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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09
3월24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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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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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U7_y59w-Wso&list=PLpB9z9SOeZQfGRsNAtfExml1MP8zwjc0C&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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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알고, 구세주로 고백하고, 그분과 연결됨을 통해서 참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첨예한 논쟁은 오늘도 계속됩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유다인들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유다인들과의 대화는 계속 평행선을 걷습니다.
고수이신 예수님께서 초보 단계의 유다인들과 소통하시려니 무한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위의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유다인들은 철저하게도 아래의 것에 대해서만 골몰합니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났습니다. 거듭된 외침과 함락, 멸망과 유배 속에 유다인들은 분명 노예살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다고 따져댑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노예, 죄로 인한 종살이를 말씀하시는데, 유다인들은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동문서답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복음 8장 33절)
계속해서 유다인들이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고 고집하지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날려버리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요한 복음 8장 39~40절)
이 한세상 살아가는 우리가 참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돈이 다가 아니라는 깨달음,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깨달음, 정작 중요한 것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깨달음, 이 세상 저 너머에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존재한다는 깨달음, 이 세상이 지나가면 사랑으로 충만한 아버지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다는 깨달음...
또 다른 세상에서는 더 이상 슬픔도 고통도 울부짖음도 없을 것이라는 기대, 그곳에서는 우리가 한평생 견뎌왔던 결핍이 충만한 하느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인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진리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복음 8장 31~32절)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온전히 하나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분명히 현존해 계신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것이 진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모든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는 좁은 새장을 벗어난 한 마리 새처럼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온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하느님 아버지 나라를 향해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을 알고, 구세주로 고백하고, 예수님과 연결됨을 통해서 참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고, 하느님과 연결되기를 거절할 때 우리는 그저 한 마리 짐승과도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또 다른 깨달음을 향한 멀고먼 길이 펼쳐집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말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참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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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ZgK1eTlbC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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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를 위한 선결 조건: 자랑스러운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어떠한 말씀을 해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는다면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진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죄의 종살이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실의에 빠진 아이에게 어머니는 이런 말을 해 줍니다.
“너의 아빠는 네가 태어나기 전 외국에 돈 벌러 나가셨어. 네가 먹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것들이 아빠가 힘들게 일해서 보내오는 것들이란다. 그러다 사고가 나서 그곳에서 돌아가셨고 아직 그곳에 묻혀계셔. 네가 조금 더 크면 아빠 무덤이라도 한 번 찾아가자.”
자신이 아버지 없는 아이라고 우울해하기만 했던 아이는 이 말을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계신다는 말에 항상 기쁘고, 감사하게 됩니다. 만약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고 믿지 않는다면 아이는 낮은 자존감으로 그 열등감을 채우기 위해 죄의 종이 됩니다. 자아와 세상, 어둠이나 나쁜 친구들을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어머니와 같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이고 어머니는 그 사랑의 번역자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존재를 믿게 만들어 아이에게 자존감을 심어줍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말을 믿으면 세상 집착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줍니다.
아버지의 존재가 나에게 어떤 자존감을 주고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지,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았습니다.
“나는 서른이 다 되어가는 취준생이다. 요즘 코로나 상황이라서 그냥 부모님께 뭐라도 하는 것을 보여주려 도서관에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다. 5시쯤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가 약속이 있어 나가셨고, 아버지만 계셨다. 아버지는 맛있는 것 시켜 먹자고 하셨다. 돈도 못 벌면서 부모님 돈으로 저녁을 때워야 하는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그래도 아버지께서 오랜만에 함께 소주 한 잔하자고 하셔서 족발과 쟁반국수를 시켰다.
