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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2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1티모 6,2ㄹ-12
복 음 : 루카 8,1-3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자녀들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을 때,
부모는 자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가 전화나 SNS, 문자로라도 연락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으면 잘살고 있는지,
혹시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걱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먼저 조심스럽게 연락해 보았음에도 연락되지 않는다면 걱정은 더 커지고 맙니다.
하지만 자녀와 부모가 서로 연락을 자주 한다면 어떨까요?
부모의 걱정은 크게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과 연락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즉, 기도는 하느님께 연락해서 잘 지낼 수 있게 합니다.
성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을 가까이하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을 가까이하실 것입니다.” (야고 4,8)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든 다 알고 계신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의 연락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자주 연락하면서 훨씬 더 가까워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더 충만히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당신의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분입니다.
하지만 당신 혼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과 함께하셨고,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 복음에도 등장하듯 많은 여자들도 함께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가운데 여자가 있었다는 것은
당시 시대에는 커다란 물의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오직 남자에게만 종속되어 있었고, 율법을 지킬 의무도 없었으며
그 어떤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함께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다는 것을,
또 죄인이든 의인이든 상관없다는 것을, 즉 모든 이는 주님을 따라야 함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고 있습니까?
부족함이 없으신 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기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지금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주님과의 연락을 스스로 끊어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독서의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세상의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패배자는 머뭇거리고 망설이느라 에너지를 허비하지만,
이기는 사람은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신있게 뛰어든다(카를 크라우스).
자기들의 재산으로 시중을 들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면 걸맞은 응답을 해야 당연합니다.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감사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되면 더 큰 감사를 할 기회가 옵니다.
빈첸시오 성인은
“나누면 나눌수록 풍요로워지고 버리면 버릴수록 자유로워집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입니다. 사랑은 베풀면 베풀수록 풍요로워집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전하셨는데
제자들과 막달라여자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습니다.
그들 중에는 일찍이 악령과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서 행복을 찾았습니다.
그들은 악령과 고통이라는 시련을 통해서 주님을 만났고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했기에 모두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님과의 만남이 더 깊어졌고
나중에는 십자가 곁에도 설 수 있었고(루카23,49)
천사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소식을 듣고 이를 사도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루카24,10).
여인들은 주님을 만나 행복했고 자기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제자들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풀었지만, 보답을 바라지 않았고 자기네 재산을 바쳤지만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 숨은 공로자들입니다.
그들은 “은혜를 베푼 것은 모래밭에 새기고 은혜를 입은 것은 돌 판에 새겼습니다.”
재산은 이웃과 나눌 때 비로소 가치를 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도직 단체의 구성원이 이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궂은일을 도맡아 합니다.
때로는 오해를 사고 무시당하는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아시니까' 하면서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숨은 공로자가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시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갖 욕심에 사로잡혀서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됩니다”(1티모6,8-9).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화가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부자가 된다 하여도, 제 집의 영광을 드높인다 하여도 불안해 하지 마라.
죽을 때 그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으며 그의 영광도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한다”(시편4917-18).
따라서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주님의 일에 쓴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도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은총을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공로자가 됩니다.
지금 감사하십시오! 절대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만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참을 인(忍)이 셋이면 살인을 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왜 참아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이다.”
참을 인(忍)의 반대말은 화낼 노(怒)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화를 내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줍니다.
본당 사제가 화를 내면 공동체가 큰 상처를 받습니다.
형제가 화를 내면 부모의 가슴에 멍이 듭니다.
부부가 화를 내면 자녀들이 불안합니다.
내가 화를 내면 곧 후회하게 됩니다.
참을 인(忍)도, 화낼 노(怒)도 모두 마음의 문제입니다.
평소에는 참을 인으로 지내는데 욱하는 성격에 가끔 화를 내곤 합니다.
돌아보면 별것 아닌데 화를 내고 후회할 때가 많습니다.
며칠 전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평화신문의 지면이 ‘좌파성향’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였고, 그것이 지면에 보도되었는데
그런 기사는 좌파 성향의 기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예수님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일본의 주교회의도, 한국의 주교회의도, 아시아 주교회의도,
교황님도 일본의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좌파와 우파의 이념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다는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필요한 소중한 자원입니다.
모든 생명의 시작은 바다입니다. 바다는 생명의 터전입니다.
