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근대 예술가 100년 서화 전각 명인 낙관 인감 :황빈홍
近百年书画名人印鉴047:黄宾虹
소스:이페어케이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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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빈홍(1864-1955), 원안후이성 휘주(徽州, 지금의 황산시)는 저장(浙江)성 진화(金華)에서 태어나 고향 노숙현 담도촌(潭渡村)에서 자랐다.초명은 무질(無質), 일명 원길(元吉), 후역명질(後易名質), 자는 박존(朴存), 호는 빈홍(濱虹), 중년(민국정무간) 역자빈홍(易字賓虹)으로 글씨를 바꾸어 행하였다.별서여향만년서홍서,황산산중인.근현대 저명한 화가, 학자, 산수를 잘 그려 산수화 일대의 종사가 되었다.
1865년 1월 27일생, 이른 나이우시사, 동맹회, 남사, 국학보존회 등에 참여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화리·화리를 깊이 연구하였다.국수학보·신주시보·상무인서관 등에서 편찬했고, 주신주국광사에서 '신주대관'을 편찬했다.신화예전, 베이핑예전, 중앙미원 화동분원 교수, 전국정협 위원을 역임했다.학식이 풍부하고 저술이 풍부하며, 시·서·화인 및 감상 모두 정밀한 중국 근현대 예술사의 한 세대이다거장.
열두 살에 조경전, 응근생, 이명선이영당은 학문을 배워 오경을 졸업하고 시를 익혔으며, 13세에 회박응동자시(回 应應童子試)로 상위권에 올랐다.14세에 동생인 무경(茂庚)과 족조카 숭보(崇保)를 데려와 응원시(應院試)를 하고, 16세에 김화려정서원(金華麗正書院)에 급제하여 이오진춘(義烏陳春)에서 승습하고, 17세에 봄에 응원시(應院試)를 받아 준(準)을 얻었다.23세에 귀박응원시(歸宿應院試)로 곡식을 채우고 서계 왕중이(汪仲伊)에게 물었다.스물여섯 살에 담도마을로 돌아와 서계 왕중이에게 물었다.스물아홉에 거업을 그만두고, 도착한다.남경은 좌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38세에 《빈홍집인》으로 집인하고 서문을 작성하였다.40세에 《빈홍집인존(濱虹集印存)》으로 서명하다.42세 신안중학당 교수.43세에 허승야오 장웨이 천거병 왕율번 등 비밀조직 황사를 조직해 시주로 혁명을 고취했다.44세에 혁명당으로 고발돼 상하이로 망명해 황제(黃節), 덩실(鄧實)이 세운 국학보존회에 가입했다.덩은 46세 봄, 『신주국광집(神州國光集)』과 『국수학보(國修學報)』의 편집자를 맡아 상하이(上海)에 머물렀다.신주국광사에서 동료 채수와 교제를 맺고 서로 화예를 겨루며 남북 종회화를 하나로 묶어 중서화학을 소통하는 변법 시도를 시작했다.47세에 중국서화연구회(해상제개관서화회)에 가입했다.48세의 여름과 가을을 맞아 안후이성과 함께 《안후이선일보》를 기획·설립하였다.49세에 선철과 함께 금석서화 단체인 정사(貞社)를 결성해 사장을 지냈고, 7월에는 상해무상중학교 동(同)을 지냈다.50세에 '주합재'라는 골동품 가게를 차리고 친구를 만났다.55세에 정서국이 있다.56세에 미술주간지 편집장을 지냈다.57세 맹추, 《빈홍잡재》라는 책이 인쇄되었다.59세에 상무인서관 미술부 주임을 맡았다.60세에 임제비 아저씨가 만든 구름서화회(사)에 가입했다.61세 봄, 왕이팅(王一亭)·우창석(吳昌錫) 등 11명과 함께 장쑤(江蘇)성 제1회 미술전시회 중국화부 심사원으로 선발됐다.62세에 유정서국에 복입해 『중국명화집(中國名畵集)』을 편찬했다.9월에는 광둥국화연구회에, 12월에는 상하이예관학회에 각각 가입했다.65세에 월간 국수의 명예 편집인을 맡았고, 3월에는 왕성위안 등과 국화 보습소를 열었다.