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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장
신기남이 공격한 후의 허점을 찾아서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손을 휘둘러오면 머리를 숙여 피하고 가슴을 공격하고,
왼손으로 베어오면 몸을 뒤로 젖히며 다리로 무릎을 공격하는, 신기남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백산의 반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투귀 오구가 이야기했던 팔과 다리를 모두 이용하는 격투술,
신기남이 손만을 이용한 단조로운 공격임에 반하여 백산의 공격은 두 팔과 두 다리 그리고 온몸을 이용하는 싸움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상했다. 끊임없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신기남에게 별반 타격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격투술은 맞는 것 같은데…뭔가 이상해!"
유령시마 예인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산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고도의 기술임에는 틀림없지만 뒷골목의 건달들이 주로 보여주는 그런 격투술에 불과할 뿐이었다.
정권을 뻗었다가 실패하면 팔꿈치가, 그 다음은 어깨가, 전신의 모든 곳을 이용해서 상대를 공격하는 기술. 분명 굉장한 공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무인들은 이러한 기술을 쓰지 않는다.
장법(掌法)과 권법 그리고 온몸 곳곳에 암기를 숨겨두고 여차하면 발사할 수 있는 그런 무인들의 싸움에서 저런 식으로 몸을 밀착시켰다가는
자신도 모르게 암습을 당하거나 장법이나 지공(指功) 등에 당하기 딱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놈의 공격은 너무나 정확했다. 상대와 한 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도 상대의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맞아! 저것은 유권(柔拳)이야."
유령시마가 백산이 펼치고 있는 손과 발놀림이 단순한 삼류 격투술이 아닌 또 다른 힘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보았다.
유권(柔拳) 흔히 격공장(隔空掌), 또는 통배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무공.
어떤 물체를 가격하여 외부는 멀쩡하게 보이지만 내부만 파괴하는 무공으로 주로 외공 고수와 싸울 때 많이 쓰이는 기술이다.
가장 유명한 격공장으로는 무당파의 면장이 있다.
사실 무당파에서도 면장을 그렇게 대단한 무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익히지 않고 굴러다니던 무공기서로 속가 제자들에게나 전수하던 그런 무공이었다.
체면과 멋을 중요시하는 정파인들로서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무공이 성에 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무공으로 인정하지도 않던 면장을
극성으로 익힌 속가 제자 중 한 명이 외공 중 최고라는 금강상피공을 익혀 도검이 불침하는 피부를 가졌다는 마인을 제압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각 문파에서는 격공장에 대해서 연구를 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모든 문파에 격공장 종류의 무공이 하나씩은 존재하고 있다.
격공장, 통배권, 면장 등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권이란 것은 손으로 펼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워낙 섬세하고 고도의 기술이다 보니 가장 자유롭고 다루기 편한 손을 이용하여 장이나 권으로 펼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래! 저것은 용왕유권(龍王柔拳)이야! 하지만 어떻게…."
유령시마가 부지불식간에 외치는 소리였다. 그도 이름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유권 중 최고라는 용왕유권, 권(券), 장(掌), 지(指)를 포함한 신체의 모든 관절을 이용하여 펼칠 수 있다는 소림의 무상절기,
무당의 면장보다 이전에 만들어졌으나 너무 난해한 무공 구결 때문에 익힌 자도 없었고 수백 년 전에 실전되어 그 이름만이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던 그 무공.
지금 저놈이 펼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용왕유권이 확실한 것 같았다.
"그럼 저것이 소림에서 실전되었다던 그 용왕유권이란 말이요?"
귀령마제 마자광이 놀라는 얼굴로 유령시마를 쳐다보았다.
소림의 제자 같이도 보이지 않은 자가 어찌 소림의 무공을 익히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실전된 지 수백 년이나 지났다고 알려진 무공을….
그들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에 비무의 향방이 정해지고 있었다.
거칠게 몰아치던 신기남의 몸놀림이 현저하게 둔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지켜보고 있는 중인들의 눈에도 확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산을 공격하고 있는 신기남의 표정에 나타난 낭패의 기색을.
"등에 있는 무기는 폼으로 들고 다니는 것인가?"
신기남의 가슴을 가볍게 쥐어박고 훌쩍 물러나며 하는 말이었다. 일각 이상을 빛살 같은 속도로 싸운 사람 같지 않게 호흡은 고요했다.
"셋째야, 괜찮으냐?"