교회가 오염수 방출을 우려하고 반대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오염수를 바다에 방출하는 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비용의 문제입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비용이 더 들더라도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지만,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터전인 바다와 땅 그리고 공기와 물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익의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임계점에 다다르면 자연은 자본주의가 쌓아 놓은 바벨탑을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가뭄, 폭염, 화재’로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풍요해진 세상에 살지만, 인류는 터무니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함께 살아야 하는 다른 생명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무분별한 개발로 자연을 파괴하였고, 이는 기상이변과 코로나와 같은 자연재해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릇된 종교적인 신념으로 다른 문화와 종교를 배척하고 없애려고 하였습니다.
이념과 욕망의 늪에 빠져서 땅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뼈저리게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강대국의 욕심 때문에
국지적인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난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질과 자본을 얻기 위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양심과 사랑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십시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명을 밝혀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쁜 소식'이요, '하늘나라'의 선포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십니다.(루카 8,1)
그런데 이러한 일에 홀려 숙식을 같이하며,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니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열두 제자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시중드는 여인들이었습니다.(루카 8,3)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이를 선망하고 따라다닙니다.
정치가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정치꾼들을 따라다니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는 장사꾼들을 따라다니며,
주먹잡이가 되고 싶어 하는 이는 싸움꾼들을 따라다닙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이는 구원자를 따라다니었으니,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은 다양한 직종과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모두가 구원과 구원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을 뿐만 아니라, 믿는 바를 위해 투신하고 헌신한 이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이 믿는 것에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직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들'(앙드레 루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전 인격으로 따르고 온 마음으로 섬기며 시중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단지 고향이나 집 혹은 부모 형제뿐 아니라
자신의 욕망마저도 버렸다는 것이요,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과 소유물 혹은 재산뿐만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재능과 자신의 뜻마저도 바쳤다는 것이요,
‘온 마음을 다해 따르고 시중들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행동만으로 따르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정신과 뜻을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를 여섯 개의 동사로 표현해줍니다.
곧 우리에게 ‘제자 되는 길’을 여섯 개의 동사를 통해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함께 있다”, “함께 다니다.” “따르다”, “선포하다”, “전하다”, “시중들다.” 라는 동사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첫째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기도에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둘째로, 그들은 그저 함께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주님과 함께 다니는 이들이요, 주님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가는 이들입니다.
셋째로, 그들은 그토록 그분을 ‘주님’으로 추종하며, 실행으로 '따랐고',
넷째로, 그분을 따라 그분께서 선포하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였고',
다섯째로, 복음을 '전했으며',
여섯째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주님께 봉사하고 '시중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신과 힘을 다해 그분께 전적으로 헌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시중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이 여섯 가지의 ‘제자 됨’의 특성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지 들여다봅니다.
특별히, 순교의 달을 보내면서 먼저 예수님을 전 인격으로 따를 수 있는 은총,
곧 '예수님께 사로잡힌 자'임을 증거하고 순교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해야 할 일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본성은 이것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부족하니,
주님께서 당신 은총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간구하자.”(규칙서 머리말 41)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주님!
제가 믿기에, 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이미 저를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로 당신을 따를 것이며,
사랑으로 시중들고 당신이 하신 일을 할 것이며,
당신께 사로잡혀 당신이 원하신 바를 행할 것입니다.
늘 저와 함께 계시는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며,
마땅히 당신이 사랑하시는 작은 이들을 당신과 함께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헌신 봉사하며 따랐던 여자들이 나온다.
그들 중에는 대표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수산나, 요안나라는 여인이다.
이 여자들과 수산나는 복음에 그 이름이 전해질만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헌신적으로 도운 여자들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자가 설교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고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도 시키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으로 복음 전파를 도운 것이다.
그들은 오로지 주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데
구체적으로 아무 사심 없이 주님과 사도들을 도왔다.
이러한 모습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헌신적으로
주님의 사업을 도와왔고 지금도 여성들이 그러한 열성을 보이는 것은 또한 주님의 부르심이다.
이들은 주님의 사업을 돕는데 그들 사이에 어떤 시기나 질투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 그런 것이 있었다면 예수께서 그 봉사를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도 이 여인들과 같이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봉사하고 하느님의 뜻에 맞는 실천을 하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고 하면,
‘그건 네가 시작한 일이니 잘 해봐!’라고 하면서 협조도 하지 않고
골탕 먹기를 바라고 있는 자세는 없었는지,
그래서 그를 어려움에 빠뜨리고 속으로 손뼉을 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야 한다.
