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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바람의 장례
“통 괴기가 안 잡혀라우”.
“추와서 못 가것네. 올 때는 모르고 왔는디 갈라고 보께 못 가것네. 추와라, 아이고 추와라.”
청산도 도청리 선창가, 마실 나왔던 노인은 찬바람 맞으며 고갯길 넘어갈 걱정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큰 바람이 불고 다시 파도는 잠잠해졌다. 한 차례 결항했던 여객선이 운항을 재개한다.
밀린 차량들로 완도행 철부선 막배는 금세 만선이다. 사내의 트럭은 자리를 얻을 수 없다.
여객선 터미널 앞에서 사내는 안타까움에 발을 구른다.
사내를 가둔 것은 바다가 아니다. 바람이다.
일렁이며 막배는 떠나고 완도에서 오는 배는 청산도 부두에서 하룻밤을 정박한다.
사내도 청산도 뱃머리에 닻을 내린다.
부두 앞 간이 어판장은 관광객들에게 해산물을 팔기위해 만든 곳이지만 겨울 추위 속에 섬을 찾는 관광객은 드물다.
섬의 늙은 해녀들이 따온 소라, 해삼, 담치(홍합)와 양식 전복, 횟감용 생선들이 낡은 고무대야에 담겨 있다.
“생선들은 여기 것이 아니지요?”
“그라지라우. 완도서 들어오지라우.”
좌판 주인 여자의 답이 솔직하다.
도미, 농어, 광어 등이 담긴 대야에는 산소가 공급되고 있다.
저것들 중 완도에서 양식을 많이 하는 광어 정도만 그나마 국산이다.
도미나 농어는 일본이나 중국산 양식이다.
섬에 와서도 자연산 생선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요샌 청산도에서도 통 괴기가 안 잡혀라우”.
완도 근해의 섬들 대부분이 전복이나 어류 양식을 많이 하지만 청산도에는 양식업이 쉽지 않다.
전복 양식장과 우럭 양식장이 몇 곳 있는 정도다.
주위에 바람을 막아줄 섬이나 만이 거의 없는 지형 때문이다.
청산도는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고등어, 삼치 파시로 흥성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인구가 만 명도 넘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어장이 형성되면 도청리선창가에 파시가 섰고
어부들과 상인들, 색주가의 색시들로 섬은 밤낮없이 흥청댔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흘러간 옛 이야기다.
물고기떼가 사라지자 어선도, 사람도 함께 떠나가 버렸다.
요즈음은 큰 배들이 제주도 아래 쪽 바다에서 싹쓸이 해버리니 살아남아 청산도까지 올라오는 물고기도 드물다.
초어단지를 이용한 문어잡이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다.
‘조폭’ 이었던 부산 사내
간이 어판장 좌판에서 초면의 나그네와 사내가 돌 멍게 한 접시를 놓고 보해소주를 마신다.
옆 자리에서는 마실 나온 섬사람들 몇이 삶은 문어를 안주로 술판을 벌였다.
사내는 목포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일한다.
사내는 청산도에 전기 히터를 설치하러 왔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목포에 오기 전까지 사내는 부산에 살았다.
낯선 목포 땅에 살게 된 것은 순전히 사랑하는 여자 때문이었다.
사내는 예천이 고향이지만 조실부모하고 부산으로 이주해 동생들을 키웠다.
열한 살 때 전포동에서 재봉 일을 시작했다.
열여덟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멸치잡이 배를 탔다.
‘조직’ 생활도 했다. 뱃일을 그만 두고 놀던 때였다.
여자 친구와 부산 백악관 나이트클럽엘 갔다가 ‘스카웃’ 됐다.
옆 좌석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자꾸 여자 친구에게 ‘찝쩍’거렸다.
일행은 모두 7명.
세 번쯤 경고했지만 숫자가 많은 취객들 눈에 사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7명과 붙었다. 셋을 쓰러뜨린 뒤 나중에는 맥주병을 깨 들고 위협하니 그들도 더 이상 덤비지 못했다.
싸움이 수습되자 나이트클럽 매니저가 사내를 불렀다.
대뜸 “너 내일부터 일해라. 안하면 죽는다.” 했다.
나이트클럽은 부산 지역 최대 폭력조직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하다가 한 달 뒤에 정식 조직원이 됐다.
또 한 달이 지난 후 조직의 명령으로 경쟁 조직의 조직원을 찌르고 감옥에 갔다.
초범이라 1년 남짓 살았다. 출소 뒤에도 5년 쯤 더 조직 생활을 했다.
인천으로 파견 근무를 가기도 했다.
인천 구 터미널 근처의 나이트클럽을 맡아서 운영했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부산으로 복귀했다.
부산 남포동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했다.
그 사이 번 돈으로 여동생 둘을 결혼시켰다.
