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부산수필문학상 심사평
박기용론
긍정 지향성과 견고한 자화상
심사위원장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누구에게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은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박기용의 수필 <백구두와 오디션>을 통해 알 수 있는 박기용 수필가의 특성은 욕망하는 주체와 견고한 자화상에 비쳐진 그의 젊은 날의 열정에 쌓인 모습이다. 추억의 시간들에 담긴 사연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수필은 응축된 정서와 사상의 지도다. 인간은 자연과 사회 환경 그리고 정신이라는 삼각의 동그란 지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작성되는 그 지도에는 작가가 거처하고 있는 위치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바로 견고한 주체의 자화상이다.
박기용의 자화상은 많은 수필에 등장하는 사연들에 빛나고, 날카로운 작가의 인식이 돋보이는, 수필에서 작가는 욕망의 근원에서부터 사건의 중심으로 달려간다. 그 접근 과정에서 인용하고 있는 예화들, 삽화들 그리고 다양한 근거와 전략장치들은 공감을 자아내게 한다. 인간미가 특출한 주변 인물이나 작중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백구두를 사서 신고 오디션을 보러 다니며 그 속에서 맺은 인연들의 서사가 재미를 준다. 가장 아름다웠던 날들을 소환해서 열정의 삶을 회고하는 것은 인생을 이해시키는 데 안성맞춤인 화소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2017년 밀양에서 개최된 전국노래자랑이다. 부산 대표로 출전하여 예심에서 「향기 품은 군사우편」 본선에서 「추억의 소야곡」을 불러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그가 음악사에 조예가 깊은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까지 받았다니, 놀랍기만 하다. 노래도 잘하고 글도 잘 쓴다면 노후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박기용 수필의 또 다른 한 축은 열정으로 일궈온 삶 속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철학을 바로 세우고 자신의 삶을 자기식으로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주체적 인식이 차지하고 있다.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굴곡진 내 영혼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앞으로도 글과 음악이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하는 다짐이 중요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지식이 많고 능력이 불어나면 욕심이 불어나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다는 욕망이 확대된다. 이러한 욕망의 확대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킴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어두움의 그림자다. 그러나 그는 오직 노래와 수필 두 분야에 대한 천착을 통해 행복을 획득해 나가고자 한다. 공교롭게도 박기용 수필은 이런 갈등의 그림자를 물리치려는 수필적 일상을 그리고 있어서 주목된다.
크게 보면, 박기용 수필은 인연화합의 본질이나 특성을 그리는 글이다. 수필의 존재 가치는 인간의 삶과 함께 빛을 발한다. 문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은 사회 현실 속 생활인들의 공유체험을 형상화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인간구원'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정서는 문학의 밑바탕이 되는 요소로서 문학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상에 대해 인정을 흘리는 일, 그리움을 갖는 일, 추억의 세계 속으로 빠져 인생을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일 등이 박기용의 주된 작업이다. 수필적 미학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도 않고, 거창한 주제나 경이로운 소재에 있지도 않다. 생을 너그럽게 돌아보는 눈 속에 배어 있는 따스한 정이 독자의 누선을 자극할 때 완성되는 것이 수필미학이다.
그래서 수필가는 정이 풍부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볼 줄 알아야 글에 공감이 묻어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 박기용의 수필이라고 하겠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면서 무욕의 삶을 추구하는 ‘비움’의 자세에서 우리는 또 한 번 가슴을 매만지게 된다. 수필가 박기용은 모두 가슴 한복판에 녹슬어가는 징을 하나 감추고 누군가 아프도록 쳐주기를 기다리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자들이 자신의 수필 이면으로 찾아와서 자신의 진실과 마주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인연화합의 원리를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박기용의 수필은 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풀어야 할 기호 내지는 암호인 것이다. 이 해답을 찾으려는 과정이 바로 상호작용이다.
수필로 쓰여진 회상의 이면에는 대체적으로 다른 기억이 은폐되어 있다. 은폐된 기억에는 박기용 수필가의 욕망이 숨겨져 있다. 이와 같은 심리 과정이 나타나는 이유는 억압해버리는 기억도 억압당하지 않으려고 저항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픈 경험도 기억으로 남으려는 힘이 있다. 이 힘의 작용으로 박기용의 기억은 수필이라는 이름의 옷으로 갈아입고 여러분 앞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 이 수필의 맛은 표면적 내용 뒤에 숨어 있는 자신을 탐구하고 성찰하여 숨어 있는 작가 자신의 긍정 지향성과 순명인식을 과감하게 보여준 데 있다고 하겠다.
백구두와 오디션
박 기 용
며칠 전, 친구 아들 결혼식 가는 길이었다. 정장 차림이라 모처럼 구두를 신었더니 발이 편치가 않았다. 10분쯤 걷다가 지하철을 탔다. 한참을 가야기에 나도 모르게 정장 차림을 한 사람들의 신발에 시선이 갔다. 나이와 상관없이 캐주얼 정장에다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많았다.