그런데 시킨 지 1시간이 넘는데도 음식은 도착하지 않았다. 난 조금 짜증이 나서 족발집에 전화를 걸었다. 떠난 지 30분이 넘었는데 이상하다고 했다. ‘비가 많이 와서 그런가?’라는 생각으로 아버지와 어색하게 TV를 보며 30분을 더 기다렸다. 그제야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좀 따지려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배달 온 사람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비에 홀딱 젖어있었고, 대뜸 ‘죄송합니다. 오던 길에 빗길에 오토바이가 미끄러져 넘어져서 수습하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음식은 먹기에 민망할 정도로 불어있었고 또 엉망이 되어있었다. 뭐라 한 마디도 못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현관으로 나오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음식을 시킨 저희 탓입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당신의 책임감으로 오늘 우리 부자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음식값과 세탁비까지 건네주었다. 그러자 배달원은 펑펑 눈물을 흘렸다. 나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고마울 일이 하나 없는 코로나와 무직 상황에서도 이상하게 감사한 마음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이 이야기는 아버지의 아들이 ‘배달 중 넘어져서 음식이 섞여서 옴’이란 제목으로 SNS에 올려 화제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절대 절대 절대로 돈을 적게 벌든 많이 벌든 다른 사람의 직업을 하찮게 생각해서는 안 되고 내가 그렇게 살 수 있는 걸 항상 고맙게 생각해야 함.”
[참조: ‘아들도 감동한 아버지의 배달원 대하는 태도’, 유튜브 채널, ‘KMIB’]
세상에 감사하면 모든 좋은 일을 끌어당긴다는 수많은 책과 동영상들이 널려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고 그 아버지의 존재로 이끌어주는 어머니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감사를 찾으려고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어떤 유튜브 댓글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이유 없이 스트레스받는다.”(H HS)란 글이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에 대한 확신 없이는 아무리 행복하려 노력해도 항상 다시 근원적인 불안과 불만, 우울함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근원적인 것을 해결해야 합니다. 아이는 부모만 있으면 굳이 감사하려 하지 않아도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모든 사람의 근본적인 불만족은 부모를 찾지 못한 데서 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 행복의 보증입니다. 저는 집이 가난했어도 불만이 없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니 굳이 감사하려 하지 않아도 불평불만이 없으니 항상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전에 ‘그레이스’라는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천연두로 얼굴에 지울 수 없는 흉터를 가지고 자라던 아이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적에 천연두라는 큰 병에 걸린 적이 있었단다. 그 병은 네 오빠와 동생의 생명을 빼앗아갔지. 이웃의 많은 아이도 죽었단다. 하지만 하느님이 너만은 살려주셨단다.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아이인지를 기억하라고, 하느님께서는 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을 남기셨단다. 그래서 이건 네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하다는 표시야.”
아이는 이 말을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남자친구를 사귀고 둘 다 미국 상원, 하원의원이 됩니다.
감사한 것을 찾아내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얼굴에 난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면 성공적인 삶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아버지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뤄집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아버지가 되어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면 우리는 항상 기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면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을 아버지로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아와 악과 불만족과 죄와 어둠으로부터의 해방의 유일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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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8,31-42 :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절) 라고 한다.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절)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절)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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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소임을 맡아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가 많습니다. 하루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고속도로 진입로를 지나쳤습니다. 차를 돌려 다시 고속도로 진입로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차를 돌릴 만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시간도 넉넉하였기에 급하게 차를 돌리지 않고, 더 오래 걸리는 국도를 이용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달렸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언제나 갈림길에서 어느 한 곳을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한 선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누구도 강요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정답이라 생각하는 쪽을 택하고, 그 선택에는 언제나 책임과 의무가 뒤따릅니다. 우리는 그런 선택, 곧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을 ‘자유’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려는 일을 행하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라며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선택은 자유가 아닌 방종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라고들 합니다. 다시 말하여 진정한 자유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 곧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신념과 가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선과 기준을 알고 깨닫는다면 우리는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선택의 이유가 된다면,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슨 행동을 하여도 참으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선택, 곧 예수님을 박해하고 심판하고 죽이는 이유는 성경 말씀이나 하느님의 가치와 기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에만 그 이유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과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가며 선택의 순간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유와 시선으로, 그분의 가치와 기준으로 주위를 보면 무엇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우리의 삶은 옳을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선택은 언제나 사랑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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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진리, 자유>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1)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라는 말씀은, “나의 참된 제자가 되려면 내 말 안에 머물러야 한다.”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얻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면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나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4-5) 이 말씀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구원과 생명은 예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2)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라는 말씀과 뜻이 같은 말씀인데, “참된 신앙인으로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는 예수님 말씀을 뜻합니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은, 그 진리의 목적에 도달한다, 즉 예수님 말씀의 목적인 구원과 생명에 도달한다는 뜻이고,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이 ‘깨달음’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자기 스스로 도를 닦아서, 자기 힘으로 어떤 진리를 알게 되는 경지에 도달하는 일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은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뜻인데,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유’는 구원과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 또는 구원과 생명 자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자유’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와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남의 억압과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을 뜻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유’는 죄와 죽음의 억압과 지배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 즉 구원받은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3) 그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시작되고, 그 나라에서 완성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지금 이곳에서부터 그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모습을 베드로 사도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사도 12,6) 헤로데는 야고보 사도를 죽이고 나서(사도 12,2) 베드로 사도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밤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아무런 근심, 걱정, 두려움 없이 깊이 잠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구출하려고 나타난 천사가 그를 깨우기 위해서 옆구리를 두드려야 할 정도로 그는 깊이 잠들어 있었습니다.