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윌슨 대통령의 1912년 대선 열풍
유대교 랍비 ,‘와이즈’의 뉴저지 연설문을 옮겨 적는다.
“화요일에 프린스턴대학 총장이 여러분의 주지사로 당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1912년 3월에 그는 대통령에 연임되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 될 것입니다.”
훗날 윌슨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참모를 지낸 와이즈는 2년 전에 대통령 대선 결과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심지어 그로부터 6년 후의 대선 결과까지 정확히 예측해냈다.
그에게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은행가들의 치밀한 사전 책략이 낳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예상대로 1907년의 금융위기는 미국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국민은 투신사에 분노를 품었으며, 사회 전반에 걸쳐 월가 금융 세력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은행 파산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
금융 독점을 반대하는 국민의 목소리는 전국을 휩쓸었다.
프린스턴대학의 우드로 윌슨 총장은 금융 독점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뉴욕 내셔널시티은행의 프랭크 밴더리프 행장이 한 말을 들어보자,
“나는 프린스턴의 우드로 윌슨 총장에게 편지를 써서 만찬회 연설을 부탁했다.
그 연설이 중요한 기회임을 알려주기 위해 나는 상원위원 넬슨 올드리치도 그 자리에서 연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내 친구 윌슨 박사는 뜻밖에도 올드리치 상원의원과 같은 자리에서 연설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올드리치 상원의원은 당시 여야에 상관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다.
40년 동안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36년간 상원의원을 지냈으며, 권력이 막강한 상원 금융위원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존 록펠러의 장인으로 월가 금융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08년, 올드리치는 긴급한 상황에서 은행이 화폐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하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와 지방정부의 채권과 철도 채권을 담보로 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금융계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위험은 정부와 국민이 고스란히 감당하고 은행가들이 그 열매만 따 먹겠다는 발상이었다.
월가의 이처럼 교묘한 수법이 놀라울 뿐이다. 이 ‘긴급화폐법’은 5년 후 FRB 법의 기초가 되었고, 올드리치는 명실상부한 월가의 대변인으로 인식되었다.
우드로 윌슨은 1879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버지니아대학에서 법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886년 존스홉킨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02년 프린스턴대학 총장에 취임했다.
학구열에 불타던 윌슨은 금융 독점에 대해 큰 목소리로 반대해왔다.
당연히 금융계의 대변인인 올드리치를 반길 리가 없었다.
그러나 학술적 열정과 이상주의만으로는 금융업에 대한 부족한 지식을 메울 수 없었다.
윌슨은 월가의 은행가들이 돈을 벌어들이는 수법에도 완전 문외한이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단순하면서도 이용하기 쉬운 특징에 주목했다.
게다가 그는 사회가 인정하는 금융 독점 반대 운동가가 아닌가!
이처럼 참신한 이미지의 인물은 그야말로 보기 드문 보배였다.
은행가들은 윌슨에게 자금을 쏟아 부으면서 그를 이용할 날만을 기다렸다.
마침 뉴욕 내서널시티은행의 클리블랜드 도지 이사가 윌슨의 프린스턴대학 동기였다.
1902년 윌슨이 순조롭게 프린스턴 총장에 임명된 것은 든든한 재력의 도지가 뒤에서 도운 결과였다.
이렇게 조금씩 관계를 다진 다음, 도지는 은행가들의 책략대로 윌슨이 대통령감이라는 소문을 월가에 퍼뜨렸다.
총장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갑자기 대통령감이라고 떠받드니, 윌슨이 내심 기뻐하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여기에도 대가는 따랐다. 이때부터 윌슨과 월가와의 관계는 더욱 밀착되었다.
얼마 후 윌슨은 월가 큰손들의 지원에 힘입어 1910년 뉴저지의 주지사로 당선된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윌슨은 여전히 정의감에 불타는 어조로 월가의 금융 독점을 비난했다.
그러나 사적으로는 자신의 자리와 정치적 미래가 완전히 은행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은행가들은 윌슨의 비난을 이상할 정도로 용인했으며, 쌍방은 일종의 미묘하면서도 드러나지 않는 묵계를 유지했다.
윌슨의 명성이 날로 높아질 즈음, 은행가들은 발 빠르게 움직여 그의 대통령 경선 비용을 모았다.
도지는 뉴욕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윌슨 선거 자금 모금 사무실을 차리고 은행 계좌를 개설했다.
자신은 1,0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헌금했다. 그 후 은행 직접 송금 방식으로 은행가에서는 많은 정치 자금을 모았는데, 그 중 3분의 2가 월가의 큰손 7인이 내놓은 정치 헌금이었다.
대통령 경선 후보에 이름이 거명되자 흥분을 감추지 못한 윌슨은 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네.”
라고 썼다. 이때부터 윌슨은 완전히 금융재벌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당 후보인 윌슨의 어깨에는 민주당의 염원도 실려 있었다.
몇 년간 대통령을 배출하지 못한 민주당 측도 권력에 대한 목마름으로 윌슨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윌슨이 넘어야 할 산은 현직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당시 전국적 지명도에서 딸리는 윌슨에 비해 태프트 대통령은 훨씬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자신 있게 연임에 도전한 태프트가 올드리치 법안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태프트의 전임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갑자기 경선 참가를 선언한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택한 계승자이자 같은 공화당 소속의 태프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의 소식이었다.
루스벨트는 노던증권회사의 해산으로 명망이 높아졌고, 반독점법 추진으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그의 갑작스런 출현은 태프트의 표를 상당 부분 잠식했다.
사실 이들 세 후보자는 모두 은행재벌의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은행재벌들이 가장 통제하기 쉬운 윌슨 쪽으로 암암리에 기울 뿐이었다.
월가의 계획에 따라 루스벨트가 태프트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윌슨은 가볍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이는 1992년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가 로스 페로에게 지지표를 많이 뺏기는 바람에 신예인 빌 클린턴에게 패한 경우와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