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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3) 장-조제프 벙쟈망-꽁스떵의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000년 비잔틴 제국의 몰락, 이슬람의 승리
- 장-조제프 벙쟈망-꽁스떵,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1876년, 오귀스탱 미술관, 프랑스 툴루즈.
오스만 제국의 성장과 비잔틴의 고립
동ㆍ서방 교회의 통합으로 비잔틴 제국을 구하고자 한 양측 교회의 대표자 베사리온과 쿠사노의 노력은 허망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긴장 상태에 있었고,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반세기 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1세(BayezidⅠ, 재위 1389~1402)는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 아시아 쪽에 거대한 요새를 세웠다. 마침 몽골 제국의 티무르가 사망(1405년)했고, 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 틈을 타서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힘을 그리스와 발칸반도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증손자 마호메트 2세(Mehmet II, 재위 1444~1446, 1451~1481)에 이르러 유럽 쪽에 두 번째 요새를 세워 콘스탄티노플을 압박했다.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모든 길이 끊어진 채 섬이 된 상태였다. 콘스탄티노플 성벽 밖에는 무슬림 군대가 차곡차곡 모여들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플만 남겨둔 채, 성벽 밖에서 최후의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콘스탄티노플을 과연 유럽은 도와줄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영국은 백년 전쟁의 후유증으로 자기네 상처를 치료하기도 바빴다. 두 나라의 군주는 술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그렇게 위협하면 안 된다는 외교 서한만 달랑 한 통씩 보냈다. 경제적인 교역로 확보만 걱정하던 베네치아는 제국의 원군 요청에 1452년 8월 크레타 섬에 주둔하던 소수의 함선을 보냈지만, 과거 제4차 십자군 당시 콘스탄티노플 약탈에 동원된 병력에 비하면 시늉에 불과했다.
강력한 포병 갖춘 오스만 군대의 공격
당사자인 콘스탄티노플의 상황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요안니스 8세(1448년 사망)의 뒤를 이어 동생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가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1437~1439년, 형 요안니스 8세가 피렌체 공의회 참석차 자리를 비운 사이 섭정한 적이 있었다. 다른 동생 데메트리오스와 재위를 놓고 분쟁이 벌어졌는데, 웃기게도 적(敵)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2세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미스트라에서 황제로 즉위했다.(1449년) 이런 상황이라, 양측 교회 인사들만 발을 동동 구른 셈이었다.
오스만 군대가 포위 공격을 시작한 것은 1453년 4월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인구는 약 5만 명이었고, 군인은 8000명이 채 안 되었다. 반면에 오스만 군대는 적게 잡아도 20만이 넘는 정예부대였다. 그들은 잘 훈련되고 조직된 군대였고, 무엇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을 뚫을 것 같은 강력한 포병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200척이 넘는 함대가 동행하고 있었다. 준비기간을 고려하더라도(처음 징후가 나타난 것이 1년 전) 병사의 숫자와 병기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상태에서 시작하는 전쟁이었다.
마호메트 2세는 이런 병력 차이를 인식하고,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항복하면 도시는 약탈하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마호메트 2세는 누구보다도 콘스탄티노플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탐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되도록 파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비잔틴 측의 오만과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집착으로 술탄의 제안을 거절했고, 비잔틴 장수들은 항복보다는 죽음을 선택하겠노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마지막 미사… 함락 후 학살과 약탈
1453년 5월 28일, 새벽부터 오스만 군대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불리던 콘스탄티노플의 삼중의 성벽, 난공불락의 성을 향해 무섭게 대포를 쏘아댔다. 성벽 근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시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그날 저녁, 콘스탄티누스 11세 황제는 이시도로 추기경에게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정교회 전례로 마지막 미사를 집전하도록 했다. 도시에 남아 있던 모든 신자는 미사에 참여했고, 황제도 마지막으로 성체를 모셨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성가 사이로 황제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고, 백성도 절규했다. 미사가 끝나고 황제는 모인 콘스탄티노플의 전 신자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제노바의 장수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Giovanni Giustiniani Longo, 1418~1453)와 그가 이끌던 400명(혹은 700명) 남짓의 라틴 군인들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1444년 바르나 전투 이후, 적은 숫자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구하겠다고 참가한 거의 유일한 서방측 군대였다.