잔독일마 만효우가 나지막한 비명을 토하며 뒤로 물러서는 신기남을 부축하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모든 것을 보았다. 아무런 타격도 없을 것 같은 놈의 손과 발놀림에 자신의 셋째가 충격을 받고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형님! 보통 놈이 아닙니다. 합공을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 생각했다. 별다른 고통도 없었고 충격도 없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내부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무기 한번 꺼내보지 못하고 철저히 당해버렸다.
자신은 이곳에서 죽어갈 것이다. 이 독연 속에서는 운기조식도 할 수 없다. 내부의 상처는 점점 커질 것이고 독 기운까지 침입하게 될 것이다.
"용왕유권은 어디서 배웠느냐? 소림의 제자냐?"
그곳에 있던 무림인들의 얼굴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변했다.
유령시마가 소림의 문하냐고 물었고 용왕유권이라고 했다.
천년 전부터 내려오는 무림의 불문율, 소림의 문하는 건드리지 마라.
부처의 징벌이 내리게 된다. 모든 면에서 한없이 자비로운 소림이었지만 자파의 제자에 대한 것만큼은 가장 철저했다.
소림의 제자를 핍박하게 되면 그가 마인이건 정파인이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응징해왔다.
자파 제자의 잘못은 소림에서만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다른 이들의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광오했다. 무림인들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소림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소림의 철칙은 영원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고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용왕유권? 아니야, 이것은 광풍유권이라고. 내가 창안한 것이고. 그래서 지금 시험을 하고 있는데 그런 대로 쓸만해."
하얀 이를 드러내 보이며 하는 말이다. 백보신권을 광풍신권, 용왕유권은 광풍유권으로 개명하여 자신이 창안한 무공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소림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것이면 족했다.
"선배들! 더 이상은 이곳에서 견딜 시간이 없소. 빨리 해결합시다."
같이 합공(合攻)을 하자는 소리였다. 이 독연 속으로 들어온 지 벌써 한 시진이 넘었다.
더 이상은 버틸 재간도 없거니와 셋째가 죽어가고 있었다. 만효우의 심정은 다급했다. 보물이 주는 유혹은 이래서 무서운 것인가.
아니면 친 혈육이 아니라서 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 비록 의형제라지만 셋째인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구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비도에 더욱 욕심을 내고 있는 만효우였다.
"좋네! 나도 소림의 절대 절기인 용왕유권을 한번 견식하고 싶구먼…."
이름도 없는 강호의 젊은이를 합공한다는 것에 약간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용왕유권을 견식하고 싶다는 말로 얼버무리며 유령시마가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드디어 그곳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들고 백산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서로가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놈을 죽이더라도 다시 자신들끼리의 승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놈에게 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말이 합공이지 그들이 형성한 포위망은 이곳저곳이 순 허점투성이였다.
그런 와중에서도 전력을 다하는 이가 있었으니 이제는 잔독이마로 바뀐 잔독사마의 첫째 만효우와 둘째 정귀상이었다.
자신들의 독문 무기인 잔독겸(殘毒鎌), 농부들이 쓰는 낫처럼 생겼으나 손잡이 부분이 더 길었고,
직각으로 꺾인 부분에 칼날이 하나 더 달려있는 이른바 쌍초겸이라 알려진 무기다.
독까지 발랐는지 퍼런 빛으로 빛나는 잔독겸 두 자루를 백산을 향해서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저돌적인 공세에 나머지 인물들은 뒤로 물러나 포위망을 형성한 채 백산이 허점을 보이면 그곳을 향해서 가볍게 장력을 날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애당초 합공이란 말 자체가 우스웠다. 서로 죽이려 했던 이들이 조그마한 쥐새끼 한 마리를 잡기 위해 합공을 하다니?
저놈과 싸우다 놈을 죽이면 그것도 괜찮고 공격하던 놈이 죽으면 그것도 더욱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닌가. 누가 죽어도 자신들에게는 하등의 손해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백산의 몸놀림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자신의 요혈을 향해서 날아오는 네 개의 잔독겸을 피하며
교묘하게 두 사람의 사각지대를 뚫고 들어가 자신이 광풍유권이라고 했던 용왕유권으로 만효우와 정귀상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용왕유권은 신기남에게 펼쳤던 것과는 또 달랐다.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산의 위력적인 공격에 흠칫 놀란 만효우와 정귀상이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막무가내로 공격하던 그들의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잠시 후 이인 합격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들도 백산을 정식 상대로 인정한 것이다.
