사단은 일본군 정규 보병사단의 2/3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갖추는 것을 목표로 하며 이와 별도로 Y군에 준하는 9개 방어형 사단을 편성키로 하였습니다. 사단은 각각 1만명의 보병과 포병대대, 지원부대로 구성되며 미군을 모델로 하였습니다.
웨드마이어는 중국이 제시한 36개 사단의 무장과 훈련을 위해 대중원조 물자를 적극적으로 늘리고 가장 시급한 급식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4천명의 미군을 각 연대마다 장교 25명, 사병 50명씩 배치하여 연락업무와 군사고문의 역할을 맡도록 하였습니다. 만약 중국군 지휘관이 그들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지휘관은 즉각 해임될 것이며 해당 부대에 대한 미군의 원조는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모든 정보와 계획을 혼자서만(심지어 자신의 참모들조차 배제했던) 독점하고 독선적으로 지휘했던 스틸웰과 달리 중경에서 연합참모회의를 매주 개최하고 장개석이 직접 참석할 것을 권유하여 서로간에 소통을 확대하였습니다. 특히 자신은 공산군에 대해 어떤 지원도 할 계획이 없음을 명확히 밝힘으로서 장개석은 그를 매우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총명하고 솔직하며 부지런하다. 스틸웰과는 정반대이다. 그의 적극성과 집중력은 우리 장교들이 본받아야할 좋은 예를 제공해 준다."
장개석은 무너져 버린 군대의 재건을 위해 44년 10월 청년군의 건설을 지시합니다. 이전까지 장개석은 "설사 중국전토가 함락되어도 지식청년이 남아 있다면 얼마든지 재건할 수 있다"라면서 대학교나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들에 대해서는 병역을 면제시켜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군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병사들은 농민이나 부랑자, 실업자와 같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층이었고 그들은 체력이나 지식, 능력에서 매우 형편없었습니다.
※ 이런 지식인에 대한 우대정책은 동시기 일본군 수뇌부의 사고와는 대비되는 것인데, 그들은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하는 농민출신들을 선호하였고 도시출신이나 지식인 계층을 대단히 불신하여 학도병들을 천시하고 차별하여 가미가제와 같은 자살 공격에 우선적으로 투입하여 무의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따라서 전쟁에서 살아남은 학도병들은 전후 민간정부를 구성하면서 군부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을 보이며 강력한 문민통제를 실시합니다.
자원자는 모두 12만명이었고 8만 6천명이 선별되어 입대하였습니다. 1만명은 X군에, 나머지는 미군의 경기계화부대를 본뜬 3개군 9개사단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대중원조물자가 증가함에 따라 4월 1일부터 시작된 신편 36개 사단에 대한 훈련과 재편 역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인도, 버마에서 작전중인 X군과 Y군 역시 6월 15일까지 모두 중국으로 복귀하기로 합니다. 45년 2월 12일 군령부는 "중국육군작전계획대강"을 작성하여 5월부터 화남전역에 걸쳐 공격을 개시하여 유주와 계림을 탈환하고 상계철도를 회복한후 중국 연해에 연합군이 상륙하는 것과 연계하여 장강 하류까지 진격할 것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미군의 대만 탈환과 중국 상륙을 전제로 한 계획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중국군의 재무장 시기가 너무 늦은데다, 미군은 많은 병력이 소요되는 중국 상륙 대신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 본토를 직접 공략하는 쪽을 택함으로서 결국 실현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이치고작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지강과 노하구에 대한 공격을 계획합니다. 44년 11월 계림이 함락 된후 중미연합공군은 일본군에게 점령되지 않은 호남성 서부의 지강비행장과 호북성 서부의 노하구비행장으로 거점을 옮긴 다음 일본군이 장악한 화중, 화남의 철도 수송과 양자강의 수송선단을 지속적으로 폭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버마전역에서 승리함으로서 그쪽에 파견되어 있던 공군력을 다시 중국 전선으로 돌릴 수 있어 이치고작전 당시 일본이 일시 장악하였던 제공권은 도로 연합군이 차지하였습니다.
