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chosun] [강천석의 아주 특별한 외출]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
심심할때 추억의 무료게임
9799
국립암센터 이진수 원장
이진수 “담배 끊으시죠. 발암물질이 60가지나 들었어요”
국립암센터 이진수(58) 원장은 ‘금연을 통한 폐암 예방 전도사’다. 이 원장은 담배가 식품, 약품도 아닌 기호품으로 애연가를 유혹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부모, 배우자, 직장 동료 등과 같은 흡연자 옆에서 어쩔 수 없이 ‘간접 흡연’을 해야 하는 상황은 반드시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한국 여성의 폐암은 다수가 간접 흡연에 의한 것이어서 이 상황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8월 12일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온 이 원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재떨이를 진작 치웠지만 이 원장의 민감한 코는 담배 냄새를 놓치지 않았다.
이진수/ 주필님, 담배 피우십니까.
강천석/ 네. 치운다고 치웠는데 그래도 냄새가 나나요.
이/담배부터 끊으셔야죠. 이 방과 주필님 목소리에서 담배 냄새가 많이 납니다.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강/제 목소리에서까지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런데 담배 끊는 게 정말 쉽지 않네요.
이/저도 10년간 담배를 피웠고 1985년에야 끊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만난 한 환자 때문이었습니다. 오클라호마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휴스턴까지 날아온 재력가였어요. 어머니, 아내, 자녀와 같이 왔었죠. 나이가 45세라 ‘젊으니까 치료하면 오래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10일 후에 사망했어요. 20년 동안 피운 담배 때문이었죠. 그의 죽음을 보고 금연을 결심했어요.담배를 피면 폐암에 걸릴 확률이 평균 15배나 높아집니다. 하루 한 갑을 피면 10배, 두 갑을 피면 20배 정도 늘어나죠. 담배에는 발암물질만 60여종이나 들어있어요. 플루늄이라는 방사선물질도 들어있고요. 그러니 담배는 독약입니다.
강/담배를 입에 무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그리고 마감시간에 쫓길 때 더 손이 자주 가더라고요. 몇 번 금연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무너지고 말았죠.
이/ 니코틴 중독 때문에 그렇습니다. ‘폐암이 나에게만은 예외일 것이다’라는 느낌이 ‘나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으로 바뀌면 끊기가 쉽죠. 환자들을 보면 정말 흡연여부가 건강과 직결된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어요. 영국에서의 연구 결과를 보면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평균수명이 10년 정도 차이가 나더라고요.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군인들에게 담배 보급이 많이 돼서 폐암 환자가 늘어난 면도 있죠. 군인들에게 담배를 줘서 진정효과를 노린 건데 전쟁 이후에 세계적으로 폐암 환자가 양산됐어요.
강/ 외국 사례를 단지 그 나라의 이야기로만 생각하고, 정작 자신이 피는 한국 담배에 대해서는 예외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지요.
이/ 어느 나라에서 만든 총이건 맞으면 죽는 건 다 똑같죠. 미국에서 만든 권총으로 쏴도 죽고 한국에서 만든 권총으로 쏴도 죽는 건 마찬가지잖아요. 한국인 사망 1위 암이 바로 폐암입니다. 위암, 간암, 대장암, 췌장암이 뒤를 잇고요. 폐암으로 매일 35명이 사망합니다. 1년이면 1만2000여명이죠. 종합적으로 보면 매년 13만명의 암 환자가 새로 생기고 현재 25만명이 투병 중입니다.
강/세계적 폐암 권위자인 이 원장께서는 대학 때 학생운동을 했다는 ‘전과’ 때문에 전문의 과정을 거칠 수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의대생이었나 봅니다.
이/ 당시 국민건강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걸리는 병, 즉 영양실조나 폐결핵에 대한 국가적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강/ 전문의 과정에 들어가지 못해서 거제도로 가게 된 겁니까.
이/ 그렇습니다. 거제도에서 ‘지역사회의학 프로젝트’에 연구원으로 참여했어요. 식수검사, 주민 진료 등 위생상태를 점검하는 역할도 했죠.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질병률을 크게 낮출 수 있으니까요. 그곳에서 군복무까지 마쳤습니다.
강/연구원, 의사, 군인 등 1인 3역을 했군요. 그런데 미국으로 가기 1년 전에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더군요. 49세에 위암으로 말이죠.
이/ 외아들이었기에 결혼 후 모시고 살았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복수가 차서 음식을 전혀 못 드셨죠. 보통 숨을 거두시기 전에 수의를 입히는데 어머니가 ‘나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말씀을 남기고는 운명하셨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 가서는 암을 전공하게 됐어요. 아내가 간호사였고 결혼하기 전에 미국 취업비자를 받아 놓은 것이 있어서 함께 가게 됐죠. 1978년 10월 31일 미국에 도착했는데, 그날이 ‘핼러윈 데이’였어요. 새벽에 미국에 도착했는데 너무 깜깜하고 집집마다 해골과 호박이 걸려있어 정말 무서웠어요.
