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 부처님은 도솔천 내원궁에 호명보살로 계시다가 사바세계에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수행하고 성불해 중생을 구제했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이 아는 상식이다. <장아함경>에 부처님은 “하늘 위나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나니 욕계, 색계, 무색계가 다 괴로움에 허덕이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하게 하고 중생들의 생로병사를 제도하리라(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要度衆生 生老病死)”고 이 땅에 나투신 뜻을 말씀하셨다.
또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는 “너희들은 여래의 비밀신통력을 자세히 들어라.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는, 석가모니불이 석씨 궁전을 나와 가야성에서 멀지 않는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함이라. 그러나 선남자야,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한량없고 가이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니라”고 해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미 한량없는 세월 전에 성불하신 것으로 돼 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은 석가모니 한 부처님에 한하지 않고 과거의 부처님, 현재의 부처님, 미래의 부처님 등 삼세의 부처님이 계신다. 공간적으로는 <화엄경>에서 강조하고 있듯이 시방세계에 상주하실 뿐만 아니라 우주법계에 충만하다.
마음속에 자리한 욕망의 더러움을 한꺼풀 제거해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에 보답하는 것이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
인간의 몸으로 化現
고통 받는 중생에게
無常의 이치 가르쳐
부처님 탄생은 이 세상에 중생의 몸을 받았다는 의미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나투어 우리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출가하고 수행해 도를 깨달음처럼 보이시어 수많은 중생을 구원하셨기에 화현(化現)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탄생한다는 것과 오신다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탄생한다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의적인 것보다 타의적인 것이 많으며 불교적으로 말하면 업으로 말미암아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즉 생멸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화현은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것은 완전히 자의적인 힘에 의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나타나 목적을 달성하면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업에 의한 생멸이 아니라 원력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생에 어떤 한 장소에 계시지 않고 시방법계에 계시면서 석씨궁전에 화현한 것이다.
# 왜 오셨을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앞서 이를 알려고 하면 먼저 이 세상은 어떤 세계이며 어떤 중생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객관적인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이치에 의해 하나의 물질이 이루어지면 머무는 기간이 있고, 이것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 속에 변해 결국에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주관인 나라는 몸은 생로병사라는 흐름 속에 한번 태어나면 늙고 병들어 결국 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식은 영원하지 않고 생주이멸(生住移滅)로 한 생각이 잠시 머물다가 움직여 사라지는 과정을 가지기 때문에 객관적인 세계나 주관적인 세계 이 세상 어느 하나도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무상한 것이 영원히 존재하는 줄 알고 이에 집착해 영원히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 욕망에 의해 인간 자기 자신은 괴로움의 상처만 남길 뿐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준다. 근래 매스컴에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보자. 돈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는가 하면 돈 몇 만원 때문에 길가는 여자를 살해하고, 남의 정보를 훔쳐 돈을 가져가는 등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또 명예와 권력을 가지기 위해 장기집권하면서 많은 시민을 굶주림과 부자유속에 살게 하면서 자유와 먹을 식량을 외치면 이들을 죽이는 국가도 있는 등 다양한 욕망에 의한 불행한 현실이 우리주위에 존재하고 있다.
이 많은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존재가 멸하는 ‘죽음’일 것이다. 필자는 세계 종교가 죽음의 문제를 풀기위해 생겼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없는 영생(永生)을 기원하고, 중국의 도교에서는 늙지 않고 죽지 않는 불로장수(不老長壽)를 원하며, 불교에서도 실달태자가 출가를 말리는 아버지 정반왕에 부탁하는 말 가운데 “나에게 늙지 않고 아프지 않으며 죽지 않는 법을 일러주면 출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내용을 보면 여기에도 죽음의 문제가 있다. 그래서 불교의 정토사상에서 무량수(無量壽)란 단어가 중요하게 부각됐을 것이다.
