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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송은 무엇입니까?
복음송가(福音頌歌) : Gospel Song
복음송가란 대략 1868년경 미국의 재편입시대(Reconstruction Era)에 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집회에서 많이 불렸던 종교적인 노래를 일컫는 말이다. 19세기 초엽의 시골 캠프집회가 캠프집회찬송을 만들어 냈듯이 19세기 말엽의 도시 부흥회는 복음송가 혹은 복음찬송(gospel hymn)이라고 알려진 교회노래를 만들어냈다. 필립 블리스는 ‘복음송가’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의 모음집 (1874)와 블리스와 아이라 쌩키의 (1875)에, 처음으로 ‘복음송가’, ‘복음찬송’이란 용어가 나타난다. 베일리(A.E.Bailey)는 복음송가의 전통은 ‘특수한 미국의 현상’이라고 말했다.
1. 복음송가의 토대
1) 캠프집회 찬송
미국 북부에 있던 13개의 영국 식민지는 독립전쟁을 일으켜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전쟁 후의 경제적 침체로 많은 사람이 서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서부 개척자들이 생활 환경의 변화로 본래의 문화적 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고, 거친 개척생활에서 영적 빈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1800년 대부흥운동이 서부 켄터키주의 로간 카운티에서 장로교 부흥사 제임스 맥그레이디에 의해서 전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천명의 사람은 며칠씩 산야에 텐트를 치고 캠프를 하면서 집회를 하였는데, 설교 기도 찬송 친교가 그 집회의 중요한 요소였고, 찬송은 설교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였는데 대부분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몸을 흔들며 열광적으로 불렀다. 부흥운동이 새로운 찬송을 탄생시키듯이, 서부의 대부흥운동은 캠프집회 찬송을 낳았다. 찬송의 내용은 죄인의 구원받음에 대한 것이 많았고, 곡조는 단순하며 민요조로 후렴이나 합창이 반드시 붙여졌다.
당시는 찬송가가 부족했으므로 대부분 암송해 불러야 했고 대부분이 무식하였기 때문에 가사나 곡조는 쉽게 배울 수가 있고, 기억할 수 있는 간단한 것이어야 했고, 반복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후렴이나 합창을 기존하는 찬송가에 덧붙여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 캠프집회 찬송의 모음집은 당시에도 많지 않았고, 대개 악보가 없이 가사만 수록되어 있다.
조슈아 스미드의 혹은 (1784)와 제레미아 잉겔스의 (1805)등의 모음집은 캠프집회 찬송을 다소 포함하고 있다.
찰스 존슨은 캠프집회 찬송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종교적인 민요(ballad)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 간증하는 하나의 독창곡,
(2) 찬양의 노래
아이작 왓츠 ‧ 찰스 웨슬리 ‧ 윌리엄 쿠우퍼 ‧ 존 뉴우튼 등에 의해 쓰여진 대표적 영국 찬송에 열정적인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곡조를 붙인 것. 헨리 앨리슨의 (1802), 데이빗 민츠의 (1809), 토마스 힌드의 (1810) 그리고 존 와이드의 (part second; 1813)은 다수의 이런 민요와 찬송을 포함한다.
(3) 부흥영가
캠프집회의 성격을 대표하는 언어에 기초한 가사들, 예를 들면 (질문) “누가 약속한 땅에 들어가려느냐?” (대답) “나는 꼭 갈 것이다. 할렐루야!”이 질문과 대답(chorus)은 자유롭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민요 등에 붙여 불려졌다.
캠프집회시대로부터 나온 가사와 곡조를 포함하는 중요한 4개의 모음집은 윌리엄 워커의(1835), 화이트(B.F.White)의 (1844), 하우저와 터너의 (1878)케이스(C.H.Cayce)의 (1913)이다.
(1971년에 개정된)는 아직도 남부의 테네시 ‧ 조지아 ‧ 미시시피 ‧ 앨라바마 등지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북쪽에서 사용되는 모음집으로는 조나단 리비트의 (1868)가 있다.
1850년 이후 장로교회의 캠프집회는 급격히 줄어들고 1825년까지 주로 감리교회가 이를 주도하였으며 침례교회에서는 교회 내에서의 장기집회로 이끌어나갔다. 오순절성회에서는 20세기초까지 캠프집회를 계속하였다.
