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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23일 토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제1독서 : 1티모 6,13-16
복 음 : 루카 8,4-15
그때에
4 많은 군중이 모이고 또 각 고을에서 온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5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발에 짓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들이 먹어 버리기도 하였다.
6 어떤 것은 바위에 떨어져, 싹이 자라기는 하였지만 물기가 없어 말라 버렸다.
7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한가운데로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함께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 자라나서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외치셨다.
9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 비유의 뜻을 묻자, 10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11 그 비유의 뜻은 이러하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12 길에 떨어진 것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와서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 가 버리기 때문에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3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이다.
14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15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뒤로 미루는 것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미루는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일상 삶을 보면 그리 게을러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 무엇인가를 하는 것 같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미루고만 있을 뿐입니다.
기도의 일상화가 잘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주일미사에 참석한 뒤에 열심히 기도하며 신앙인답게 사시겠다고 다짐하십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하는데, 기도만큼 잘되지 않게 되고 계속해서 뒤로 미루십니다.
그 이유를 묻자, “제가 게을러서요.”라고 답하십니다.
정말로 게을러서 그런 것일까요?
우리 뇌는 장기적인 성취와 성장보다는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을 우선시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편하고 쉬운 것, 순간의 만족을 주는 것에 먼저 집중하고,
평상시에 잘 하지 않았던 익숙하지 않은 것은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게을러서 뒤로 미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이유는 게을러서가 아니라,
아직 신앙생활이 자기 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운동도 그렇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너무나도 힘듭니다.
몸의 이곳저곳이 아파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익숙하게 되면 단기적인 기분 회복과 감정조절이 이 운동에서 나옵니다.
이제는 운동하지 않는 것이 더 힘들게 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더 익숙한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나한테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 내가 게을러서 그렇다는 것은
모두 그만큼 주님께 맞춰서 살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주님께 익숙해지는 삶을 살아야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참 행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좋은 땅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아마 농사를 짓는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좋은 땅을 어떻게 만들겠습니까?
식물을 잘 키워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유기물도 풍부하고 미생물도 풍부한 땅을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립니다.
그냥 길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고, 바위에다가 씨를 뿌리지 않으며
또 가시덤불과 같은 잡초가 무성한 곳에도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곳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계속해서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신앙생활이 우리의 삶 자체가 되어 익숙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노력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할 수 있다고 믿든, 할 수 없다고 믿든, 믿는대로 될 것이다(헨리 포드).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땅을 결코 못쓸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가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두려 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사제가 된 후에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스키, 스킨 스쿠버, 피아노입니다.
모두 정식으로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깨 넘어로 배우고, 혼자서 배우고, 시간 나면 배우고 그랬습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모두가 발전이 없었습니다.
스키는 91년에 배웠으니 32년이 되었습니다. 스킨 스쿠버는 95년에 배웠으니 28년이 되었습니다.
피아노도 2009년에 배웠으니 14년이 되었습니다. 스키는 아직도 겨우 내려오는 수준입니다.
스킨 스쿠버는 기록이 중요한데 기록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피아노는 겨우 건반을 만지는 수준입니다.
제가 이렇게 시작은 했지만, 결실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욕은 있지만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창 중에는 시작하면 끝을 보는 신부님이 있습니다.
스키를 배우면 강사 자격증을 딸 때까지 배웁니다.
기타를 배울 때도 노래만 들으면 반주할 수 있을 만큼 배웁니다.
스킨 스쿠버도 강사 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저와 같이 시작했지만, 동창 신부님이 다른 것은 기초부터 배우는 것이고,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비슷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지만 몇 번 주일미사에 참례하다가 그만 포기합니다.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의지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결혼하기 위해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듯이,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하려면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련과 고난이 다가오면 포기합니다.
본당 신부님의 사목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단체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웃과 의견 충돌이 생긴 뒤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했는데 시련과 고난이 사라지지 않아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결실을 맺기도 합니다.
사람을 믿기보다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습니다.
본당의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어떤 단체든지 가입하면 단체를 발전시킵니다.
교리신학원에 등록해서 교리교사 자격증도 얻습니다.
같은 날 세례를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결실을 맺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는 사람,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마저 대주는 사람,
겉옷을 달라면 속 옷까지 내주는 사람,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좋은 결실을 맺는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미친 짓일 수 있고,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가는
부활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합니다.
공동체에는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은 봉사의 씨를, 어떤 분은 나눔의 씨를, 어떤 분은 희생의 씨를,
어떤 분은 사랑의 씨를 뿌렸습니다. 공동체에는 그 씨들을 키우고 관리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목회, 구역장, 반장, 레지오 단원, 각 단체의 봉사자들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공동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랑의 정원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거름을 줄 때, 우리가 나눔의 물을 줄 때, 공동체는 풍성한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련의 바람이 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고통의 비가 내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갈등과 아픔의 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가장 큰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계명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듯이”(마태 5,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 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일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 있기 때문에 씨가 심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 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삶이 열매를 맺지 못하였더라도,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땅을 탓하지 말자.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공관복음 모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마르 4,1-20; 마태 13,1-23)
루카는 마르코의 전승을 그대로 베끼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마르코는 등불의 비유, 자라나는 씨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와 함께 씨 뿌리는 비유를 맨 앞에 놓았고,
마태오는 7개의 비유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누룩의 비유
보물의 비유, 진주의 비유, 그불의 비유)을 모아 놓은
비유 설교집(13장)에서 첫 번째 비유로 다루고 있다.
