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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6) 고독
인간은 짝을 찾아나서는 ‘관계 속의 고독한 존재’
구약 성경의 창조 설화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독한 존재임을 암시하는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라고 하시면서 사람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빼내어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다. 그러자 사람은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라고 기쁨에 넘쳐 외친다.
이 이야기에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관련해 실존론적으로 매우 깊은 철학적 통찰이 담겨 있다. 처음에는 하나였지만 나중에 둘로 갈라졌다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은 필연적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짝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관계 속의 고독한 존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근원에 있어 자기 일부가 떨어져 나간 불완전한 존재로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자 자기 밖에서 자기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존재다. 인간의 고독은 사회관계망 혹은 인격적 관계의 단절을 의미하는 고립이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처해 있는 근원적인 실존적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이 고독하여 찾아 나서는 타자는 근원적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존재이기에 분명 ‘자기’여야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더는 자기로 있을 수 없는 존재, 즉 나와 대립하는 낯선 자기 소외(疏外)의 존재다. 품 안의 자식이라는 말처럼 자기로부터 소외된 그 타자는 더는 자기로 있을 수 없다. 나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고독의 대상으로서의 타자는 바로 ‘자기인 타자’가 분명하지만, 그러나 그 타자는 결코 나와 하나가 될 수 없는 ‘타자인 자기’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는 인간 안에 본질적으로 놓여있는 이런 관계적 타자성을 근원어로서의 짝말(Wortpaare) ‘나-너’(Ich-Du)로 표현한다. 부버에 따르면 인간은 나와 너의 관계 없이는 결코 자기를 이해할 수도, 본래의 자기가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본성적으로 타자에게로 기울어져 있음은 자기 소외로서의 고독에 근거하며, 이 근원적 소외로서의 실존적 고독은 인간이 본래 고립되고 외로운 ‘나 홀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관계 속에 있는 ‘공존재’(Mitsein)임을 의미한다. 야스퍼스(Karl Jaspers) 또한 고독은 타자와의 소통 속에서만 실현되는 나의 ‘가능 실존’을 준비하는 ‘의식’이라고 했다. 고독은 소통 안에 존재하기에 소통 없이, 그리고 고독하지 않고서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나의 고유한 근원으로부터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면 결코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타자와 하나가 될 수 없음에도 자기 밖의 타자로부터 동일한 자기를 발견하고, 그와 일치하고자 하는 실존적 고독에 처해 있다. 타자는 나에게 고독과 그리움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소외되고 낯선 대상이다. 우리는 이 간격을 메꾸고자 부단히 노력하며, 이 과정에서 상처받곤 하다.
실존적 고독은 타자와 일치하려는 열망을 낳지만, 그 일치하려는 행위가 자기중심적일 때 부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타자를 강제로 자기와 일치시키려는 행위는 소유·집착·가스라이팅·증오·폭력 등으로 나타나곤 하기 때문이다. 반면 실존적 고독이 타자 중심적인 헌신·희생·봉헌의 열망으로 승화될 때 바로 사랑의 계기가 된다.
[과학과 신앙] (25) 새벽 닭이 울기 전에
‘은하 밝은 고요한 밤에는 새벽을 알기 어렵고(星河夜靜難知曉), 바람은 약해 종소리가 밤을 알리지 못하는데(鐘漏風微未報更)⋯ 첫 닭의 꼬끼오 소리 무척이나 듣기 좋구나(喜聽嘐嘐第一聲).’
이 글은 조선 전기 대학자이며 문인인 용재 성현 선생의 시 일부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성종의 명을 받아 1493년에 유자광·신말평과 함께 조선 음악의 교과서라 불리는 「악학궤범」을 편찬했다. 문학과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던 그는 새벽의 고요함을 깨우는 닭의 울음소리를 시를 통해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그렇다면 왜 닭은 동틀 무렵인 새벽에 우는 걸까?
척추 동물의 경우 뇌 중심부에 솔방울을 닮은 호르몬 분비 조직인 송과선(松果腺)이 있다. 여기에서는 멜라토닌 호르몬이 합성·분비되는데 멜라토닌은 낮과 밤의 일주기(日週期)에 따른 생리적·행동적 활동의 일상 리듬을 만드는 생체시계 역할을 한다. 멜라토닌은 빛이 약한 밤에는 분비가 촉진되어 수면을 유도하고, 빛이 강한 낮에는 분비가 억제되어 수면에서 깬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밤에 방의 전등을 끄지 않으면 잠을 자기 힘든 건 이 때문이다.
