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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을 찾기 위해 길을 걷기 시작하다. 곧 만난 것은 살짝 돋아 올라온 푸른 싹.
1. 스승을 찾는 자들.
스승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 한 것이다. 이름표에는 선생이라고 적힐 수는 있을 지 몰라도 그 이름표가 선생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가 제자를 자처하고 나서서 누군가를 따라야 비소로 스승이라, 선생이라 일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본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그가 군자로써 살지도 않았고 이렇다 할 정치적 성과를 이루지도 못했지만, 항상 말하던 인과 그로 인하여 더불어 사는 인간상의 모습은 곧 공자 본인과 제자들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인을 이루어 살려 노력하고 항상 배우려 노력하였던 공자는 결국 그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그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는 제자를 만들었다. 그렇게 공자가 꿈꾸던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었다.
논어 제19편 자장편에서는 공자의 말이 아닌 그의 제자들의 말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각자 그들의 스승에게서 배운 것들을 해석하여 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가르친다. 어떨 때에는 서로가 배운 공자의 말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하며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하나로 모이는 것은 자신들의 스승인 공자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이다. 공자가 제자들 각자에게 가르쳐준 가르침을 꼭 붙들고 그것이 무너지지 않게 계속 떠올리는 것이다.
어쩌면 공자에게 들은 가르침 대로 다시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과, 이용하여 직위에 오르는 것이 무언가 잘난 체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변 정치인들이 자공을 두고 공자와 비교하며 너가 더 낫다고 할 때 자공의 입장은 단호하다.
“나의 담장은 어깨에 미치므로 집안의 좋은 것을 엿볼 수 있지만 선생님의 담장은 몇 길이므로 그 문을 찾아 들어가지 못하면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의 풍성함을 복지 못합니다. 그 문들 찾은 자도 적으니 당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자장편 23장)?”
사회에 사는 인간에게 만남은 매순간 계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기에 공자 또한 인으로 서로 인정하고 예의를 갖추기를 원했던 것이겠다. 하지만 인간의 만남을 그저 인정과 예의로 정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배 당하고 싶은 욕구’ 마조히즘이라는 이름으로 프로이트가 처음 정의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 이루지 못하는 것을 가르침과 함께 이루어 주기를 바란다. 굳이 ‘지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도 어느 공동체이던 책임자가 필요할 따름이고 사람들은 본인이 속한 공동체에 책임자가 좋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약 그 책임자가 정말 나의 마음에 든다면 그대로 따를 뿐이다.
편애. 이 단어도 인간관계를 설명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가 되었건 사람은 누군가를 편애하기 마련이다. 무언가 더 친해지고 싶고, 말을 걸고 싶으며, 그와 함께 걷는 이가 부럽게 느껴 지기도 한다. 이런 편애를 이성에게 느끼면 이것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얼굴 때문일까? 혹은 성격? 그 사람의 재능? 제일 오래 본 사람? 정확한 기준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편애한다는 감정은 어떻게 생각하면 불공정하게 느껴진다. 특히 어떤 선생이나 부모가 편애를 한다 하면 나쁘게 받아 드려 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에는 나보다 높은 사람을 항상 만날 따름이며, 높을 뿐 아니라 내가 따라야 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또한 나를 이끌어 줄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어느 공동체에 가서던 제일로 의지할 만한 사람을 고른다. 그런 리더 혹은 스승이라 부를 만한 이들 앞에 편애를 가지게 된다. 어째서 일까?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따르길 바라며, 의지하길 바랄까? 누군가를 나의 스승의 자리에 앉혀 내가 닿지 못한 그곳에 나를 이끌어 주기를 바랄까?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편애할 사람을 찾을까? 내가 나의 마음에 끌리는 선생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분명 사람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울려 자신의 마음이 치우치는, 한 마디로 편애하는 사람을 따를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부족함이 보이기에, 연약함이 보이기에, 미련함과 역겨움이 보이기에 이상적인 선생을 만들고 자기 멋대로 편애하며 ‘이끌어 줘’라는 말 뒤에 숨어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실패를 탓한 만한 방패를, 성공을 더욱 크게 느낄 만한 자극제를 찾는 것이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을 수 있게 하는 사다리 따위의 도구를, 나를 대변하여 나서 줄 용병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그 편애의 선생이 이 임무를 잘 수행한다면 존경해야 마땅하고 감사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게 박수를 보내며 속으로는 나 자신을 향해 와인잔을 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감사를 받는 스승은 복되다. 제자들의 감사는 진심인 부분이 있으니. 정말 참된 스승이 있어 제자를 잘 이끈다면 그 만큼 복스러운 관계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잘 이끌어준 스승에게 감사하며 존경을 표하고 그 뜻을 잇는 다면 그만큼 아름다운 관계가 어디 있을까? 그렇게 서로 좋은 부분을 보며 나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그런 스승이 어디에 있을까? 스승은 본인이 스승이 되고 싶기는 했던 것일까? 멋대로 편애에 대상이 된 기분은 어떨까? 참된 스승. 어디에 있을까? 그 스승의 부족한 부분은 어떤 스승이 채워야 할까? 어디로 갈까?
