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골 답사기
이동민
내가 한문을 배우는 이장우 교수는 유년기와 성장기를 보냈던 고향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지독히도 가난하였다는 이야기와 산골 마을이라서 호랑이가 더러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집안 어른 중에는 이마에 호랑이 발톱에 할퀸 자국이 있는 분도 있었다면 실감이 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높은 산이 코앞에서 가로막고 있는 첩첩 산골이려니 믿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낸 입구자(口) 집 이야기도 하였으므로 가난과는 앞, 뒤가 쉬이 연결되지 않아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하였다.
동양고전연구소의 종강 답사지를 영해로 정하였다. 장육사도 있고, 봉수대도 있고,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진 터도 있어서 두어 번 답사를 다녀왔던 곳이기도 하다. 양반 마을을 찾아가는 길은 처음이어서 기꺼이 신청하였다. 눈부신 햇살과 싱그러움이 넘쳐나는 푸르름, 그리고 산들 바람이 제 맛을 내는 초여름의 산천은 생기가 넘쳐난다. 시골 마을의 정취를 맛보기로는 가장 좋은 절기이다.
이장우 교수님의 고향 마을은 영해의 창수면에 있는 나라골이다. 숙종 때에 이조판서를 지낸 갈암 이현일이 40세까지 세거하였다는 양반 마을이다. 마을 안까지 버스가 들어갈 수 없어서 큰길에서 재령 이씨 종가까지는 걸어서 갔다. 이장우 교수의 생가이다. 마을 앞에는 너른 들판이 펼쳐져 있어 전망이 무척 좋았다. 동구 밖을 흐르는 물길도 작은 하천이 아니었다. 이장우 교수님의 호랑이 이야기를 듣고 지레 짐작한 산골 마을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지, 경제적 기반이 없는 양반 마을이란 생각할 수가 없지. 나는 너른 들녘을 바라보면서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이 중얼거렸다.
답사 팀은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후암 선생을 비롯하여 초서를 공부하는 사람은 현판이나 비석 글씨가 나오면 우 몰려서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숲과 나무반 팀은 몇 아람이 되는 나무나 낯 선 나무가 나오면 나무 박사인 박용구 교수를 찾기가 바쁘다. 종택 앞에 이르면 문중의 내력을 주고받는 이야기로 시끄럽다. 듣다보면 종택에 사신 분들은 모두가 훌륭하신 분들 뿐이다. 나는 이도저도 아니어서 귀 동냥하듯이 듣기만 하였다.
나는 미술사를 공부한답시고 가옥의 구조에 관심이 많다. 동양고전 답사팀은 가옥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재령이씨 종택도 입구자 집이었다. 그러나 행량채가 없었다. 사랑채 가운데에 중문이 있었다. 행랑채에 대문(중문)이 있고 안채를 바로 들여다보이는 문은 만들지 않은 것이 경상도 양반가의 양식이다 싶어서 관리하는 분에게 물어 보았다. ‘이 대문이 본래부터 있었어요?’ ‘있었지요.’라고 대답하였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재령이씨 가문에 관하여 이장우 교수님의 설명을 들었다. 어릴 때의 추억담에서 유학자이셨던 할아버지의 생활철학까지 들었다. 입향조 이래의 마을의 내력도 들었다. 나는 대문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선생님, 대문이 본래부터 사랑채 가운데에 있었습니까?’ ‘아냐 내가 어릴 때는 마방이었어.’
그럼, 그렇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있는 사실을 나 혼자만이 알아냈다는 것이 너무 흐뭇하였다. 마을 안길을 걸어내려 오면서 고랫등 같은 기와집을 여러 채 만났다. 안동 권씨, 무안 박씨, 등등의 종택이라고 하였다. 마을이 끝날 즈음에 입구자 집을 또 만났다. 평산신씨 종택으로서 19세기 말에 신재수가 지었다고 하였다. 예정 시간보다 너무 많이 지체되었다면서 이 고택에는 관심도 없었다. 서둘러 마을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어 이집 봐라.’
나는 걸음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안채와 안마당을 살펴보았다. 아주머니 두어 분이 나를 따라와서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를 보세요. 행랑채가 없다보니 대문(중문)을 사랑채에 두었네요. 대신에 사랑채의 한 쪽은 사랑채 역할을 하도록 안쪽은 벽으로 막아 두었네요. 다른 한 쪽은 행랑채 역할을 하도록 방을 안채 쪽으로 출입문을 두었네요. 대문 앞은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담을 쌓았네요.”
아주머니 한 분은 내 이야기를 솔깃해 하면서 집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굴을 보니 할머니쯤의 나이 같았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기분이 좋아서 연신 아주머니라고 불러 주었다.
집 밖을 나오니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큰길로 걸어가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19세기 말이라면 신분 변화가 일어나면서 조선의 양반들이 몰락해가는 시기이다. 새로이 집을 지으려고 하였다. 행랑채와 사랑채, 안채를 갖춘 양반가의 집을 지으려고 하니 돈이 모자랐다. 아무리 몰락하였더라고 양반가로서의 체통과 전통은 지켜야 한다. 집을 간략하게 축소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 행랑채를 없애고 입구자 집을 짓기로 하자. 평산신씨 종택이 바로 그렇게 하여 지은 집이라고 생각하였다. 전통과 혁신이 조화를 이루어서 지은 집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설명문에도 ‘경상도 양반가의 변천을 보여주는 집이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여러 양반 성씨들이 섞여서 살고 있는 마을에서 격이 떨어지는 집을 지어야 하는 집주인 신재수의 고뇌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쩌면 바뀌어 가는 세태에 적응하지 못하여 뒤로 뒤로 내몰리는 우리의 모습,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버스에 오르니 무엇하느라 우리를 기다리게 하느냐며 질책하는 시선이 따갑다.
2014, 6 울산문협지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