포유류는 눈을 통해 빛을 받아들이지만, 조류는 머리의 피부를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빛을 받아들여 송과선을 자극하기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훨씬 빛에 민감한 생활 주기를 갖는다. 이 때문에 새벽 동틀 무렵 희미한 빛에도 조류는 멜라토닌 분비 감소로 잠에서 일찍 깨어나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지저귄다. 닭 또한 이런 이유로 사람들에게 아침을 알리는 알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현 선생의 귀에는 새벽 첫 닭의 울음소리가 듣기 좋았겠지만, 베드로 성인에게는 그 소리가 가슴 철렁한 천둥소리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번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복음에는 베드로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22,34)라고 하시는 장면이 있다. 실제 베드로는 새벽 첫 닭이 울기 전 예수님께서 끌려가실 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정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22,62)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권력에 대한 두려움과 굴종, 자신에 대한 비굴함에 괴로워하던 베드로 성인의 인간적인 나약함은 첫 닭의 울음소리와 함께 변모되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을 때까지 교회의 반석으로서 역할을 다한다. 생명파 시인 청마 유치환은 1953년 그의 수상록 「예루살렘의 닭」에서 ‘위선이 선(善)을 능욕하는 그 부정 앞에 오히려 외면하며 회피하므로서 악에 가담하지 않았는가. 새벽이면 새벽마다 먼 예루살렘 성에 닭은 제 울음을 기일게 홰쳐 울고 (⋯) 사모치는 분함과 죄스럼과 그 자책에 눈물로서 베개 적시우노니’라며 스스로를 반성했다.
사순 시기는 깊은 성찰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한 행동의 변모를 실천해야 할 회심(回心)의 시간이다.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에 세상의 부정과 위선 그리고 자신에 비굴함에 대해서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살펴야겠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5) 한계상황
한계상황 회피·체념 말고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우리는 항상 우연적이고 변화 가능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이는 외적인 조건에 의해 혹은 개인의 행위나 이해·체험에 따라 달라지는 우연적인 상황으로서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궁극적인 상황과는 구분된다.
궁극적인 상황은 인간존재 자체와 결부되어 유한한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상황으로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변화시킬 수도, 그렇다고 극복될 수도 없다. 궁극적인 상황은 인간존재의 보편적인 상황을 말하며, 그 상황 안에 인간의 개별적인 상황이 놓여있다.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이러한 인간존재의 상황을 ‘근본상황(Grundsituation)’이라 불렀고, 그 상황 안에 개개인이 처해있는 상황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 칭했다.
근본상황은 숙명적으로 놓여있는 보편적인 상황 그 자체로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고통·투쟁·죄책·우연 등이 속하며, 이는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다. 근본상황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예외없는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한계상황은 이러한 근본상황을 주체적·실존적으로 홀로 겪는다는 점에서 개별적인 나의 고유한 ‘실존적 체험’이다. 한계상황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부정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부딪쳐 ‘난파(Scheitern)’하는 거대한 ‘벽’이다.
그렇다면 절망적으로 다가오는 한계상황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일반적으로 한계상황을 부인하거나 합리화하면서 은폐한다. 그러나 야스퍼스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수용하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태도다. 인간의 깊은 절망을 통해 한계상황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절망의 체험은 실존으로 도약하는 장소인 동시에 삶의 발판을 다시 얻게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위기가 곧 기회’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한계상황의 체험을 통해 우리가 견고하게 짜인 ‘사고의 틀’로부터 벗어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자유 안에서 무한한 자기 가능성을 향해 결단해 가는 ‘실존조명(Existenzerhellung)’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계상황으로부터 새로운 경험을 이끄는 자기의식은 주체적이며 고유한 체험에 기반한 것으로서 개념이나 사회적 규범이 아닌, 자유로운 실존적 결단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므로 한계상황은 회피하거나 성급히 체념하기보다는 직면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를 자각하는 것은 ‘철학적 자기 계몽’에 비유될 수 있다. 어두운 심연 같은 실존을 이해하고 견지하는 일은 사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개인의 고유한 실존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한계상황 앞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누구인지를 성찰하고, 불가능한 일에 힘을 쓰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한계상황 자체를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자기 계몽의 철학적 통찰을 통해 그런 한계상황 속에서도 삶을 유지하고 견딜 수 있는 유용한 덕, 즉 침착(沈着)·용기·인내 그리고 사랑을 키워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소중한 것을 한계상황에 직면하지 않고는 결코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한계상황은 비본래적 삶의 나를 본래적 삶의 참된 실존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삶의 열쇠다.