오카무라 야스지(1884~1966) : 지나파견군의 마지막 사령관. 38년 제11군사령관으로 무한회전에서 활약하였고 육군대신을 거쳐 41년 7월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후 문란해진 군기를 바로잡고 소위 "삼광작전"이라 불리는 학살, 약탈범죄를 금지시키려고 노력했으나 별 효과는 없었습니다. 44년 11월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그는 휘하 부대에게 공산군에게 항복하지 말 것과 국민정부군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덕분에 전범으로서의 기소를 면한채 49년 1월 본국으로 무사히 귀환하였고 이후 국공내전에 패하여 대만으로 쫓겨온 장개석의 요청에 따라 대만 육군의 훈련을 위해 구 일본군 장교들로 구성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합니다. 한편, 그는 32년 제1차 상해사변 당시 군의 강간을 막는다는 이유로 이른바 "정신대"의 편성을 주장하였고 그의 건의에 따라 중일전쟁 발발후 일본정부는 본격적으로 강제로 위안부를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문에 2000년 여성 국제전범으로 기소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노하구는 낙양 남서쪽 250km, 한구 북서쪽 300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중미연합공군의 주요기지이기도 했습니다. 노하구에 대한 공격(중국명 : 예서악북회전)은 3월 22일부터 개시되었는데, 하남성 정주에 주둔한 제12군이 주공을 맡고 제34군이 조공을 맡아 제110사단이 우익을, 제115사단이 좌익에서 진격하여 중국군의 진지를 돌파한후 기병 제4여단과 제3전차사단(97식 20량, 경장갑차량 100량)이 신속하게 노하구, 서섬구까지 진출토록 하고 제34군의 제39사단이 남동쪽으로 진격해 남북에서 협격하여 중국군을 격멸토록 합니다.
이런 일본군의 공세에 대해 중-미측은 사전에 파악하였고 지강에 중국군 주력을 집중 배치하여 방어토록 합니다. 호종남의 제1전구가 북쪽정면을, 이품선의 제10전구가 평한철도 남단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공군은 적의 병참선을 폭격하여 차단시켜 적의 진격을 둔화시킨후 류치의 제5전구는 제1전구, 제10전구와 함께 삼면에서 협격하여 일본군을 포위 섬멸할 것을 지시합니다. 장개석은 이미 일본군의 공세역량은 바닥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들의 화살은 이미 사정거리끝에 도달해 버린 것이며 우리에게 상처를 낼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일본군의 최초 공세는 성공적이었고 기병 제4여단은 3월 26일 노하구 비행장 근처까지 진출하여 중국군 방어선에 대해 기병돌격을 시도합니다. 이 돌격은 전쟁사에서 최후의 대규모 기병돌격이었습니다. 중국군 수비대는 일본군의 전차에 맞서 필사적으로 방어했으나 결국 4월 10일 노하구 전역이 완전히 함락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계선이었고 반격에 나선 중국군은 공군의 지원과 M4 셔먼 전차를 앞세워 일본군을 전전선에서 격퇴합니다. 4월 4일 장개석은 반격을 명령하였고 일본군을 소탕하여 서협구에서만 일본군 5천명을 격멸하고 전차 50여대를 파괴합니다. 4월말까지 빼앗긴 지역을 모두 탈환하는데 성공하죠.
M4 셔먼 전차를 앞세워 진격중인 중국군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g17/140019097023
또한 같은 시기 호남성 서부 지강에 대한 일본군 제20군의 공격 역시 완전히 실패로 끝납니다. 4월 8일 제20군산하 제116사단, 제47사단, 제68사단, 제34사단 등 약 10만명의 병력으로 지강작전(중국명 : 상서회전)을 개시합니다. 지강은 한구 남서쪽 600km 떨어진 곳이며 중경과 성도로 향하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하응흠은 새로 편성된 미식사단들을 동원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키로 하고 탕은백의 제3방면군과 왕요무의 제4방면군이 종심방어를 펼치는 한편 신편 제6군을 급히 항공수송으로 지강으로 이동시켜 예비대로 합니다.