5월 29일, 마호메트 2세가 직접 이끄는 최후의 공격에서 성벽을 방어하던 론고는 오스만군의 대포에 맞아 크게 다쳤다. 전투 초기, 론고의 카리스마 덕분에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군대는 잘 싸워 주었는데, 론고의 부상과 후퇴는 성벽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큰 손실이었다. 일부 사료에는 부상 이유를 다르게 말하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퇴각했고, 그리스의 제노바령 히오스 섬으로 가던 중 부상으로 사망했다.
그의 퇴각 소식은 비잔틴 군인들의 사기를 떨어트렸고, 마호메트 2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투르크 군에서 선발된 술탄의 호위병들과 소부대원들이 론고가 지키던 성벽을 무너트려 잠입에 성공했고, 오스만 군대는 도심으로 물밀 듯이 밀고 들어왔다. 대포를 성벽에 쏘면서부터 진입까지, 사망자는 수천 명에 달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도 성문 중 하나를 방어하다가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수천 구의 시신 더미에서 누군가 황제만 신는 적색 신발을 신은 사람을 찾기는 했으나 그것도 추정에 불과했다. 역사는 황제가 그냥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마호메트 2세는 도시로 들어가기에 앞서, 3일간 학살과 약탈을 허락했다. 도시는 오스만 군인들이 사냥감에 달려드는 사냥꾼처럼 약탈과 강간, 학살이 범람했다. 모든 것이 처참했다.
초상화와 프레스코화 많이 남겨
소개하는 그림은 프랑스인 장-조제프 벙쟈망-꽁스떵(Jean-Joseph Benjamin-Constant, 1845~1902)이 그린 ‘마호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 입성’(1876년)이다. 작가는 일찍 고아가 되어, 두 고모의 손에 자라며 툴루즈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21살에 파리로 옮겨 파리 미술학교에서 공부했고, 교사로 재직했다. 처음에는 외젠 들라크루아(Eugne Delacroix, 1798~1863)의 영향을 받았다. 1870년 스페인과 1872년 모로코 여행은 그의 작품 전반에 오리엔탈리즘을 가미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보는 그림도 작가가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동방의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듯 시공을 가득 채운 밝은 색상이 다소 어색하기까지 하다. 1876년 살롱에서 발표되자, 오귀스탱 미술관(Muse des Augustins)에서 샀다.
꽁스떵은 1800년대 말 영국 귀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초상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초상화와 프레스코화 작품을 남겼다. 초상화 중에는 레오 12세 교황과 영국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인 알렉산드라 애 단마르크가 있고, 프레스코화로는 파리의 드 빌 호텔(Htel de Ville)과 오페라 코미크 국립극장(Thtre national de l‘Opra-Comique)의 천장화, 소르본의 여러 벽화 작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벽에 ‘공의회를 주관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등이 있다. 오리엔탈리스트 시대를 제외하고는 낭만주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림 속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시신들을 밟고 콘스탄티노플 성문을 들어오는 21살의 승자,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 장식의 기(旗)를 손에 번쩍 들고 있다. 작가의 연극적인 배경 감각과 글로 기록된 역사적 사실보다 더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의 승리다. 부서진 성벽 안쪽에 ‘성모자’ 벽화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호메트 2세로서는 콘스탄티노플 정복이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확보한 것이고, 일생 최고의 업적이었으리라.
이후 술탄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있던 생존자들을 모두 추방하고, 성당들을 모스크로 바꾸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이 되었고, 점점 더 강력해지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훗날 비오 2세 교황으로 즉위하는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다음날 친구 벤볼리엔티에게 이렇게 썼다. “이탈리아인들이 지배하던 곳이, 이제 터키 제국이 시작되는구나!(Fuerunt Itali rerum domini, nunc Turchorum inchoatur imperium)”.
비잔틴 제국 1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역사는 이렇게 사라졌다. 중세기 동서양 교역의 중심지며 로마 제국 문화의 산실이었던 비잔틴 제국의 종말은 서방에 적잖은 충격이었다. 이후 서방은 동방에서 오던 교역 물품들을 얻기 위해 ‘인도’를 찾아 바다로 향했다. 대항해 시대는 이런 맥락에서 시작되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4) 핀투리키오의 ‘만토바 공의회를 소집하는 비오 2세’
비잔틴 회복 위해 소집됐으나 이름뿐인 공의회에 그쳐
- 핀투리키오, ‘만토바 공의회를 소집하는 비오 2세’(1502~1507), 피콜로미니 도서관, 시에나 대성당.