2) 주일학교 찬송
19세기 초기에 일어난 부흥운동의 영향으로 교파적인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영적인 힘은 신앙생활의 여러 부분에 나타나게 되었다. 각 교파에서는 해외선교와 국내선교를 위한 선교부를 설치하고 복음전파를 위한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주일학교운동도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독립전쟁 후에 감리교에 의해 처음으로 미국에 소개되었고 다른 교파들에서도 받아들였다. 1824년에 미국 주일학교연합회가 조직되어 주일학교운동을 증진시키며 필요한 주일학교 자료를 출판하였다.
복음송가란 용어는 1870년경 나타났지만 이런 성격의 노래들은 이미 184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주일학교를 위한 모음집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복음송가의 특징적인 면이 이미 로웰 메이슨과 토머스 헤스팅스의 찬송에서도 예기되었으나, 현재 사용되고 있는 미국 찬송가에 그의 찬송이 많이 실려 있는 주일학교 노래의 대표적 작곡가는 윌리엄 브래드버리이다.
그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흥미를 모으기 위해 고안된 여러 가지 모음집과 편집자 ‧ 출판자로서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개 313, 합 326, 새 325), (wn 나를 인도하신다, 개 332, 새 325) 등을 비롯한 많은 주일학교 노래를 작곡하였다.
브래드버리 이후에 주일학교 노래를 제공한 사람은 침례교인인 로버트 로우리와 윌리엄 도온(1832-1915)이다. 로우리는 (합 528), (늘 함께하소서, 개 455, 새 448)들의 곡조를 썼고, 도온은 2,200 곡 이상을 작곡했고, 40개 이상의 모음집을 편집했다. 그는 특히 패니 크로스비의 가사에 꼭 조를 붙였는데 그 중 한 예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개 260, 합 185, 새 272)이다.
그 이외에 조우지 루트(1820-95), 윌리엄 피숴(1835-1912)등에 의해 주일학교 노래들이 계속 출판되었는데 이런 곡조들은 부르시 쉽고 외우기 쉬운 가벼운 성격의 종교적인 노래를 원하던 젊은이의 기호를 만족시켰다.
주일학교 노래의 가사와 곡조는 복음송가와 공통되는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가사는 하늘의 기쁨, 노래 부르는 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 기독교인의 생활을 영위하므로 얻어지는 만족감 등을 강조한다. 선율은 밝고 외우기 쉬우며 화성은 단순하고 발라드와 유사한 형식을 가져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흥미있는 노래들이었다. 당시에 주일학교에서 가장 많이 불려진 복음송가는 <죄짐 맡은 우리 구주>(개 168, 합 418, 새 443)와 <예부터 전한 말씀>(개 561, 합 418, 새 473)이었다.
주일학교 노래에 덧붙여 다음과 같은 노래들이 복음성가의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YMCA(1844년 런던, 1851년 보스턴에 창설)의 전국 대표자대회를 위한 노래들, 이븐 투어지(Eben Tourjee)에 의해 1873년에 시작된 ‘기도와 찬양모임’, 남북전쟁 당시의 애국적인 노래들, 스티픈 콜린스 포스터(1826-64)의 민요(포스터의 민요는 당시 복음송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세속민요 곡조를 그대로 채택하여 복음적인 가사를 넣어 부르기도 하였다), 구세군(1865년 런던에서 창설)의 노래들. 가장 단순한 음악적, 수사적 형태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지금까지 언급한 모든 노래들이 복음송가의 중심을 이룬다.
