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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정종1년 7월10일
1399년 7월에 백제의 후손이라 칭하며義弘(요시히로)가 땅을 청했고 정종은 300결 정도줄까? 라는 말을 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義弘은 大内義弘(오오우치 요시히로)를 말합니다. 근데 이 아저씨는 꽤나 이전부터 한반도하고 인연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한국주(韓國柱)가 일본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대내전(大內殿) 의홍(義弘)이 박거사(朴居士)를 시켜 군사 186명을 거느리고 동행하게 했다.
고려사 우왕 5년 5월조
(상략)앞서 일본의 오오우치 요시히로[大內義弘]가 자기 조상이 백제(百濟) 출신이라며 우리나라를 종주국으로 여기고서 진작부터 여러 섬의 왜적이 우리 영토를 침구하는 것을 금지하려고 하였다. 마침 본국 사신 한국주(韓國柱)가 큐슈[九州]로 가 해적질을 금지시켜달라고 요청하자 오노우치 요시히로가 자기 부하 박거사(朴居士)를 군사 186명과 함께 보내면서 한국주더러,
“우리 군사를 선봉으로 삼고 귀국의 군사가 뒤를 이으면 해적을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제의했다. 이때가 되어 왜적이 계림(鷄林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으로 침구해 왔기에 박거사가 군사를 거느리고 맞아 싸우는데도 하을지는 머뭇거리면서 구원하지 않았으므로 박거사의 군사가 크게 패하여 겨우 50여 명만이 살아 돌아왔다.
고려사 하을지 열전
20년전인 1379년에 이미 백제출신이라고 말하면서 군사를 파견을 한 인물이었습니다.(단 고려사가 만들어진것이 조선시대인 만큼 고려조부터 백제출신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수천단위의 왜구가 쳐들어 오고 있는데 꼴랑 100여명 보내 장난함? 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큐슈는 남북조 내전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터 였고 오오우치요시히로도 북조의 최일선에 서있던 인물이었던 만큼 많은 군사를 보낼수 없는 형편이기는 했습니다.
뭐 어쨌든 고려조 백촌강전투이후 처음 한일협동 군사작전(?)은 패배로 끝났습니다만(백촌강전투도 그렇고 한일협동군사작전은 잘깨지내 상성이 안맞나........ 광개토대왕때도 그러더니), 이렇게 사서에 이름을 남길정도로 당시 고려에 큰 인상을 남긴것만은 분명했고, 조선이 세워진후에도 계속해서 외교를 이어나가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땅을 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물론 대신들은 극구 반대를 하게됩니다 권근등이
대개 토전을 하사함의 불가한 것이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토전을 저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요, 해마다 조세(租稅)를 실어 보내는 것이 공(貢)을 바치는 것 같으니, 두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해마다 사람을 보내어 친히 조세를 거두게 되면, 우리 백성이 해를 받을 것이니, 세 가지 불가한 것이요, 금(禁)하면 저들이 반드시 노여움을 품을 것이고, 따른다면 우리 백성에게 해가 될 것이니, 네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 사람들은 진실로 믿기가 어려우니, 뒤에 불순함이 있어서 그 토전을 회수하면, 그로 인하여 변흔(邊釁)을 이룰 것이니, 다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저들이 장차 책하기를, ‘내가 받은 토전을 자손에게 전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빼앗는가?’ 하고, 토전을 되찾는다고 이름하여 와서 우리를 침구(侵寇)하면, 저들은 바르고 우리는 잘못이 되어, 변을 장차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니, 여섯 가지 불가한 것이요, 우리 강토의 토전이 저들의 소유가 되면, 후세에 반드시 자손의 근심이 될 것이니, 일곱 가지 불가한 것입니다. 또 더구나 토전을 주는 것은 약한 나라가 땅을 베어 강한 나라에게 주어 화호(和好)를 구하는 일과 같습니다. 우리의 토전이 저들에게 공(貢)을 바치니, 우리가 저들의 변강(邊疆)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혹 불순한 일이 있으면 회수하기가 진실로 어려울 것입니다. 작명(爵命)으로 주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경(卿)에게 작명을 주는 것과 같으니, 우리의 위명(威名)이 저들에게 가(加)하여지는 것입니다. 저들이 만일 우리의 번신(藩臣)이 되어 진실로 불순한 일이 있으면, 대의(大義)로 책하고 그 작명(爵名)을 회수하여 봉록(俸祿)을 정지하더라도, 저들이 장차 무슨 말로 우리를 책하겠습니까? 경중(輕重)의 형세와 이해(利害)의 기틀을 환하게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하고 의논해서 신문(申聞)하여 시행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정종1년 7월10일
