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으로 그의 아내는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입니다.(근데 그 전에 이승만이 결혼한 사람과의 사이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중혼이라는 설이 우세합니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25세나 되었지만 사이는 좋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전혀 없었고 전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은 적이 있었지만 그도 10살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조선시대에 태어난 이승만으로서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것은 큰 문제였고 결국 1957년, 이승만의 83번째 생일에 이승만은 양자를 들입니다. 양자로 들인 사람은 당시 국회의장이자 그의 측근인 이기붕의 장남인 이강석으로 이승만이나 이기붕이나 전주 이씨이며 더 정확히는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후손, 이기붕은 효령대군의 후손이었던, 즉 같은 가문이었기에 그런대로 양자로 맞을 조건이 되었습니다. 다만 당시 민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로 갈 수 없다는 점과 항렬상 이기붕이 이승만의 조카 뻘이었기에 이는 논란이 되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기붕을 보고 권력에 미쳐 장남을 팔아먹는다고 손가락질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러거나 저러거나 이강석은 이승만의 양자가 되었고 이기붕의 입지는 더욱 올라갔으며 이승만의 양자가 된 이강석은 이런저런 아버지 빽을 얻게 되었는데 한 예시로 서울대 법대를 이승만 빽으로 입학한 적이 있었는데 비록 학생들이 등교 거부를 하는 등 격렬히 반발해 취소되었지만 무려 서울대 법대를 뺵으로 입학할 정도니 어느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튼 아버지 빽이 있어 그런지 이강석은 이런저런 소동을 일으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해 8월 30일에 경상북도 경주에 갑자기 이강석이 나타나 경주경찰서에 와서 아버지의 밀명으로 풍수해 피해 상황과 공무원들의 기강을 알아보러 왔다고 말합니다. 이에 경주경찰서장이었던 이인갑과 경주시장인 김교식은 당시 이승만의 아들이란거 외에 아무것도 없는 이강석을 직접 맞이하며 "귀하신 몸이 여기까지 왕림하시다니 광영(영광)이옵니다." 라고 말하고는 극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지금봐서 보면 경찰서장이나 시장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심지어 당시는 독재정치 시절인 만큼 공무원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았음에도 고작 대통령 아들에게 오바 수준으로 아부하는 것이나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당시는 독재정권 시절이고 하니 독재자의 아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한국은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군주제 국가인 일제의 지배를 받았기에 아직도 국민정서상 공화정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대통령=왕' 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는 무려 '왕자님' 이 '왕명'을 받들고 직접 '납신' 것이기에 그들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바떠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인갑은 경호차까지 내줘 그가 경주 시내를 둘러보게 했고 이강석은 다음날에는 영천으로 갔고 마찬가지로 영천경찰서장인 김정열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이후 그는 안동으로 가서 안동의 지역 유지들에게 수재의연금을 주라는 눈치를 주자 다들 알아서 갖다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흘 째 되는 날에는 대구에 나타났는데 이번에는 경북도청(아직 대구가 대구광역시로 분리되기 전) 사찰과장이 그를 안내하고 경북도청 관사에서 지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경북도지사인 이근직은 이강석을 만나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지금 온 이강석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껴 자기 이강석과 서울대 동창인 아들을 시켜 알아보게 했고 그 결과 이 이강석의 정체는 '가짜'로 드러났고 이렇게 가짜 이강석은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조사에서 이 가짜 이강석의 진짜 정체는 강성병이라는 청년으로 본디 고등학교 졸업 후 가출해서 방황하던 도중,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강석을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자신감을 얻고 사칭했다고 합니다.(아무리 그래도 고교 졸업 경력 정도가 어떻게 엘리트 출신인 이강석 흉내가 가능했는가 싶겠는데 당시엔 고교 졸업 정도도 대단한 학력이었고 또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 출신이다 보니 가능했다고 합니다.)
근데 사건 초기에 경찰은 이 일을 조용히 덮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대통령인 이승만과 연관된 사건인 만큼 이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가 그의 체면이 깎이는 것보다는 단순 헤프닝으로 묻어버리려고 한건데(물론 그렇다고 진짜 아무 일 없듯 넘어갈 리는 없습니다. 무려 '왕자님' 사칭이나 다름없으니 조용히 쥐도새도 모르게 처분되었을 수도 있고 재판도 없이 감옥에 집어넣어질 수도 있습니다.) 매일신문의 기자가 이 소식을 접하고는 이 사건을 기사로 써내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이 가짜 이강석 사건은 진짜 재판으로 이어졌고 이 사건은 큰 이슈가 되어 방청객이 몰려들어 재판장에는 사람들이 미어터져 판사의 법복이 찢어지고 재판장 내의 의자 절반이 파손되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여기서 피의자 강씨는 "언젠가 서울에서 이강석이 헌병의 뺨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을 보고 한번 흉내 내본 겁니다."라고 말하거나 "내가 시국적 악질범이면 나에게 아첨한 서장, 군수 등은 시국적 간신도배입니다." 라고 말하며 당시 대한민국의 부패상을 지적했고 "할리우드 같았으면 60만 달러 정도의 연기료를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 나는 연기료 대신 벌을 받게 되었다" 라며 방청객들을 빵터지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판결은 의외로 가벼웠는데 진지하게 이강석을 사칭하려는 것이 아닌 단순한 장난이었으므로 그의 판결은 징역 10개월에 불과했고 이후 3년 뒤인 1960년 4.19 혁명 때 진짜 이강석이 서울에서 자살하였고 다시 3년 뒤인 1963년 가짜 이강석이 대구에서 자살합니다. 결국 이 사건은 고작해야 대통령 아들을 자칭하는 사람에게 그러하다는 말만 듣고도 경찰서장, 시장 같은 사람들이 발바닥을 핥아대는, 이승만 정부 시기 대한민국 사회의 부패와 부조리를 고발한 사건으로 끝났습니다.