정귀상이 백산의 하체를 향해 잔독겸을 휘두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 허공으로 솟아오른 백산을 향해 뒤에 있던 만효우가 정귀상의 머리 위로 뛰어넘으며 백산의 몸통을 향해 잔독겸을 휘두른다.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인 이인 합격진이 무서운 위력으로 백산을 몰아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질풍 같은 합격진에 견디지 못하는지 백산의 발놀림이 어지러워지고 온몸에 허점을 보이며 연신 뒤로 물러나는 것이었다.
백산이 밀려나고 있는 곳은 독각삼수 두 명이 서 있는 위치였다. 계속해서 물러나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는 독각삼수의 첫째인 방만구의 눈에 악독한 빛이 흘렀다.
바로 그 순간 잔독사마의 공격에 당했는지 그의 바로 일장 앞에 무방비 상태로 다가오는 놈의 등이 보였다.
방만구는 동생인 방만해와 눈빛을 교환했다. 일격에 끝내버리자는 신호였다.
"염천장(炎天掌)!"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외침이 터져 나오고 뜨거운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자신들의 최고 절기인 염천장, 화공을 익힌 덕에 이 독연 속에서도 그들은 무사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으악!"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만구와 방만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교환했다.
바로 지척에서 공격했으니 온몸이 부서졌을 것이고, 저렇게 처절한 비명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던 독각삼수 방만구와 방만해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들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자신들의 염천장에 맞아서 죽어있는 자는 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던 놈이 아닌 힘을 합치기로 했던 잔독사마 중 남은 이 인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가슴팍이 으스러지고 뼈가 산산이 부서진 채 그 자리에서 절명해버린 것이다.
"자기편을 죽이면 벌받아, 벌. 하기야 조금 전까지 서로 죽이자고 싸웠던 놈들이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방만구와 방만해는 머리가 아득해짐을 느꼈다. 백산이 두 사람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대었다 떼는 순간 그들의 머릿속은 이미 가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네 명의 고수가 이승에서 하직인사를 하고 말았다.
"으음,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
이미 죽어버린 사 인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보았다. 독각삼수의 공격이 등에 작렬하려는 순간 환상처럼 사라져버린 놈의 몸놀림을.
그리고 사라졌던 그의 신영이 처음부터 독각삼수의 뒤쪽에 서 있었다는 듯이 나타났고, 그들을 처치하는 장면이 마치 정지된 그림이 지나가는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쾌에 쾌를 넘어선 무변(無變)의 경지라는 금강부동신법,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산이 전개한 신법은 금강부동신법의 모체인 무상신법(無上身法)이었으니 결코 그들이 알 리가 없는 것이다.
"소림의 제자가 맞기는 맞는 모양이군, 금강부동신법까지 사용하는 것을 보면."
본인이 아니라고는 했으나 소림의 제자도 아닌 자가 용왕유권에 금강부동신법까지 펼칠 리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소림의 제자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소림의 제자가 자신들을 헤치려 하고 있는 바에야 그를 죽인다 한들 소림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강호 무림의 최고 신법이라는 유령신법과 소림의 무상신법과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몸놀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던 삼절마창 가득오를 비롯하여 뇌음천권 정오 등 그곳에 있는 무림인들은 그 누구도 두 사람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귀령마제만이 흐릿하니 두 사람의 형태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놀라움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들이 누구인가! 칠십 년 전에도 강호 제일의 고수였다.
고수 소리를 들은 지 일 갑자가 넘었다는 소리다. 그런 자신들과 대등하게 싸우고 있는 저 젊은 놈은 도대체 어떻게 무공을 익혔다 말인가.
"으악!"
그가 이런 상념에 잠겨있을 때 또다시 포위망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유령마제와 장력을 교환하고 뒤쪽으로 날아가던 놈의 손이 앞으로 뻗어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뒤로 날아가고 있는 삼절마창 가득오.
그렇게 죽어가는 순간을 본인도 느끼지 못했는지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삼절창은 아직도 그의 손에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백보신권(百步神拳)?"
귀령마제의 나지막한 외침이었다.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저놈은 분명히 소림의 문하다. 다행히 이곳에 자신들 말고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귀령마제 마자광의 눈이 악독하게 빛났다.
'어차피 죽이려 했던 놈들…조금 일찍 죽는다고 달라질 것은 없겠지….'
자신의 양손에 극성의 귀마조(鬼魔爪)를 운기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표물들을 흘낏 쳐다보니 삼절마창 가득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유령마제와 같이 싸우는 놈의 행동만 주시하고 있었다.
삼절마창의 죽음을 목격한 그들은 이젠 포위망이고 뭐고 없이 남은 네 명이 한 곳에 모여서 백산만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으윽! 컥! 억! 크윽!"