권근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풀어 말하면
우리땅은 애초에 다른나라 사람에게 주면안됨
그땅의 조세를 실어보내는 형태가되면 공물바치는 형태가되서 위신이 깍임
갸네들이 와서 조세거두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해를 입음
그렇다고 땅주고 조세거두는 것을 금지하면 갸네들이 빡칠것이고 그때문에도 우리나라사람들이 해를 입음
갸네들은 애시당초 못 믿을 애들이라, 나중에 문제생겨서 땅을 회수하려하면 그때도 문제가 생김
그리고 자기네 땅을 후손에게 전하는데 무슨 상관임 하고 하면서 그 명목으로 침략가능함
자국의 영토를 갈라주면 우리 후손들에게 문제가 생김
마지막으로 영토를 갈라주는건 약한나라가 강한나라에게나 하는 거임
그니까 봉작을 주는 것이 나음
인데요, 근데 우리의 우유부단하신 방과어르신께서 이때는 고집부리시면서
이미 끝난이야기임 더 하지 마셈 하고 고집을 부립니다(지 동생들한테나 좀 세게 나가보시지 ㅉㅉ)
그러자
박석명이 다시 상소하여
가만히 듣건대, 《춘추(春秋)》에서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분변을 삼간 것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달라서 화하(華夏)를 어지럽히는 계제가 싹트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춘추》의 의(義)가 전해지지 못하여, 한(漢)나라에서 남선우(南單于) 를 오원새(五原塞) 에 머무르게 하고, 사성(賜姓)하여 번신(藩臣)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유연(劉淵)· 유총(劉聰) 은 크게 중국의 근심이 되었고, 당(唐)나라에서 융적(戎狄)에게 원병을 구하였는데, 마침내 그 독을 입었고, 송(宋)나라의 두 황제[二帝]가 북쪽으로 순행하였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도 또한 금(金)나라와 화친한 까닭이었습니다. 역대에서, 융적(戎狄)에 대하여 어거하는 도리를 잃어서 도리어 제압을 당한 것을 소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우리 나라 동쪽에 있어서 대대로 변경의 근심이 된 것이 중국의 융적과 같습니다. 지금 육주목(六州牧) 의홍(義弘)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고, 백제(百濟) 고씨(高氏)의 후손이라고 칭한다 하여, 전지 3백 결(結)을 주어 채지(采地)를 삼게 하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의홍이 적을 토벌한 공이 있으면 전백(錢帛)으로 상주는 것이 가(可)할 것입니다. 산천(山川)과 토전(土田)은 천자(天子)에게 받았으니 사사로이 남에게 줄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왜인(倭人)의 사람된 품이 그 마음이 강퍅하고 사나와서, 변사(變詐)가 무상하여 예의로 사귀는 것은 없고, 오직 이(利)만을 생각합니다. 지금 의홍이 이미 육주(六州)의 땅을 차지하였으니, 그 인민의 많음과 갑병(甲兵)의 날카로움이 부족한 것이 없는데, 백제의 후손임을 밝히고자 하고 백제의 땅을 얻기를 원하니, 그 마음가짐을 알 수 없습니다. 만일 채지(采地)의 연고로 인하여 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허실(虛實)을 엿보아 불측한 변을 일으키면, 비록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또한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홍에게 금백(金帛)과 그가 청구한 대장경판(大藏經板)을 상주시고, 토전을 주지 마시면, 융적을 어거하고 공을 상주는 도가 적의(適宜)할 것입니다.”
이것도 간략히 풀어 말하면
중국애들이 오랑캐에들하고 친하게 지내다가 x된거 몰름?? 일본애들도 똑같은 넘들임 땅주면 우리도 x됨 그러니까 그냥 보물이랑 대장경만 주면 되염
임금이 사사(使司)에 내려 의논하게 했는데 정종의 고집이 통할리 없죠
문하 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성석린(成石璘)·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조영무(趙英茂)·정당 문학(政堂文學) 하윤(河崙)·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온(趙溫)이 낭사(郞舍)에서 진달한 것만 따르고 나머지는 좇지 않았다. 중추원(中樞院)에서도 역시 서로 득실(得失)을 말하였다
뭐 용의눈물을 보신 분들은 이해가 빠르시겠지만 성석린을 제외하고 죄다 이방원의 수족들이니 정종의 막무가내 행동이 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유약하신 정종아저씨도 참다참다 폭발해서
의홍이 우리 나라에 향(向)하여 정성을 바쳐 적을 쳐부수었는데, 그 청구하는 바는 오직 이 일뿐이다. 하물며 본래 토지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본가의 계통을 추명(推明)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실속 없는 은혜를 베풀어 실속 있는 보답을 얻는 것이니, 무엇이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설혹 뒤에 변이 있더라도 시기에 임하여 응변(應變)하면 또 무엇이 어렵겠는가!