뒤를 돌아 보니 달라붙은 Follower. 왜 나를 따라오는 거야?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거늘.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야? 참된 스승? 편애의 대상? 나는 무슨 거짓을 말해야 하는 걸까. 푸른 싹 앞에 넘어져 깊은 악몽 속으로.
2. 내가 스승이 된다면
가끔 꿈을 꾼다. 나의 어깨는 무겁게 눌려서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을 해치우듯이, 매우 버겁게 하고 있다. 숨을 가쁘게 몰아 쉴 때마다 주변의 시야는 한 층 더 어두워져 간다.
이런 추한 꿈을 꾸고 난 뒤 등에는 식은땀이 가득하다. 그런 등을 적시는 목욕으로 전날 밤의 일을 잊어버려 애써도 결국 오늘 밤 다시 적셔질 등을 생각하면 동기부여는 전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밤이 되기 전까지 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야 하니 나름 깨끗한 물에 몸을 씻고 서는 밖으로 나선다.
‘그들이 입맞추는 나는 이런 나입니다! 제발 나를 오늘 밤 또 미련한 꿈이 빠져 허덕일 뿐인 멍청이로 보세요!‘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나의 화장으로 덧씌워진 입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 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멋들어진 말로 여러 사람을 유혹하고 다닌다. 악마. 그렇게 불릴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사람들이 봤을 때는 난 그저 영웅이고 스승일 뿐이다.
그들은 나에게 답을 요구하고, 가르침을 요구하고, 좋은 모범이 되기를 원하며, 성과를 보여주기를 원하고, 본인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원하고, 이끌어 주라 외치지만 나는 답을 모르고, 가르칠 것이 없고, 좋은 모범이 되지 못하며, 성과를 이룬 적이 없고, 부족한 부분 밖에 없어 ‘채운다’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에 이런 나를 누군가 이끌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왜 나를 따르는 것인가? 왜 나를 의지하는 것인가? 어째서 ‘답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라는 탈을 쓴 칼을 쑤셔 미는 것인가? 난 아무것도 모른다. 나도 따를 자를 찾으려 이 길에 들어선 터인데 어째서 나그네에 불과한 나를 따라 오는 것인가? 푸념과 상실과 회의와 우울만이 가득한 이 길을 걸어가는 나를 따라오는 것은 그저 멸망에 가까워질 뿐이라는 사실을 어째서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나를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도 없고, 이런 나를 완전히 애정 하는 사람도 없지만 그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결코 스승이 못될 자임과 더불어 가장 미련한 자이고, 게으른 자이고, 가식적이고, 멸망적인 자이다. 단 한 순간도 좋은 것은 고사하고 괜찮을 것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허락 돼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이 망자를 따르면 그 끝은 망자의 결론일 뿐이다. 그럼에도 배울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아니 없다. 결코 없다. 처음엔 무언가 멋들어진 말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도 결국 전부 패망의 길로 이끌 뿐이다.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찌 타인이 나를 통하여 올바른 것을 배우겠는가? 내가 스승이 된다면 그것은 악몽이다. 매일 밤마다 꾸는 꿈보다 훨씬 독하고 쓰린 악몽이다. 그럼에도 난 이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다. 되려 더 있어 보이는 스승의 모습을 띄려고 삶 속에 연출을 가미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알기에 나는 누구도 스승으로 삼지 못한다. 분명 나의 부족한 면을 채우며 이끌어줄 지도자를 원하지만 무엇을 따르던, 편애하고 존경심으로 우러러 보아도 그는 또한 망인일 뿐이며 그의 이끄는 손길의 마침표는 절망과 회의와 죽음 뿐일 것이다. 그렇기에 한 선생을 따라 나름대로 인생의 답을 찾은 사람이 멋있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련해 보이면 불쌍하며 연약해 보일 따름이다. 그가 따르는 것이 누구이던 인간인 이상 결국 망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자 된 자가 지배당하기 원하는 이유, 스승을 찾는 이유는 조금 더 나은 망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망자에서 벗어가기 위해서이다. 곧 이것이 망자인 인간이 찾는 답의 질문이며, 스승이 이루어 주길 마라는 소망이다. 하지만 이루지 못한다. 악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 것은 가능성 없는 미련한 짓이며 망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망자를 것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멍청한 짓이다.