도씨의 초청으로 남대 중국화연구회 강석을 겸임하고, 신주국광사미술부 편집주임을 맡았다.증희·진강숙·유검화·장선완·대지곤중·마화나·웅송천 등과 함께 난만사를 조직하여 사장으로 추대되어 《난만사동인화집》을 펴냈으며, 66세에 상해미전국화전문이론과 시문교수 겸 신화예술대학 교석을 겸임하였으며, 춘은 《국수월간》 명예편집인을 설립하였으며, 2월에는 왕이정·증희제인 3회 청청서화전람회를 조직하였다.추는 신화예에 의해 국화 교수로 특별 초빙되었다.68세에 안휘총서편인처편심회 회원으로 추대됐고, 수집본본상무회원을 겸했다.69세에 《화학월간》 편집장을 맡았으며, 11월에는 쓰촨예술전문학교에서 교동(校動)으로 초빙되어 중국화학과 주임을 겸하고 있다.70세에 청두 서화 동아리 룽사(龍社)에서 출판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초가을에 겸남대학교 중국화연구회 산수화의 지도교사를 맡다.71세에 중국화회 2기 감사위원에 선출됐고, 3월 바이촨서화회 이사로 선임돼 상하이시 박물관 임시 이사회 이사로 재직했다.72세에 안후이(安徽) 황산(黃山)건설위원회 상무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위촉됐고, 3월에 황산금기서화사(黃山禁器書畵社)를 발족했으며, 6월에는 학술세계 저술주임을 맡았다.73세에 중화미술협회 주최 제1회 미술전람회 준비위원으로 추대됐다.74세에 전국미술연구학회 임시이사로 선임됐고, 4월에는 베이핑예전의 초청으로 북상했으며, 8월에는 고물진열소 국화연구원(관)을 맡아 베이징예전교수로 경화미전을 겸직하고 있다.78세에 《고옥인》 한 권을 편찬하였다.86세에 국예에 교수로 초빙되었다.90세에 중국미협 상무이사와 중국문학예술계연합회 제2기 전국위원에 선출됐다.91세에 화동미협 부주석에 선출돼 문화부에서 중앙미원 민족미술연구소(현 중국예술연구원 미술연구소 전신) 소장으로 임명됐다.92세에 병치료를 하지 못하고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는 항저우 시 외곽의 協山 묘지(지금의 남산 묘지)에 묻혔다.
어려서부터 시문 경사를 전공하고, 서화와 전각 등을 배웠다그러면서 황생, 유헌정, 고염무, 황종희 등 명나라 유민의 저서를 탐독했다.여섯 살 때 가장(家藏)의 저애 산수를 모사해 양주(揚州)에서는 진숭광(陳崇光)으로부터 화훼를, 안경(安慶)에서는 정산(鄭山)으로부터 산수를 배웠다.정련 전통과 관심사생(情硏思生)이 함께 진행되었는데, 일찍이 "신안화파"의 영향을 받아 건필담묵(乾筆潭墨)과 소담청일(疏密淸日)을 특징으로 하여 "백빈홍(白賓虹)"이 되었으며, 80세 후에는 흑밀중량(黑密重重重重), 흑리투명(黑里投明)을 특징으로 하였다.'흑빈홍(黑賓虹)'으로, 이류방(李流芳)·정수(程 以及)·곤잔( 残 弘)·홍인(弘仁) 등 회화 기법을 구사하였으나 법송(法宋)·원(元)의 집안을 겸하였다.장법의 허실·번간·소밀의 통일을 중시하고, 붓을 전서처럼 쓰고, 귀를 씻고 경청하며, 힘이 있고, 행필이 근엄하며, 종횡무진하여 '흑·밀·후·중'한 화풍, 즉 붓을 수십 겹 쌓고 층층이 두터워진 것이 그의 산수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색채에는 수륜묵장과 원기 왕성한 수묵 산수도 있고, 단청 알록달록한 것도 있다청록색에 색칠을 하고, 더욱 색칠을 하는 발묵중채, 그리고 순전히 선을 사용한 초묵갈필.상속과 창조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어느 가필법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지만 전혀 옛사람이 아니다.그의 화조화는 우연히 한 그림으로 아담하고 청일하여 이채롭다.