여자의 권유로 사내는 조직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까지 왔다.
목포는 여자의 고향이었다.
둘이 3년을 살았다. 그러다 여자와 헤어졌다.
가진 돈과 집 모두를 여자에게 남겨주고 몸만 나왔다.
그가 집을 나온 일주일 뒤부터 여자는 그 집에서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다.
여자는 영영 떠났지만 사내는 목포에 정이 들어 목포를 떠나지 못했다.
왜구들이 노략질하고 수산물 채취도 해가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 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다.
청산도, 추자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들의 침략에 시달렸다.
섬들은 더러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왜선(倭船) 수척이 달량(達梁) · 청산도(靑山島) 에 이르러 상선(商船)을 약탈하고,
무명[綿布] 50필, 미곡(米穀) 30여 석(碩)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성종 21년(1490)에도 청산도와 추자도에 왜구가 나타났다.
추자도 · 청산도(靑山島) 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諸島)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왜적 이며....”
중종27년 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추자도뿐만 아니라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노략질을 하고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한다.
전란 전부터 서남해 섬들은 왜구들의 수중에서 농락당했다.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제주도 사람이 본 18세기 청산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다.
장한철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하다.
<표해록>은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문다.
당시 청산도는 이웃 섬 신지도진에 부속되어 있었다.
“이 섬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 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진진(梨津鎭)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 한 사람을 거느리고
어제 저녁 이 섬에 들어와 혹은 이정(理正)을 몽둥이로 때려 주식(酒食)을 억지로 달라하여 먹으며
혹은 남자 광대를 족쳐서 전재(錢財)를 빼앗기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기까지 합니다.”
장한철은 섬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서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 가지 않았다.
왕화(王化)를 입은 육지의 땅들도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감시마저 미치지 못하는 섬은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하다.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섬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다.
사람이 삶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고통 또한 그러하다.
섬으로 산 속으로 숨는다 해서 삶의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논에는 멍청이 마늘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랭이 논이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생긴 것이 구들장 논이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이다.
지금이야 쌀값이 라면 값 보다 못한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청산도에서 논은 귀하고 소중하다.
논은 섬사람들을 먹이고 입힌다.
추수가 끝난 청산도 들녘에는 볏단과 두엄더미들이 오두막처럼 쌓였다.
두엄, 저 냄새나는 똥거름을 벼와 마늘, 유자와 국화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땅이다.
오로지 땅만이 똥냄새를 향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지녔다.
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소, 육체를 살찌우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생명의 발전소다.
노인 한 분이 천변의 논가에서 무너진 축대를 쌓고 있다.
여름철 물난리에 무너진 것을 이제 보수하는 것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마늘 갈이도 다 끝난 지금에야 짬이 난 까닭이다.
청산도는 온통 마늘 밭이다.
나그네의 눈에는 다 같은 마늘처럼 보이는데 노인은 논과 밭에 심는 마늘의 종자가 다르다고 한다.
청산도의 밭에는 주로 대만산 마늘을 심는다.
논에는 ‘멍청이 마늘’을 심는다. 멍청이는 욕이 아니다.
스페인산 마늘은 아무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해서 섬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이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연락선
오늘, 섬의 땅 절반은 사자(死者)의 영토다.
밭에도 산 중턱에도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무덤들이 들어서 있다.
저 묘의 주인 중 누군가는 표류해 온 제주 유생 장한철에게 밥과 술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다.
풍장(風葬),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다.
지붕에는 솔가지가 드문드문 얹혀 있다. 솔가지를 꺾어다 올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
잘 썩지 않는 솔잎의 힘으로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일까.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이 선산의 어느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이다.
솔바람에 솔숲이 일렁인다. 초분 옆에는 다 익은 깨금(까마중) 열매가 시들어 말라간다.
서로 멀지 않은 완도의 섬들도 초분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다.
초분을 쓰는 것은 금기 때문이다.
소나 개의 산달에 초상집을 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다.
나그네의 고향 섬에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해에 초상이 나면 초분을 썼다.
자녀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놨는데 초상이 나는 경우가 그런 때다.
자식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초상이 나도 초분을 썼다.
하지만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시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장례 풍습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축대를 쌓는 노인이 들려주는 청산도의 풍장은 그것과 조금 다르다.
“바람에 말라 수분이 쪽 빠지면 마른 장작 같이 되는 디, 그 시신을 수습해 땅에 뭇어라우.”
여름철 습기 많은 섬에서 방부 처리도 하지 않은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노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습한 바람에 육신이 풍화되지 않고 건조한 바람에 육신이 마르는 더러 그런 경우도 있는 것일까.
이 섬에서는.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고 믿어진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매장되기도 한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 하는 것이 아니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하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데도 배가 필요 하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