"당--신이…왜?"
네 마디의 참담한 비명과 함께 뇌음천권 정오를 포함한 사 인이 지르는 마지막 소리였다.
전방만 주시하고 있던 네 명의 뒤로 돌아간 귀령마제가 자신의 귀마조로 그들의 사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너무도 허무한 종말이었다.
천하제일이라는 꿈을 좇아 이곳까지 왔고 독연까지 뚫으며 목숨을 건 도박을 했다. 그런데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는 무림의 생리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제거해야 할 자들인데 시간을 좀 앞당긴 것뿐이오. 그리고 우리가 소림의 제자를 해친 것에 대해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고…."
싸움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령시마 예인상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다.
천하가 비좁다 하던 이 노 마두 두 명이 소림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태산북두라는 소림이 주는 무게는 무거웠다.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나 홀로 독불장군은 없다.
비록 무공이 고강하다 하더라도 세력이 없으면 언제나 약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 무림이라는 세계다.
"이봐! 뼈다귀, 내 밥을 왜 네놈이 처먹어. 새로 창안한 무공을 연습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그랬다. 지금 백산은 마불신승이 전해주었던 소림의 절기들을 익숙하게 펼치고자 실전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익히기 위해서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고 광견조에게 전수하기 위해서였다.
초식을 일러주는 것으로는 결코 무공을 전수할 수 없다. 일러준다고 해서 이해할 놈들도 아니고….
소림의 무공을 펼칠 때 몸속에서 움직이는 진기의 변화를 통해서 무공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다음에 진기의 이동경로를 숙지하여 무공을 전수하는 방법밖에 없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네놈이 시험대상이 되어야 해!"
백산이 외침과 함께 귀령마제를 향해 자신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순간 찬연히 솟아나는 불광(佛光), 나한 모양의 거대한 신장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헉!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귀령마제의 입에서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제 더 이상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저놈에게서 나오는 권은 모두가 소림에서 실전되어 전설로만 내려오던 무공들이 아닌가!
마치 산책 나온 나한(羅漢)처럼 자신을 향해서 천천히 다가오는 기세는 그가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방법은 한 가지 정면대결밖에 없는 것이다.
"쇄비장(鎖秘掌)!"
이를 악문 마자광의 일갈이었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은색의 강기가 거대한 나한상을 향해서 엄청난 속도로 밀려갔고 두 개의 장력은 거칠게 충돌했다.
"으윽!"
입안 가득 피를 쏟아내며 귀령마제가 뒷걸음치고 있었다. 단 일초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패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귀령마제와 장을 교환한 백산은 그대로 있지를 않았다.
돌아오는 반탁력에 몸을 싣고 자신을 치기 위해서 기회만 노리고 있는 유령시마를 향해서 양손을 합장하듯 안으로 모았다. 그리고 나오는 자그마한 외침소리.
"광풍청강수!"
자기 딴에도 소림사에 미안했나 보다, 엄연히 존재하는 무공 이름을 앞글자만 바꿔서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지금 펼치고 있는 무공들은 불공 냄새가 너무 진했다.
그래서 나오던 목소리가 줄어든 것이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위력은 엄청났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제천대성 손오공을 굴복시킬 때 사용했다는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 무려 천여 개의 손바닥이 유령시마를 향해서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한 마디로 손바닥의 벽이었다. 그가 가장 자신하는 유령신법으로도 피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강호를 뒤흔드는 초극 고수들이 소림을 건들지 못하는 이유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리 실전 무공이고 절기라고 하나 자신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저 무공에 정녕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령개천공(幽靈開天功)!"
자신을 향해서 밀려오는 천여 개의 수강을 향해서 전력을 다한 유령개천공이었다. 지난날에도 최고였던 그의 독문 무공을 칠십 년 동안 보완하고 또 보강해서 다시 재정비한 무공이었다.
"크윽!"
그러나 결과는 너무 허무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강을 다 막지 못하고 왼쪽을 허용하고 말았다.
왼팔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이미 팔의 내부가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놀랍게도 놈은 관음청강수에 용왕유권을 섞어버렸다.
이건 차라리 잘린 것만 못하다. 유령신법을 전개하는데 거치적거리기만 할 뿐이다. 잘라버리고 싶지만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는다.
놈의 신법이 더욱 경악스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예 흔적이 없다. 허공에서 솟아나는 것처럼 그냥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리고 지금 귀령마제를 향해서 펼치고 있는 저 무공, 아홉 개의 연꽃 모양의 강기가 찬연하게 빛나는 저것, 바로 구련조화인(九蓮造化印)이다.