[과학과 신앙] (24) 사람 눈이 두 개인 이유
사람의 눈은 왜 두 개일까? 과학책에서는 이 질문에 원근감과 입체감을 더 잘 느끼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하지만 이것은 눈이 두 개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누가 또는 무엇이 사람의 눈을 두 개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에 과학은 아직 답하지 못한다. 눈이 두 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장점은 명확하다. 두 눈과 물체 사이에서 형성되는 각도를 광각(光角)이라 하는데 광각의 크기에 따라 뇌에서는 물체가 멀리 있는지 가까이 있는지를 인지한다. 눈과 물체의 양 끝에서 형성되는 각도는 시각(視角)이라 하는데 물체의 크기를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눈은 빛 자극을 받아들이는 감각기로서 사물의 형태나 색을 감지하고 사물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지만, 모든 동물의 눈이 사람 눈처럼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한다.
예를 들어 물속에서는 멀리 있는 물체가 잘 안 보여 대부분 어류는 가까운 물체만 식별할 수 있는 근시(近視)이며 눈에 색을 감지하는 세포가 없다. 양서류인 개구리나 파충류인 뱀의 경우도 불완전한 눈의 기능으로 인해 다른 감각기의 도움을 받아야 먹이를 식별하며 색 구별을 못 한다. 조류의 경우는 사람보다 5∼10배 정도 멀리 볼 수 있는데 하늘을 날며 높은 곳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 생존 조건과 관련 있다.
포유류인 개의 경우는 빨간색을 구별하지 못해 사람의 적록색맹과 유사한 시각을 갖고 있으나 뛰어난 코의 후각과 귀의 청각이 눈의 불완전함을 보완한다. 오직 인간과 침팬지 같은 일부 영장류만이 자연에 존재하는 많은 색을 볼 수 있으며 앞을 향한 두 눈으로 원근(遠近)감을 인지하고 사물의 크기를 파악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발달한 눈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과 타인에 대한 본질적인 원근 조절에 종종 실패한다. 세상에는 멀리서 봐야 제대로 보이는 것이 있으며 반대로 가까이 클로즈업해야지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는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 구석구석 성찰하고, 타인의 잘못이나 세상 일들에 대해서는 조금 떨어져서 전체적인 윤곽을 봐야 한다.
인터넷에 악플을 올리는 사람들, 남의 잘못에 쉽게 분노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내면에 대해서는 가까이 다가간 적 있을까? 매주 한 번 수채화 수업에 간다. 스케치북에 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제대로 채색되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때 미술 선생님께서는 자주 “가까이서만 보면 안 보여요. 조금 멀리 두고서 보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요즘 이 말의 의미를 자주 되새김한다. 세상일과 타인에 대한 원근 조절이, 정신의 시력이 필요하다.
이번 주 사순 제5주일 복음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죄지은 여자를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라고 하시자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 타인의 잘못을 가까이 들여다보고 비난하기 전에 자신에 대해 가까이 보는 내면의 원근 조절이 필요하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마음의 시력을 잃고 멀리서 봐야 할 것은 너무 가까이서 크게 보고, 가까이서 봐야 할 것은 너무 멀리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과 신앙] (23) 사순절, 보라색에 대한 단상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데카르트는 유리 프리즘을 이용해 최초로 빛이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태양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색이 나오는데, 데카르트는 빛은 원래 색이 없으나 프리즘의 재질 때문에 여러 색을 나타낸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영국의 뉴턴은 1666년 두 개의 프리즘을 이용한 보다 정교한 실험을 통해 빛이란 여러 가지 색이 혼합되어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며, 빛이 유리 프리즘을 통과할 때 각각의 굴절률 차이로 혼합된 빛이 나누어져 여러 가지 색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했다. 뉴턴은 1704년 그의 저서 「광학(Opticks)」에서 기존 통념을 깨고 색(color)이란 물체가 가진 성질이 아니라 물체에서 반사되는 빛의 성질이라고 결론지었으며, 프리즘을 통해 분리된 빛의 여러 색을 빨강·주황·노랑·초록·파랑·남색·보라색으로 구분했다. 이러한 일곱 가지 색은 무지개에서 볼 수 있으며 빨강·노랑·파랑은 색의 3원색이라 부른다.
