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9일 부활 제2주간 화요일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7ㄱ.8-15 그때에 예수님께서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셨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9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하자, 10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스승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느냐? 1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이, 곧 사람의 아들 말고는 하늘로 올라간 이가 없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15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물처럼 살라지만
세상에는 철학과 사상, 학문과 이론과 과학, 수많은 발명과 발견 등이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많기도 합니다. 교회는 영성으로 가득하고, 인간의 수련 방법 또한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인지 말과 이론은 참으로 많이도 정리되어 있고 연구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진리 같고, 모든 것이 참인 것 같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너무 모르는 것이 많은 채 세상을 산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면서 조금이라도 많이 알고자 그렇게 노력했지만 이제는 하나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처음에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 원자와 분자를 설명하시던 과학 선생님께서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우리에게 정구공 하나를 들고 오셔서 “정구공이 우주만큼 커졌다면, 지구는 정구공의 분자정도 되고, 원자는 너희들이 보는 정구공만 하다고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무리 비유로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수학에서 가장 좋은 해법을 찾았다고, 과학과 의학에서 최상의 방법을 찾았다고 자랑하고, 경영학에서 최고의 전략을 찾았다고 하지만 그건 아주 표현할 수 없는 미미한 해법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아무리 비난이나 험담을 해도, 아무리 법적으로 올바르다고 해도 사람의 판단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바르다고 큰 소리를 쳐도 시간이 지나서 그 사람을 역사는 다시 판단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성장을 위해서는 어떤 조언도 훌륭합니다. 정말 가치가 있고, 고귀한 조언들이 많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이 그 생활을 실천하면서 그 경험을 얘기해 주어서 많은 명언들이 남았고, 좋은 글들이 생겨났으며 모든 정의와 정리, 법칙과 규칙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책이 펼쳐졌으며, 지식과 지혜가 쌓였습니다. 그 가르침과 그 교훈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지침이 되었습니다.
종교와 사상을 떠나서 이렇게 주어진 명언들을 잘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은 노력했고, 노자(老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일관되게 ‘도(道)란 물과 같은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노자는 제8장에서 “최고의 선이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이란 능히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까운 것이다”고 설파하였습니다. 나는 어려서 이 말을 듣고 최고의 진리를 안 것처럼 흥분하였습니다.
그리고 논어의 가르침이 충서(忠恕)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에도 얼마나 동감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경을 대할 때마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생각하며 세상을 모두 끌어안을 것과 같은 흥분을 느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얼마나 교만하고 잘못 살면서 조금 아는 것을 모두 아는 체하면서 살았는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18, 22)라는 주님의 말씀을 숫자로만 생각하였던 것이 부끄러운 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진실한 한 번의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또한 과연 내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용서해 본적은 있는지 반성해보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물처럼 완전히 녹아들어서 나와 너와 이웃이 똑 같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청할 때도 상대방과 똑같이 되어야 용서를 청할 수도 있고 그 ‘용서 청함’이 곧 용서와 사랑의 시작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물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물처럼 살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먼저 물이 되지 않으면 물처럼 살 수 없습니다. 사실 나는 한 번도 물이 되 본적도 없고, 물이 되려고 노력한 적도 없습니다. 물처럼 오염되어 썩어 본 적도 없고, 독극물을 품어 정화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물고기와 모든 생물이 숨쉬며, 헤엄치며 살 수 있도록 영양분을 주어 본적도 없고, 댐에서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깨진 적도 없습니다. 수중기가 되어 작은 알갱이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지도 못해보았고, 그렇게 가볍고 겸손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떤 쓰레기든지 모두 받아들이는 아량도 없었고, 뜨거운 불에 끼얹어져 분노도 식혀보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지도 못했고, 구석구석 파고드는 땅속 깊은 곳까지 모래와 돌 틈을 비집고 내려가 본적도 없습니다. 이슬방울처럼 태어났다가 금방이라도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도 못하였고, 무언가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 기를 쓰면서 살았던 것이 내 삶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지금도 ‘물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물의 본질로 돌아가서 살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도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묵상하면서 아무리 물처럼 살라지만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응어리진 심장과 뻣뻣한 혈관과 부풀어 오른 악성 종양들에 파묻혀 있습니다. 마치 강물을 막고 있는 높다란 보(堡) 때문에 썩어가고 있는 물과 같은 자신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