이제는 놀라고 싶어도 놀랄 수도 없다. 움직이고 싶어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더 이상 발악해봐야 자신만 초라해질 뿐인 것이다.
그런 유령시마의 눈에 귀령마제 마자광의 최후가 보였다. 이마에 선명한 연꽃 모양의 인(印)이 찍히며 뒤쪽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유령시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을 지탱해주던 기력이, 자존심을 키워주던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그 자리에서 빌어먹을 소림(少林)이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너만 살려주도록 할게, 약속은 약속이니까."
넋이 빠져있는 유령시마의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며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주머니를 뒤집어서 그 내용물 중 하나를 유령시마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먹을 꼭 쥐어주며 그의 볼을 툭툭 치면서 한마디 더 하는 것이었다.
"힘내라고!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이까짓 일로 뭘 그러나. 그럼 잘 가라고."
새파란 놈이 백 살이 넘은 노인네에게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는 몸을 돌려 휘적휘적 사라지는 것이었다.
너무나 고요한 적막감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유령시마는 가만히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꿈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이 사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볼을 꼬집기 위해서 손을 펼 때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바라보았다.
놈이 힘내라며 자신에게 주고 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본 순간 왠지 모를 설움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리돈 한 문.
유령시마라는 별호를 얻은 이후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노인이 울고 있었다. 며느리에게 구박받고 쫓겨난 노인네처럼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살았으니까 가야겠지?"
실컷 울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천천히 일어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령마제를 포함한 열한 구의 시신에는 피 냄새를 맡은 독물들이 새카맣게 들러 붙어있었다.
"내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않는다."
그 약속을 지키겠다는 듯이 놈이 주고 간, 원래는 자기 것이었던 구리돈 일 문을 꼭 쥐어보았다.
그러나 조용히 사라지고자 했던 그의 맹세는 독령곡을 나서면서부터 철저히 무너졌다.
독연 속에서 들려오는 외침 때문이었다.
"유령시마 예… 인상이 비도를 탈취…했다!"
죽기 전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독령곡 외부에 있던 모든 무림인에게 전달된 그 한마디, 유령시마의 고난은 이제 시작이었다.
누가 믿어줄 것인가, 소림의 무공을 익힌 놈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그것도 일반 무공도 아닌 전설 속에나 존재하던 무공이었던 것이니….
* * *
"이제 오느냐?"
유령시마 일행을 처리한 백산이 중화독지대로 돌아왔다.
그곳에는 열심히 운기를 하고 있는 석두와 광견조원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안쓰러운 눈으로 죽어가고 있는 수구해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미 독의 섭취가 한계를 넘어선 수구해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이곳이 모든 독을 중화시킬 수 있는 중화독지대라는 절지라 해도,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피마저 검은색의 독혈로 변해버린 수구해에게는 효험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마 지금껏 숨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중화독지대의 효과라면 효과였다.
독연 속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다는 갈태독의 말처럼, 중화독지대가 그의 고통만 가중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인데도 얼굴을 찡그리며 힘들어하고 있는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수구해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일행들이 강호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이 기인을 위해서 명복이나 빌어주자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갈태독은 이곳저곳의 바위를 뒤집으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백년이 넘었어도 아직 의가(醫家)의 자손인가! 그의 손놀림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명색이 독을 다루었던 의가 출신이고, 그 비전을 모두 계승했는데 독에 당한 환자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영감! 그냥 유언이나 들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방법이 있는 거요?"
여러 가지 독을 모으고 있는 갈태독을 쳐다보며 백산이 물었다.
의술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백산이었지만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호흡도 끊긴 듯 간간이 이어지고 있는 수구해의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시도해 보아야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의원으로서의 본분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의가에서 태어나 의술을 배웠고, 생명을 살려야 할 그 손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제 다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그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가문의 비전이다.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한 환자에게 마지막으로 시술해 주는 침술대법.
성공 가능성 일 할, 실패하게 되면 시술 받은 환자는 핏물로 녹아내려 시신조차 보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바로 만독봉침구혈대법(萬毒蜂針求血大法)이다.
