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허리가 약간 시큰거려 마늘작업을 결석했다.
7년 농사지으면서 일기 등의 불가항력적인 날을 제외하고
스스로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시큰거리고 나면 크게 허리가 고장나서
1달 이상 고생한 적이 여러 번 있어서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작업을 쉬고 한의원에 가서 여러가지 조치를 하고 약도 먹었다.
잠시 시간이 나서 포스팅을 한다.
3명의 누이들
2023.1.11
첫째 누나는 나와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 세살이다.
나이로 보면 어머니와 같은 존재지요.
큰누나 사진은 독사진이 없어 내 결혼식 사진을 첨부한다.
누이는 딸 여섯을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을 낳았다.
당시만 해도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아들을 기다리다 보니 딸을 여섯이나 낳았다고 한다.
누이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서 1킬로쯤 떨어진 구숫말이란 곳에 살았다.
제일 큰 딸이 나 보다 세 살이 많았고, 둘째 딸이 나하고 동갑이었다.
누이 말이 내가 외삼촌 노릇하려고 일 주일 먼저 태어났다고 놀리곤 했다.
어머니와 딸이 동시에 임산부였던 거다.
구숫말에 우리 논도 3마지기(600평) 정도 있어
봄이 되면 가래로 무너진 논 둑을 보수하고,
갈(활엽수의 어린잎)을 꺾어 논에 넣어 거름을 만들곤 했다.
어머니의 심부름을 가면 항상 반가이 맞아주면서 조카들에게
삼촌칭찬을 너무 해 어린 마음에도 쑥스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엔 조카가 4 ~5명으로 막내인 영훈이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이다.
그 후 오산으로 이사 해 지금까지 그 곳에 살고 계시다가
2년 전 91세에 돌아가셨다.
회사 은퇴 후 여주에 살 때부터 어머니같은 생각이 들어
가끔 농사지은 고구마를 보내고 제주에서는 귤을 보내드리며
가끔 안부를 전했다.
둘째 누나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시집을 갔다.
어릴 때 어렴풋이 나는 기억은 수양아들이 된 병식이 고학생이
우리집에 처음 와서 학용품을 사 달라고 할 때 내가 마당에 있었는데,
부엌에 있던 누나 두 명(둘째,셋째)이 부엌문을 열고 내다 본 기억이다.
둘째 누이는 결혼해서 처음에 시흥에 살았는데
이 때부터 형의 숙식을 제공했다.
당시 형은 중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한양공고에 입학을 한 것이다.
서울에 아무 연고가 없던 어머니는 시흥에 살던 딸에게 아들을 맡겼다.
당시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 전이라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나가 서울 장위동으로 이사한 후에는
누이 집에 어머니를 따라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둘 째 누이는 우리 형제들 중 가장 인간미가 있었다.
남을 잘 도와주고 인간관계도 참 좋았다.
우리가 전세에서 멍덕골 무허가 집에 한 칸 방에 살 당시
동방주택 슬라브 집에 살던 누이가 방 하나를 주어서
중학교 때 누이 집에서 공부한 기억이 난다. 가끔 용돈도 주셨다.
대학교 시절에는 3명의 자식들을 지도하고 용돈을 받았는데,
매형이 암에 걸려 투병하다 돌아가신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병으로 20여 년을 사시다가 세상을 뜨셨다.
제사 때 형제들을 만나면 언제나 동생들을 위해 기도한다며
반가워 하시던 모습 눈에 선하다.
셋째 누나는 애살이 많은 성격에 얼굴도 예뻐서
동네 남자들의 인기가 많았고 학구열도 높았지만
진학을 할 수 없어서 혼자 한문공부도 열심히 한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글씨를 예쁘게 잘 썼는데
소죽을 끓이면서도 벽에 한문을 빽빽히 써놓아
아버지로부터 지저분하다고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처녀 때의 기억은 수양형과 그 친구 매형사이의 삼각관계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6살 무렵)
누나 두 명이 시집을 가기 전이다.
고학생이라고 학용품을 팔러 우리집 사립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와 자신을 소개한 젊은 이가 생각난다.
그 때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던 누나 두 명이
내다보던 모습도 생각난다 .
평소에도 인정이 많으셨고 일 손이 필요했던 어머님은
고학생의 말을 듣고는 방학동안 농사 일도 거들고
겨울에 나무도 해오는 학생이 필요했고
또 학생이 불쌍해서 부모님이 수양 아들로 삼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그 학생은 매년 방학이면
우리 집에 와서 농사일도 거들면서 형 노릇을 했다.
그 때부터 나는 그 학생을 서울형이라고 불렀다.
친 형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때였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형이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왔고
그 후엔 같이 우리 집을 방문하곤 했다.
둘 째 누나가 시집을 갔고, 초등학교 3학년 때 부터는
나중에 같이 온 청년(매형)이 우리 셋 째 누나와
은밀히 같이 다니는 것을 목격했다.
서울형과 같이 올 때도 있었지만
혼자서 내려와 우리집에 기거하기도 했다.
처음엔 그 사람도 형으로 삼았는지 알았는데
형으로 부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형은 아니고 그냥 수양아들 친구였던 것 같다.
그 청년이 내려오면 어머니는 항상 들에 나가 계시기에
나에게 ‘누나를 잘 감시해라.’ 하셨는데
두 사람이 만나는 것을 미행하여 보고하라는 거였다.