서예사 승종정문과 진위, 행초취법왕헌지, 안진경은 《정문공비》, 《석문명》, 저수량 등을 해서 취법하였다.뭇사람의 장점을 널리 취하고 자기의 뜻을 나타내다.
저서로는 《황산화가 원류고》와 《홍려화가 있다담·고화미·화법요지·금석서화편·고인개론·빈홍초당인보·감고명화론·도새문자합증·고저논증·고문자석·빈홍잡저·빈홍시초 등이 있고, 등실과 함께 '미술총서'를 편찬하고 있다.대표 작품으로 《산거연우》《계산낚시》《기러기》가 있다탕기유, 《신안강주중작》, 《부춘강도축》, 《아미용문협》, 《송설시의도》, 《화훼사병조》, 《설색산수도》 등
黄宾虹(1864-1955),原籍安徽省徽州(今黄山市)歙县,生于浙江金华,成长于老家歙县潭渡村。初名懋质,又名元吉,后易名质,字朴存,号滨虹,中年(民国丁戊间)易字宾虹,以字行。别署予向,晚年署虹叟、黄山山中人。近现代著名画家、学者,擅画山水,为山水画一代宗师。
1865年1月27日出生,早年激于时事,参与同盟会、南社、国学保存会等,后潜心学术,深研画史、画理。曾在国粹学报、神州时报、商务印书馆等作编纂工作,并主神州国光社编纂《神州大观》。历任新华艺专、北平艺专、中央美院华东分院教授、全国政协委员。学养渊博,著述宏富,诗书画印及鉴赏皆精,为中国近现代艺术史上的一代巨匠。
12岁从赵经田、应芹生、李灼先、李咏棠问学,五经毕业,习为诗;13岁返歙应童子试,名列前茅。14岁偕胞弟懋庚、族侄崇保赴歙应院试,列高等;16岁考入金华丽正书院值课,从义乌陈春帆习写真;17岁春返歙应院试,获隽。23岁返歙应院试,补廪生,问业于西溪汪仲伊。26岁回潭渡村,从西溪汪仲伊问学。29岁弃举业,至南京坐馆教书。38岁集藏印为《滨虹集印》,并为之作序。40岁成《滨虹集印存》,作序署名黄贽。42岁为新安中学堂教授。43岁与许承尧、江炜、陈去病、汪律本等秘密组织黄社,以诗酒鼓吹革命。44岁以“革命党”被人告发,亡命上海,加入黄节、邓实创办之国学保存会。46岁春,邓实邀任《神州国光集》、《国粹学报》编辑,遂留上海。在神州国光社与同事蔡守订交,彼此切磋画艺,开始将南北宗绘画合二为一以沟通中西画学的变法尝试。47岁加入中国书画研究会(该会翌年改名为海上题襟馆书画会)。48岁夏秋之际,与安徽同人发起筹办《安徽船日报》。49岁与宣哲发起金石书画团体—贞社,分任社长,7月任上海务商中学校董。50岁创办“宙合斋”古玩店,以画会友。55岁入有正书局。56岁任《美术周刊》主编。57岁孟秋,《滨虹杂着》全书印成。59岁任商务印书馆美术部主任。60岁加入任堇叔创建的停云书画会(社)。61岁春,与王一亭、吴昌硕等11人被推为江苏省第一届美术展览会中国画部审查员。62岁复入有正书局,编印《中国名画集》。9月加入广东国画研究会,12月筹组上海艺观学会。65岁任《国粹月刊》名誉编辑,3月与汪声远等开办国画补习所。应陶氏之请,兼暨南大学中国画研究会讲席;任神州国光社美术部编辑主任。