독 중의 독이라는 최고의 극독만을 가지고 시술하는 대법, 필요한 독의 종류도 상당히 까다로워 과거 자신의 가문에서도 몇 번 시술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중화독지대의 넘쳐나는 풍부한 독물들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조그마한 돌을 깎아서 만든 그릇에 독물들의 독을 수거한 갈태독이 수구해 쪽으로 걸어가며, 자신의 품속에 있던 침통을 꺼내들고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단 하나 남은 가문의 유산인 자모천통(紫毛天桶), 지난 백삼십 년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침통을 들고 있는 그의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산아, 옷을 벗기거라. 너희들은 저쪽으로 가있고,"
옷을 벗기고 있는 백산을 쳐다보던 갈태독이 자신이 들고 있는 침통을 열었다. 그리고 약간 붉은빛을 띠고 있는 새하얀 침들을 독을 받아두었던 석기 속에 쏟아 부었다.
"흡독자모침(吸毒紫毛針)?"
석숭의 입에서 나온 외침이었다. 아무래도 시술이 궁금했던지 한켠으로 가있으라는 갈태독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마물이며 절대 암기.
희귀함이 금강석보다 더 높다는 자모철로 만들어진 삼백육십 개의 자모침.
흔히 독성의 유무를 판단하는 은보다 독에 더 민감하다고 알려진 광물로 자모철 자체가 독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흡수하는 독이 극독일수록 색이 진해지며 최고의 독을 흡수하게 되면 검은색의 광채가 난다고 한다.
자모침을 마물이며 절대 암기라 칭하는 이유는 자모침만이 가지는 특이한 성질 때문이다.
인간의 체온 정도의 온기를 만나면 흡수했던 독을 토해내는 특성 때문에 최고의 암기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 자체도 희미한 광물이라 널리 알려진 바도 없고, 구할 수도 없어 독을 다루는 인물들에 의해서 조금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그럼 어르신께서 잔독문(殘毒門)의 후예?"
석숭의 입에서 또 한번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잔독문,
어디서 들어보았던 이름이다. 바로 백산이 복용했던 광혈단을 만들었던 문파였던 것이다.
"쓸데없는 소릴…."
갈태독의 눈빛이 엄해졌다. 잔독문이란 한마디에 마음의 평정을 잃고 말았다. 과거의 잔상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인 것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상념을 떨쳐버렸다.
"시작하자!"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백산에게 하는 말인지 한마디를 툭 던지며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휘둘러지고 석기그릇 속에서 새카만 묵광을 발하고 있던 침 하나가 둥실 떠올라 수구해의 양미간 사이 인당혈(印堂血)에 깊숙이 박혀들었다.
"만독봉침구혈대법의 시작은 양미간 사이의 인당혈에서 시작하여…."
"……."
"……."
"마지막으로…."
대법을 시전하면서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갈태독이었다. 소운에게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모양이다.
자신 가문의 비전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전수하는 비법이다.
시술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시술법이기에 더욱더 진지하고 상세하게 전하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도중에도 그의 침술은 계속되고 있었고, 허공에 떠있는 수구해의 몸은 마치 적을 발견한 고슴도치처럼 빽빽하니 침이 꽂혀 있었다.
"의술은 인술이라 했다. 치료하는 수단이 독이 되었건 약이 되었건 인체의 조화와 균형을 다시 이루게 하여 정상적인 상태로 만드는 것이 의술이다.
우리 의술의 근간은 바로 인간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즉 잠재력이란 소리다.
그 잠재력을 격발시켜 몸을 치유하는데 독을 사용하느냐 아니면 약을 사용하느냐는 의원의 선택에 달려있다.
독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방법은 그 효과는 탁월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높다…."
마치 이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기라도 하는 것처럼 갈태독의 입에서는 끊임없는 의술의 비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수구해의 몸에 박혀있던 자모침이 본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갈태독의 손이 가볍게 저어지고 온몸에 박혀있던 모든 침들이 일수에 수거되어 자모침통 안으로 들어갔다.
"의술이란 지금부터가 가장 중요하다. 특히 독으로 치료하는 의술은 깨어난 순간 환자의 안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독에 의해 맞추어진 몸의 조화가 안정될 때까지는 네 시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전에 심적인 충격을 받게 되면 독에 의해 맞추어졌던 균형이 무너지며 독을 견디지 못한 육체는 죽어가게 되는 것이다."
독을 이용한 치료술의 가장 큰 단점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그의 가문이었지만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자, 안정을 취해야 하니까 이제 자리를 피하거라. 너도!"
석숭이 소운과 함께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꼼짝도 하지 않는 백산을 향해서 갈태독이 하는 말이었다.
"으음!"
수구해가 깨어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갈태독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재빨리 그의 몸 상태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잠시 후 그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성공이닷!"
들뜬 목소리였다. 이번 시술이 열한 번째 시술이다. 앞의 열 번의 시술마저도 그가 전부 시술했었고 절반만 성공했다.