결혼식장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홀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접수대에 축의금 봉투를 내어놓고 혼주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나도 바로 홀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친구들과 정담을 나누면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구두보다 운동화가 많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양복 차림에는 구두가 제격이 아니었던가. 그 순간 어느 노신사의 백구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구두는 천연이나 합성 가죽으로 만든 서양식의 신으로 양화라고도 불린다. 그 기원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사용했던「모카신」으로, 아직도 사용되는 이 구두는 한 장의 가죽으로 발을 싸서 발등 부분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묶었다. 하이힐의 시초는 르네상스 시대에 귀부인이 신던「쇼핀」이라는 구두였으며 현재와 같은 하이힐은 16세기 중엽부터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구두가 등장한 것은 1880년대 경으로,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구두를 신고 들어온 것이 시초인 것 같다고 한다. 그 당시 구두라고 불렀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1900년도에 구두 생산 공장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공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1954년에는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구두닦이를 소재로 한 박단마의 「슈산 보이」 노래가 발표되기도 하였다. 그녀의 대표곡으로는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 「아리랑 목동」 등이 있다. 최근에는 박목월 시인의 미발표 육필 시 166편 중 한국전쟁의 참상을 뒤로한 채 구두닦이 소년의 새로운 삶을 그린 「슈산 보이」도 공개되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도심에서는 슈산 보이들이 자그만 구두통을 둘러메고 “구두 딱어”라는 소리를 외치면서 행인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 후로는 사무실이 많은 건물 옆에 자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닦이도 하였지만, 사무실을 돌며 구두를 걷어와서 즐비하게 늘어놓고 닦은 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1964년에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맨발의 청춘」 영화가 상영되고 흥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젊은이들 사이에 신성일 머리를 닮은 짧은 스포츠머리와 백구두가 유행하였다. 나도 끈이 없는 멋진 백구두 한 켤레를 샀다. KBS 「가요 자랑」 프로그램 등에 이 구두를 신고 출전하여 남인수의 「산유화」 등으로 몇 번 입상하였고, H 여고 여학생 두 명으로부터는 선물도 받았다.
부산 MBC 「노래 흉내 콩쿠르」 대회와 2기인지 3기인지 전속가수 모집 오디션에도 백구두를 신었다. 오디션에 나가기 전에는 나의 음정과 음색에 맞는 「추억의 소야곡」 등 남인수 노래를 집중적으로 연습하였다. 그러나 남인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많아 오디션 날에는 1차 자유곡에 중저음인 「명동 블루스」를 불러 합격하였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 역시 중저음인 도미의 「청춘부라보」를 지정곡으로 받았다. 쉬운 노래라 알고 있었지만 중간 몇 군데 가사가 기억나지 않아 모른다고 하자, 앞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김지곤, 이경화 등 전속 가수들이 가사를 큰 소리로 알려주며 부르라고 격려하였으나 끝내 부르지 못했다. 그다음 기수에 전속가수로 합격한 사람이 지금의 유명한 작곡가 정풍송 등이다.
나는 지금도 백구두를 신은 신사나 어디에서 「청춘부라보」 노랫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가슴을 쓸어내리곤 한다. 그 당시 악단장에다 심사 위원장 허영철 씨는 서구 초장동에 살았다. 나는 그때 심사 위원장님의 딸 허인애 양의 가정교사로 일주일에 두 번씩 집에 가서 영어, 수학을 가르쳤다. 심사 위원장과는 시간이 맞지 않아 집에서 뵐 기회가 없었다. 내가 애통해하는 것도 가수 오디션을 보려면 사모님을 통해서, 사전에 선생님을 만나 정보를 알고 시험을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 때문이다.
뒤돌아보니 그 후에라도 선생님께 가수를 해 보고 싶다고 한번 테스트를 받아 봄직도 하지 않았겠는가. 중학교 동창으로 같은 동네에 살았던 김양화는 오디션을 보지 않았어도 「오 대니 보이」 등을 자주 부르며 MBC 가수로도 활동하지 않았던가. 그는 뒤에 현철이 불러 크게 히트한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조영남의 「낙엽은 지는데」 등의 많은 작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발을 보호하는 구두가 패션을 선도하는 등 위상이 높았지만, 구두를 신는 사람도 구두를 닦는 곳도 차츰 줄어들고 있어 안타깝다. 그나마 나에게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 2017년 밀양에서 개최된 전국노래자랑이다. 부산 대표로 출전하여 예심에서 「향기 품은 군사우편」 본선에서 「추억의 소야곡」을 불러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글을 써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굴곡진 내 영혼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글과 음악이 함께하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