이런 고통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단적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괴로움의 원인은 욕망이고, 이 욕망의 원인은 무상한 것에 집착한 것이며, 이 무상한 것에 집착한 원인은 어리석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리켜주고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원시경전의 <아함경>에서 “삼계가 다 괴로워하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해주며 중생들의 생로병사를 없애주겠다”고 하셨고, <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 법을 설해 교화하며, 또 다른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나라에서도 중생을 인도해 이익케 하노라”고 해 이 세계의 중생들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의 중생들까지도 구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고통을 여의고
부처님처럼 되려면
원을 갖고 정진해야
그런데 오늘날 왜 많은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욕망에 빠져 이웃을 위한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욕망에 쌓인 사람은 이웃에 대해 마음을 열 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인가도 모르고 마냥 욕망을 찾아 헤맨다. 옛말에 ‘청동’을 거울로 삼으면 의관을 바르게 하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흥망성쇠를 볼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고 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붙인다면 부처님의 대승경전을 가까이하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욕망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무상의 이치를 연기에 의한 공의 입장에서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리를 이해하면 그 무엇에 지나치게 집착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해탈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본다. <사십이장경>에서는 “쇠를 버려 불순물을 제거하고 나서 그릇을 만들면 그릇이 좋아지듯 수행하는 사람도 마음의 더러움을 제거하면 행동이 청정해진다”고 했으며, <원각경>에서는 “자심(慈心)을 닦는 사람은 능히 탐욕을 끊고, 비심(悲心)을 닦는 사람은 능히 화내는 것을 끊고, 기뻐하는 마음(喜心)을 닦는 사람은 능히 달갑지 않게 여기는 마음을 끊으며, 버리는 마음(捨心)을 닦는 사람은 능히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끊게 된다”고 해 네 가지 무량심을 닦으라고 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어리석은 생각에서 비롯된 욕망의 더러움을 한 꺼풀 한 꺼풀 제거해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에 보답하는 것이다.
둘째는 끊임없이 참회를 해야만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의 결과는 원인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고통의 언덕에서 헤매는 것은 과거에 무언가 잘못한 행동으로 업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과거를 되돌아보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선한 행동, 바른 행동으로 나아가는 것은 참회만이 제일이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만약 죄를 지었으면 숨기지 말고 감추지 말 일이다. 숨기지 않으면 죄가 가벼워질 것이며, 만약 부끄러움을 느낄 때는 죄가 소멸되고 말 것이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 주의에는 죄를 짓고도 죄를 짓지 않았다고 변명하는가 하면 심지어 죄를 지은 것을 정당화해 정의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참으로 이는 불쌍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잘못은 자기의 이념이나 사상에 준해 판단하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에 준해 판단하고 여기에 잘못이 있으면 곧 바로 참회하는 것이 자기의 삶의 질이 높아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관경>에서는 “참회하는 물로 번뇌의 더러움을 씻어낸다면 몸과 마음은 함께 청정한 그릇으로 바뀐다”고 해 참회하는 수행의 길만이 청정으로 돌아가는 것이기에 이 또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의 하나라고 본다.
# 부처의 씨앗 키워야
대승불교에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중생들이 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부처의 씨앗을 키워 자기와 같은 부처가 되어 고통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것일 것이다. 즉 부처님의 등불이 나를 비추어 나를 인식하게 되었으면 나도 등불이 되어 남을 지혜의 광명으로 비추는 것이야 말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의미라고 본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원을 갖고 마음으로 꾸준히 정진해야 한다. <부자합집경>에 “위대한 영웅이신 세존께서는 생사의 무거운 짐을 버리시고, 부지런히 수행해 좌절하지 않으심으로써 빨리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했다. 이 또한 부처님이 이 세상 중생들에게 너희들도 수행하면 나처럼 될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이다. 대승경전의 꽃이라는 <화엄경>에서 “삼계가 두레박이 물을 번갈아 퍼 올리듯이 우리 인간도 윤회함이 백천만겁 동안 한 없이 흘러왔는데 이 세상에서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니 금생에 이 몸을 제도시키지 않으면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라는 말씀을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교신문 2718호/ 5월7일자]
첫댓글 감사드립니다.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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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가 두레박이 물을 번갈아 퍼 올리듯이 우리 인간도 윤회함이 백천만겁 동안 한 없이 흘러왔는데 이 세상에서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니 금생에 이 몸을 제도시키지 않으면 어느 생에 이 몸을 제도할 것인가”라는 말씀을 부처님오신 날을 맞이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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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다행히 불법을 만났으니...'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부처님과 불법이 함께하므로 두렵지 않고 든든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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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무상 무원의 도리를 알고 실천하며
부처님의 지혜광명에 의지하여 참된 불자의 모습으로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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