(사도 12,7) 사형당하기 전날 밤인데도 감옥에서 태연하게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살고 죽는 것을 모두 주님께 맡기고, 믿음 안에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하던 초기에는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4,37-40)
4)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라는 말씀에서 ‘죄’는,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거부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스스로 ‘자유가 없는 종’으로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집에(나라에) 들어가서 살기를 바란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의 종’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종’이 되어 있는 그 사람 자신이 안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참된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있는 사람과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 줍니다. ‘회개한’ 작은아들은 ‘안에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는데(루카 15,24),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큰아들은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아버지는 큰아들도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면서 그를 타이릅니다. (그는 고집부리면서 계속 ‘밖에’ 있었을까? 아니면, 회개하고 ‘안으로’ 들어갔을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양’을 하느님 나라의 ‘안으로’ 데리고 가려고 애를 쓰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미 틀렸다.”라고 생각하면서 들어가기를 포기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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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올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멀리 타향에서 숨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도 있습니다. 3명의 젊은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마카오로 가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은 사제가 되지 못하였고, 건강이 나빠져서 1837년 먼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은 1845년 조선의 첫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1년 동안 사목하였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1846년 순교하였습니다. 최양업 신학생은 1849년 조선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12년 동안 사목하였습니다. 과로에 지친 최양업 신부님은 1861년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집을 지으려면 먼저 터를 잡아야 합니다. 그 위에 기둥을 세워야 합니다. 그 뒤에 비로소 눈에 보이는 집을 볼 수 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한국 교회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교회의 무게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열정과 헌신을 다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섬기라고 하는 왕에게 3명의 젊은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하느님께서는 거센 불길에서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3명의 젊은이를 죽이려했던 왕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 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3명의 젊은이에게 사는 것과 죽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최방제 프란치스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3분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천상에서는 모두 빛나는 신앙의 별이 되셨음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는 무엇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큽니다. 진리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말씀에서 나왔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그 어떤 것들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하느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들을 이어주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려주는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약속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공동체로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함께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함께 사는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믿어 줄 수 있습니다. 말씀은 역사적인 사실과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진리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말씀은 공동체를 친교와 일치로 맺어주는 삶의 지침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삶으로 증언하지 않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은 많이 배웠고, 많이 알았지만 그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보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 외로운 이들, 죄를 지은 사람들 중에서는 말씀을 삶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많이 알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어도 진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삶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지 않는 말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사탄이 좋아하는 말들입니다. 어떤 말들일까요? “지겨워, 피곤해, 싫어, 죽겠어”와 같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1주일 동안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겨워’라는 말을 500번 하더랍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삶이 지겨워지고, 삶이 고단하고, 주위 모든 것들이 싫어지고, 결국 죽고 싶어집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말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고마워, 사랑해, 감사해, 아름다워, 믿어요.’와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말을 1주일에 500번 정도 한다면 우리는 정말 고마워 할 일, 사랑하고 사랑받을 일, 아름다운 일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한 생명은 내가 죽은 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꺼운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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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불가마 속에 던져진 세 사람을 구해 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드락, 매삭, 아벳느고’는 세상의 것들을 잡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교만, 인색, 미색, 분노, 질투, 탐욕, 나태’의 불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일곱 가지 죄의 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와 같은 죄의 뿌리에서 이끌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학식이 뛰어난 사람도, 많은 업적을 쌓은 사람도,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도,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은 죄의 불길을 피해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돈, 명예, 권력’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일까요?