2. 무디-생키시대
1870년대부터, 특히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와 그의 음악보조자 생키의 연합을 계기로 복음송가는 도시의 부흥회에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들의 집회마다 생키는 자신이 직접 오르간을 치면서 많은 복음송가를 소개했다. 이미 캠프집회, 주일학교, YMCA 집회를 통해서 불려지던 많은 찬송도 무디-생키의 복음성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1) 생키(1840-1908)
1956년 20세의 젊은 무디는 동부에서 시카고로 와서 처음에는 주일학교를 통해서 대중전도사업을 시작하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무디는 시카고 YMCA의 지도자로 일하며 전도활동을 하였다. 1870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있었던 YMCA 대회에서 무디는 생키를 만나 그의 전도집회의 음악가로 전도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무디는 음악적인 소양은 없었지만 시카고 주일학교에서 노래의 위력을 보았기 때문에 그의 전도를 위하여 음악을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고자 하였다. 무디는 대도시에서의 대중전도집회나 교회에서의 부흥집회를 위한 음악은 캠프집회의 노래와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생키로 하여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독창과 대중들에게 맞는 복음적인 노래를 만들도록 하였다.
1872년 무디와 생키의 영국에서의 부흥집회는 성공적이었고 생키가 사용한 노래들이 영국에서 (1873)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1875년 미국에 돌아온 생키는 필립 블리스의 (1874)와 자신의 (1873)를 합하여 (by P.P.Bliss and Ira D.Sankey, as used by Them in Gospel Meetings)를 출판했다. 이것은 라는 제목으로 1891년까지 6권으로 연속 출간되었는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1894년에 나온 <복음찬송> 제 1권에서 6권을 모아놓은 에는 739편이 수록되어 있다.
2) 블리스(1838-76)
생키는 Gospel Songs 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것은 블리스라고 주장한다. 블리스는 무디의 권유로 당시의 유명한 부흥사 메이저 휘틀의 집회에서 독창자와 음악담당자로 활약하였으며 많은 복음 찬송을 작곡 작사하였다.
처음에는 주일학교 노래를 주로 작곡 작사하여서 그의 주일학교 노래집 (1871), (1873)에 수록하였고 무디와 생키의 부흥집회가 성공적으로 전개되자 대중 전도집회를 위한 복음찬송을 쓰기 시작했다. 1874년에 출판된 그의 에는 52편의 블리스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1875년 블리스는 무디와 생키와 같이 미국의 주요 도시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는데 이들의 복음찬송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복음찬송의 곡조는 음악회에도 침투되었고 거리에서, 집에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상 노래가 되었다. 이들 노래 중에는 블리스의 <하나님의 진리 등대>(개 222, 합 454, 새 466), 크로스비의 <저 죽어가는 자>(개 207, 합 194, 새 235)가 있다.
3) 패니 크로스비(1820-1915)
가장 많은 복음성가를 작사한 사람은 맹인 여류 작가이며 감리교인인 크로스비이다. 그는 8,000여편의 복음찬송을 작사하였는데 그 중에 <나의 갈 길 다가도록>(개 355, 합 345, 새 353), <확실한 나의 간증>(개 285, 합 451, 새 442) 등이 있다. 그의 찬송은 브래드버리, 조오지 루트, 윌리엄 도온, 로버트 로우리, 생키, 존 스웨니, 커크페트릭크(W.J.Kirkpatrick)등 당시의 많이 알려진 복음찬송 작곡가들의 곡조로 되어 있다.
4) 제임스 맥그라나한(1840-1907)
블리스가 죽은 후 휘틀의 집회에서 음악담당자로 일하며 <은혜의 단비>(개 184, 합 335, 새 334), <죄인 영접하심>(개 608, 합 232, 새 277)등을 작곡했다.
5) 조오지 스테빈스(1846-1945)
25년동안 무디와 다른 부흥사들의 집회에서 노래를 부르며 <자비한 주께서 부르신다>(개 233, 합 237, 새 273), <참 좋은 나의 친구>(개 169, 합 260, 새 380),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개 411, 합 272, 새 310) 등을 작곡했다.
6) 다니엘 타우너(1850-1919)
시카고 무디성경학교의 음악과 과장으로 생애를 마친 타우너는 2,000여곡을 작곡했는데 그중에 <예수 따라 가며>(개 300, 합 265, 새 309)가 있다.
7) 존 스웨니(1837-1899)
장로교인 음악담당자로서 1,000곡 이상의 복음송가를 작곡하고 60여개의 모음집을 편집하였다. <예수 더 알기 원하네>(개 445, 합 427, 새 440)가 그의 작품이다
8) 윌리엄 커크패트릭(1838-1921)
감리교인으로 100여개의 복음찬송 모음집과 관련이 있다. 그는 <주여 이제 옵니다>(개 245)의 작사 작곡을 했으며 <기쁜 소리 들리니>(개 257, 합 190, 새 228)를 작곡했다.