비잔틴 제국의 퇴장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호메트 2세에게 함락되고, 서방은 비잔틴 제국과 교회를 영원히 잃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재위 1447~1455)는 유럽의 그리스도교 제후 국가 간의 싸움을 멈출 것을 호소하는 한편, 공동의 적인 오스만 제국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큰 성과 없이 역사의 흐름은 비잔틴 제국의 퇴장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르네상스를 주도한 로렌조 마니피코 데 메디치의 그리스어 스승 아우리스파처럼, 이탈리아인 학자가 동방으로 유학 가서 공부할 필요는 이제 없어졌다. 동로마 제국의 붕괴로 서방으로 망명한 비잔틴 학자들로 인해 다양한 문화가 융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신학자, 과학자, 정치가, 문법가, 시인, 인쇄업자, 음악가, 건축가 등이 대거 망명해 대학과 개인에게 그리스어로 된 지식을 전수했고,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파도바, 밀라노 등 이탈리아 도시들은 그리스인 학자들로 넘쳐났다. 이 도시들을 교두보로 시칠리아의 메시나 대학과 파리 대학으로 진출하기도 했고, 스페인과 러시아로 르네상스를 퍼다 나르기도 했다.
망명한 학자들과 꽃피운 학문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전수된 그리스어 텍스트의 풍부한 지식은 인쇄술의 발명으로 유럽 전역에 퍼졌다. 1500년을 전후로 베네치아에는 약 5000명의 비잔틴 공동체가 있었는데, 이것은 유럽 대도시 중 피렌체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은 크레타와 달마티아를 지배하고 있었고, 비잔틴 제국이 붕괴하자 많은 학자가 그곳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크레타 섬을 비롯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식민지 영토들은 중요한 비잔틴 문화의 요람이 되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을 그리스도교 세계와 그리스 학문의 참사라고 했고, 훗날 비오 2세 교황이 되는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는 이 참사는 “호메로스와 플라톤을 두 번 죽인 일”이라고 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비잔틴 제국의 위험을 일찌감치 감지하고 있었고, 1450년 성년을 지내면서 교황청 재정이 나아지기가 무섭게 르네상스 정신을 불어넣는 일을 시작했다. 예컨대 그리스인 게오르그에게 명하여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1450년)를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아랍어 번역본을 거치지 않은 최초의 번역이었다. 이후 상당한 양의 코덱스(codex)를 수집하기도 했는데, 1455년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1200개가 넘는 고전 작가들의 코덱스를 수집할 정도였다. 이것은 미래 바티칸 도서관의 원천이 되었고, 교황청 상서국(尙書局, Cancellaria)을 설립하는 근거가 됐다. 상서국은 후에 인문주의 학자들에게 위탁해 교황을 도와 교회 행정 관련 칙령과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니콜라오 5세 교황은 인문주의자로 깊은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고, 학문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친구 피콜로미니 추기경은 그를 두고 “사람이 알아야 하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재임 기간 ‘니콜리노 계획’으로 로마 도시를 재편하기도 했다. 성벽을 강화하고, 로마 시대 상수도를 복원하며, 동네를 재배치하고, 로마 시내 40여 개 성당을 복원 또는 재건하며, 성 베드로 대성전을 확장했다. 바티칸 사도궁도 개축했다. 그때 베아토 안젤리코(1387~1455)를 불러 니콜리나 소성당을 장식하도록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비잔틴 제국 멸망의 아픔만 안고, 이후 수많은 서적을 갖고 이탈리아로 오기 시작한 그리스 학자들로 인한 결실은 보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2년 후에 숨을 거두었다.
비오 2세 교황, 마지막 노력
그의 인문학적 노선을 계승한 교황은 1458년에 비오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는 시에나 대교구장 에네아 피콜로미니 추기경이었다. 비오 2세 교황은 평신도로 있던 1442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3세 황제로부터 계관 시인의 관을 받을 정도로 문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가 쓴 「두 연인의 이야기(Historia de duobus amantibus)」는 사제 수품 이전에 쓴 것으로, 훗날의 교황이 쓴 유일한 ‘성인 소설’이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서양 문학에서 널리 읽히고 있다. 그가 평신도로 있을 때, 경험한 연애를 바탕으로 쓴 것이라고 한다. 비오 2세 교황은 유럽 최초로 근대적인 도시 계획을 수립해 고향 마을 코르시냐노를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개발했고, 도시의 미관을 달리해 자신의 이름을 따서 ‘피엔자(Pienza)’로 개명했다.
