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한비야가 찾아간 말리, 그 나라의 모든 것 <2>알카에다는 왜 말리를 택했나
역시나 문제는 알카에다였습니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예멘에서 미군에게 억눌려있던 알카에다는 아프리카 지역을 새 근거지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미 말리 북부는 알카에다 북아프리카지부(AQIM)가 근거지로 삼은 곳이었죠. 말리는 북으로는 AQIM이 태동한 알제리와 국경이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나이지리아의 보코 하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북동쪽에는 알카에다 연계 단체 ‘안사르 알샤리아’가 있는 리비아도 가깝습니다.
말리를 장악할 경우 안보가 부실한 서아프리카 지역을 모두 세력권 안에 넣을 수 있고, 리비아·나이지리아에 진을 치고 있는 알카에다 세력과 연계해 테러 모의를 용이하게 전개할 수 있습니다. 북아프리카에 테러 국가를 건설하기 원하는 알카에다에게 말리는 최적의 조건을 모두 갖춘 곳이었죠. 알카에다 또한 투아레그와 함께 리비아 내전에 참전했습니다. 투아레그가 카다피 편에서 무기를 공짜로 얻었다면, 알카에다는 반군과 함께 카다피의 무기고를 약탈하고 서방이 지원한 무기를 공짜로 취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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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2012년 3~4월 투아레그족이 말리 북부에서 독립을 선포하자 알카에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들에게 접근했습니다. 독립을 도와주겠다고 투아레그를 현혹한 것입니다. 투아레그는 확실한 지지 세력을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카에다는 영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슬금슬금 말리 북부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투아레그의 독립 선포 두 달 뒤인 2012년 6월 투아레그를 몰아내고 말리 북부를 차지했습니다. AQIM, 안사르 딘(이슬람 수호자라는 뜻), MUJAO(서부아프리카의 통일과 지하드를 위한 운동) 등 제대로 훈련받고 조직된 세 무장단체 앞에 투아레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AQIM은 말리에서 지난 수년간 납치를 벌여 몸값으로 1억 달러를 벌어들일만큼 조직 운영 자금도 풍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독 말리에 알카에다가 자리잡기 쉬웠을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빠른 인구 증가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말리는 매년 3%의 인구증가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즉 말리 여성 1명이 자녀 6명을 낳는다는 이야기죠. 지난 50년간 말리 인구는 3배 증가했고, 향후 50년간 3배 증가할 것으로 유엔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인구가 빠르게 는다는 것은 말리처럼 경제가 낙후되고 황폐한 국가에서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발생시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자원과 일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말리인들은 일자리와 먹을거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되고 그 결과 무장단체 가입에 대한 유혹이 커지게 됩니다. 또한 극단적인 이슬람 성직자들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서방에게 있다는 식으로 설교해 알카에다 가입을 부추기기도 하죠.
이 같은 양상은 말리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파키스탄에서는 빈곤가정이 급증해 학교를 보낼 돈이 없던 부모들은 마드라사(이슬람신학교)로 아이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재정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마드라사는 이슬람 원리주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고, 반미·반서방 사상을 주입했습니다. 여기서 교육받은 무슬림들은 알카에다 등 이슬람 무장단체로 가입해 서방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죠. 또 다른 알카에다 근거지인 예멘도 현재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높은 국가라고 미 외교전문 포린폴리시(FP)가 2013년 1월 보도했습니다. 2001년 9·11 테러범 15명은 사우디 국적이었는데 현재 사우디 출산율은 2.3%입니다. 또한 인구 10명 중 6명이 40대 이하로 알카에다 주장에 동요되기 쉬운 것으로 분석됩니다.
유엔은 2006년 출산율이 2.5% 이상인 국가 29개국 대부분이 심각한 폭력 사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통상 ‘2.5%의 원칙’이라고 부르는데요. 2.5%보다 출산율이 훨씬 높은 말리는 이미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는 얘기죠. 말리인 300만명이 스스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린이 17만5000명은 영양실조로 죽을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먹고 살기 힘든 말리 인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커지면서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것은 서방’이라는 알카에다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엾다는 것입니다.
알카에다는 언제나 ‘확고한 근거지’ 확보를 테러의 제1원칙으로 삼습니다. 빈 라덴의 친구였던 압둘라 아잠은 “모든 원리는 그것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 근거지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했죠. 동시에 알카에다는 언제나 해당 근거지 인근의 젊은 무슬림들과 연합해 세를 불려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2원칙입니다. 이런 면에서 알카에다에게 말리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죠.
프랑스, 옛 식민지 친구들 돕기 위해 알카에다와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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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싸움은 ‘투아레그 대(對) 말리 정부’에서 ‘알카에다 대 말리 정부’로 구도가 바뀌었습니다. 알카에다는 말리 정부가 있는 남쪽으로 무섭게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무기와 전투력을 갖춘 알카에다에게 쿠데타·과도 정부 구성 등으로 내분을 겪고 있는 정부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죠. 2013년 1월까지 알카에다는 말리 북쪽에서부터 밀고 내려와 말리 영토의 60%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프랑스 영토보다 넓은 땅을 알카에다가 차지한 것입니다. 당시 말리 북부는 전 세계에서 알카에다가 장악한 가장 넓은 지역이었습니다.
카터 햄 미 아프리카사령부 사령관은 2012년 12월 “말리 북부가 알카에다의 테러 훈련소이자 아프리카·중동·유럽 등에서 신입 멤버를 모집하는 기지로 활용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말리가 테러리스트·조직 범죄의 안전한 네트워크로 활용될 것”이라고 경고했죠.
알카에다가 말리 전역을 유린하면서 2012년 한 해 동안 말리에서 난민 10만 명이 발생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는 2012년 11월 3300명 규모의 다국적군을 말리에 1년간 파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인근에 거대한 알카에다 근거지가 마련되면 서아프리카도 곧바로 알카에다의 목표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계 최고의 테러 집단이 바로 옆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것을 ECOWAS는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죠. 또한 서아프리카 각국에 도사리고 있는 분리 독립주의자들이 말리 사태를 보고 저마다 독립을 요구하고 나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ECOWAS는 이 방안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을 요청했습니다. 안보리는 2012년 12월 20일 ECOWAS의 파병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경험 및 대테러작전 경험이 일천한 ECOWAS는 자신들의 힘만으로 알카에다를 상대할 자신은 없었습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국가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죠. 이들은 서방 국가 특히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서아프리카 지역은 제국주의 식민지배 시절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프랑스어를 쓰는 국가가 많을 정도로 프랑스와 끈끈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특히 말리 과도정부는 프랑스에게 적극적인 구애 작전을 펼쳤습니다. 프랑스는 식민 통치를 끝낸 이후에도 말리의 기업·학계·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친구처럼 지낸 말리 정부가 간절히 요청하는 도움을 프랑스는 뿌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프랑스는 서방 국가 중에 가장 먼저 2013년 1월 11일 알카에다 소탕을 위한 공습을 개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