조금 더 나은 망자? 그딴 것은 의미가 없다. 끝에는 새롭게 채우고 싶은 것이 생길 뿐이며 이 채우고 싶은 부분을 배움으로 채워도 또 다른 회의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이렇게 계속 미련한 망자의 모습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게 하는 것, 배우는 것을 공자는 높이 사고 인간의 덕이라 여겼지만 그 끝에는 또다른 회의가, 불분명한 미래와 악한 인간성의 결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선생과 제자는 아름다운 관계를 이루었지만 결국 주변에서는 이간질을 시키는 것이며 이에 휘둘려 제자끼리 다투는 것이 공자의 새로운 결론이다. 이 또한 배움으로 해결하려 든 다면 다음에는 어떤 형태의 결론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도 찾지 못한 길. 채워지지 않는 만족. 누구를 위한 빈자리인가? 스승을 만드는 본질적인 이유. 점점 가까워 지는 결론과 나락에서 찾은 이미 죽은 자들의 해답. 그들이 찾지 못했기에 나는 찾는다. 그들이 미련했기에 나는 영리해진다.
3. 나의 스승-선택
그럼에도 따라야 한다. 나는 어째서 망자로 살며, 망자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그 해답을 또 스승을 찾아야 한다고 결정 내린 것일까?
내가 망자인 것을 아는 망자. 이곳이 나락인 줄 아는 자.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객관화이다. 어째서 객관화가 가능할까? 처음부터 물속에 산 사람이 자신이 물속에 있었구나 한탄할 수 있을까? ‘땅에 살았으면 더 좋았을 걸.’ 생각할 수 있을까? 그는 물속에서 살지 않았었기에, 땅에서 살았던 경험이 은연중에 있기 때문에 그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헛되다, 이상적이다, 말이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앎에도 모든 시절의 사람들이 더욱더 이상을 바라는 것은 본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내가 살던 그 한 곳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곳은 어디였는가? 누가 이런 마음을 주는 것일까? 과연 모든 일에 인과관계를 덧붙이는 세상에 이상을 바라는 마음은 우연이라 칭할 것인가? 그렇게 미련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또한 어째서 인간은 이상의 해답으로 스승을 찾을까? 왜 이미 자신이 그 일을 해결할 수 없다고 은연중에 결론을 내렸을까? 이미 알기 때문이다. 복종을 원하는 이유? 이미 알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이라고? 그렇다면 왜 신을 만들었을까? 이미 알기 때문이다. 본인들의 힘으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망자의 길에 서있다는 사실을. ‘불공정한 인생!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외쳐 보아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본인들도 회피 하였거늘. 말도 안 되는 이론으로 이 미련함을 풀려다 망가져 버렸거늘. 어찌 스승을 찾는 자들을 욕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올바름, 진화하는 인류, 이기적으로써 이타적인 인간성을 강조하다가 정치적으로 무너지고, 퇴보 되는 인류를 지켜보고, 그저 이기적이기만 한 인간성을 목격하고는 그저 세뇌로 그 미련을 메꾸려는 것을. 모든 이들의 스승으로 서려다 그 추함을 보이고서는 어찌 다른, 더 좋은 스승을 찾아 무릎 꿇으려는 자들을 욕할 수 있는 것인가? 인간 스승의 추악함을 통해 답은 하늘에 있다 결론 내린 자들을 몰상식한 자들이라 욕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기에 내가 내 스승을 신으로 삼은 것은 천사를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악마를 보았기 때문이며, 신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면 감동만 느낄 뿐이지만 나를 되돌아보면 신을 느낄 수 있다. 그저 광활한 광경은 알 수 없는 경외심을 일으키지만 내 안에는 조밀 조밀하게 철저히 박살 나 있는 인간성과 채워지지 않는 빈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사춘기의 고민들, 성장기에 처음 겪는 욕구들이라 풀이하지만 그런 말 하는 사람 치고 ‘행복’을 물어 봤을 때 답하는 어른은 본 적이 없다.
누구를 편애할까?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나의 스승은 누가 될까? 답 없는 질문에는 도착지가 없다. 복종해야만 하는 나. 해결을 타인에게 넘길 수 밖에 없는 나. 누구를 편애할까? 내가 걷고 있는 길에는 무슨 결론이 있을지. 과연 이미 큰 역겨움이 편애함으로 해결이 가능한 문제일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내 앞에 남아 있는 것인지. 내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이런 문제에 답을 내려야 할지. 이 답은 내 힘으로 가능한 것인지. 또한 스승을 원할 수 밖에 없는 이 수레바뀌 아래서 깔려 죽는 것은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