첫 번째 진리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회개’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만이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곳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에 있습니다.
두 번째 진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에 있습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은 진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고, 눈먼 이를 뜨게 하시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을 주시고,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표징이 진리입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주님이 진리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의 문을 열었습니다. 걱정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의 자리에 넣을 수 있는 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사랑, 믿음, 희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진리의 자리에 무엇을 넣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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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민병섭 바오로 신부님]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진리를 깨닫게 되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죄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종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진리가 자유를 준다 했고 죄가 그 자유를 박탈하고 우리를 종으로 만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로부터도, 우리마음속에 이기심으로부터도, 세상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죄 속에 파묻혀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일어서야 하는데 일어서지 못하고, 잘못된 줄 아는데, 그래서 이제는 그만하려고 하는데 생각만 있지 그것을 결단코 끝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란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스님은 언젠가 지인으로부터 아주 귀한 난초를 선물 받아 애지중지 키웠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볼일이 있어 산사를 내려가다가 아침에 물을 주고 밖에 내어놓은 난초를 실내에 옮겨 놓지 않은 것이 생각났답니다.
난초가 얼어 죽을까봐 방에 들여놓으려고 다시 산사로 되돌아가던 중에, “귀한 난초를 소유함으로써 작은 기쁨을 얻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버린다면 무소유가 주는 더 큰 기쁨과 자유로움을 얻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일 이후로 스님은 귀한 난초를 전부 나눠주고 말았답니다.
좋은 것이건 좋지 않은 것이든 거기에 마음이 묶여 있다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요한 8,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이란 주인에게 몸이 매여 있고 행동의 제한을 받으며 소유물로 간주되는 사람을 뜻하지요. 복음에서 말하는 종이란 말은 “영적인 차원에서 악에 얽매인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습관적인 죄를 곧잘 범하게 되는 것을 악습이라고 하는데, 이런 악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죄가 자기 인격의 일부가 되어서 유혹의 순간마다 죄의 지배를 허용하게 되고, 마침내 죄의 종이 되어 버리고 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죄가 지배하면 죄의 종이 되지만, 그리스도께서 지배하시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로마 6,22 참조)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진리를 깨닫고 참되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주님 말씀 안에 머물며 참된 제자로서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가진 고질병 -말씀을 한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습관- 과 불치병- 말씀을 듣기는 잘 듣지만 그 말씀이 심장으로 내려가 구체적인 삶에로 연결되지 않고 귀에서만 맴돌다 사라지는 증상 - 을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생활화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말 안에 머물면”이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바로 매일 매일의 우리의 삶을 통해 증거 하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묵상하며 본받으려고 노력한지도 벌써 5주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에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아집과 이기심으로 가득하여 무엇이나 먼저 비판하고 따지며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부정적인 생각을 버릴 수 있을 때만이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절망적인 것만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잘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 놓지만,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잘 기억하려 하지 않고 가슴에 새기려 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립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의 말을 귀담아 듣고 오래 기억하고자 하고 가슴 속에 간직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되고, 기억하게 되며, 마음 속 깊이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박재순 씨가 지은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나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남편이 공부하느라고 한창 바쁘고 경제적으로 어려웠을 때 아내는 한국 식당에서 일을 했다. 어느 날 설렁탕이 많이 남아서 남편에게 주려고 가져왔다. 남편이 먹으려고 보니 설렁탕에 담배꽁초가 들어 있었다. 한동안 먹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먹지 않으면 설렁탕에 담배꽁초가 들어 있는 것을 아내가 알게 될 테고 그러면 아내가 가슴아파할 걸 생각해 남편은 설렁탕을 남김없이 먹었다. 그러고 나서 말없이 뒤뜰로 나가 오래 울었다. 아내는 이 일을 모르고 있다가 세월이 흐른 후에 남편의 제자한테서 들었다고 한다.”