원색(primary color)이란 사전적 의미로 다른 색으로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모든 색의 바탕이 되는 기본 빛깔을 의미한다. 그래서 빨강·노랑·파랑은 1차색이라고도 하며 1차색끼리 혼합해 만든 색은 2차색, 다시 1·2차색을 혼합해 만든 색은 3차색이 된다. 예를 들어 보라색(violet)은 1차색인 빨강과 파랑으로 만들어진 2차색이며, 자주색(purple)은 1차색 빨강과 2차색 보라로 만들어진 3차색이다. 인위적으로 합성된 첫 번째 색인 보라는 자연에서 가장 드물게 발견되는 색이다. 허브 식물의 대표인 라벤더나 붓꽃에서 보라색을 볼 수 있는데 염료를 자연물에서 얻었던 과거에 보라색은 귀한 재료여서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황제의 의복에만 보라색이 사용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보라색의 붓꽃 그림을 여러 점 남겼는데 보라색 자체가 주는 색의 매력에 이끌렸을 뿐 아니라 보라색 붓꽃의 꽃말이 ‘기쁜 소식과 행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 「메르헨」에 아이리스(iris : 붓꽃)에 대한 글을 쓸 정도로 보라색의 붓꽃을 좋아했는데 그는 붓꽃이 피는 시기가 한 해의 가장 은총의 순간이라고 했다.
보라색은 가톨릭의 전례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연중 시기 사제의 제의 색깔은 녹색이지만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사순 시기 제의 색깔은 보라색으로, 이는 통회·속죄·보속의 의미를 지닌다. 또 사제가 고해성사를 주관할 때 착용하는 영대 색깔도 보라색으로, 통회와 보속을 의미한다.
미국의 색채연구소 팬톤(PANTONE)사는 ‘2022년 올해의 색’으로 보라색을 선정했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의 혼합이라는 의미에서 ‘서로 다른 가치의 화합, 커다란 대립의 통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사순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분열과 반목을 보이는 빨강과 파랑의 극단적 대립도 사순 시기를 보내며 보라색이 지닌 의미처럼 통회와 속죄의 시간을 거쳐 화합과 통합으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 보라색 붓꽃이 피는 은총의 시기가 우리에게도 반드시 찾아오리라.
[과학과 신앙] (22) 정의의 저울
물리학과 화학에서 무게(weight)는 중력에 의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며, 질량(mass)은 물질이 갖는 고유의 양으로 정의한다. 무게의 단위는 N(뉴턴), 질량의 단위는 g(그램)이나 ㎏(킬로그램)을 사용한다. 무게는 장소에 따라 변하는 상대적인 값이라 달에서 몸무게를 측정하면 지구에서보다 1/6 작게 나오지만 질량은 우주 어디에서나 변하지 않는 불변의 값이다.
일상생활에서 이 두 용어는 구분 없이 사용되어 흔히 ‘내 몸무게가 70kg이다’와 같이 표현하는데, 과학적으로 이 표현은 오류이며 ‘내 몸의 질량이 70kg이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또는 ‘무게=질량×중력가속도 상숫값(지구의 경우 약 9.8)’이므로 ‘내 몸무게가 686N(뉴턴)이다’라고 해야 한다.
고대부터 현재까지 상업과 교역에서는 거래 대상이 되는 물질의 실질적 양이 중시되어 무게가 아니라 불변의 값인 질량을 표준으로 사용한다. 고기 600g(한 근), 금 3.75g(한 돈)으로 사용하는 것이 그 예다. 질량은 저울로 측정하는데 성경에 “아브라함은 (⋯) 은 사백 세켈을 상인들 사이에 통용되는 무게로 달아내어 주었다”(창세 23,16)고 쓰여있듯 인류는 예부터 저울을 사용했다.
기원전 수천 년 전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저울 사용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매장한 사후 세계의 안내서인 ‘사자의 서(死者의 書)’에는 죽은 자를 인도하는 신 아누비스가 양팔저울을 이용해 한쪽에는 죽은 자의 심장을, 다른 쪽에는 정의의 여신 마아트의 깃털을 올려놓고 무게를 재는 그림이 있다. 죄가 많은 자의 심장은 무거워 저울이 심장 쪽으로 기울어져 지옥으로 쫓겨나고 반대로 저울이 깃털 쪽으로 기울면 영생의 세계로 간다고 한다.