하지만 비오 2세 교황은 재임 초기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잃은 것을 가장 아까워했다. 그래서 원정대를 보내 오스만 제국에 맞서고자 했으나, 유럽의 상황이 그럴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이에 교황은 유럽의 제후들에게 제발 서로 싸우지 말 것을 호소하기 위해, 또 공동의 적에 맞서 연합을 촉구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했는데, 그것이 만토바 공의회(1459년)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은 로디 평화협정으로 종식되었지만(1454년), 영국은 장미 전쟁(1455~1485년)을 하고 있었고, 13년 전쟁(1454~1466년)으로 프로이센 도시와 지역의 귀족이 튜턴 기사단과 싸우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공의회에서 거둔 수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서방 교회가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기울인 마지막 노력이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레스코화 세밀화에 탁월한 재능
소개하는 그림은 핀투리키오(Pinturicchio)로 알려진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di Betto Betti, 1452~1513)의 ‘만토바 공의회를 소집하는 비오 2세’(재위 1502~1507)다. 시에나 대성당 내 피콜로미니 도서관에 그려진 프레스코 작품 중 하나다. 시에나 출신의 피콜로미니 추기경이 비오 2세 교황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이 도서관의 벽에 그의 업적과 생애를 그렸다. 모두 핀투리키오의 작품이다.
핀투리키오는 템페라 프레스코화 세밀화 등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페루지노, 젊은 라파엘로와 함께 움브리아 학파 최고 마에스트로 중 한 사람이었다. 장식적인 프레스코 작품을 남긴 대표적인 화가로, 1492~1494년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을 위해 바티칸 궁전의 ‘보르자 아파트(교황의 사저)’에 그린 6개의 방 벽화가 있고, 시에나 대성당의 피콜로미니 도서관에 그린 비오 2세 교황의 생애 10개의 장면(1503~1508년)이 있다. 이 그림들에서 드러나는 뛰어난 공간성과 색채에 대한 세부 묘사는 후에 라파엘로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 속으로
작품으로 들어가 보면, 비오 2세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한 동기가 원래 오스만 제국의 서방 진출을 막고, 1453년에 잃은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자는 것인데, 그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비오 2세 교황의 이런 논리에 만토바 공국의 루도비코 곤자가(1412~1478)가 동조했고, 1459년 그의 궁정에서 공의회가 소집됐다.
오른쪽에 삼중관(티아라)을 쓰고 회의를 주재하는 비오 2세 교황은 창문이 큰 회랑 같은 공간에 있다. 건물의 현관 같기도 한 장소에서, 교황은 계단 위에 앉아 있고, 가운데 보이는 창문 너머로 멀리 움브리아의 풍경이 펼쳐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비오 2세 교황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검은색 계단 난간 혹은 커튼 너머로 구경꾼들로 보이는 그룹의 사람들과 교황 앞 계단 아래서 카펫이 덮인 책상에 어지럽게 펼쳐진 책과 코덱스 자료들을 둘러싸고 동ㆍ서방 교회의 고위 인사들과 학자들이 진지하게 회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의 사람과 현재의 사람으로 구분된다.
6개월 남짓 이어진 공의회에서 얻은 소득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만토바 공의회가 역사에서 주목받지 않은 이유다. 그런데도 그림을 통해 비오 2세 교황의 10가지 중요한 업적 중 하나로 소개하는 것은 그림이 담고 있는 원근법, 명암법, 장식 등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이 당시에는 시대 정신이었고, 그것은 ‘집단’으로 묘사되는 구경꾼이 아니라, ‘원자적 개인’으로 묘사되는 능동적인 주체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교황이 그것을 주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공의회는 최초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공의회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르네상스는 잃어버린 콘스탄티노플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5) 멜로초 다 포를리의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교황’
르네상스 문화 융성의 불씨를 지피다
- 멜로초 다 포를리, ‘바르톨로메오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에 임명하는 식스토 4세 교황’, 1477년, 피나코테크, 바티칸 박물관.
역사는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중세 역사와 최종 단절하는 것으로 보고 1453년을 중세의 끝이라고 하고, 근대의 시작을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1492년으로 보기도 한다. 서방 세계에서 비잔틴 제국의 몰락은 그만큼 큰 충격이었다. 동시에 그로 인해 서방은 르네상스가 한층 풍성해졌고, 그 영향은 교회 안팎에도 미쳤다.