강/문화적인 충격을 받았겠는데요.
이/그럼요. 제겐 충격 그 자체였죠. 입국 당시 아내도 만삭이었는데 너무 공포스러웠어요.
강/당시 미국의사면허증이 있었나요.
이/없었어요. 외국인의사면허증만 갖고 갔어요. 인턴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공식적으로 주선해주는 인턴매칭프로그램에 가입해야 하는데 그것도 몰랐어요. 제가 갔을 땐 이미 매칭프로그램이 끝난 후라 각 병원에 100통이 넘는 이력서를 보냈는데 아무 병원에서도 반응이 없었어요. 경기고·서울대를 졸업했다는 ‘한국식 자존심’이 다 구겨졌죠. 하지만 아내와 두 아이를 부양하는 가장이 어떡하겠어요. 돈을 벌어야죠. 그래서 수술실 보조의사 일부터 시작했어요. 시간당 3달러50센트를 받았죠. 의사와 보조의사는 들어가는 출입문부터 달라요. 하지만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새로운 기술로 시술하는 심장 수술을 경험할 수 있었어요. 뛰는 심장을 멈추게 하고 얼음으로 처리한 후 수술하고 다시 뛰게 하는 것이었죠. 2개월 정도 보조 일을 하고 정신 병동에서 환자 기록을 담당하는 ‘하우스 스태프’ 일도 했죠.
강/ 하우스 스태프 일은 얼마나 했나요.
이/ 3개월 정도 했습니다. 이후 노스웨스턴대에서 내과트레이닝을 받고 휴스턴의 MD앤더슨으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미국에 갈 때부터 암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세부 전공을 암으로 정했죠. 원래는 존스홉킨스대에서 장학금을 주겠다고 오라고 해서 그곳에서 좀 더 공부를 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아내가 학비는 그렇다 치고 생활비는 누가 대냐고 하는 거예요. 요즘은 맞벌이가 많지만 당시엔 아내는 살림하고 남편은 당연히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죠. 생활비까지 벌면서 학교를 다니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월급을 준다는 MD앤더슨을 택한 겁니다.
강/그곳에서 19년의 세월을 보냈죠. 암센터에서 ‘닥터 리’로 이름을 날렸다고 들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안 하는 분야를 하다 보니 더 유명해진 것 같아요. 당시에 폐암은 ‘치료약이 없다’ ‘애연가의 자업자득’이라고들 했고, 사망률도 매우 높은 암이라 의사들이 꺼려하는 분야였어요. 지원하는 의사가 거의 없었고, 남들이 안 하고 피하는 길을 가자는 생각으로 뛰어들었죠. 커리어를 쌓아나갔고, 1999년에는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건희 회장이 폐에 이상이 있으니 제가 있는 곳으로 와서 치료를 받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이전에 선경 최종현 회장이 다른 곳에서 수술을 받다 돌아가셨으니 수술보다는 치료하는 방법을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치료로 유명한 MD앤더슨을 선택한 거죠.
강/ MD앤더슨에서 자리를 잡는 과정에는 엄청난 노력이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이/일요일도 없이 살았죠.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딸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됐어요.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미안합니다. 그런데 그 딸아이도 결국 의사가 됐네요.
강/ 2001년 한국행을 가족회의를 통해 어렵게 결정하셨다고요. 귀국을 만류하던 가족에게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미션’을 강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영어회화 공부를 하기 위해 영어성경 공부 모임에 나가면서 신앙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봉사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요. 조국에서의 봉사가 제 미션인 것 같았어요. 또 나중에 제가 자리를 구하러 다니는 것보다는 좋은 조건으로 불러주실 때 와야 할 것 같더라고요.
강/ 미국에 있었을 때 말단비대증으로 투병생활도 했다면서요. 의사가 환자가 됐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이/ 정말 인정하기 싫었어요. 당시 골프를 배워서 새 장갑을 사려는데 사이즈가 맞는 게 없는 거예요. 발도 커지고요. 그땐 운동을 해서 근육이 늘었다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말단비대증이었죠. 혀도 커졌고 코도 심하게 골았어요. 이 모든 것이 말단비대증의 증상인데도 인정하기 힘들었어요. ‘설마, 내가?’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항상 정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제가 비정상이 됐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강/ 수술로 회복되셨다고요. 위험한 수술이라고들 하던데요.
이/ 예전에는 정말 위험한 수술이었어요. 두개골을 열고 뇌를 들어올려서 수술을 했거든요. 그래서 수술 중에 죽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이제는 콧구멍을 통해 수술을 해요. 저는 수술 전에 담담한 편이었는데 아내가 ‘할 말 없냐’고 하더라고요. 만일을 대비해서 유언을 들으려고 한 거죠.