피차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 삶을 통해 보여준 참으로 아름다운 사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미사를 봉헌하며 참으로 우리들이 주님의 그 큰 사랑을 본받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아집과 이기심을 버리고 이웃을 아니, 나와 가장 가까운 바로 우리의 가족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물고 있음을 체험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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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다니엘 예언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저자는, 시리아의 셀레우키아 임금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에 일어난 종교 박해의 상황을 나타내고 그들의 신앙에 충실한 유다인들을 지키려고,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배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해 줍니다.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웠던 것처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도 자신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는 모든 이를 사형에 처합니다. 다니엘의 젊은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임금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아 사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에서 세 젊은이를 구해 주시고 불경한 임금은 회개하게 됩니다.
박해는 의인의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선과 악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학대와 고문에도 자신의 내적 자유를 지키며 하느님의 은혜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맙니다.
초기 박해들부터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으나 하느님을 찬미하며 견디어 낸 세 젊은이로 표상된 교회를 보게 됩니다.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적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응답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마음을 지닌 자유를 표상합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태도를 닮아 가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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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이는 이미 제자 된 이들에게, 참으로 제자 되기를 초대하는 말씀입니다. 곧 ‘자유’로의 초대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고 우리가 그분 안에,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는 ‘상호내주’(perichoresis)를 말해줍니다. 이는 그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내주나 거주가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교환, 곧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서로 향하여 있어서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만이 진정, 저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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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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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8,32)
<진리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걱정과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 지금 여기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오늘은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두 분의 형제님께서 비상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날입니다.
한 분은 췌장암으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분(64세)이시고, 다른 한 분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90세)이십니다.
두 분 모두 어제 방문교리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4대 핵심 교리인 '천주존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강생구속', '상선벌악'의 교리를 잘 받아들이셔서 내일 세례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두 형제님들의 자매님들께서는 현재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나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에 대한 것과 특히 죽음에 대한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갑니다.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 말 안에 머물러라. 그러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머물러 있는가?'
'돈인가? 건강인가? 권력과 명예인가?'
'나는 지금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가?'
'정말 자유와 해방을 누리고 싶은가?'
언제나 깨어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 독서가 전하고 있듯이 타오르는 불가마의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처럼 어떠한 고통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와 해방의 기쁨과 행복이 지금 나와 함께할 수 있도록 예수님 안에 머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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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자유>
요한 8,31-42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나는 자유>
스스로
있을 수 없는
나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계시고
모든 것 있게 하시는
하느님께 매여
비로소
나는 자유
스스로
할 수 없는
나마저 버리고
스스로 하시고
모든 것 하게 하시는
하느님을 따라
비로소
나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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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이런 유머가 생각납니다. 어느 고급 주택가에 불이 났습니다. 마침 그 근처에 있던 거지 부자가 불구경을 하고 있었지요.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는 아무 걱정이 없네요. 불이 나도 탈 집이 없으니까요.”
이 말에 아버지 거지가 말합니다.
“다 아비 잘 둔덕이다. 나에게 감사해라!”
뭐 생각해보면 이것도 감사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하지 못할 것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요? 모든 것이 다 감사할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하고 대신 불평불만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께 감사했고, 이것이 그에게 더 큰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사는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은 세상의 것에 연연하면서 늘 구속된 느낌입니다.
