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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티브이
그는 글을 읽어 내려가는 아내를 보았다. 그 글은 호소였다. 자신이 요즘 느끼는 감정을 알려주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는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각방을 쓴 지는 3년이 넘었고 아내는 아예 둥지를 작업실에 틀었다. 애초 아내의 작업 공간은 부엌이었다. 부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일하는 아내가 안쓰러워 방을 한 칸 더 늘려 이사 왔던 것인데 처음에는 좋았다. 언제부터인가 급한 일이라면서 밤을 새우기 시작했고 이후 급한 일은 계속해서 생겼다. 늘 마감에 시달렸고 아내의 얼굴은 갈수록 꺼칠해졌다.
그런 밤이 몇 날이고 계속 되고 난 다음에는 부실하던 반찬이 충실해졌고 책상이 깨끗해졌으며 집안이 깨끗해졌다. ‘책을 끝냈구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일이 두 어해 계속되자 집안은 점차 지저분한 상태가 되었다. 먼지가 굴러다녀도 머리카락이 굴러다녀도 그만이었다. 엄마 같으면 두고 보지 않았을 일이었다. 엄마라면...그는 생각만 해도 목이 메었다.
솔직히 그는 불만이 많았다. 결혼 초 아내는 얼마나 살가웠던가. 저녁나절 퇴근해 돌아오면 김 오르는 식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그의 초인종 소리를 듣고 버선발로 마중 나왔고 집안에 들어서면 아내는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내가 차린 저녁상을 부모님, 때로는 여동생 부부와 둘러앉아 먹는 맛은 그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었다.
아내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여름이면 일쑤 냉면과 비빔밥으로 식구들 입맛을 돋우었고 겨울이면 그가 좋아하는 녹두 빈대떡과 감자탕으로 그와 식구들 입맛을 맞추었다. 여름 날 아내가 땀 흘리면서 차려낸 나물 비빔밥을 먹고 식구들과 더불어 거실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부엌에서는 아내가 설거지를 하느라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왔고 설거지를 끝낸 아내는 수박을 잘라오거나 화채를 들고 왔으며 그것들을 먹고 마시면서 식구들과 보내는 하루는 무척 짧았다.
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매제와 여동생과는 마음이 잘 통했다. 작은 매제는 화술이 좋았다. 매제는 싹싹했고 명랑해서 엄마도 아버지도 작은 매제를 좋아했다. 매제가 있으면 늘 집안이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마루에 깐 돗자리 위에 누워 티브이를 함께 보면서 웃다보면 더운 하루도 긴 줄 몰랐다. 저녁이면 엄마는 밥상을 마당으로 들고 나왔다. 손바닥만한 마당이었지만 수돗가에 심은 감나무는 제법 컸고 그 그늘 아래 만들어둔 평상에 앉으면 집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평상에 앉아 아내가 차려낸 저녁을 먹었다. 엄마는 그가 좋아하는 연포탕에서 낙지를 건져 그의 입속에 넣어주었고 돼지 불고기를 상추에 싸서 그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그는 티브이를 좋아했다. 티브이 속에는 삶이 있었다. 개그 프로에는 재미가 있었고 연속극에는 감동이 있었고 교훈이 있었으며 이상적인 가족상이 있었다. 소리 지르고 화를 내는 프로는 보기 거북했다. 슬프거나 괴로운 일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면 그만이었다. 폭력을 전하는 뉴스는 보지 않았다. 연예인들이 출연해 재치를 겨루거나 운동을 익히는 게임을 하는 오락 프로는 유쾌하고 즐거웠다. 아버지와 엄마, 여동생들과 매제들, 그들과 함께 티브이를 보면서 웃는 일처럼 좋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아내는 티브이를 보지 않았다. 하긴 아내가 집안일을 끝내고 나면 재미있는 드라마는 다 끝나기 마련이었지만. 아내가 티브이를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결혼 초였다. 장안을 그처럼 흔들었던 <사랑이 뭐길래>에 그녀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그 탤런트들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희라가 고집부려 완고한 집안으로 시집가는 딸이었고 최민수가 대발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보수적 집안의 아들이었다. 이순재가 고집센 시아버지 역할을 맡아 온건한 시어머니인 김혜자 속을 긁곤 했는데.