대한민국 법원은 저울을 들고 있는 정의의 여신을 현대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을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대법원 앞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저울과 법전을 들고 있는데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는 왼손에 저울을, 오른손에 칼을 들고 있다. 저울은 공평하고 엄정한 법의 기준, 칼은 법 집행의 엄격함과 강력한 권위를 상징한다.
요즘 뉴스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유명 인사들에 대한 법원의 판단과 거기에 따른 여론 반응이 보도되고 있다.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는 성경 말씀처럼 절차적 공정성과 정의로운 판결이 나오기를 바란다.
인간이라면 삶이 다하는 날 누구나 한번은 서야 할 법정이 있다. 그 어떤 법정보다도 상위에 있는 그곳의 재판관은 하느님이다. 우리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삶 동안 제대로 살아왔는지, 자신의 의무를 다했는지 그곳에서 간단한 셈법으로 정의의 저울을 마주할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서시’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고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생각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큰 경외감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과 칸트가 숭고한 가치로 여긴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이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덕목이 아닐까 싶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12) 공감적 대화
타인 공감하려면 정확한 상황 인식이 우선
철학상담의 기술적 방법으로 공감적 대화가 있다. 이는 상담자를 찾아온 내담자의 고유한 체험을 가능한 한 객관화시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느낌으로써 문제 해결에 이르는 철학상담의 고유한 방법을 일컫는다. 공감적 대화의 중요성은 철학상담의 기본이 공감적 태도를 지향하는 ‘열린 경청’의 소크라테스적 대화에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공감적 태도란 어떤 것인가?
사실 타인을 공감하는 일은 쉽지 않다. 우선 오늘날 공감(共感)의 개념은 그 어원과 관련해 중의적 의미로 쓰이고 있다. 윤리적 행위로서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한 독일 철학자 셸러(Max Scheler, 1874~1928)는 공감 개념으로 독일어 ‘아인필룽’(Einfühlung) 대신 ‘미트게필’(Mitgefühl)을 강조한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심파테이아’(συμπάθεια)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어떤 감정을 누군가와 함께 느낀다’란 의미다.
중요한 점은 ‘함께’(συν/Mit)라는 접두사의 사용이다. 반면 ‘아인필룽’의 어원인 그리스어 ‘엠파테이아’(ἐμπάθεια)는 ‘안에’ 혹은 ‘안으로’(ἐν/Ein)의 뜻을 지닌 접두사가 사용된다. 즉 공감은 어떤 감정(πάθος/파토스) ‘안으로’ 몰입해 들어가는 행위가 아니라 감정을 ‘함께’ 나누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엠파테이아’에 어원을 둔 ‘아인필룽’에서 번역된 영어 ‘엠파티’(empathy)가 심리학 용어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셸러는 어원에 근거해 공감의 기본 요소를 ‘이해·뒤따라 느낌·뒤따라 삶’이라 하고, 공감의 본질이 타인의 체험과 느낌의 객관적 이해와 이를 따라 느끼고 겪는 데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공감은 철학적으로 단순한 느낌 차원의 정서적 반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심리주의에서 말하는 주관적이고 투사적인 감정이입이나 모방충동 혹은 감정 전염이나 감정합일과 같은 것이 아니다. 철학상담에서 말하는 진정한 공감은 타인의 내적 체험에 대한 객관화와 그에 상응한 정서적 반응을 통해 타인의 고유한 자아를 체험하는 매우 깊은 정서적 교감 행위를 의미한다.
우리가 서로 진정으로 공감하는 데 필요한 것은 사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도, 동질의 경험과 느낌도, 감정이입이나 감정합일도 아니다. 타인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인식을 위해 외적으로 표현되는 타인의 말과 행동을 편견없이 주의 깊게 경청하고 바라보는 판단 중지의 현상학적 태도가 요구된다. 타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라 하겠다. 또 공감과 유사한 감정에 빠져 타인을 잘못 이해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가 범하는 실수 가운데 흔한 것은 자기 경험에 근거해 타인을 판단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행위를 공감으로 잘못 이해할 때가 많다. 감정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만큼 정서적 반응인 공감 역시 다양한 외부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며, 그렇기에 타인을 향한 우리의 감정이 어디에 토대를 두고 있는지 항상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사 우리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과 고통을 공유한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아픔과 고통이 객관화되어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타인을 공감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자기 연민에 불과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