갸네들이 잘해줬자나, 그니까 좀 줘도 되자나, 문제가 생김 그때 해결하면 되자나(그니까 대신들은 그 문제가 될 소지를 만들지 말라는 거자나).
라면서 끝끝내 땅을 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일본국 육주목(六州牧) 좌경 대부(左京大夫) 의홍은 본래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고씨(高氏)의 후손인데, 그 선조가 난을 피하여 일본에 건너가서, 대대로 상승(相承)하여 육주목에 이르러 더욱 귀하고 현달하게 되었다. 근년 이래로 대마도(對馬島) 등 삼도(三島)의 완악한 백성들이 흉도(兇徒)를 불러 모아 우리 강토를 침노하여 어지럽히고 인민들을 노략하여, 이웃 나라 사이의 화호(和好)를 저해하였다. 지난번에 대상국(大相國)이 의(義)로써 발병(發兵)하여 몸소 스스로 독전(督戰)해서 그 무리를 섬멸하였으니, 변경의 인민들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되어, 생민에게 해독이 없게 하고 두 나라로 하여금 화호를 닦게 하였다. 내가 그 공을 아름답게 여겨 그 공적을 말하기를, ‘참으로 잊지 못하여 〈그 공을〉 갚고자 생각한다.’고 하였다. 너희 호조 급전사(戶曹給田司)에서는 그 선조의 전지가 완산(完山)에 있는 것을 상고하여, 예전대로 절급(折給)하여 채지(采地)를 삼도록 해서 특수한 공훈을 포상하라.”
참 이 아저씨도 갑갑합니다;; 어쨌든 왕명은 조선에온 일본승려(당시 막부와 다이묘들은 한자에 능하고 교육을 받은 승려들을 통해서 외교를 했습니다)에게 전달이 됩니다만
만일 세계(世系)를 명시(明示)하여 주시면 전지를 주지 않더라도 또한 좋습니다
하면서 전지는 사양하는태도를 보입니다
외교관으로 파견되었을 만큼 조선조정돌아가는 눈치가 빠른건지 아니면 겸양하는 말인지는 모르겟습니다. 정종의 명령은 내려졌지만 또다시 반대상소가 올라오고, 결국 7월21에 일본사신이 돌아갈때는 대장경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됩니다;;
문제는 이 해에 땅을 주었다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뻔 했다는 거죠.
1399년 당시에오오우치 요시히로는 周防・長門・石見・豊前・和泉・紀伊 6개지방의 守護였고(위에서 6주목이라는 말은 이것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당시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는 1391년 남북조 합일이 이루어나아갈 즘 부터(1392년에 남북조 합일) 거대 슈고를 하나둘씩 정리하기 시작해갑니다 1391년에 六分一殿(당시 일본 전국이 66개 지방이었는데 그중에 11개지방의 슈고였기 때문에)라 불린 야마나우지씨(山名氏)를 토벌한것을 시작으로, 1395년에는 큐슈정벌의 제 1등공신이었던 큐슈탄다(九州探題)이 이마가와료우슌(今川了俊) 도 큐슈탄다이에서 해임(당시 그도 10개지방의 슈고였습니다 해임된 뒤에는 2개의 지방 슈고로 전락)시키고, 남은것이 오오우치 요시히로였습니다.
결국 오오우치 요시히로는 1399년 10월13일거병하기에 이르고 사카이(堺)로 진출(현 오사카부 남쪽)하여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応永の乱) 이때 오오우치 요시히로는 당시 관동의 가마쿠라 쿠보우(鎌倉公方)과 이마가와 료우슌과도 연계하려 하고, 구 남조 세력과도 연합을 꾀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하지만 결국 12월21일경 패하고 전사하게 됩니다.
오오우치요시히로가 혹시 패한뒤 조선으로 도망을 치고 거기서 힘을기른뒤 일본으로 다시 쳐들어갈 생각이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결국 개념있는 조선 신하들의 혜안으로 일본의 내전은 조선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됩니다. 물론 조선에게는 동복형제의 싸움인 2차왕자의 난과 (부자간의 대결인것 같은)조사의의 난이 기다리고 있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