작년 코로나바이러스의 대유행으로 인해서 몇 차례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적은 인원이라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평범했던 일상이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큰 감사의 순간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고통, 시련의 순간이 어쩌면 감사를 느낄 수 있는 바로 전 단계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을 더 느끼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 구속의 삶이 아닌,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신앙을 시험하십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은 진리를 알게 됩니다. 진리는 곧 그리스도이며, 그분은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은 이들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죽음과 부패와 가변성에 종속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하지만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따라서 참회로 죄의 굴레를 끊고 눈물로 죄를 씻어야, 예수님께서는 주시는 아들과 딸들을 위한 참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죄가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자유로울 뿐입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내세우는 대신 그보다 더 고귀한 것에 눈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었더라면, 진정한 자유를 찾아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자유의 삶을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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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멘토}
부모의 역할과 임무는 자녀에게 무엇일까요? 자녀에게 보호자의 역할과 임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식주를 챙겨주면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줍니다.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는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멘토의 역할과 임무는 무엇일까요? 짊어지고 있는 짐을 알아채고, 그 짐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비전을 제시하고, 응원과 지지를 해 주며, 엄격한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분명히 부모와 멘토의 역할은 구분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역할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 우리는 혼란을 겪습니다. 부모에 대한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가 자신에게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응원과 지지를 해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자녀인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에게 당연히 원망해야 합니까? 아니지요. 부모에게 멘토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좀 더 부모와의 관계 안에서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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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 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치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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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유의 여정>
-진리, 자유, 찬미, 섬김, 행복-
자유롭습니까?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과연 자유롭다고 대답할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희랍인 니코스 카잔스키스의 묘비명에는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라는 세문장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끼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역사’라는 책의 제목도 ‘더 큰 자유를 지니기위해(With Greater Liberty)’입니다. 하여 수도자는 물론 진정 참 삶을 원하는 자의 삶은 자유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자유로워지는 삶인지요?
참으로 자유는 인간에게는 본능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이요 자유로울 때 참된 행복이요, 자유롭게 하는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하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불암산 배경의 하늘입니다.
-“하늘을 본다.
텅비어 있는 하늘
자연스럽게 뻗는 나뭇가지들
하늘은 사랑이다, 자유다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1997.3
하늘이 상징하는 바 자유입니다. 답답할 때 눈들면 하늘이듯 누구나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누리는 내적자유의 정도는 다 다를 것입니다. 새삼 자유도 능력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자유의 성장과 성숙이 가능할까요?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의 삶도 상당한 내적 자유를 요구합니다. 참으로 자유로워야 기쁘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도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선물로 주어진 자유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유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진리를 찾는 사람입니다. 진리에 대한 항구한 열정과 사랑이 자유롭게 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진리는 막연하지 않습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제자되어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살 때 비로소 자유의 시작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바로 진리는 자유의 열쇠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 주님의 제자가 되어 살아갈 때 진리를 깨닫게 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아가는 ‘깨달음의 여정’이 바로 자유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깨달음의 은총이 얼마나 귀한지요!
진리를 깨달아 가면서 자유로워지는 삶이요 비로소 무지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라면 그런 삶은 무가치한 무의미한 삶입니다. 부단히 깨달음을 추구할 때 비로소 영적 삶이요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결정적인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주님이 아니곤 이런 자유에 대한 명쾌한 답을 어느 누가 줄 수 있을런지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참 자유인이 있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뿐일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때 비로소 우리도 정녕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아닌 아버지의 자녀로서의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겐 죄의 종으로, 세상의 종으로 사느냐 혹은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인의 삶이냐 둘 중 하나이겠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일치가 자유에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깊어지는 내적 자유의 삶이요 결국 자유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과의 일치가 참된 자유인의 삶에 결정적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지옥같은 환경 속에서도 주님과 하나되어 살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음을 오늘 제1독서 다니엘서의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세 청년이 입증합니다.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고백을 통해 자유의 비결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볼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이 신의 아들 같구나”
아, 바로 넷째 사람이 상징하는 바 우리와 늘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도반이자 반려자이자 동행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임금의 하느님 찬미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는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의 세청년은 말 그대로 참 자유인의 모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끊임없이 찬미를 드리는 우리 수도자들의 모범입니다. 세청년은 불가마 속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그 일부이지만 원래의 찬미가는 한없이 깁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축일이나 주일 아침 성무일도때 부르는 다니엘서의 찬미가입니다.
찬미의 수행,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찬미의 순수, 찬미의 자유입니다. 참으로 찬미의 하느님 맛으로 살아가는 수도자들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끊임없이 바치는 하느님 찬미가 수도자는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을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결코 값싼 자유는 없습니다. 부단한 수행과 영적훈련의 열매가 참 자유입니다. 하여 평생 매일 끊임없이 사랑의 찬미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사랑의 수행이, 사랑의 찬미가 사람을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자유가 궁극의 가치는 아닙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만으로는 부족하고 무엇을 위한 자유를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자유이니 바로 섬김의 자유입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자유입니다.