르네상스 정신 불어넣은 교황
비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또 다른 인문주의 교황으로 등장한 사람은 델라 로베레 가문 출신의 식스토 4세(재위 1471∼1484)였다. 학문과 예술, 도시 재정비사업 등 인문주의의 확장과 공공사업 지원 정책으로 로마에 르네상스 정신을 불어넣은 교황이었다.
그는 형제들이 많았다. 4명의 누이와 2명의 형제, 15명의 조카가 있었다. 재위 중 34명을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6명이 그의 조카들이었다. 친조카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훗날 율리오 2세 교황), 외조카 피에트로(28살에 사망)와 라파엘레 리아리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는 것을 시작으로, 포목상 출신의 지롤라모 리아리오에게 이몰라(Imola)와 포를리(Forl)를 지배하도록 했고, 조반니 리아리오를 로마시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으로는 족벌 정책을 쓰고, 밖으로는 명분도 성과도 없는 전쟁을 부추겨 장화 반도의 여러 공국끼리 싸우게 해 반(反) 교황주의를 낳게 했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업적으로 보는 것은 그의 인문학적 유산들이다.
1471년 교황으로 선출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로마 시대 예술 작품들을 기부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이후 교황들이 예술품을 후원, 수집, 기부하는 선례가 됐다. 식스토 4세가 기부한 예술품들은 현재 카피톨리니 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그는 바티칸 도서관의 규모를 확충하고 도서 목록을 풍성하게 했다. 독일의 수학자며 천문학자인 레기오몬타누스(Regiomontanus, 원래 이름은 Johannes Mller von Knigsberg) 주교를 로마로 불러 율리우스 달력의 수정을 자문했고, 플랑드르에서 활동하던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 1440~1521)를 로마로 초대해 시스티나 소성당 합창단을 창설했다.
그는 당시 교회로부터 상당한 독립을 보장받고,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고 특히 인문과학 분야에서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파도바대학교 출신이다. 그 역시 과학에도 조예가 깊어 예술은 물론 과학 후원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교황이 된 후, 칙서를 통해 지역 주교들에게 범죄자 및 신원 미상의 시신들을 의사와 예술가들에게 연구용으로 제공할 것을 지시했다. 식스토 4세 덕분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티치아노의 제자인 얀 스테판 반 칼카르는 획기적인 해부학 교재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발간해 의학 발전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교회적으로는 1439년 바젤-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확인한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에 대한 신심을 장려해 12월 8일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 축일로 선포했고, 묵주기도를 장려함으로써 한 세기 후 성 비오 5세 교황에 의해 최고의 마리아 기도로 승격되는 데 초석을 놓았다. 그의 이름으로 지은 시스티나 소성당도 원래 ‘성모 승천 소성당’으로, 그의 마리아 신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도시 재건 사업과 인문주의 부활
식스토 4세가 시작한 토목 공사는 바티칸에서 가까운 산토 스피리토 병원 복합 건물을 새로 짓는 일이었다. 1471년 화재로 전소하자 즉시 재건했다. 또 로마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테베레 강의 수질을 정화하기 위해 수로를 복구하고, 로마 시대 이후 아무도 세우지 않았던 다리를 새로 건설해 ‘시스토 다리(Ponte Sisto)’라고 했다. 바티칸 사도궁에서 천사의 성까지 ‘시스티나 가(街)’를 만들고, 바티칸 박물관 내 ‘시스티나 소성당’을 지어 피렌체 거장들을 불러 양쪽 벽에 ‘그리스도의 생애’와 ‘모세의 생애’를 그리도록 했다. 당시 피렌체를 이끌던 로렌조 마니피코는 기를란다이오, 페루지노, 보티첼리, 시뇨렐리, 로셀리 등 문화사절단을 보내 식스토 4세의 요구를 들어줌으로써, 1478년 ‘파치가의 음모 사건’ 이후 불편했던 관계를 회복하고, 이후 마니피코의 두 아들(삼남과 양자)을 성직에 입문하는 계기로 삼았다. 이 두 아들이 훗날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 교황이 된다.