与曾熙、陈刚叔、俞剑华、张善孖、大千昆仲、马骀、熊松泉等组织烂漫社,被推为社长,出版《烂漫社同人画集》;66岁兼任上海美专国画理论与诗文教授,又兼新华艺术大学教席;春为《国粹月刊》名誉编辑;2月与王一亭、曾熙诸人组织青青书画金石展览会;3月被推为教育部第一届全国美术展览会参考品部委员;67岁任叶恭绰创办的中国文艺学院(不久改名中国艺术专科学校)院长,未久辞去院长职,专任教授,并兼昌明艺术专科学校教席。秋被新华艺专聘为国画教授。68岁被推为安徽丛书编印处编审会会员,兼搜集版本常务会员。69岁任《画学月刊》主编;11月被四川艺术专科学校聘为校董,兼中国画系主任。70岁被成都书画社团蓉社选为出版部主任。初秋任暨南大学中国画研究会山水画导师。71岁当选为中国画会第二届监察委员;3月被百川书画会推为理事;此际,任上海市博物馆临时董事会董事。72岁被安徽黄山建设委员会常务委员会推为审核委员会委员;3月发起组织黄山琴棋书画社;6月为《学术世界》撰述主任。73岁被推为中华美术协会主办第一届美术展览会筹备委员。74岁被推为全国美术研究学会临时理事;4月应北平艺专之邀,北上任教;8月执教古物陈列所国画研究院(馆),并任北京艺专教授,兼职京华美专。78岁辑成《古玉印》一册。86岁被国立艺专聘为教授。90岁当选中国美协常务理事、中国文学艺术界联合会第二届全国委员。91岁当选华东美协副主席,被文化部任命为中央美院民族美术研究所(今中国艺术研究院美术研究所前身)所长。92岁因病医治无效去世,实年90岁,葬于杭州市郊协山公墓(今南山公墓)。
自幼攻读诗文经史,学习书画及篆刻,同时潜心研读黄生、刘献廷、顾炎武、黄宗羲等明代遗民的著作。六岁时,临摹家藏的沈庭瑞(樗崖)山水册,在扬州从陈崇光学画花卉,在安庆从郑珊学山水。精研传统与关注写生齐头并进,早年受“新安画派”影响,以干笔淡墨、疏淡清逸为特色,为“白宾虹”;八十岁后以黑密厚重、黑里透亮为特色,为“黑宾虹”。其绘画技法行力于李流芳、程邃以及髡残、弘仁等,但也兼法宋、元各家。重视章法虚实、繁简、疏密的统一,用笔如作篆籀,洗耳恭听练凝重,遒劲有力,在行笔谨严处,有纵横奇峭之趣,形成“黑、密、厚、重”的画风,即积笔墨数十重,层层深厚,是他的山水画最显著的特点。色彩上有水晕墨章、元气淋漓的水墨山水,也有丹青斑斓的青绿设色,更有色墨交辉的泼墨重彩,以及纯用线条的焦墨渴笔。从继承和创新的角度来看,可以发现古代某家笔法的影子,但又完全不是古人。他的花鸟画,偶一为之,雅健清逸,别具一格。
书法师承钟鼎文和晋魏,行草取法王献之、颜真卿,楷书取法《郑文公碑》、《石门铭》、褚遂良等。博采众长,出以己意,浑朴沉雄之中隐含着清刚秀逸。
著有《黄山画家源流考》、《虹庐画谈》、《古画微》、《画学编》、《画法要旨》、《金石书画编》、《古印概论》、《宾虹草堂印谱》、《鉴古名画论》、《陶玺文字合证》、《古籀论证》、《古文字释》、《宾虹杂著》、《宾虹诗草》等,与邓实合辑《美术丛书》并有辑本《黄宾虹画语录》。代表作品有《山居烟雨》、《溪山垂钓》、《雁宕纪游》、《新安江舟中作》、《富春江图轴》、《峨眉龙门峡》、《松雪诗意图》、《花卉四屏条》、《设色山水图》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