하여 한결같은 사랑의 찬미 수행은 우리를 순수하고 자유롭게 하면서 더욱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에 투신하게 합니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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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진정한 자유가 어디에서 오는지 이야기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말씀 안에 머무르면, 차츰 그 말씀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그 말씀이 내면에 녹아들어 영혼과 존재 전체로 번져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깊이 머무르는 이는 자신과 말씀을 칼로 베어내듯 분리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말씀이 곧 진리이고, 말씀을 하시는 분 또한 진리십니다. 말씀을 껴안은 이는 진리를 부둥켜 안은 것과 다름 없습니다. 진리가 그의 품에서 그를 깨우치고 밝혀 줍니다.
진리를 깨달은 이는 사고와 행동에 있어 자유를 획득하게 됩니다. 삶의 정수를 관통하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메뉴얼을 일일이 지시받지 않아도 그에게는 전체로 조망되는 지평이 있습니다. 진리이신 분과의 만남과 일치는 한 존재를 관통하여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를 선사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다니 3,18)
우상에게 절 하라는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명을 거역한 이스라엘 청년들이 불가마에 던져질 위기에 처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위협에도 굴하거나 동요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이 곤경에서 구해 주시리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혹 당장 이 상황을 모면하는 구원이 오지 않는다 해도 거기에는 분명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바가 있으리니, 그 또한 개의치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당장 자신들의 안위는 그닥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니까요.
이들의 믿음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위기 앞에서 쉽게 신의 존재 여부까지 들먹이며 흥정하기 일쑤인 우리네 나약한 신앙을 부끄럽게 합니다. 존재와 생명을 관통하는 진리를 깨달아 주님 안에서 자유를 찾은 이에게는 행운도 불운도, 빛도 어둠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웃음도 눈물도, 단맛도 쓴맛도, 풍요도 가난도, 성공도 실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를 뒤흔들어 전복시킬 건 별로 없는 셈이지요. 주님에게서 오는 건 모두가 다 주님의 선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다니 3,92)
삶에 집착하지 않는 이는 죽음에도 초연할 수 있기에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설령 불 속에 던져진다 해도 상처를 입지 않고 자유도 제한을 받지 않지요.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하는 불길 속을 거닐며 그 거칠고 혹독한 세력들과 유유히 공존합니다. 진리 안에서 진정 자유를 얻은 이는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에 머물러 진리를 깨닫고, 진리가 주는 자유 안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포용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진리와 자유의 원천인 말씀이야말로 삶의 고된 질곡을 견디어 나가게 해 줄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이토록 복된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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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믿음은 되어감이요 성숙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성숙해짐)이다. 옛 아브라함, 이삭, 요셉, 다윗처럼 넘어지고 마치 낡은 거미줄처럼 바람에 날리며, 하느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연약함을 인정하고, 절박하게 주님의 손길을 <기다림>과 <하느님께 안기는 것>이 믿음이다.
♣세례를 받아 새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마치 이민 갈 사람이 한국 세간살이를 그대로 가지고 가지 않고 그곳에 맞추어야 하기에 최소한의 것만 가지고 떠난다. 그곳의 말을 새롭게 배우고 그 문화에 적응하며 새로운 세상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시각이 달라져야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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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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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UtNBIiBV3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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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진리가 너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진리의 여정은
십자가의
여정이다.
십자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욕망에서 죽고
죄에서 죽어
하느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생명의
참된 자유이다.
밀알이
죽지 않고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이치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자신을
우리에게
건네신다.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전부 주시는
진리이다.
진리의
결정체는
분명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자기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돌아서게 하는
참된 진리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로
우리들 다스리신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일상을 사신다.
참된 진리는
생명을 나누고
생명을
살리신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
자유로운
사람이다.
끝내 십자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임을 믿는다.
십자가의 죽음이
부활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는
사순이다.
꽃이 피고
꽃이 지는
십자가의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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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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