강/ 환자에서 다시 의사로 돌아오니 환자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습니까.
이/ 그럼요. 이전에는 환자의 심리와 통증을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젠 환자들의 몸과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된 거죠.
강/2001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마음속에 담아온 온 목표나 포부는 무엇인가요.
이/ 솔직히 아무것도 없었어요. 기대를 하지 않았으니 좌절도 없었죠. 하지만 여기에 와서 차이점은 많이 느껴요. 미국과 한국 환자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암을 대하는 태도예요. 한국 사람들은 암을 죽는 병이라 여기지만 미국 사람들은 치료하면서 함께 사는 만성병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이런 문화를 개선하고 암의 정체를 철저히 밝혀 환자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싶어요. 똑같은 상황이라도 얼마나 긍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병의 치유 속도가 달라지거든요. 암은 이제 불치병이 아니라 만성병으로 봐야 해요.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암에 걸리는 사람은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이와 함께 좋은 치료제가 많이 나와서 충분히 암을 치료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이제는 ‘암에 걸리면 죽는다’가 아니라 ‘암에 걸리면 치료하면서 함께 산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강/그래도 폐암은 사망률이 매우 높지 않나요.
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좋은 약이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한국은 신약의 시판허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좋은 약이 나와도 허가를 받으려면 오래 걸리기 때문에 효과가 떨어지는 약을 써야 하는 거죠. 또 신약개발을 위한 임상실험 비용은 의료보험이 안 돼 제약회사가 모두 부담해야 해요. 그러니 국내에서는 외국 약의 복제품만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지난 30년간 국내에서 항암 후보물질은 937개가 개발됐는데, 정작 항암제는 3개밖에 시판되고 있지 않아요. 또 건강보험에는 보험이 적용되는 ‘급여’가 있고 보험적용이 안 되는 ‘비급여’가 있어요. 이 둘 중 하나가 아니면 불법이에요. 하지만 항상 제3지대가 있을 수 있잖아요. 제도 밖의 현실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허가는 받았지만 아직 시판되지 않은 신약을 환자에게 사용했던 것 때문에 소송이 종종 생겨요. 이를 ‘동정요법’이라고 부르는데 소송을 제기하면 불법이 되거든요. 이런 부분을 제도권으로 넣어줬으면 좋겠어요. 진료비가 너무 낮아 의료 서비스가 낮아지는 것도 문제입니다. 현재 초진료가 1만2000원, 재진료가 9000원입니다. 이 가격으로 좋은 의료 서비스를 기대하기는 힘들죠. 어느 병원에서든 3시간 기다리고 3분밖에 진료를 받지 못하지 않습니까. 진료비가 너무 싸다 보니 환자들은 ‘의료 쇼핑’을 하듯이 이 병원 저 병원 옮기면서 입맛에 맞는 의사를 선택하느라 치료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한 병원에서 깊이 있는 진료를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좋은 의사는 좋은 환자가 만듭니다. 의사를 믿고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강/대한민국 암센터 설립 목적이 암 발생 원인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건데요.
이/ 암 발생률과 사망률을 낮추고 치료를 통해 생존율을 높이는 거죠. 앞으로는 암에 대한 인지도를 더욱 더 높이는 게 중요합니다.
암 예방은 ‘얼마나 생활수칙을 잘 지키냐’에 있어요. 하루에 술은 두 잔 이하, 야채와 과일을 많이 먹고, 건전한 성생활을 하면서 정기검진을 잘 하면 많이 예방할 수 있어요. 물론 그렇게 해도 암은 생길 수 있죠. 아무리 불조심을 해도 불이 나는 것처럼요. 불이 나면 불을 꺼야죠. 불을 끄는 방법 중 가장 좋은 것에 ‘암 치료제 개발’이 들어가요.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인 지원시스템이 필요해요. 저는 이를 B & D(Bridging & Development·가교적 개발)라고 부릅니다. ‘B’는 신약 개발을 돕는 국가적 자금인 ‘Bridging fund’를 말합니다. 국가적인 성장동력의 일환으로 새로운 암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은 세계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어요. 이제는 단순히 성공사례가 없다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기보다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꿨으면 합니다. 수영에서는 한국 선수가 결코 금메달을 딸 수 없다고 생각하면 박태환 선수 같은 스타가 나오겠어요. 된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것 같아요. 꿈꾸는 자만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하잖아요.”
이진수 원장
1950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고, 서울대 보건대학원을 거쳐 미국에 건너가 1982년부터 2001년 미국 텍사스의대 MD앤더슨병원에서 폐암을 전문적으로 연구했다. 1999년에는 MD앤더슨병원에서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폐 질환을 치료해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1996년 제8차 세계 폐암학회 프로그램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2004년 세계폐암학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1년 귀국해서 국립암센터 부속병원 병원장에 이어 연구소장을 지냈고, 지난 6월부터는 제4대 국립암센터 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