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의 경기에서 전반전이 끝나고 나오면서 이을용 선수는 황선홍 선수에게 "형, 국민들이 나를 죽이겠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페널티킥 실수가 얼마나 큰 죄이길래 그러한 멍에를 짊어져야 하는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히딩크 감독도 100퍼센트 그를 지지한다고 하면서 축구란 그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경기중 실수 안하는 선수는 없고, 이탈리아의 바조도 네덜란드의 데부르도 스페인의 라울도 결정적인 페널티킥을 실수하였던 적이 있음을 볼때 페널티킥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것인지 잘 알 수 있다.
MBC 방송국은 미국과의 경기 다음날 선수들이 찬스를 놓치는 장면만을 편집하여 계속해서 되풀이 보여주면서 실수한 선수들을 죄인으로 몰고 갔다. 과연 거대 언론이 최선을 다한 선수들에 대한 대접이 그것 뿐인가?
축구는 감동의 스포츠다. 48년만에 우리 축구에 맺힌 한을 풀었고, 그것을 통해 감동 받았다. 4700만 국민이 모두 하나가 되어 열광했고 붉은 물결은 한반도를 몰아쳤다. 그 감격은 우리 국민이라면 모두가 느꼈을 것이고 우리는 승리를 통해 전율하였다. 4년 전 벨기에와의 피흘리는 전투를 통해 우리는 감동했었고, 그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축구에서 얻을 수 있는 감동은 경기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나이지리아의 웨스트 선수는 조국의 가난한 어린이를 위해 축구화 사주기 운동에 발벗고 나서 그들의 꿈을 키워준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플레이 메이커 오코차는 28살의 젊은 나이로 후배를 위해 대표팀 은퇴를 한다고 한다.
또한 덴마크 선수들은 SOS어린이 마을을 후원하며 불우한 어린이를 돕고자 앞장서고 있다. 대구의 보육시설인 SOS 어린이 마을은 덴마크 선수를 찾아가 그들과 훈련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으며, 선수들은 160만원 정도의 후원금을 모금하였다고 한다.
승리의 순간 뿐 아니라 패배의 아픔까지도 감동을 준다. 지단의 고개숙인 뒷 모습에서 바티스투타와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눈물에도 같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느낀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감동시킨다.
언론은 패배의 감동까지 전달할 의무가 있다
언론은 이러한 감동을 전달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선수 죽이기에 앞장 설 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 주어야 한다. 찬스를 놓친 설기현 선수의 표정이 굳어 갈때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 주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황선홍 선수의 모습을 편집하여 집중보도하여 진정한 감동을 전해주어야만 했다.
스포츠 투데이는 홈런왕 유상철을 내세우며 말초적인 기사를 싣고 있다. 이제는 설기현과 최용수가 새로운 축구계의 홈런왕으로 등극했다는 유치한 농담과 욕지거리를 자랑스럽게 기사라고 싣고 있다. 한번의 실수로 밤잠을 못자는 선수들의 심정을 헤아려 본 적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진정으로 승리를 얻고자 한다면 오늘의 실수를 위로해주고 더 잘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주는 것이 더 현명하고 성숙한 언론일 것이다.
반미 시위를 걱정하며 선정적인 보도를 기성 언론은 일삼았지만. 오히려 우리 국민은 그러한 언론을 질타했으며 비가 오는 가운데도 해산하면서 주변을 정리했고, 단 하나의 사건도 일어 나지 않았다. 성숙하지 못한 것은 국민이 아니라 기성 언론들이었다.
SBS의 송재익 캐스터와 신문선 해설위원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을 하였다. 미국 선수가 찬스를 놓치자 `미국에도 설기현이 있네요` 라고 하면서 뜨거운 더위 속에 풀스피드로 공격과 수비에 최선을 다한 설기현 선수를 욕보였다.
신문선 위원도 승리하지 못한 원인을 제공한 설기현 선수와 최용수 선수는 책임을 면키 어렵다는 칼럼을 중앙일보에 게재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책임을 지라는 것인가? 자책골로 인해 권총으로 피격당한 콜롬비아의 수비수 에스코바르와 같은 전철을 밟으라는 것인가? 신문선 해설위원의 해설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항상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경기를 잘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교체를 하고 있습니다"
선수가 최선을 다한다면 책임질 의무는 전혀 없다. 잘못이 있다해도 그것은 실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책임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군가를 반드시 역적으로 몰고가는 것뿐이다.
스포츠 조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을용 선수 속죄 투혼을 하겠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 다는 말인가? 고의로 페널티킥을 실축하기라도 한 것처럼 `속죄`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한 것은 이을용 선수를 죄인이라 규정지어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구나 부담감에 실수할 수 있는 것이며 단지 그 부담감을 이을용 선수가 짊어졌을 뿐이다. 오히려 회피하지 않고 나서준 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승리가 아닌, 감동을 주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오직 승리만을 바란다면 승리하지 못한 모든 선수들은 다 죽일놈이고 죄인이다. 그러나 승리보다 더 값진 것이 훨씬 많으며 90분 동안 모든 것을 잊고 열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한 선수들은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기쁨을 준다.
미국과의 경기후 믹스트 존을 통과하는 선수들이 인터뷰를 거부하자 외국 기자들은 욕을 해댔다고 하고, 우리 나라 기자들도 이것을 문제 삼아 선수들을 매너없는 선수들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러나 승자만이 대접받고 무승부나 패자는 죄인으로 취급한 언론이 이제와서는 침통한 그들의 심정을 보듬어 주지 못하고 매너없음 만을 강조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불성설이다.
월드컵은 축구이지만 전국민이 즐기는 축제의 마당이다. 그러하기에 광화문에서 시청에서, 전국의 도처에서 수십 수백만이 거리로 나와 붉은 카펫을 깐듯이 한 마음 한 목소리로 울고 웃고 탄식하여 즐거워했던 것이다.
이런 열정과 환호를 단지 16강이라는 올가미로 묶어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고 선수들을 매장시키는 언론이야말로 책임을 면키 어렵고, 죄인으로 형벌을 받아야만 한다.
선수들을 죽일 놈으로 몰아가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실수한 선수를 감싸주고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 국민들은 용기있는 국민들이며 따라서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 볼 것이며, 다음 경기에 더 잘해주리라 믿는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스런 전사들과 승리의 순간에도 영광과 환희를 같이 나눌것이며, 좌절의 순간에도 선수들과 함께 있어 외롭다고 느끼지 않게 할 것이며, 단지 패배의 책임은 선수들의 몫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몫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K리그나 학원에서 열심히 뛸때 텅빈 관중석을 채워주지 못했으며, 그들이 얼마만큼 고통을 인내하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평소엔 전혀 관심을 갖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기에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지 그들이 최선을 다해 후회없는 멋진 경기를 펼쳐주는 것 뿐이다. 그런 멋진 경기를 한 게임이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 뿐이다. 그러하기에 이을용, 설기현, 최용수 선수를 우리는 사랑한다.
은퇴 발표를 하며 죄송하다고 표현한 황선홍 선수에게 우리는 오히려 미안하고 감사한다. 홍명보, 황선홍 선수의 마음에 응어리가 풀릴 수 있도록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