수송기로 이동중인 중국군 美式사단. 중국 하늘에서 이미 일본기는 완전히 소멸했고 중미 연합공군은 막강한 전력으로 도처에서 일본군을 폭격하고 항공수송을 통해 중국군을 최일선에 신속하게 투입하였습니다.
※ 사진출처 : 도설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p.167
일본군은 3로로 분산하여 진격했으나 중국군에게 완전히 저지당했고 5월초부터 중국군은 반격을 개시합니다. 5월 9일 오카무라대장은 작전 중지를 명령하고 퇴각을 명령했으나 중국군을 이를 추격하여 6월초에는 모든 영토를 탈환합니다. 이 전역에서 일본군은 참전병력의 약 30%에 달하는 2만 8천여명이 넘는 막대한 피해를 입어 "중국군 과달카날"이라고까지 불리게 됩니다. 그동안 화력과 제공권에서 일본군은 우세를 누려왔지만 이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중국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일본군은 중국전선에서 더이상 공세를 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 전선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됩니다.
더욱이 전황은 일본에게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4월 1일 사이몬 바크너 중장이 지휘하는 제10군 5개사단 8만 5천명이 오키나와에 상륙하였고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밀어닥치자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수상이 된 되니츠제독은 5월 7일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장장 5년에 걸친 유럽전쟁이 막을 내렸습니다. 소련 역시 얄타회담에 따라 4월 7일 "일소중립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 극동으로 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대본영은 광주, 홍콩만을 확보하는 선에서 화남에서의 전선을 축소하기로 결정하고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킵니다.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중국군 역시 제한적인 반격을 시작하여 5월 26일 장발규의 제2방면군이 남녕을 탈환하였고 탕은백의 제3방면군 역시 제2방면군과 연합하여 6월 14일 선산을, 6월 30일 유주를 탈환합니다. 7월 28일에는 계림을 탈환하죠.
일본군의 마지막 공세와 중국군의 반격. 그러나 시기적으로 너무 늦었고 중국군이 반격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일본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장개석은 일본이 항복하려면 적어도 1년에서 1년반은 더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죠.
45년 7월 웨드마이어와 하응흠은 일본군의 지강, 노하구 공격으로 인해 일시 중지되었던 반격작전에 대해 다시 논의합니다. 하응흠이 제시한 계획은 제1방면군은 월남을, 제2방면군은 뇌주반도를 거쳐 광주로, 제3방면군은 계림을, 제4방면군은 형양을 공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웨드마이어는 현재의 병참능력과 공군력으로 형양과 광주 양쪽에 대한 공격을 동시에 지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우선 광주, 홍콩 탈환에 집중할 것을 주장하여 결국 관철됩니다. 또한 마셜은 유럽전쟁의 종결에 따라 패튼, 심슨, 트러스콧과 같은 유럽에서 활약했던 뛰어난 지휘관들을 중국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웨드마이어가 구상한 이른바 "카보네이도 작전"은 새로 편성된 20개 사단을 투입해 광주, 홍콩을 점령한후 해안선을 따라 온주, 복주, 하문 등을 점령하면 태평양을 통해 대규모 미군부대가 상륙하며 패튼은 화북으로, 트러스콧은 양자강을 따라 상해로 진격하며 심슨은 자신의 부사령관으로 임명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세는 46년초에 시작될 계획이었습니다.
더욱이 미국에게 중국 전구는 끝까지 지엽적인 부분이었습니다. 4월 12일 루즈벨트가 뇌출혈로 사망한후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장개석에게 맨하튼 계획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습니다. 7월 30일에야 마셜은 웨드마이어에게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였고 미국은 중국 대륙의 전투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웨드마이어가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죠.
따라서 중국군은 동쪽으로 철수하는 일본군을 조심스럽게 추격하고 있었으나 전쟁이 그렇게 빨리 끝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고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을때 이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웨드마이어는 마셜에게 "중국은 피점령지에 대한 회복과 재건, 복구, 피난민들의 귀향 등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대비책이 없으며 혼란과 무질서가 닥쳐 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순간 그의 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첫댓글 오카무라 야스지는 그나마 일본군부중에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고 생각할라고 했더니 정신대 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