4학 년 때 쯤인가 두 사람이 읍에 영화보러 간다고 하자
어머니는 나보고 쫓아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5킬로 정도의 거리를 두 사람을 뒤 쫓아 갔다.
읍에 도착하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는
나에게 과자와 잠자리채를 사주고는
둘이 볼 일이 있으니 혼자 집에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거미줄을 나무에 묻혀 잠자리 잡던 시절,
망이 달린 잠자리채 선물을 받고는 너무나 기뻐서
깜빡 내 사명을 잊고, 혼자서 신작로 길가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니 어머니가 왜 혼자 왔냐고 물으셔서
두 사람이 볼 일 보고 온다고 말했다가
매를 맞은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누나와 그 청년은 그 길로
전라도 군산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왔다고 한다.
벌써부터 결혼 약속을 하고 시댁에 인사 드리러 가는 길을
나보고 막으라고 하신 어머님이 무리였지
잠자리채가 문제는 아니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한편 수양아들(서울형) 은
속으로만 누이를 좋아했고 고백을 하지 못해
결국 친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꼴이 되었다.
고백할 용기도 없이 왜 친구를 데리고 와서 화를 자초 했는지…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고 했던가...
그 화풀인지 동네에 내 친구 ** 누나가 있었다.
우리 누나와 친구였고 이름도 같은 순자였다.
한 번은 나를 부르더니
용돈을 주며 심부름을 해 달라는 것이다.
편지봉투를 나에게 주며 중수 누나에게 전달해 달라며,
그 분이 무엇을 주면 받아 오라는 거였다.
나는 달려가서 봉투를 전하고
누나가 주는 봉투를 형에게 갖다 주었다.
그 후 그런 일은 자주 있었다.
결국 그 두 사람도 결혼하기에 이르렀고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했다.
그 후 두 순자는 경쟁이라도 하듯
서울에서 결혼 생활을 하고 처음에는 교류가 있었지만
우리 매형의 반대로 교류를 끊었다.
질투하는 마음인지?
누나와 서울형은 서로 왕래를 하고 싶어했는데…
17년간 야쿠르트 아줌마로 배달을 하면서
조카 세 명 모두 공부를 시키고 결혼을 시킨 후
심심하기도 하고 애살도 많아 용돈이라도 벌려고,
아니 말벗이라도 만나려고 70세가 넘어서까지도
건물 청소하러 다니곤 했다.
큰 며느리가 어린이 집을 하면서부터
본인을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 누이는 그 일을 했고,
며느리가 어머님 건강을 생각해서 수영장 정기티켓을 끊어 수영을 했다.
갑작스런 누이의 죽음 소식을 들었는데
수영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거였다.
이제는 고생도 끝나고 즐기는 일만 남았는데…
이런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도 있듯이
오늘은 오늘 걱정만 하고 인생을 즐기면 될 것을..
우리는 내일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걱정하고 준비하느라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사는 것 같다.
결국 나중에 행복하기 위해 준비하다
그것을 즐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 인생 아닐까.
나도 남은 인생은 남을 의식할 필요없이,
또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지도 말고
주어진 선물인 현재(present)를 즐기며 살아야 겠다고 다짐해 본다.
5형제 중 3명의 누나는 돌아가시고 이제 남은
하나뿐인 형은 바로 위의 형 이지만 10살의 나이 차가 있어
서울로 이사 가기 전의 형의 기억은 거의 없다.
고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다녔는데 한양공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중퇴한 것으로 안다.
중퇴한 이유는 학비문제가 주된 원인였던 것 같다.
연예계에 관심이 많았고 극단에서 연극을 하기도 했다.
중학교에 입학한 후 멍덕골 무허가 집을 사서 이사했고
이 때부터 어머니, 형과 함께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당시엔 형이 학교를 그만두고 밤에 리어카상(사과 등 과일)을 하면서
연극계에 열심히 다닌 것 같다.
집에 오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듣고
종이를 수첩크기로 잘라 묶은 곳에 연필로 적었다.
수없이 많은 노래를 적고 계속 흥얼거렸다.
경제적 뒷바침이 어려워 둘째 매형과 기모공장을 운영,
연극을 계속 못한 것이 한이 되는지 자식들이라도
연예계에 나가면 밀어 주고 매니저를 하겠다고도 했다.
조카들이 딴 길로 가니까 우리 딸에게도 제안하곤 했다.
그리고 가요를 열심히 듣고 쓰고 부른 탓에
노래에 취미가 있고 또 잘 불러 모임에서 인기가 있다.
형의 인생을 보면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일 때문에
항상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인생인 것이다.
요즈음은 매일 카톡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묻고지내고
나이차는 있지만 형님말로는 친구처럼 대하신다고 한다.
어릴 때 그처럼 부러워했던 형제애를
인생황혼기에 이루어주신 주님께 감사드릴 뿐이다.
건강하게 오랫동안 형제며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
1950년 ~60년대 초반 시골 농부의 집에서 태어나
먹고살기도 힘든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그래도 끼니는 굶지않았다.
누이들이 시집가기 전에는 누나들의 보살핌 속에 사랑을 받고
또 50대에 접어든 부모밑에서 막내사랑을 받고 자라났기에
지금도 자존감이 강한 성격을 갖게 된 것 같다.
첫댓글 다복하신 가족소개~행복 가득하시길요~~
다복하신 가정
축하드립니다
정성이 가득하신 게시물이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