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인터넷에서 <구원 그 이후>라는 책을 쓰신 모 은퇴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분이 말한 내용 중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어 잠시 인용해 보겠습니다. “청소년 시절 구원의 확신과 전도 열풍이 한국 교회에 몰아쳤다. 그때 교회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읊조리고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말이 없었는데, CCC나 네비게이토 등 선교단체로 인해 구원의 확신이 들어 전도에 힘써야 한다는 해답을 얻었다. 선교단체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는 교회가 드물 정도로 열광했다. … 그러나 난 그게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성경이 정말 구원의 확신과 전도만 말하고 있는지 의심했다. 결국 회의가 들어 신학교에 들어갔다. … 한국 교회는 교인에게 신앙의 완성, 즉 점진적 성화를 가르치지 않는다. 교인들은 '나는 구원받았으니 내 문제는 모두 끝났다. 이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자'고 생각한다. 교회도 그렇게 종용한다. … 일은 열심히 했는데 일을 끝내면 허탈하다는 솔직한 고백을 듣는다. 허탈함을 벗어나기 위해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교회도 일을 계속 개발하고 돌리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안이 아니다. … 하나님의 자녀로서 종교적 영역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관련하여 아래 말씀은 믿는 이들의 본인 사도 바울이 소위 <구원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짧지만 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이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서 오 주님, 이것이 바울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하여 <구원 그 이후>를 관심하는 모든 이들의 고백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그러므로 내가 하늘에 속한 그 이상(the heavenly vision)을
거스르지 않고(행 26:19)
바울이 본 그 하늘에 속한 이상: 바울은 지금 정관사‘ the’를 사용하여 ‘그 이상’(異象)이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이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전후 문맥과 바울의 일생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말한 그 이상은 그가 다마스쿠스에서 회심할 때 자신이 보았던 바로 ‘그 사건’을 염두에 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 당시 사울은 이 땅 위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하늘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행 9:4). 이 사건을 통해 바울은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이 땅에 사는 모든 믿는 이들을 <그분의 확대 된 몸>(엡 1:23)으로 삼아 내주하시고(골 1:27, 3:4) 동시에 하늘 보좌 우편에 <그 몸의 머리>(골 1:18)로 계시면서 하신 말씀인 것을 영적인 눈이 열려 보게 되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 단체적인 몸과 하늘 보좌 위의 머리이신 분을 우주적인 한 인격체, 즉 <한 새사람>(엡 2:15, 골 3:10-11)으로 묘사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회심 즉 구원 이후에 이 ‘한 새사람’의 이상 아래 살면서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들을 서신서들 안에서 풀어냈습니다. 회복역 성경 관련 각주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교리나 이론이나 종교적인 신조나 어떤 신학이 아닌 하늘에 속한 이상(異象)이다. 이 이상 안에서 사도는 삼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속하시고 변화시키신 백성 안으로 그분 자신이 분배되시는 것에 관한 신성한 것들을 보았다.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전파한 것과 로마서부터 히브리서까지의 열네 서신서에서 기록한 것은 모두 그가 본 하늘에 속한 이 이상을 상세하게 기술한 것이다”(각주 1).
실제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쓴 서신 중 핵심이 되는 네 곳에서 이 한 새사람의 어느 한 부분씩을 특징적으로 다뤘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는 <그리스도와 유대 종교(그리스도 아닌 것)>의 대비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골로새서는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빌립보서는 <그리스도를 체험함>을 강조했습니다. 그 외에도 그는 우리 모두 “한 입”(one mouth)(롬 15:6)과 “같은 생각과 같은 의견”으로 조율되고(고전 1:10), 심지어 “한 가지 것만을 생각”(thinking the one thing)(빌 2:2)하라고 권합니다.
쉽게 말해서, 한 새사람 안의 유일한 인격이신 주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을 우리도 생각할 수 있도록 구하고, 모든 상황에서 그분이 결정하시도록 기회를 드림으로, 그분의 생명과 본성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가 최선을 다해 성화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단체적으로 주님을 인격 삼는 문제입니다. 즉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 모두도 하는 것입니다.
“거스르지 않고”: 사실 이 말씀을 추구하면서 제 마음에 더 깊이 다가온 부분은 사도 바울이 엄청난 이상을 본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그가 그 이상대로 살았노라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한 부분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묵상할 때 다음 세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1) 베드로를 꾸짖은 사건: 바울은 자기가 본 한 새사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충만해야 하는데(골 3:11), 베드로가 타협하여 율법이라는 ‘이물질’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을 때, 그를 강하게 책망했습니다(갈 2:11-21). 2)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얻음: 바울은 이 한 새사람 안에는 오직 그리스도만 충만하심을 본 후에, 그리스도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얻고자”(gain Christ) 했습니다(빌 3:5-8,.3) 몸을 위하여 육체 안에 남아 있음: 바울은 심지어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자기 원함을 꺾고, 살되 주님의 몸 즉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를 위해 살기를 선택했습니다(빌 1:22-25).
이러한 말씀을 묵상할 때, 거듭난 이후 믿는 이들은 복음을 전하고 성화되기를 구할 뿐 아니라,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이 한 새사람(엡 2:15-16, 4:22-25, 골 3:10-11, 몬 1)에 대해서 더 눈이 열려 보고, 그 실제적인 체험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관련된 내용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민수기 20장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게 되는 사건의 본질을 알게 되면서 가슴이 서늘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반석을 향하여 말하라고 하셨는데 두 번 쳤기 때문이라고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이 물 달라고 불평한 것에 화내지 않으시고(금송아지 사건 때와는 달리) 다만 그 필요를 채워주라고 하셨지만, 모세는 자기가 임의로 화를 냄으로써 하나님을 잘못 대변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때 그분이 하지 않는 말을 하고, 그분이 원치 않는 것을 임의로 행함으로 그분을 잘못 대변하는지요! 그분의 인격을 살지 않는 모든 시간은 옛 자아를 사는 시간, 좀 더 노골적으로는 죄짓는 시간일 뿐임을 더 보기 원합니다(롬 14:23).
오, 주 예수님! 바울에게 보이신 그 이상을 우리에게도 보이소서!
그 이상대로 살도록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http://www.btmk.org/board/view.php?m=23&b=65&i=4965
첫댓글 아멘!
우리가 본 이상을 거스르지 않고
그 이상에 통제받고 신실하게 살아내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