서로 약간의 차이는 보이고 있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거의 같다.
특이한 점을 지적한다면,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비유의 해설이 예수의 제자단에게만 따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께서 혼자 계실 때 제자들이 다가와 비유의 뜻을 물었다.(마르 4,10)고 하며,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오자(13,10) 그들에게만 비유의 뜻을 밝혀주신 것(13,18)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 자체나 그에 대한 해설은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씨를 잘 갈아엎은 밭에 뿌리지 않고 아무 데나 뿌리는 사람은 없겠지만,
이스라엘의 척박한 땅을 감안한다면 오늘 비유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
① 우선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은 곧바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에 밟히거나 새의 밥이 되고 말았다.
② 바위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지만 습기가 없어 말라 죽어버렸다.
그래서 마르코와 마태오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고 했다.
③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은 왕성한 덤불에 숨이 막혀 죽어버렸다.
④ 마침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잘 자라서 100배의 열매를 맺었다.
마르코와 마태오는 그 열매를 30배, 60배, 100배로 기록함으로써 土壤의 質을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오늘 비유는 그 자체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播種의 방법이나 그에 따른 수확을 가르치려 하신 것은 아니다.
비유란 원래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므로, 예수께서 ‘무엇을’ 파종에 빗대어 말씀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씨앗이 떨어지는 곳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
① 길바닥은 그애말로 가능성 제로의 상태를 말하며,
길바닥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은 충분히 세속적인 환경을 말한다.
하늘의 새는 그 말씀을 빼앗아 가는 악마를 뜻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믿음도 구원도 없다.
② 바위는 수분이 없어 씨앗을 감싸않을 수 없는 마음이다.
말씀에 대한 반응은 있으나 세상의 시련과 고통이 닥치면 뿌리가 없어 믿음도 사라진다.
③ 가시덤불은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이미 세속적인 가치관에 사로잡힌 마음이다.
말씀을 수용하여 믿음의 생활을 하지만,
그 마음은 늘 세상의 온갖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더 가까이 있음을 뜻한다.
이것들에 눌려 믿음의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것이다.
④ 좋은 땅은 바르고 착한 마음을 뜻한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믿음의 뿌리와 생활의 줄기를 뻗어 꾸준히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무에게는 슬픈 운명이 있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에 싫든 좋든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자신의 힘으로 옮겨 다닐 수 없는 슬픈 운명이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햇빛과 비바람을 맞으며
더워도 추워도 옷 한 벌 벗고 입지 못하는 그런 슬픈 운명이다.
그러나 진작 나무는 자신의 그런 운명을 슬퍼하지도 나무라지도 트집 잡지도 않는다.
자연이라는 큰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슬프다고 생각하는 쪽은 우리 인간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늘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남의 것이 더 크고 좋게 보이면 기뻐하고 격려하기보다는 슬프고 실망하며 포기한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람의 마음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는 토양과도 같다.
그러나 그 마음을 지닌 사람은 자유로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닐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의 토양을 더 좋게 만들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이 나무에게서 배울 점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나무와 사람은 다르며,
나무보다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이다.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과 같은 자신의 딱한 처지와 환경을 나무는 불편해도 바꿀 수 없으나,
사람은 바꾸어 改善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인내의 열매 (루카 8,4-15)
사공 제노 수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을들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당신께 다가오자 그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 비유를 들려 주십니다.
‘씨는 하느님 말씀입니다’(11절).
이 하느님 말씀이 길에도, 바위에도, 가시덤불 속에도, 그리고 좋은 땅에도 떨어집니다.
각 장소에 떨어진 씨는 똑같은 하느님 말씀이지만, 씨가 떨어지는 장소가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 뿌려진 씨가 열매를 맺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씨앗에 달린 것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인 장소에 달려 있습니다.
그 땅이 길가이면,
씨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거나 새들의 먹이가 됩니다.
그 땅이 바위투성이면,
싹이 자라도 물기가 없어 곧 말라 버립니다.
그 땅이 가시덤불 속이면,
가시덤불로 인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땅이 좋은 흙으로 되어 있다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모든 이에게 골고루 하느님의 말씀을 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누군가의 마음 밭이
길가라서, 바위라서, 가시덤불이라서‘안 된다.’ 고 하시며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좋은 땅이든 그렇지 못한 땅이든 모든 곳에 말씀의 씨를 뿌려주십니다.
우리는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15절) 이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우리 안의 말씀을 앗아가게도 할 수도 있고,
시련의 날에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빠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바로 앞 장 마지막 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7, 50절)
그리고 오늘 복음 8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8, 48절) 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말씀처럼
단순히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말씀을 간직하고(8, 15절),
들은 그 말씀을 실행할 때(8, 21절)
비로소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입니다.
나는 말씀을 바른 마음으로 듣고 있는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혹은 ‘좋은 말씀이다’하고는
돌아서서 내 관심사와 걱정과 세상 속에 파묻혀 살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씨는 저절로 자라지 않습니다.
씨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랍니다.
씨는 농부의 수고와 노력과 노래 속에서 자랍니다.
우리 각자에게 뿌려진 씨가 백배의 열매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출처] 루카 8,4-15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