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없이 그려진 드로잉
▲ metro, Paris _ 75JEROME
자연스러운 일이다.
감각으로 몰입하는 순간 이성(생각)은 손을 놓는다. 이성은 감각(하는 일)과 함께 있을 뿐 관여하지도, 간섭하지도 않는다. 멈추고, 머물고, 관찰하며, 그저 기다린다. 비로소 ‘이성’은 ‘감각’의 최고의 파트너가 된다. (걱정하지 말라. 힘을 실어준 감각의 경험은 이성에게 곧 생각할 것들, 깊게 사유할 단서들을 제공하여 줄 것이다.)
다양한 드로잉과 그리는 경험들이 있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자 하는 드로잉은, 감흥에 반응하는 감각의 드로잉, 즉 몸을 통한 드로잉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쭉 이런 드로잉에 대해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양한 그리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그리기를 강조하여 소개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다. 그리고자 하는 내 욕구의 첫 번째 경험들을, 내 선택에 의한 나의 경험으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다. 다소 막연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리기’이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과정이다.
또 ‘내가 내 그리기의 주인이 되어 그리기를 이어갈 것인지?’, ‘외부의 기준에 충족하며 단계 단계 그려갈 것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중요한 시발점이 된다.
문 : 젊은 화가에게 주고 싶은 충고는?
답 (앙리 마티스) : 많이 그리되, 너무 생각하지 말라.
_ 마티스가 풀어 본 스무 고개 _ <루크>지, 1953년 8월 25일
드로잉 할 때, 만약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면, 그 자체가 감각적 몰입을 방해할 수 있다. 물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방식으로 그리기에 집중할 수 있지만(나름의 결과를 성실하게 만들 수는 있지만), ‘의지적인 노력’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는 ‘감각의 몰입’은 서로 크게 다르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 중 하나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이다. 그 대상과 연결된 내 내면의 미적인 추구이다. ‘자연스러운 감각의 몰입’은 이 둘의 연결이지만, ‘의지적인 노력’은 이러한 것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쉽다.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만 그만큼 무자비할 뿐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 ‘관계’는 사라지고 일방적이 된다. ‘의지’가 감각 대상의 실제를 소외시킨다. 그리기를 욕망하는 나도 소외시킨다.
보여지는 것, 그 자체.
너무 성급하게 메타포나 상징으로 건너뛰지 마라.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아직 이르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먼저 대상의 표면에 떨어진 빛의 실체를 느껴야 한다.
의미는 없다. 오로지 사물만이 존재할 뿐이다.
-윌리엄스 W.C.Williams
_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필립 퍼키스
그림을 그릴 때, 그리는 대상과 행위에 몰입할 때, 감각으로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생각하지 않게 된다. 점점 더 많은 것을 잊게 된다. 그리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긴장하며 하던 생각도 잊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그림은 그리는 게 아니라 그려지는 것이 된다. 그동안 궁금했던 그리기를 실감하며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리는 나를 발견한다. 수동자에서 능동자로 변신한다. 생각과 다른 경험 속에서 내 생각을 갖게 된다. 행위로부터 사유하며, 내 몸(감각)이 이 혼란스러우면서도 황홀한 미지를 탐구하는 최고의 도구임을 알게 된다.
▲ 아이의 책가방과 신발 주머니 _ 75JEROME
“그리면서 어떠셨어요?” 드로잉 클래스를 진행하며 나는 자주 이렇게 묻는다.
“아! 죄송해요! 아무 생각 없이 그렸어요.” 뭔가 할 말을 생각하다가 조금 미안해하고, 많이 부끄러워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정말 멋진 그리는 경험을 하셨군요! 그림에서도 잘 보입니다. 드로잉이 너무 재밌고 좋아서 물었어요.”
“네?”
드로잉 클래스를 진행하면서 자주 겪는 일이다. 감각을 따라 자연스럽게 그리다 보면, 그림을 다 그린 후에는 어떤 느낌들만 남는다. (사유할 것들은 경험과 함께 그려진 그림에 다 나타나 있고.)
‘어땠냐’는 질문에 뭔가 내용이 있는 논리적인 답을 하려고 하지만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이 질문 자체가 어떤 답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떤 느낌, 기분이었는지, 그 상태를 묻는 질문이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이 질문을 오해한다. 단순한 느낌과 감정을 얘기하는 것은 별로 좋은 대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답할 내용이 없다는 것을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한다.)
▲ 드로잉 _ 75JEROME
그리려는 대상을 바라보며 그리기를 시작할 때, 그리기를 진행하면서, 어떤 이는 점점 망각의 늪에 빠진다. 또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할 것들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이 둘의 경험은 분명히 다르다.
제롬 (www.75jero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