현대 교회의 모습은 사실상 여자들의 수가 더 많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 여인들의 봉사로 교회가 살아있을 수도 죽어갈 수도 있다.
우리의 역할은 이렇듯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주님 앞에 더욱 생동감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려운 가운데 서로가 깊이 일치한 이 여인들의 모습이
리에게서도 나타나야 할 것이다.
역사의 인물 속에서나 지금에도 그러한 역할, 그러한 도움은 절대로 필요하다.
이러한 봉사는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러한 도움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한 부르심에 따라 자기 소임을 잘한다는 것은 하느님 앞에 큰 영예가 아니겠는가?
예수님을 도와드린 여인들이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해 보아야 한다.
우리도 봉사를 통해 주님께 항상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자매 신자들께 감사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는 여러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선행하시는 선교활동의 日常에 관하여 짧지만, 종합적인 내용을 들려주면서,
활동에 함께 다니던 동반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는 오늘 복음에 언급된 바대로 열두 제자와 십수 명의 여인들이 있었다.
여인들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시달리다 치유된 여인이며,
요안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신하 쿠자의 아내였다.
이 여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도왔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에까지 동행한 사람들이다.(루카 23,49)
참으로 진정한 동행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예수님의 동반자들이 어디 이들뿐이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선교활동의 시작부터 많은 동행자를 얻으셨다.
예수께서 직접 제자로 불러 곁에 둔 사람들도 있었지만, 친지와 고향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心琴을 울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자치유와 구마기적에 마음을 뺏겨
그저 신이 나서 따라다녔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감사의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감찰반도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열두 제자를 선별하셨던 내용이나(루카 6,13),
일흔 두 제자들을 뽑아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둘씩 짝지어 보내신 내용(루카 10,1)만 보더라도,
예수님의 동반자는 적어도 100명은 훨씬 넘어 200명 정도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루카 9,58; 마태 8,20)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날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집도 절도 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두루 다니시면서 하느님 나라와 그 복음에 관하여 遍歷 설교를 하셨고,
병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다.
편력설교자에게 고정된 주거지란 있을 수 없다.
발 닿는 그곳이 그날 묵을 곳인 것이며, 거저 그때 주어지는 음식이 그날의 양식이다.
이는 예수님의 동반자 모두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공식이다.
특별히 여인들이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루카복음이 가난한 이들과 불쌍한 이들, 죄인들, 여인들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이들을 주제로 보도하는
고유의 특수사료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 많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루카복음은 특히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 예언자 안나, 나인의 과부, 마르타와 마리아, 어떤 부인의 성모 칭송,
곱사등이 부인, 잃은 은전과 부인, 재판관과 과부의 청, 가난한 과부의 헌금,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길을 동행하는 부인들 등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당시 이스라엘 여인들의 비교적 낮은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감안할 때,
예수님의 관심이 여인들에게 쏠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인들 또한 예수님의 관심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어디를 가든 신학교만 빼고 항상 자매님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활동하며,
하느님 사업의 중심에 서 있다.
이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가 제공하는 2003년 교세통계자료, 전체신자수 4,481,490명 중에서
자매들이 2,614,773명, 형제들이 1,866,717명인 것만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적으로도 같은 통계일 것이 뻔하다.
따라서 교회는 대부분 여인들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해도 관언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적으로 열세인 우리 형제 신자분들이 마냥 놀고만 계신 것은 아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sr.윤 마리 소화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에 숨고 싶다.라는 생각이 간절한 요즘이다.
예수님 주변의 여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털어 예수님의 여정을 도왔는 데...
나는 무엇을 드려야 하나...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없고...
그런데도 자꾸 내어놓으라고 하는 거 같아서
움츠러들고, 눈치 보게 되고,
이렇게 해도 되는가... 매번 고민하는 하루하루들.
망망대해 드넓은 바다에 혼자 표류하는 듯한 요즘...
뜨거운 햇빛 가려줄 그늘 한 점이 그립고
땀 식혀줄 바람 한 점이 그립고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마음 나눌 친구가 그립고...
이런 마음 모두 가지고
예수님 십자가 그늘도 숨어들어 본다.
[출처] 루카 8,1-3 연중 제24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