식스토 4세는 로마 교구의 서른 개가 넘는 성당을 재건하기도 했다. 성 비탈레 성당과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도 이때 복구됐다. 식스토 4세 덕분에 변두리에 불과했던 바티칸 언덕이 보르고 거리를 통해 로마의 중심지가 됐다. 1477년,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던 캄피돌리오 시장을 정리하고, 주랑 현관을 해체했으며, 1480년에는 고대 로마 이후 처음으로 도로를 확장하고 대대적인 포장 공사를 했다.
식스토 4세의 이런 ‘도시 재건’ 사업에는 니콜라오 5세 교황에게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있었던 것처럼, 인문주의 지식인이 필요했다. 1479년 교황청 상서원의 ‘서기관 회의’와 ‘로마 학술원’은 이런 취지에서 부활시켰다.
전임 바오로 2세 교황(재위 1464~1471)은 인문주의 사고(思考)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인문주의자들로 구성된 서기관들을 모두 파직하고, 예술가와 문인들의 활동을 막았다. 당시 문인들은 대부분 로마 학술원 소속의 인문주의자들이었고, 교황의 이런 처사에 분노했다. 바르톨로메오 사키(Bartolomeo Sacchi, 흔히 플라티나 Platina로 알려짐)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교황에게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편지를 써서 수감됐다가 4개월 뒤 무죄로 풀려났지만, 교황에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재수감됐다. 교황은 로마 학술원 회원들이 이교도적인 이상을 가졌다고 해 모두 체포, 투옥, 고문했다. 플라티나는 저서 「교황들의 생애(Vitae pontificum)」에서 바오로 2세의 인품을 형편없는 것으로 묘사해 로마 지성계의 큰 공감을 얻었다. 바오로 2세는 결국 로마 학술원을 해체했다. 그것을 식스토 4세가 부활시켜 인문주의자 폼포니오 레토(Giulio Pomponio Leto, 1428~1498)에게 책임을 맡기고, 니콜라오 5세, 비오 2세 교황들로부터 내려오던 바티칸 도서관의 체계를 확고히 해 초대 관장으로 플라티나를 임명했다.
교황청 전담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바로 그 순간, 식스토 4세 교황이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으로 임명하는 순간을 그린 것이다. 멜로초 다 포를리(Melozzo di Giuliano degli Ambrosi, 1438~1494)가 그린 프레스코화다. 포를리(Forl)라는 지방 출신이라, 흔히 ‘다 포를리’라고 부른다. 바티칸 도서관 벽에 있던 것을 벽체 오려서 현재 바티칸 박물관 피나코테크에 있다.
멜로초는 어린 시절 포를리에서 조토학파 사람들과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티의 영향을 받으며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로마와 우르비노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다가, 식스토 4세의 교황청 전담 화가(Pictor papalis)가 됐다. 1478년 12월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거장들과 함께 예술인학교를 설립했고, 그것은 후에 ‘성 루카 아카데미아’로 발전했다.
그 시기, 지롤라모 리아리오의 요청으로, 로마에 알템프 궁을, 이몰라에 여러 건물과 포를리에 리아리오 궁을 설계했다. 로레토의 거룩한 집 성지 내 ‘성 마르코 제의실 돔 내부 천장화’와 로마의 성녀 프란체스카 로마나 대성당에 ‘교부들’을 그렸다. 1494년 고향 포를리에서 숨을 거두고, 그 지역 ‘삼위일체 성당’에 잠들어 있다.
그림 속으로
바티칸 도서관은 1475년 로마에 세운 최초의 공공도서관이다. 플라티나는 무릎을 꿇고 식스토 4세 교황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장엄한 순간이라는 것은 배경이 말해준다. 식스토 4세는 우측에 앉아 있고, 주변에는 모두 그의 조카들이 있다. 우측에는 교황청 서기관 라파엘로 리아리오가 있고, 앞에는 훗날 율리오 2세 교황이 되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서 있다. 플라티나 뒤에는 지롤라모 리아리오와 조반니 델라 로베레가 있다.
가운데 무릎을 꿇고 임명장을 받는 플라티나는 오른손 검지로 아래에 펼쳐진 식스토 4세에게 헌정한 문장을 가리키고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신전, 도로, 시장, 성벽, 다리를 배치하고/ 트레비의 ‘처녀의 샘’을 복원하며/ 고대의 뱃사람 조각상들로 항구였음을 드러냈어라/ 식스토와 바티칸은 자신을 둘러싼 도시를 발전시켰노라/ 세속에 숨어 애도하던 내게, 저 유명한 도서관의 한자리를 수여하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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