그가 시술했던 인물들이 얼마 살지 못하고 핏물로 녹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는 그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남아있던 독정(毒精)이 없었다.
만독봉침구혈대법의 결과 반드시 나타났던 독정,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독정이 몸의 내부에서 폭발하게 되고 그 사람을 녹이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독정이 없었다.
내부 장기마저 녹아가고 있던 회생불가능의 환자를 그의 가문 비전이 살려낸 것이다.
"여기는!"
어느 정도 의식이 들었는지 수구해의 입이 열렸다. 무심결에 나온 소리였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생각났는지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번쩍 떴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자신을 놓고 싸우던 인물 중의 한 사람이 아닌 흡족한 미소를 띠고 있는 백발 백염의 인물이었다.
"일단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안정을 취하게. 이제 자네를 해칠 사람은 없네."
환자를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구명지은에 감사드립니다, 대협!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천하의 안위가 걸린 일입니다."
역시 정파의 인물답게 자신의 목숨보다 천하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을 천무맹의 맹주님께 전해…."
"헉!"
자신의 품속에 있어야 할 천선비도를 담아두었던 주머니가 없어진 것이다. 수구해의 표정이 붉게 달아올랐다.
"자! 자! 우선 진정하고 차분히 생각해보게. 아까 치료할 때도 보았는데 자네의 옷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네."
다급한 심정으로 수구해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갈태독이었다. 처음으로 성공한 만독봉침구혈대법이다. 자신의 의술로 처음 성공시킨 자신만의 작품인 것이다.
갈태독의 말에 마음을 진정시킨 수구해가 지금까지의 상황을 천천히 되짚어 보고 있었다.
독연 속에서 그의 몸에 손을 댄 사람은 없었다. 서로를 경계하느라 누구도 자신 곁으로 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했던 이 사람, 비도를 노리는 자였다면 목적달성이 되었는데 굳이 자신을 살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그의 머릿속을 번쩍 스치는 생각,
'괜찮은가, 젊은이!'
'괜찮습니다. 어르신, 바쁘신 것 같은데 빨리 가보시죠!'
이곳에 오기 전 자신과 부딪친 예의 바른 사냥꾼 청년과 나눈 대화였다.
"그럼, 그놈이! 그놈이…오! 하늘이여."
수구해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지고 있었다. 바로 진기의 역류인 주화입마 상태. 허무함과 자신에 대한 자책이 주화입마로 이어지고 독에 의한 균형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이것 보게! 진정, 진정하게!"
갈태독이 다급한 음성으로 소리치며 수구해의 진기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그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엄청난 내공을 소유한 고수답게 역류한 진기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요? 영감!"
갈태독의 다급한 행동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백산이 다가온 것이다.
"너? 너는! 크억!"
백산의 얼굴을 바라본 수구해가 비명과 함께 입으로 피를 토해냈다.
갈태독의 얼굴이 참담하게 변했다.
재차 역류해버린 진기는 그가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급속하게 온몸을 잠식해버렸고 간신히 균형을 이루고 있던 독들이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이었다.
아무리 갈태독이라 해도 더 이상 손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는지 멍한 얼굴로 손을 떼며 수구해의 몸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수구해의 몸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서 온 정신을 쏟고 있던 갈태독은 알 수 없었지만 백산과 같이 다가오던 석숭은 분명히 보았다.
안정을 찾아가던 수구해가 백산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주체할 수 없는 격동에 온몸을 부르르 떨며 피를 토해내는 것을.
수구해의 몸이 머리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가장 나중에 녹아 없어지던 손가락은 그때까지도 백산이 왔던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허무한 종말이었다.
죽음의 손 대신 생환의 손을 갖고자 했던 의가 자손의 심력을 다한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한 것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영감. 의술을 행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것 아뇨. 그래서 우리네 인생살이가 힘든 것이고…."
두 번째 하는 말이다.
유령시마에게도 했던 말이었고 이번에는 백오십이 넘은 노인네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인생이 어쩌고저쩌고 하고 있었다. 이 일의 원흉이 자신인지는 알고나 하는 말인지.
"장사를 지내주려 해도 아무 것도 없으니…그냥 명복이나 빌어줍시다. 그리고 천무맹 놈이라며?"
천무맹 놈이란 말, 자신의 원수라는 소리였다.
자신 때문에 수구해가 죽었음에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죽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잊지 않았다.
간단하게 고개를 숙이며 묵념을 해보인 백산이 이번에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찾는 양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이쯤 어딘데? 아, 바로 여기구나!"