그 이외에 1890년대 복음송가의 작사자로는 에드워드 모트(1787-1874), 리디아 벡스터(1808-94), 애니 하욱스(1835-1918), 윌 탐슨(1847-1919), 조셉 스크라이븐(1819-86), 조셉 길모어(1834-1918)등이 있다.
3. 20세기 복음송가
무디와 생키의 시대를 지나면서 부흥사들이 전문음악가를 고용하여 팀을 이루어 전도하는 것이 하나의 표준이 되었다. 20세기 초엽 부흥사를 도와 일한 음악가들 중 특히 복음찬송의 발전에 공헌한 사람은 찰스 알렉산더(1867-1918)와 호머 로드헤버이다.
알렉산더는 처음엔 무디와 후에는 르우벤 토리(1856-1928), 윌버 쉐프만(1856-1932)이 작사 작곡한 <영광의 찬송>(개 498, 합 502, 새 502)은 대단히 유행하게 되었다. 로드헤버는 빌리 선데이의 집회에서 음악담당자로 일하면서 많은 복음찬송을 출판하였다.
대규모의 도시 부흥집회는 20세기 초엽 이래 쇠퇴해 가는 경향이었으나 복음찬송은 계속 작사 출판되어 불려졌다. 19세기 말의 복음송가를 계승하는 현대적 복음송가는 존 피터슨과 윌리엄 게이더에 의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노래는 19세기 복음송가의 가사나 음악적 스타일과 비슷한 점이 많은데 직설적이고 단순한 가사라든지 일반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부르기 쉬운 대중적인 곡조로 되어 있다.
4. 복음송가의 특징 및 결론
로버트 스티븐슨은 (개신교 교회음악의 형태, 1953)에서 말하기를 “복음찬송은 기독교 노래에 있어서 미국의 가장 독특한 공헌이다. 복음찬송은 단단히 포장된 사람의 마음을 파헤칠 수 있는 힘이 있어서 장엄하고 고상한 교회의 찬송이 할 수 없는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종교가 생존하기 위해서 대중의 인정과 지지가 필요한 시대에 있어서 복음찬송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생키의 노래는 진정한 대중의 민요였다. 댄 엠메트와 스티븐 포스터가 세속음악에서 미국인에게 준 영향을 종교음악에서는 생키와 블리스가 효과적으로 유용하게 적용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복음송가는 대중들에게 호소력이 있고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대중집회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구원에 대한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되어 있는 가사는 어린이에게 말하듯이 쉬운 말로 되어 있으며 간단한 구절을 반복함으로 쉽게 배우고 기억할 수 있었고 지성보다는 감정(emotion)에 쉽게 호소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복음송가는 문학성이 결여되어 있고 기독교의 교리보다는 감상적인 빈약한 가사로 되어 있고 대중집회라는 전도를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노래이므로 교회의 정상적인 예배를 위한 목적에는 적절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음악적으로도 옛 찬송 곡조가 예배의 분위기에 맞도록 장엄하고 경건하고 무게가 있는 것에 반하여 복음송가의 음악은 단순한 화성에 민요조의 가볍고 흥겨운 곡조로 되어 있어서 일반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었다. 또한 후렴(refrain)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당시 미국의 민요처럼 대중들과 가장 친근한 형태로 되어 있어서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복음송가는 교육을 받은 계층보다는 일반대중의 취향과 수준에 맞는 노래였다. 작곡이나 작사도 모두 평민의 수준에서 이뤄졌다. 복음송가의 작곡가들은 대체로 정규 음악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복음송가는 대중 전도집회에는 효과적이었으나 교회 예배 찬송으로 사용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복음송가는 교회 예배에도 침투되어 복음적인 교파의 찬송가에는 복음송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미국의 선교사들은 선교사업의 효과적인 도구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복음송가는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피 선교지 나라에서는 지금도 찬송가에 많은 미국의 복음송가가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찬송가도 그 한 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