그와 부모님이 마음 졸이면서 간혹은 집안이 떠나갈세라 박장대소하는 그 드라마,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의 아들과 현대적이고 열린 집안의 딸이 결혼하느라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 생기는 에피소드들을 다룬 그 드라마는 정말 멋졌다. 며느리가 완고한 시아버지를 설득하는 과정은 눈물 나리만큼 우스웠고 감동적이었다. 화장실에 팻말을 걸어놓아 시아버지에게 자신이 화장실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그 장면처럼 재미 있는 장면이 또 어디 있던가.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한옥, 집안을 호령하던 시아버지는 며느리가 걸어놓은 팻말을 보고 화장실에 며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쩔쩔 매었고 그가 쩔쩔매는 모습은 근엄했던 모습에 정 반대였기에 더욱 우스웠던 것이다. 재치 있는 며느리, 그는 자신의 아내가 그 며느리처럼 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더더욱 아내가 그 드라마를 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근사한 드라마를 보지 않다니.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이 뭐길래>야 오래 전 이야기지만 최근에도 마찬가지 일이 계속되었다. <아내의 유혹>은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죽은 아내가 얼굴에 점을 찍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해 남편을 유혹해 결국에는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그 드라마를 그는 손에 땀을 쥐면서 보았다. 인생이 거기, 드라마 안에 있는 게 아니었던가. 생은 그 안에서 울고 웃었고 악인은 패배했으며 선인은 승리했다. 지혜로운 그 드라마들. 드라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는 생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있으면 더욱 좋았다. 엄마, 엄마와 함께라면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니 보고 나서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텐데. 동생들과 함께라면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텐데. 지금 엄마는.....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불쌍한 엄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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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희야님..큰일 치루고 오셨군요...애쓰셨어요..아직도 엄마라는 단어는 떠오르기만해도,입에 담기만해도 가슴속이 뜨거워집니다...저도 ...
정리를 하시나 봅니다. 그 분은 전형적인 우리 한국의 가장이요 효자인 아들이군요. / 그 며느리처럼 되기를 바랬다 --> 바랐다.
바랐다가 맞아도 저도 늘 바랬다고 씁니다.그래야 속이 시원한거 있죠...ㅋㅋ
참 말 안듣는 학생 '어진내'님...ㅋ
다른 분 같으면 가만 있지만 희야님은 번역을 하시는 분이라 적었는데... 아이구, 못 말려...
아직 몸과 마음이 고단하실텐데 글을 올리셨네요. 울남편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사실에 위안 받습니다. 열심히 애써서 식사 준비하고 제일 늦게 수저 들었다가 물심부름 덧반찬 심부름에 늦어 제일 늦게 밥먹고 설겆이 할라치면 남편과 어머님은 TV보며 하하호호...효자인 남편, 아내를 조금은 외롭게 합니다.
그 남푠 데불고 계명대 심리학과 여자 교수님께 상담 받으러 가세요. 이 교수님 1회 상담료가 15만 원인데, 6회분을 미리 내야 하지만, 울학교 샘 내외분이 요즘 주1회 받으러 다니는데 열 배를 주고 싶답니다. 남푠을 홱 뜯어 고쳐 놓았다구 그럽니다. 교수님 이름 알아서 내일 다시 올려 드릴게요.^^
정말 "홱" 뜯어 고쳐 줍니까? 내가 힘들어서 잔소리 안했는데 어제 또 뭔일을 저질러 할수없이 오늘 그 하기싫은 잔소리를 좀 했습니다. 순간에야 '알았다. 많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며칠이나 갈런지...... 근데 남자 "홱" 변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 아예 갈려고 안 하는데 어떻게 데리고 갑니까.. 저 혼자도 고쳐 줍니까? 저 고치고 싶어요.. 성격을요..
희야님이 남자분이신가요? 음.. 저는 읽으면서 왜 그 아내가 자꾸 눈에 밟히고 가슴아픈지 모르겠어요.. 소외되어 있는 기분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