십 척 높이의 커다란 바위 앞에선 백산이 감회가 새로운 듯 그것을 가만히 쓰다듬고 있었다.
그곳에는 돌로 찍어서 그렸는지 건장한 장년 한 명과 어린아이 하나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조악하게 새겨져 있었다.
"산아! 다음에 네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곳에 와서 이 아래를 파 보아라, 나의 선물이 있을 것이다."
"뭔데요, 아버지?"
"알면 재미없지 않느냐, 비밀이다."
과거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 친구 하나 제대로 없었던 그에게 아버지는 친구였고 어머니였다.
이곳에 와서야 알았다. 이곳도 아버지가 꿈을 이루기 위한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을….
잠시 그곳을 응시하던 백산이 바위 밑을 파기 시작했다. 이윽고 흙 속에 묻혀있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그마한 철함 하나와 술항아리 하나.
백산의 입가에 피식 하니 미소가 맺혔다.
어머니를 잃고 나서 유난히 술을 많이 드셨던 아버지, 당신다운 행동이다. 장성한 아들에게 주는 선물이 고작 술항아리라니.
술항아리를 쳐다보던 백산이 이번에는 옆에 있는 조그마한 철함의 뚜껑을 열었다.
"아!"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옥가락지 두 개.
돌아가셨던 어머니의 손과 아버지의 손가락에 끼어져 있던 옥가락지였다.
살점밖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마을에서 찾아내셨나 보다.
울먹이는 자신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온 마을에 널린 살점들을 헤집고 다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바로 어머니의 채취가 묻어있는 것을 찾고 싶어서 뒤졌던 것인데 어머니의 손가락에 있던 가락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이미 지난 일인데…고맙소, 아버지.'
조용히 자신과 아버지가 그려진 그림을 쓰다듬는 백산이었다.
"여기였어요, 추억의 장소가?"
백산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조천영이 백산 혼자만의 시간을 준 다음 이제서야 말을 걸어왔다.
"응? 응! 선물이라고 하기에 거창한 것이 있을 줄 알았더니 달랑 이거야."
백산이 술항아리를 보여주며 조천영을 향해서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지었다.
"이거!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아무래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백산의 손에 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 예물이었던 옥가락지 두 개였다.
조천영이 왜 모르겠는가.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있는 초라한 옥반지,
시장에만 가도 흔히 구할 수 있는 그런 싸구려 반지였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시부모님의 유산이라는 것을….
"에게? 겨우 이런 옥반지로 선물이 돼?"
소운이었다. 의술 전수가 어느 정도 끝이 났는지 백산과 조천영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백산의 손 위에 올려져 있는 두 개의 옥반지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은 달랐다.
"이것 나도 하나 가질래."
둘 중에 조금 커 보이는 것을 냉큼 집어드는 소운이었다.
이 손가락 저 손가락 끼워보다 맞는 손가락이 없었던지 결국은 엄지손가락에다 끼고는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조천영도 하나 남은 어머니의 반지를 자신의 약지에 끼워 넣고 있었다.
"영원히 끼고 있을 게요."
두 개의 반지 중 어머니의 반지는 조천영의 손에 아버지의 반지는 소운에게 돌아갔다.
"자, 이제 술이나 한잔 하자고."
모든 일행이 모여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사주(蛇酒), 술은 흔하디흔한 화주였지만 이곳에 널려있던 뱀들을 잡아넣고 십 년이 넘었다는 백산의 말에 입맛을 다시며 광견조원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갈태독은 자신이 처음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가문의 비전이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넋을 놓고 있었다.
"영감! 그렇게 생각한다고 죽은 양반이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속도 상할 텐데 술이나 한잔 하쇼."
조금밖에 안 되는 술로 마음을 달래고 일행은 형산을 넘기 위해서 그곳을 출발했다. 그때 갈태독의 귓가로 들려오는 백산과 석숭의 목소리.
"석 대인,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소?"
"솔직히 자네야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 내가 여자라면 절대 자네 같은 사람은 선택을 안 하지, 근데 그건 왜 묻나?"
"조금 전 수구해 그 놈 말이오, 다 살아난 것 같더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게거품을 물고 가버리지 않았소."
"그것은 나도 보았는데… 혹시 자네 그 사람을 따로 만난 적이 있나?"
"에? 아! 여기 오기 전에 나하고 부딪쳤지요, 그런데 일어나 보니 저 양반이 자신의 주머니를 내 품에 넣었는지 가슴속에 주머니 하나가 있습디다?"
"크악!"
갈태독의 비명소리였다.
첫댓글 즐감하고 감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